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크론에 걸렸다. 늘어나는 확진자에도 나는 지나가지 않을까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확진 판정을 받았고 나는 일주일 동안 방에 갇혀야 했다. 자가 격리를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나는 타고난 집순이였으니까! 그런데 그건 오만이었다. 나흘 차가 되는 날 방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방이 너무 좁았다. 전에도 나흘 동안 안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금방 나왔다. 그때는 거실과 부엌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 강아지 산책도 나갔다. 나흘 동안 방을 안 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24시간 내내 방에만 있는 것이었다. 방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좁은 방을 물리적으로 늘릴 순 없으니 넓어 보이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물건을 정리해야 했다. 『맥시멀 라이프가 싫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내게 좋은 가이드북이 되었다.
먼저 책에서 말한 대로 비움 계획을 세웠다. 크게 옷장, 책상, 화장대 구역을 나눴다. 먼저 옷장. 나는 세일과 쿠폰에 약하다. 쇼핑 생각이 없더라도 가격 상술에 넘어가서 옷을 구매하곤 했다. 행거에는 철지난 옷과 맞지 않는 옷이 걸려있다. 옷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다양했다. 비싸게 주고 샀어, 몇 번 안 입었어, 살 빠지면 다시 입을 거야 등등. 이제는 그 이유들에서 벗어날 때였다.
2년 이상 입지 않은 옷은 비우기로 했다. 자가 격리 기간 동안 쓰레기를 버릴 수 없으니 일단 정하기만 했다. 쉽게 비움이 결정되는 옷도 있었고 아닌 옷도 있었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 결국 다 비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 뒤에는 버릴 옷과 기부할 옷으로 분류했다. 박스에 담으면 구분하기 편하겠지만 당장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니 스티커를 붙이기로 했다. 버릴 옷은 빨간색, 기부할 옷은 노란색 스티커를 붙였다. 기부는 책에서 소개한 옷캔(https://otcan.org)에 하기로 했다. 다른 곳보다 기준이 덜 까다롭다고 했기 때문이다.
채워 넣을 공간이 없으면 채워 넣지 않게 되더라.
p115
원래는 옷과 가방 정리를 위해 수납장을 구매할 예정이었다. 비우니 살 필요가 없어졌다. 만약 수납장을 샀으면 남은 공간을 채우기 위해 옷을 또 샀을 것이다. 한 번의 비움으로 여러 번의 결제를 막은 셈이었다.
다음은 책상. 책상은 내 취미 용품으로 가득하다. 내 취미는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이다. 많은 다꾸러들은 공감할 것이다. 다꾸가 얼마나 많은 물건을 필요로 하는 취미인지. 스티커, 떡메모지, 마스킹테이프, 칼, 가위, 풀, 풀테이프, 핀셋, 볼펜, 펀치 등등. 게다가 스티커는 종류가 어찌나 많고 신상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나한테는 가득 찬 바인더가 여러 개 있다. 옷과 달리 책상 정리는 힘들었다. 도저히 비울 게 없었다. 비워도 다시 채워 넣을 내가 쉽게 상상이 됐다. 그래서 비움은 포기했다. 대신 잘 정리하고 구매를 줄이기로 했다.
수납장, 서랍장, 정리 바구니의 물건은 최대 80%를 넘지 않는다.
p37
책에서 소개한 미니멀을 유지하는 법칙에 따라 바인더는 더 이상 구매하지 않으며 20%의 빈 공간을 두기로 했다.
옷들을 꼼꼼하게 다시 한번 살핀다. 그 옷 없이도 잘 살았고,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그 순간 충동구매는 사라질 것이다.
p99
그리고 다꾸 용품을 구매하기 전 루틴을 만들었다. 장바구니에 3일 동안 방치하기 그래도 사고 싶다면 내 바인더 보기. 그 스티커 없이도 잘 꾸몄고 붙일 스티커는 많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마지막으로 화장대. 몇 년 전 나는 소소하게 화장품 사는 걸 즐겼다. 취미가 바뀌면서 화장대는 방치되었다. 화장품의 유효기간을 확인하고 안 쓰는 화장품이나 샘플을 치우기로 했다. 기겁할 만한 화장품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찾아보니 분리배출이 정말 어려웠다. 파우데이션을 버리려면 펌프를 분리해서 내용물은 신문지나 키친타월에 흡수시켜 일반 쓰레기로 버리고 공병은 깨끗하게 닦아 분리 배출해야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며 산 화장품들이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파운데이션을 짜내면서 지구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자가격리가 끝나는 날 정리한 짐을 비울 것이다. 이제 여백의 미를 느끼면서 예전보다 넓은 방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방 정리를 하면서 여러 깨달음을 얻었다. 물건을 사기 전 삼일 동안 고민하자. 보복 소비하지 말자. 과시용 소비하지 말자. 살 때 어떻게 버릴지도 고민해 보자. 옷은 2년 이상 물건은 3개월 이상 사용하지 않으면 버리자. 등등. 당장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소비의 재미와 물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바를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어느새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있지 않을까.
이 책은 1부는 미니멀리스트, 2부는 제로 웨이스트에 대해 얘기한다. 저자는 미니멀 라이프 실천하면서 버림보다는 나눔을 지향하고 있다. 미니멀 라이프와 제로 웨이스트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나의 짐 비우기가 주이기에 제로 웨이스트에 대해서는 언급 하지 못했다. 환경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제로 웨이스트의 관심도 늘어나고 있다. 제로 웨이스트에 관심이 있다면, 일단 뭐라도 시작하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저자가 제안하는 쉽고 간단한 일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물론 나처럼 갑갑한 공간을 어떻게 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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