해가 쨍쨍했던 목요일 (6/4), 구덕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앞마당에는 폐백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도서관을 두르는 울타리 건너편으로는 숲으로 난 산책길이 보이는 곳.
나무그늘 아래 책 읽기 좋은
아담한 '동네 도서관' 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 구경/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이 날 제가 도서관에 간 건
가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올해의 원북원부산 선정도서, 최영철 시인의 『금정산을 보냈다』
"다 말하지 않고 더 말하는" 시
최영철 선생님은 시가 오늘날에는 소수자의, 변방의 장르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여셨습니다.
80년대에는 문창과 학생들 대부분이 시를 쓰는 이들이었던 데 비해
오늘날은 드라마나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는 이들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쓸모와 효율의 논리가 지배적인 지금, 시는 주변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러나 "다 말하지 않고 더 말하는" 시의 속성 때문에
최영철 시인은 "그래도 시가 담당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고 하십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시를 한 편 나누기로 합니다.
선생님께서 낭독하실 테니, 저희 참석자들은 시를 써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시를 눈으로 읽다가 소리내어 말하고 들으면 다르듯이,
써보는 것도 느낌이 새롭습니다.
첫사랑
-이우걸
배경은 노을이었다
머릿단을 감싸 안으며
고요히 떴다 감기는
호수 같은 눈을 보았다
내게도 그녀에게도
준비해둔 말이 없었다
3장 6구로 이루어지는 시조에서는, 마지막 두 구가 클라이막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 두 줄이 그리는 풍경은 뜨겁기는커녕 오히려 심심합니다.
최영철 시인은 청산유수로 상대를 유혹할 수 있다면 그건 첫사랑이 아닐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직 경험이 없어서,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는
그 순간을 추억하는 시를 함께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근본적으로 바람쟁이다"
시의 또 다른 특징은 익숙하고 훈련된 것이 아니라
낯설고 처음인 것마냥 세상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시인은 근본적으로 바람쟁이다"라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매년 돌아오는 봄이고 꽃이지만, 시인은 그 꽃을 매번 새롭게 봅니다.
"수없이 마음을 뺏기는" 사람이 시인인 것입니다.
"동네에 자기만의 나무를 가져보라"
최영철 선생님께서 즐겨 찾으시는 수영 사적공원의 곰솔나무
시인은 표제작인 <금정산을 보냈다> 이야기를 꺼내시며
가난한 아버지 때문에 아들이 요르단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 아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시인들은 사실 엄청난 부자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빈손이어야 삼라만상이 자기에게 안깁니다.
좋은 차 타고 흙길 밟지 않는 사람에게는 들꽃이 보이지 않습니다."
"동네에 자기만의 나무를 가져보세요." 라는 제안을 하실 때에는
선생님이 오래 사시던 수영에 있는
사적공원의 푸조나무에 대한 시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동반 강사로 자리해주신 조명숙 소설가님!
최영철 시인의 짧은 강연이 끝난 뒤,
조명숙 소설가님의 진행으로
시를 함께 읽고, 읽은 시에 대한 질문을 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표제작 <금정산을 보냈다>를 참가자 분의 낭독으로 함께 읽고,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질문: 이 시의 주제는 부모의 사랑입니까? 시가 너무 어렵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같은 시는 평소에 쓰는 말로 쓰여져 있어서 이해하기 쉬운데요.
답: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어야 시입니다. 이것은 시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좀 몰라야 시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시를 이해할 수 있나요?
답: 시의 관문은 이해가 아닙니다. 이해는 서사적입니다. 시는 공감의 예술입니다. 또, 시는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 걸 볼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해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문학적 소양이 없는가'하지 마시고, 시행착오를 거쳐야 합니다. 이해의 통로로 접근하기보다, 느낌을 주는 시를 찾아 읽으시길 바랍니다.
번외 질문: 시집 뒤에 실린 대담에서 선생님께서는 들꽃을 만지실 때도 꼭 "만져봐도 되겠습니까?"하고 묻고 만지신다 읽었습니다. 정말인가요?
답: 네, 정말 그렇습니다. 물어봐야 되요. 꽃을 만져보면 꽃이 부끄러워서 몸도 비틀기도 하는데, 그 정도로 내밀한 소통을 하는 게 시심을 가진 자들이 누리는 특혜라고 생각합니다.
강연회를 마치고 나오니 구덕도서관의 얼굴마담이라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도서관을 드나드는 사람마다 계단참에 쭈그려 앉아
고양이를 반갑게 쓰다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시가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금정산을 보냈다 (반양장) - 최영철 지음/산지니 |
금정산을 보냈다 (양장) - 최영철 지음/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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