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가네코 후미코를 깨우다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와 영화 <박열>
창고에 잠자고 있었던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 『나는 나』입니다. 2009년에 기획돼 2012년에 출간된 이 책은 초판을 다 팔지도 못한 채 어두운 창고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조금씩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 책을 깨운 것은 누구였을까요?
박열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영화 <박열>이었지요. 이준익 감독과 이제훈 배우가 함께한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 <박열>은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덕분에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까지 재조명을 받고 있는 셈이지요. 개봉 전, 가네코 후미코의 『나는 나』를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후미코가 박열을 만나 동거를 시작하는 시점까지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나』는 영화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 버전의 프리뷰 정도로 볼 수도 있겠네요.
영화 <박열>은 1923년 도쿄, 6000명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앞서 『나는 나』를 읽었던 탓이었을까요? 책에서 끝나버린 후미코와 박열의 이야기가 영화로 연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박열을 “바꾸요루~”라고 부르고, 울면서도 코끝을 찡끗해 보이던 영화 속 가네코 후미코. 마치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를 만났을 때의 느낌이었습니다. 교도관의 능욕를 가볍게 누르는 뻔뻔함에서부터 판사 앞에서 천황을 기생충이라 말하는 당당함까지. 그녀는 문명국가를 신봉하는 제국주의 일본에게 시원하게 어퍼컷을 날리는 아나키스트였습니다.
그 당시 시대의 잣대로 따지자면 가네코 후미코는 참 이상한 여자입니다. 거지꼴의 조센징 남자를 뜨겁게 사랑하고, 군국주의적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허상과 부조리를 낱낱이 까발립니다. 예심판사 다테마스가 정신 감정을 받아보라고 권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녀의 생애를 접하게 되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옥중 수기의 원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인용) 그녀가 쓴 수기를 읽은 교도관처럼 말이죠. (영화 속에서 후미코와 박열을 억압하고 감시하던 교도관이 그녀를 수기를 읽은 뒤 오탈자를 고쳐 다시 후미코에게 건냄)
“너는 무적자야. 무적이란 건 말이야, 잘 들어. 무적자라는 건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학교에도 갈 수 없는 거야.” _ <나는 나> p. 98
영화에도 이와 같은 대사가 내레이션으로 나옵니다. 1903년에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출생 신고조차 되지 않은 무적자로 살았습니다. 그녀가 무적자가 된 표면적 이유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호적에 입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서 깊은 사에키 집안의 아내로 산촌에서 자란 처녀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죠. 메이지 시대, 일본은 서양과의 교류하며 문명국가로서 도약하고자 합니다. 이에 깊은 산골에도 소학교를 세워 어린 아이들에게 의무교육을 시켰죠. 하지만 무적자였던 후미코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녀는 배우고 싶었습니다. 보다 넓은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지식들을 담으며 꿈을 꾸고 싶어 했죠. 하지만 공부하고자 했던 어린 후미코가 감당해야 했던 것은 폭력이었습니다. 무적자라는 이유는 현실에서 지워진 아이. ‘문명’사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 어린 아이에게 너무나도 잔인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진정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은 곧 우리와 일치된다. 먼 저편에 이상적인 목표를 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_ <나는 나> p.329
가네코 후미코의 삶의 목표가 바뀌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그녀는 일본인이었지만 고통 받는 약자였습니다. 필사적으로 공부하며 꿈꿨던 것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후미코는 가판 근처에서 활동하는 여러 사상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허무주의자등과 교류하며 꿈꿨던 ‘훌륭한’에 대한 생각을 바꿔나가게 된 것이죠. 남에게 평가 받는 훌륭한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가네코 후미코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자 마음먹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과거를 이야기하기보다는 미래에 대해 논했다. 두 사람이 개척해야 할 길에 대해 옅은 희망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_ <나는 나> p. 340
연인이자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그들이 옅게나마 그리던 희망이 희망으로만 끝난다는 것을 알지만, 책을 덮으면서 무거운 슬픔에 젖진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그녀는 자신의 삶 속에서 계속하여 깨어 있었습니다. 무적자라는 신분이 주는 부조리함이 무엇인지, 비인간적인 대우가 무엇인지, 나아가 일본 식민지 속에서 조선인들이 받는 차별이 무엇인지 (그녀는 조선을 타자로서 보는 시선을 내재했을 뿐 조선 독립운동에 관여하진 않았음)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사 주체적이었기에 죽음 또한 당당했습니다.
“내가 비록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삶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영화 <박열> 대사 중)
“문체는 어디까지나 단순하게, 솔직하게, 그리고 딱딱하지 않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사여구를 사용한다든지 지나친 기교를 부린다든지 우회적인 형용사를 붙인다든지 하는 일은 피하고 싶습니다”
(가네코 후미코가 자신의 원고를 구리하라에게 건내며 전한 말)
그녀와 그녀의 삶을 닮은 글을 읽으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탐욕을 생각합니다. 1923년과 2017년. 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의 메시지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울림이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와 영화 <박열>을 통해 자본주의적 이기利己에 등 떠밀려 지워져간 오늘날의 '이상'을 그려봅니다.
책소개 ::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 가 나왔습니다
나는 나 -
가네코 후미코 지음, 조정민 옮김/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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