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왼쪽)와 순종황태자가 근대 군대식 복장을 하고 나란히 섰다. 사진출처: 부산일보
칙령에서 을미사변을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해 법령을 혼란시킨 만고에 없던 일'로 규정하고 을미의병들이 국모 복수를 위해 충절로 궐기했다고 평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편전에 해당하는 경소전을 황후의 혼백과 유해를 안치한 빈전으로 삼음으로써, 통치의 우선 과제에 황후의 복수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황제 즉위 절차적 정당성 획득 노려
근대화 압력 맞선 군주제 변신 추적
고종은 왜 국장을 미루고 황후의 복수를 이토록 강조했을까?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는 고종이 공자의 '춘추 의리론'을 내세워 유교적 존왕론을 강화하고, 황제 즉위 과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하려 한 것으로 분석한다.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론이 19세기 서구와 일본으로부터의 개방 압력에 대응하는 고종의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은 광무개혁을 추진하며 1902년 5월부터 양경체제(서울·평양)를 공식화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평양 천도 가능성을 열어놓으려는 조치였다. 책은 황제의 어진을 평양 풍경궁에 모시는 의식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치렀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부 어진은 근대적인 사진이나 유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이후 쿠데타 세력이 양경체제를 추진하며 천황을 도쿄로 이주시킨 것과 비교되는데, 이때는 서구식 군복을 입은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활용되었다.
지은이 신명호 교수는 대를 이어 조선을 다스려온 국왕 고종과, 수백 년 막부시대를 거치며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일본 천황의 상반된 권력 기반에서 원인을 찾는다. 전통을 잇는 국왕이 근대적 황제로 바뀐 사실만 알리기만 하면 되었던 고종과, 천황의 존재 자체를 민중들에게 근대적인 이미지로 알리는 일이 시급했던 메이지 천황의 입장차 말이다.
이렇게 책은 서구의 근대화 압력에 맞서 한국과 청, 일본, 러시아, 티베트가 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는지, 그 군주제의 어떤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는지를 살펴본다.
국왕과 황제, 천황, 차르, 그리고 달라이 라마에 의한 정교 합일 지배 등 각국의 군주제 양상은 서구 열강의 압력과 각국의 경제 정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흘러갔다.
'서구화=근대화'에 길들어버린 동아시아인조차 과거의 군주제를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현실이다.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군주제의 의미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부경대 사학과에 재직 중인 박원용·신명호·이근우·조세현 교수와 동북아역사재단의 박장배 연구위원이 저자로 참여했다.
부산일보│이호진 기자│2014-11-01
원문읽기: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41101000051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 - 박원용 외 지음 / 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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