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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보편의 번민과 아픔 소설로 보듬어내다 (세계일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4. 17.
부산 토박이 여성작가 2人 나란히 책 출간
부산 문단의 두 여성 작가가 나란히 묵직한 작품을 상재했다. 중견작가 조명숙(57)과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가인 박향(52)이 그들이다. 이들은 부산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그곳의 풍광과 정서까지도 작품에 반영하는 토박이 작가들이다. 이들이 생산한 작품은 지역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시대와 인간 보편의 고민과 아픔을 보듬어내는 문학적 성취도가 높다. 


나란히 소설을 펴낸 부산 토박이 작가 박향(왼쪽), 조명숙씨. 이들은 지역의 질감을 잘 살려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조금씩 도둑’

‘조금씩 도둑’(산지니)은 표제작을 포함해 단편 9편이 수록된 조명숙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1996년 ‘진주가을문예’와 2001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단에 나왔으니 문단 이력이 2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연치와 등단 이력만큼 작품도 깊다. 

‘러닝 맨’의 아버지는 갑자기 옷을 벗어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눈 내리는 거리로 

달려나갔다. 그를 모시고 살아온 미혼의 서른여섯 살 막내딸이 폐암이라는 말을, 그것도 수술이 불가능한 비소세포성 선암 말기라서 잘해야 여섯 달 더 살까 말까 한다는 사실을 지나는 말처럼 형제들에게 던진 뒤였다. 아버지가 말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어서 방심했다. 아버지는 딸의 운명을 오감으로 파악했던 것인지 모른다. ‘다섯 살에 엄마를 잃고 벙어리 아버지와 오빠 셋 틈에서 천방지축 세상을 배운 막내’는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누르고 외친다. “저러신다고 내가 안 죽을까 봐!”


‘가가의 토요일’에도 말을 못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누가 무슨 질문을 던지 건 ‘가가’ 소리밖에 내지 못해 ‘가가(呵呵)’로 불리는 사내. 이 남자는 부산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수영역 2번 출구 앞 부산은행 모퉁이에서 프렌치토스트를 판다. 1987년 6월, 부산역 광장에서 뻥튀기를 팔던 가가는 도도한 시위대의 물결에 휩쓸려 서면로터리까지 행진할 때 함성과 외침 속에서 어느 순간, 태어날 때부터 까무룩 잠긴 귀가 열렸었다. 그리고 다시 2005년 에이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반대를 외치며 해운대 누리마루까지 행진하는 시위대 속에서 새로운 소리를 듣는다. 

‘점심의 종류’는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배경인 단편으로 “10년쯤 지난 뒤에는 여러 방식으로 유가족들의 슬픔과 아픔이 최소한이나마 치유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 썼다”고 작가의 말에 밝혔다. 시대와 특정 공간이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음각된 조명숙의 이번 소설집에는 이밖에도 ‘이치로와 한나절’ ‘거기 없는 당신’ ‘사월’ ‘나비의 저녁’ ‘조금씩 도둑’ ‘하하네이션’ 등이 수록됐다. 

◆‘카페 폴인 러브’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뒤 2013년 ‘에메랄드궁’으로 1억원 고료 세계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새삼 부각됐던 작가 박향은 새 장편 ‘카페 폴인 러브’(나무옆의자)를 상재했다. 부산 중앙동에 존재하는 가상의 카페 ‘폴인 러브’를 무대로 커피에 관한 지식을 사랑 이야기에 삼투시켰다.

권세희라는 여자가 이 카페의 바리스타이다. 그네는 남편 정수와 겉도는 부부관계로 살아오다 이 카페에 단골도 드나드는 기러기아빠 제호에게 빠져든다.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세희는 정작 남편 정수야말로 결혼 전부터 한 여자를 가슴에 담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번민에 사로잡힌다. 

세희에게 카페를 차려준 친구 효정은 죽음을 앞둔 암환자이지만 그네 남편과의 사랑에 마지막 생의 나날을 ‘전투적으로’ 바친다. 딸과의 불화도 극복해나가는 눈물겨운 캐릭터다. ‘죽으나 사나 영도다리’에서 만나기로 했던 60여년 전의 여자를 잊지 못하는 낭만적인 할아버지, 이 노인을 감싸는 할머니의 사랑도 일품이다. 몇 개의 사랑이야기는 원두를 로스팅하고 커피를 내리는 과정의 세밀한 지식들을 배경으로 흥미롭게 전개된다. 커피에 관한 이러한 성찰은 사랑을 말할 때 제법 유용할 듯하다.

“커피에는 신맛과 단맛과 쓴맛이 있다. 각각의 맛은 너무나 매력 없고 맛이 없는데, 그 세 가지 맛이 잘 어우러졌을 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최고의 커피 맛이 우러나온다. 어쩌면 사랑도 그와 같지 않을까. 사랑의 단맛만 보려고 하다가 실패하는 사람도 있고, 쓴맛이나 신맛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시작도 하기 전에 돌아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박향은 “사랑은 나에게 어려운 숙제와 같은 일이고, 경이로움과 권태가 함께 새겨진 행운권 당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면서 “사랑은, 태연히 세상 한가운데에 수많은 의문을 남긴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조용호ㅣ세계일보ㅣ2015-04-17



조금씩 도둑 - 10점
조명숙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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