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회 윤여일 저자와의 만남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윤여일 선생님
5월 24일 목요일 저녁 7시, 산지니 출판사, 오늘의 문예비평이 공동주관하는 저자와의 만남 시간은 저자분의 강연을 주로 했던 종전과는 달리 계간지『오늘의 문예비평』의 편집위원분들께서 한분한분 돌아가시면서 토론을 나누는 토론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 첫 토론회의 주인공은 『오늘의 문예비평』의 연재물을 모아 책을 내셨던 수유너머R(http://www.transs.pe.kr/) 연구원, 윤여일 선생님이십니다. 이날의 토론회는 윤여일 선생님과 더불어 『오늘의 문예비평』편집위원이신 전성욱 문학평론가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전성욱 문학평론가 : 수유너머R 연구원으로 계신 윤여일 선생님의 저서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이하 지식의 윤리성)는 오늘의 문예비평에 연재했던 글을 바탕으로 취합하여 책으로 낸 결과물이다. 오늘 토론회를 갖기 전, 윤여일 선생님과의 저녁 식사로 충분히 함께 교감을 나누었는데 부산에는 10년 만에 다시 와보셨다고 하셨다. 부산방문에 관한 간단한 소회를 말해 달라.
윤여일 저자 : 연구원 활동 외에도, 논술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예전에 방문했던 부산은 서울에서 강의를 마치고 순천에서 강의를 하고 이동하는 바람에 구경을 못해, 제대로 된 부산 방문은 처음이나 다름없다 . 사실 『지식의 윤리성』 책을 쓸 때 기분이 우울한 상태였다. 반면, 오늘은 부산에 와서 마을도 보고 저녁식사도 맛있게 하고 와서 우울한 기분이 들지 않아 집필 당시와의는 감정 상태에 있어 간극이 있다.
신체와 정신에 남는 기록을 쓰고파
전성욱 문학평론가 : 책에 보면 후기에 자신의 작업을 정리하셨다. 번역 활동, 논문을 쓰고 있으며, 여행기를 쓰기도 하고, 에세이 작업을 하시는 등 여러 가지 작업을 하시고 있는데 자신의 작업 활동에 관해 간단한 소개 바란다.
윤여일 저자 : 네 가지를 썼는데, 어떻게 보면 번역도 창작이나 다름없다. 나는 번역자의 기능적인 역할이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지식의 윤리성』은 나의 첫 저서인데 이러한 나의 네 가지 작업 중 마지막에 해당한다.
석사논문을 쓸 때, 개념어의 관계성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말의 부재로 인해 논문에서의 논의하려는 문제를 성립시키기가 어려웠고 사회현상의 징후들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논문이 끝난 이후에는 개념화에 비판적인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우연찮은 만남을 통해 동아시아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차적으로 생기게 되었다.
한 번은 멕시코로 여행갈 일이 생겨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용량 부족으로 백업을 시켰는데 분실당했다. 도둑맞은 것 같다. 집에 돌아와 보니 백업을 시킨게 아니라 포맷을 시켜놨더라. 파일이 모두 사라진 것에 대해 분통이 나기도 했고, 내가 무슨 글을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더 화가 났다.
물질적인 결과물인 파일이 사라지고 나니, 신체나 정신에 내가 쓴 언어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언어감각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된 것 같다. 일본에 2008년 겨울까지 있었는데 일본어를 잘 모르는 상태로 말이 와전되는 경우에 생긴, 말하고자 하는 의지 사이의 불일치 경험이 언어감각에 대한 생각을 더욱 촉발시켰다. 한국어에 대한 감각 또한 이와 다르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들이 결국 쌓이고 쌓여서 『지식의 윤리성』을 쓰게 되었다.
추상적인 언어로 구체화된 형식을 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도전하고 싶었다.
전성욱 문학평론가
전성욱 문학평론가 :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지 못해 저자와의 만남 시간에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두렵다고 하시더니 말을 너무 잘하신다. 이 책은 정신적 체험에 관한 자서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자신을 대상화 하는 작업이다. 글을 쓰고, 글을 읽고, 지식에 관여하는 사람이라면 지식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성찰해야 한다. 곧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작업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글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책에 등장하는 ‘지식의 윤리성’에 대한 개념 설명을 부탁한다.
윤여일 저자 : 아까 얘기와 연결시키겠다. 일본에 가서 동아시아 관련 논문을 썼는데 그때 당시, 밤이 되면 고민이 있어서라기보다 낮에 하고자 했지만 결국 못했던 말들이 생각나서 결국 잠을 이루지 못했다. 때문에 그전에 없었던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생겼다.
어떤 수업을 들었을 당시, 한 일본 학생이 어눌한 일본어로 질문을 했는데 스승이 태도가 좋은 질문이라며 칭찬하셨다. 그 스승의 태도는 학생에 대한 립 서비스가 아니라, 상대의 동기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어눌했던 학생의 질문을 수준 높은 질문으로 승화시켰다. 질문 내용을 자신의 체험에 대입시켜 질문자 스스로의 신변의 체험으로 끌어당기는 방식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내 개인의 체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할 수 있도록 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언어감각의 문제가 촉발된 것이다.
『지식의 윤리성』은 말하자면 여행기였다. 몸으로 다니면서 체험하고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언어로 구체화된 형식을 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것이 작년이었고 이 책은 나에게 있어서 그 도전의 결과물이다. 전성욱 선생님께서 말한 정신적 체험의 결과물이 그런 의미다.
시대에 답을 제시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전성욱 문학평론가 : 결국 윤여일 저자분의 말씀은 지식의 주체와 지식의 대상이 맺는 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지식의 주체가 객관적인 인식에만 매달려서만 안 되고, 자신의 변화를 추구해야만 지식 주체와 지식의 대상이 만나서 변화하는 과정에서 지식의 윤리성이라는 문제가 다시금 제기되는 것이다. 그 지식의 윤리성을 이론, 비평, 사상이라는 지식의 세 가지 속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세 가지 맥락에 관해서 설명해 주셨으면 한다.
윤여일 저자 : 이론, 비평, 사상에 대해 다시 또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 세 가지의 맥락은 자의적인 것이다. 책 속에서 전달하는 나의 메시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논문을 쓰는 것은 세계를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재창출해 내는 것이다. 물음이 있어서 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방식이 사회학에서 추구하는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적인 발견이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연구자에게 있어서 연구를 사는 행위를 통해 이론이 탄생한다.
글쓰기에 있어 이런 방식의 문답관계가 궁극적으로 재질문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시대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은 사상가이지, 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억압의 기제로 이론을 설정해 보고 싶었다.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끄집어내고 싶어서 이러한 이론, 비평, 사상이라는 주제로 1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적 스승으로서의 루쉰과 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전성욱 문학평론가 : 상투적이고 진부한 질문이기도 한데, 윤여일 저자분의 글 속에서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사상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선생님의 작업이 이론가가 아니라 사상가였는지 그 맥락을 집어주시길 바란다.
윤여일 저자 : 사상적 인격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쓸 수 있었다. 루쉰에 대해 간단히 얘기하자면 루쉰의 글 속에는 불투명한 말이 종종 있다. 루쉰의 원문에서 이미 번역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불행에 따라 글이 전달되지 않고 번역가를 거쳐 전달되는 것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렇게 하여 루쉰을 발견했는데, 역사와 시대, 장소 속에 맞물려있는 어떤 사람의 사유가 번역가에 의해 옮겨질 때 사상은 이론과도 같은 다른 형식으로도 옮겨질 수 있다.
루쉰이란 작가에 대해 말하자면, 그 사람의 글이 번역서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을 쓰면서 허구의 이야기와 같이 불투명한 사람 속으로 진입하고자 하면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거는 행위가 뒤따르게 되고, 그 행위로 인해 글의 진의에 가닿고 거기서 무언가의 의미를 건져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의 아카데미적으로 지적인 후계자를 만들지 못한 사람이었다. 전후 일본사상계에 있어서 극과 극으로 평이 갈린 사람이기도 하다. 이른바 체계를 갖지 못한 것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현실사상에 대해 가설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른 기대나 성과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전에 만들어냈던 가설을 다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때마다의 상황 속에서 살아보려 한 사람이고, 그래서 많은 오류를 범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간을 좀먹고 사유능력을 뺏는 TV라는 존재
윤여일 선생님.
전성욱 문학평론가 : 이번에는 번역과 현실 감각에 대해 묻고자 한다. 번역이라는 것은 원문에 대한 충실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 책에서 중요시하고 있는 점은 조금 다르다. 원문과 번역과의 어긋남을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현실감각 부분에 관하여서는 책을 출간하면서 첨가한 부분으로 알고 있다. 격정적인 어조에 텔레비전을 끊는다던지 하는 분노에 찬 결단을 내리는 부분이 나오는데 「현실감각에 관하여」편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윤여일 저자 : 이명박 정권 들어서 감정적으로 많은 피해를 받게 되었다. 이명박에게 바로 갚을 방법이 없어, 유의미하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바꾸고 싶었다. 이는 텔레비전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텔레비전으로 뺏긴 시간들을 텔레비전으로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인한 분노를 생각해보라.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너무 분노스럽지 않은가. 요즘 보게 되는 내용이 뉴스나 토론프로그램 등 우울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내 작업이 힘들겠구나 하는 자연스런 생각을 하게끔 되었다. 생각의 호흡을 압축시키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이렇게 텔레비전을 보며 느낀 나의 피해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성욱 문학평론가 : 결국 저자 분 말마따나 텔레비전은 우리의 시간을 소모시키고 사유능력을 좀먹고 현실감각을 둔화시킨다. 더 중요한 것은 반복적으로 습관화되는 현실에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정을 놓치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이러한 감각이 축적되어 곧 비평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현실을 예민하게 바라보는 현실 감각을 연마하기 위해서 비사유를 사용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윤여일 저자 : 현실감각에 대한 부분에서 비사유의 사유에 대한 얘기를 언급했다. 비사유의 사유와 관련된 대목이기도 한데, 곧 있으면 대선이다. 결과는 내가 생각한대로 잘 안 나올 것 같기도 한데, 만약에 박근혜 씨가 되면 니체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커다란 변수가 없으면 사실은 루쉰을 읽고 싶다.
이명박은 한국사회의 속물근성이 집약된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그동안 인터넷이 얼마나 개인의 감정과 정신을 집약시키는 미디어인지를 알 수 있었다. 촛불시위 따위를 지켜보며 내 자신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촛불운동이 사상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보았다면, 첫째로 그 안에서 이명박이 아니라 우리 안의 이명박적인 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가 논의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명박적인 것이란 외과수술처럼 선명하게 도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앞으로 제2,3의 이명박이 등장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또 하나는 촛불운동 실패 이후의 것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촛불운동은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촛불의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요즘들어 다시금 광우병이나 막장정권이 나타나고 있는데 예전처럼 촛불운동이 기능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루쉰을 읽고 싶기는 하나 니체를 읽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의 저작을 담론으로 삼아 이를 문제시하는 사회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나 또한 니체의 저작을 통한 작업을 하게 될테니 말이다. 책에서는 충분하게 담지 못했다.
역동적인 결과물인 정치 속,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의 여지를 남긴 노무현 정권
전성욱 문학평론가 : 나 또한 「비사유에 관한 사유」 부분에 관해 충분치 않게 읽혔다. 이 책은 뭐랄까, 답을 내야하는 조바심을 갖지 말고, 물음을 촉발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형식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책에서 기대하고 있는 답은 없으니 나같은 못된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답답했을 것이다. 정치감각에 관한 부분을 보면 텔레비전이나 언론을 보면서 국민들이 정치에 대한 무력,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것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비평정신과 정치감각으로 나온다. 선생님께서는 정치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권력과 정치의 구분, 정치사고의 구도를 이야기하셨다. 상층부 중층부, 하층부를 나누게 되는 정치사회의 구도에 대해 설명해 달라.
윤여일 저자 : 정치와 권력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노무현의 새만금 간척사업, 대추리, 한미FTA, 모두 나와 내 동료들이 개입하려고 했던 사건이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을 비교해 봤을 때, 둘 다 못마땅하지만 생각해보니 민주주의라는 문제에 있어 두 정권은 다른 면을 보인다. 이명박 정권은 민주주의를 사유하지 못하고 요구하게 만들었으나, 노무현은 민주주의에 사유의 여지를 주었다. 검찰과의 대화와 같은 행보가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에 대해 한국사회가 어디까지 생각해볼 수 있는가를 만들었던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 같다.
민주주의가 요구되는 것이 자명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명박 사회는 민주주의가 자명시되지 못하고 퇴행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정치라는 것은 역동적인 과정이며, 권력은 역동적인 과정에 대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일 따름이다. 그 운동성을 정치가 상실하면 권력을 가진 층에서 정치개입 요소를 제공하게 된다. 권력이 정치가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권력이 정치적 세계인 것처럼 마치 우리가 보게 되는 스포츠 뉴스를 다루는 방식과 가까워진다. 즉, 정치가 운동 경기를 설명하는 용어와 흡사해지는 것이다. 그런 용어에만 깊이 빠질 것을 경계하고, 권력을 누가 쟁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정치적 사고에 대해서는 이처럼 현실정치에 대해서, 정치인들의 정치뿐 아니라 이념과 이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인권과 인권, 중층, 생활세계의 하층의 다양한 정치가 있다. 현실정치라는 상층부에 있는 정치를 생활정치라는 하층부로 끌고 와야 한다.
토론회에 참여해주신 독자분들.
독자와의 대담
전성욱 문학평론가 : 책에는 구체적 사례가 많이 없다. 사례를 들어 설명을 해주니 좋다. 이번에는 독자여러분들의 질문을 받아보겠다.
독자1 :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숨이 막힌다고나 할까. 읽으면서 생각이나 여유가 없다는 생각을 받았다. 너무나 빠르고 숨막히게 글이 전개되어 미처 의문을 제기할 수가 없었는데, 이 책을 쓰시면서 독자를 위해 좀 더 친숙하고 편하게 쓰실 수는 없었는지 궁금하다.
윤여일 저자 : 어떤 글을 쓸 때 결정하게 되는 것은 글의 주제와 소재뿐만이 아니라, 감정상태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우울한 책이다. 여행기를 연재할 때는 일주일 동안 다녔던 여행을 상상하며 글을 쓰니 즐거운 감정상태였는데, 『오늘의 문예비평』에 글을 쓸 때는 어떤 다른 감정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우울한 정서였다. 글에 여백을 두고 싶지 않아 의식적으로 글을 썼다. 니체의 글쓰기 방식 중에 접속어와 함께 연결되는 세계와, 형상을 만들어내는 글쓰기 방식이 있는데 니체를 흉내내고 싶었다기 보다, 무언가 한 문장의 옆의 문장 하나하나를 다 살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힘들었다. 문장을 써내면서 여백에 해당하는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표현을 없애며 써보고 싶었다.
독자2 : 이 책은 난해하다.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데 있어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글쓰기를 시작할 때 첫문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문장, 한문장에 있어서 어떤 단어를 선택할까 고민을 많이 하는데 몇줄씩 고민하게 된다. 길을 가다가도 떠올리며 메모하고는 하는데, 추상적 언어로 구체적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이 글은 솔직히 이해가 잘 안되었다.
윤여일 저자 : A란 주제에서 글로 풀어내고자 하는 B지점이 있을 때, 나는 아주 좁은 걸음으로 가고자 한다. 그 좁은 지점을 열 문장으로 써보고 싶었다, 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사고의 절차와 표현의 절차를 어디까지 표현해 볼 수 있는가를 말하고 싶었다. A와 B사이가 먼 거리여야 했다. 둘 사이가 연관성이 없는데 논리적 비약이 될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다리를 놓아보는 것이다. B로 가지 못하고 A'나 A''라는 방식으로 관성화되는 부분이 많기에 그런 부분을 충분히 경계하고 싶었다. 그래서 돌들을 까는 방식으로 문장을 배치해보려 한 것이다. 문장을 촘촘하게 하여 이론적인 증거를 들거나 사례를 들지 않고 이론적인 표현만으로 글을 구성한 것이다. 이는 첫 번째 독자분의 질문의 답이기도 하다.
사례로 들지 않고 글을 쓴 이유는 이 책을 쓰기 전의 글이 사실 모두 사례였다.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사례만큼 좋은 것이 없지만, 번역불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구체적 사례를 들지 않았다. 원전인 내 자신의 표현만으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독자 3 : 신체에 남는 연구가 무엇인지 답변해 달라.
윤여일 저자 :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이 말한 ‘挣扎(쟁찰)’[zhēngzhá]이라는 용어에 대해 투입하다, 끄집어내다 정도로 표현해냈는데, 이는 글을 쓰고자 하는 대상에 자신을 투입해서 자신을 던지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신체에 남는 연구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글을 쓰는 대상과 자신의 거리를 어떻게 두는가에 있다. 글쓰기마다 문체가 달라질 수 있는데, 나는 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글쓰기 방식을 선호한다. 이와 다른 종류의 글쓰기와 관련해서 끄집어내고 싶은 충동을 갖고 있다.
독자4 : 「이론, 비평, 사상」부분에 있어 이론과 비평사상에 관한 총괄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비평이라는 지점과 자기비평이라는 사상에 대해서 맥락을 풀어서 얘기해 주시면 좋겠다.
윤여일 저자 : 다케우치 요시미 선생은 1500편의 글을 발표했다. 매달 한편씩 발표를 했다치면 1400편 정도 쓰는 셈이 되는데, 선생은 생애 모든 시간을 글쓰는 데 바친 사람이다. 그 글을 읽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런 사람의 모든 시간은 글을 쓰거나 읽거나 하는 등의 글과 관련되어 있다.
열아홉 편의 글을 써낼 때 자신에게 이정표가 되는 글이 있는 반면, 자신에게서 버려지는 글이 있다. 내 고민에서 그 물음을 가장 구체화되는 형태로 만들어내는 글이 있으면 그것을 이어보면서 확인시킨다. 그 이외의 글은 몸에 남는 글이 아니다. 기능적인 글이랄까. 이정표가 남는 글이 생기면 사유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다. 이론적인 공부방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좌표를 찾아가는 방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글쓰는 사람에게 글쓰기란 거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잠시 머물러 비로소 발견되는 내 한계에 대해 노력했기 때문에 그 과정속에서 내 한계를 배우게 된다. 글쓰는 행위를 나는 ‘사상한다’라는 동사로 만들고 싶다. 글쓰기는 자기자신을 분열상태로 내모는 행위이다.
독자5 : 루쉰과 다케우치 요시미, 쑨거를 사상가로 꼽으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를 들 수 있을까?
윤여일 저자 : 잘 모르겠다. 그 세 명은 텍스트로 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삶의 전체상황과 시대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에 사상가로 꼽을 수 있었지만, 어떤 분에 대해서 그 세 분 외에 그런 종류의 전체상을 그려본 적이 없고 연구해 본적이 없다. 다, 나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다.
자기고백과도 같은 솔직한 글
전성욱 문학평론가 : 그런 분들을 만나기가 어렵고, 나도 윤선생님께 물어봤었는데 같은 대답을 하시더라. 사상을 하려는 자에게는 자신이야말로 진정 중요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대목이 있었다. 자기고백과 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솔직한 글이다.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말 부탁한다.
윤여일 저자 : 솔직한 글은 아니다. 전성욱 선생님과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대화를 하면서도 의식하는 사람은 앉아계신 여러분이다. 글쓰는 행위 또한 읽어주는 사람을 향해있다. 실제 글을 쓸 때도 솔직하게 글을 썼지만, 읽힐 것을 염두했기에 솔직하게 쓰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내가 애초에 했던 계산에 대해서는 조금 충분하지 못했다. 책의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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