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1일, 산지니 출판사가 있는 거제동의 한 카페에서 유연희 작가를 만났습니다. 오전 내내 무섭게 쏟아지던 비는 그녀를 반기기라도 하듯 금세 멎어들었지요. 마도로스와 결혼하는 것이 소싯적의 꿈이었다며 웃는 유연희 작가의 모습은 비 개인 하늘처럼 청정했습니다.
첫 소설집 『무저갱』 이후 4년 만에, 유연희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날짜변경선』이 출간되었습니다. 『날짜변경선』에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지요. 지구 표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바다. 인류의 삶에는 언제나 바다가 함께 해왔습니다. 오랜 기간 바다는 삶의 터전이자 생명의 기원으로서 존재해왔지요. 더구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의 역사는 바다로 대변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의 가치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유연희 작가는 『날짜변경선』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바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책의 표제인 ‘날짜변경선’은 태평양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그어진 가상의 선입니다. 이 선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의 날짜가 달라지지요. 그러니 이곳의 날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모호한 시간의 경계에 있는 셈입니다. 『날짜변경선』속의 인물들은 모두 이 날짜변경선 위에 놓인 듯 한 사람들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인물들은 바다에서의 체험을 통해, 날짜변경선을 넘어가듯 새로운 날을 맞이하지요. 유연희 작가는 자신 또한 아직 삶의 바다를 항해하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항해에는 언제나 ‘소설’이 함께 하고 있을 것이라 덧붙였지요.
소설집이 출간되었으니 ‘이제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은데요.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딸과 터키여행을 다녀왔어요. 딸이 올해 서른 살이라, 결혼을 하기 전에 함께 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시집을 가고나면 모녀가 함께 시간을 보내기 힘들어질 테니까요. 사실 딸에게 아직 남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핑계를 대고서라도 딸과 여행을 가고 싶었던 거죠.
이전 소설집인 『무저갱』도 그렇고, 이번 『날짜변경선』도 ‘해양 소설집’입니다. <유령작가>와 <신갈나무 뒤로>를 제외하면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요. 선생님에게 바다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공간인가요?
-저는 바다가 있었기에 제 인생이 구원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결핍이라거나, 내가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삶의 짐 같은 것들이 바다로 인해 구원 받는 느낌? 사실 저에게 바다란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히 정의내릴 수는 없어요. 인생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콕 집어 이야기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저는 제 스스로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자주해요. 더군다나 제 체구가 많이 왜소한 편이잖아요(웃음). 그런데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런 것들을 위로 받을 수 있어요. 사람에게는 받을 수 없는, 바다만이 줄 수 있는 위로? 바다는 저에게 그런 공간이에요. 큰 힘이 되어주는 곳.
해양 소설집이 아닌 소설집을 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일반적으로 소설집 한 권 당 단편소설이 8편 정도 실리게 되잖아요? 그러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 중 몇 편 이상은 해양소설을 실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가 『해양과 문학』이라는 잡지의 편집 일도 하고 있다 보니, 잡지에 실릴 해양 소설들도 꾸준히 써야 하거든요.
동명의 시집(이택수/나이테미디어)과 청소년 소설(전삼혜/문학동네), 심지어는 연극(김태수 극본)까지 있는데, 굳이 ‘날짜변경선’을 표제로 택한 이유가 있나요?
-정말요? 동명의 작품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중 누구나 알만한 대히트 작품은 없었으니 괜찮지 않나요? 저는 정말 유명한 히트작이 그 제목을 고유명사처럼 만들지 않은 이상은 얼마든지 동명의 작품들이 발표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제 소설집이 그런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까지 저는 부족한 점이 많아서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웃음).
그리고 사실 ‘날짜변경선’이 표제가 된 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책 날개 귀퉁이에 ‘표지 이미지: 강석철’이라고 적혀 있죠? 제 아들 이름이에요. 아들이 시각디자인과 출신이거든요. 『날짜변경선』의 표지는 아들이 대학생 시절에 만든 디자인이에요. 꼭 아들의 디자인을 표지로 쓰고 싶은데, 여기에 어울릴 만한 제목이 ‘날짜변경선’ 밖에 없었어요. ‘어디선가 새들은’이나 ‘붉은 용골’같은 건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요.
책 디자인에 맞춰서 선택된 표제였군요. 저는 수록된 작품들 중 「날짜변경선」이 가장 표제작에 걸맞다고 생각했는데…. 「날짜변경선」의 주인공 선의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바다로 내려가잖아요. 그 장면이 작품집의 전체 정서를 대변하는 장면이라 생각했거든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저는「날짜변경선」보다 「어디선가 새들은」이라거나 「바다보다 깊은」에 더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날짜변경선」은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직접 배를 타면서 만난 사람들과, 그때 겪었던 일들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다른 소설들에 비해 쉽게 쓰인 작품이기도 하고요. ‘B급 소설’이라고 하면 될까요.
아, 제가 말하는 B급은 결코 나쁜 의미가 젆니에요. 가수 싸이가 스스로를 B급 가수라고 칭했잖아요. 그 말처럼 싸이의 음악은 싼티나고 저렴해 보이지만 그와 동시에 아주 대중적이에요. 「날짜변경선」도 그래요. 쉽게 쓰였지만, 독자와 소통하기 편한 작품. 문학성이 높은 작품을 A급이라고 본다면, 일반적으로 A급 작품들은 독자가 이해하기에 어려운 부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에요. 게다가 오늘날에는 대중의 관심이 문학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B급 문학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날짜변경선』이라는 작품집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딱히 작품집 전체에 담아내고자 했던 교훈이나 메시지 같은 건 없어요. 각각의 단편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다 다른데, 그것들을 굳이 하나로 묶어서 정의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저 바다에 관한 소설들을 모아 책으로 내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국은 지리적으로 바다와 굉장히 가까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비해 해양소설이 굉장히 적어요. 그런데다 우리나라의 해양문학회에서는 ‘배를 타본 경험을 기반으로 현장성이 잘 드러나게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리얼리즘이 없으면 그건 해양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반면 저는 비현실적이거나 환상성이 크다 하더라도, 바다의 존재감과 가치가 잘 드러나 있다면 해양문학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걸 이번 작품집을 통해 말하고 싶었죠. 물론 저도 직접 배를 타보았고, 소설을 쓸 때 그 경험을 참고해서 쓰고 있지만요(웃음). 그런 제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시커호」가 아닐까 싶어요.
저도 「시커호」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어요. 특히 마지막에 주인공 ‘정’이 수압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발버둥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죠.
-그 부분은 좀 더 공들여 쓰고 싶었던 부분인데. 바닷물이 정말 투명하잖아요. 그런데도 심해로 내려갈수록 아주 어둡고 캄캄해지죠. 그걸 ‘투명이 한 없이 쌓여 어둠이 된다’고 표현한 것이거든요. 투명이 점차 모여들어 주위가 어두워지고 수압도 점점 높아져 ‘정’을 압박해오는 장면을 더 몽환적이고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았죠.
해양소설은 아니었지만, 표절 작가에 대한 이야기인「유령작가」도 좋았어요. 얼마 전 한 유명 소설가의 표절 사건으로 인해 문학계가 들썩인 적이 있었잖아요.
-사실 그건 운 좋게 요즘 시의와 맞아 떨어진 거예요.「유령작가」는 15년 전쯤에 썼던 작품이거든요.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에요. 대부분은 10년이 넘은 작품들이죠. 그래도 그 중 가장 최신작이라 할 만한 게 「어디선가 새들은」이에요.
10여 년 전 소설이라기엔 전혀 촌스럽지 않은데요? 「유령작가」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작중 주인공이 소설가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잖아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소설가란 어떤 모습인가요?
-소설가는 끊임없이 변화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나’라는 존재는 사실 타인이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죠? ‘진짜 나’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소설가는 ‘진짜 나’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에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탐색하고 고찰하면서 그 속에서 ‘나’를 찾아내는 거예요. 하지만 주변의 것들은 그대로 멈춰있지 않아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죠. 그 변화를 감지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 또한 변화해가는 것이야 말로 소설가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이 너무 어려웠나요?(웃음)
작가의 말 중에서 “그닥 길지 않은 시간 후에 세 번째 소설집으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드린다”는 부분이 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 계획된 건 없어요. 쓰고 있는 단편들이 있기는 한데…….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할 것 같네요(웃음). 저희 세대 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롭게 일을 진행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요즘 작가들은 굉장히 빨리 빨리 작품을 발표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요즘 트렌드에 맞춰 활발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작가의 말을 저렇게 적은 거죠.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작품들을 하나의 책으로 엮어내면서, 해양소설이라는 장르의 발전과 더불어 이 책을 읽게 될 독자 분들이 바다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해양 관련 종사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기대 같은 게 있었어요.『날짜변경선』을 통해 독자 분들이 조금이라도 바다와 친해질 수 있었으면, 바다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 직접 배를 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주신다면 더 좋겠지요. ‘누가 나 배 좀 태워줬으면 좋겠다!’하고요.
날짜변경선 - 유연희 지음/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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