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을 되살려 바다를 기록하다 | ||||||||
<북양어장 가는 길>/해피북미디어 펴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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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항(避航)이 결정되면 조업을 중단하고 갑판에 있는 모든 기계와 그물은 고박한 채 배는 앞바람을 받으면서 서서히 전진하는 방법으로 저기압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갑판과 마찬가지로 처리실도 흔들리거나 넘어질 것들을 고박하고 특히 배수 관련 시설들을 점검한다. 열려 있던 ‘렛고(let go) 구멍’도 안에서 잠그고 배수펌프를 준비해둔다. 그리고 처리부원들에게 일정한 간격으로 처리실에 침수가 있는지 살피게 한다.”
최 시인이 배를 탔던 1980년대 후반에는 조업 환경이 더 열악했다. ‘올림픽 시스템’이라는 쿼터 소진 방식 때문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기억했다. “올림픽 시스템 쿼터 소진 방식 때문에 모선들은 어장을 떠나기가 어려워졌다. 만선이 되어도 귀국하지 못하고 운반선을 통해 어획물을 전재하고 다시 어장으로 복귀해야 했다. 연료와 식재료는 운반선으로 배급받았다. 그래서 출항하면 6개월 이상 바다 위에서 생활해야 했다. 북양에서 4년 근무하는 동안 항구에 정박한 것은 여섯 번뿐이었다.” “배에서 내리기 위해 배에 올랐다” 오룡호 사고를 접하고 그는 25년 전의 북양을 기억했다. “우리 때와 조금 다른 것도 있었다. 우리 때는 전부 한국 선원이었다. 오룡호는 동남아 출신 선원이 더 많았다. 오룡호는 러시아와 협약을 맺고 캄차카 반도 인근 서베링해에서 조업했지만 우리는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과 협약을 맺고 알래스카해에서 조업했다. 우리가 탔던 배는 일본에서 건조한 어선이었는데 오룡호는 스페인에서 건조한 유럽식 어선이다. 트롤 어선은 기본적으로 구조가 비슷하긴 하다. 근무 여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열악한 것 같다.” 사고 일주일 전 그는 북양에서의 기억을 모은 <북양어장 가는 길>을 펴냈다. 부제를 ‘미시적 사건으로서의 1986~1990년 북태평양 어장’으로 붙인 이 책의 내용은 북태평양 명태잡이 트롤 어선이 어떤 배이고, 어떻게 조업하고, 배의 선원들은 어떠했으며, 선사는 어떻게 운영되었고, 명태는 어떤 특성을 가진 생선이며, 어떻게 잡아서 어디에 판매했는지를 조목조목 기록한 책이다. 단지 명태잡이에 대한 글인데도 책을 읽다 보면 한국 사회가 보이고 국제 관계가 읽힌다. 등단 시인답게 문장도 유려하다. 최 시인은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 그것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청춘의 기록이기도 했고. 나이가 들수록 그때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바다에 몇 달씩 나와 있으면 마치 유배당한 것 같았다. 중심에서 멀어지는 느낌에 마음이 황량했다. 모두들 배에서 내리기 위해 배에 올랐다. ‘몇 년 타서 얼마를 모으면 내려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육지를 사무치게 갈망했다. 그때 우리의 모습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그래도 대학을 나오고 문명의 혜택을 받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최 시인이 선장의 역할만큼 부각한 것은 트롤 그물의 끝자루(코드엔드:cod end)다. 끝자루는 대량의 어획물이 마지막으로 담겨 갑판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 크기와 무게도 엄청나다. 선원들이 그물을 손질할 때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이다. 끝자루가 터지지 않도록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한다. 선장의 판단력만큼 끝자루의 지지력도 중요하다. 최 시인은 사회에서도 선장만큼 이 끝자루의 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원문읽기: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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