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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지식인의 협량한 정신세계를 보다 (한겨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4. 17.

제갈량과 20세기 동양적 혁명을 논하다

유원표 지음, 이성혜 역주/산지니·2만원

한 기업한테 3000만원을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총리 자리가 위태롭다. 만일 제갈량이 살아와 그 자리에 앉는다면?

1906년 조선의 ‘계몽 지식인’ 유원표가 그런 시도를 했다. 황제도, 무당도 아니요, 한낱 글쟁이인 터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꿈꾸기다. 그 결과가 ‘꿈속에서 제갈량을 만나다’(<夢見諸葛亮>)라는 제목의 책이다. 일부에서 ‘몽유록계’라 하여 소설 범주에 넣기도 하는데, 대화체를 빌린 계몽서다.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나 가업을 이은 유원표는 승문원에서 역관으로 15년 이상, 군부대 통역관으로 10여년 근무하다가 1906년 54살에 퇴직하여 개성에 정주한다. 그는 <황성신문> 등에 시국에 대한 글을 다수 기고하는데, 이 책은 그의 유일한 저서다. 퇴직 후 그의 모든 역량을 들여 쓴 것으로 추정된다.

책은 논자들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함(議者謂爲非計), 아마도 괴이함이 없이 용납될 것임-10조목(容或無怪十章), 선생의 역사 연의(先生歷史演義), 동양문학의 허와 실(東土文學虛實), 황백인종 관계의 진상(黃白關係眞狀), 중국 정략의 개량(支那政略改良) 등 6개 장으로 되어 있다. 앞 4개 장은 1700년 전 제갈량(181~234년)의 공과를 다투는 내용으로,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조조를 풀어준 관우는 그대로 두고 전투에서 한차례 패한 마속의 목을 벤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 승상으로 뭐든 할 수 있었으니 상하 양의원을 만들어 언로를 틔울 수 있지 않았느냐 등등의 지적질이다. 뒤 2개 장이 가관인데, 앞 4개 장을 합친 것보다 많은 분량으로 인간 유원표 내지는 계몽 지식인의 두뇌구조를 보여준다.

‘황백인종 관계의 진상’은 서세동점 시대를 당하여 한·중·일이 힘을 합쳐 이를 물리치자는 내용으로 당시 일본 지식인의 생각을 답습하고 있다. 그런 논리에 따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두고 “장하다” “시원하다”는 표현을 한다. 마지막 장이 하필 ‘중국 정략의 개량’이다. 조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게 아니라 중국의 살 방도를 제시하고 있다. 중국이 살면 자연히 조선도 살 것이라는 사대주의가 깔려 있지 않고서야….

꿈 깨시라. 제갈공명의 궁량은커녕 계몽 지식인의 혜안도 없다. 강대국 등쌀에 바람 잘 날 없는 나라의 형편을 목도한 당대 지식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들여다볼 ‘궁핍한 창’이라고나 할까. 이인직·이광수 등 친일로 나아간 문인들의 단초가 보인다.

신채호 서문이 뜻밖이다. “천만번 제갈량을 꿈꾸는 것이 한번 소학교 아이가 되기를 꿈꾸는 것만 못할 것이다”라며 에둘러 비판하는 것이 마지못해 쓴 흔적이 역력하다.

임종업ㅣ한겨레ㅣ2015-04-16


제갈량과 20세기 동양적 혁명을 논하다 - 10점
유원표 지음, 이성혜 역주/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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