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였죠? 10월 29일(목) 한겨레신문 최재봉 기자님의 강연을 다녀왔습니다.
퇴근 후라 꽤 날이 차가웠는데도 신문 광고를 보고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하셨더라고요.
강연의 주제는 '신경숙 작가 표절과 문학 권력'이었습니다.
지난 6월 신경숙 작가의 표절 이후
현재는 문학의 권력에 대한 쟁점으로 옮겨갔는데요.
이에 대한 최재봉 기자님의 날카로운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강연은 크게
1. 요산 김정한 선생의 작품세계 - 참여적 사실주의 문학
2. 신경숙 작가의 표절 그 이후 - 문학 권력
의 내용으로 진행됐습니다.
1. 요산 김정한 선생의 작품세계
최 기자님께서는 오랜만에 부산에 오면서 요산 김정한 선생의 작품을 다시 읽으셨다고 합니다. 역시 우리 문학의 참여적, 비판적 사실주의, 진보 문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라는 것을 느꼈다며 강연의 운을 띄우셨습니다.
특히 <사하촌>과 절필 이후 문단 복귀작인 <모래톱 이야기>를 거론하셨는데요, 먼저 <사하촌>에서는 소작농이 된 사람들의 핍박받는 현실과 말미에 이러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래톱 이야기>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주인공 소년 건우에게 하는 말, 건우 할아버지의가 자신의 땅을 유력자들, 권력자들에게 뺏기고 시달리는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대목 등에서 민중의 처지와 삶을 보여주는 요산 선생의 문학 정신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글을 읽어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핍박받는 현실에 분개하는,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저항적인 문학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며 소설 속의 사실적인 부분에 대해 강조 하셨습니다.
"1966년, 요산 김정한 선생의 문단 복귀와 창작과 비평의 창간"
요산 선생은 36년 등단 후, 40년 이후 절필. 66년에 다시 복귀를 하셨습니다. 1966년 그 해, 창작과 비평(이하 창비)가 창간 되는데요, 요산 선생께서 참여적 사실주의 문학을 일궈가는 시점과 창비의 참여 진보적 문학과의 시점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요산 선생이 문단에 복귀하며 쓴 작품들은 가라앉은 참여 문학을 다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고 이후 70년대부터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들,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진보적이고 참여적인 문학이 든든하게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창비가 있었고, 창비는 그런 문학들을 적극적으로 개제, 출판, 착가 후원을 왔습니다.
2. 신경숙 작가의 표절 그 이후-문학 권력
내년이죠? 2016년은 창비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창비. 그러던 와중에 최근에 여러가지 상황들이 벌어진 셈이죠. 최 기자님께서는 신경숙 작가의 표절 그 이후, 지금 현재 상황이 어떻게 와 있는지 설명하시며 메이저 출판사(문학동네,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의 문학 권력을 비판하셨습니다. 그중 특히 창비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이어가셨는데요, 특히 창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이고 참여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창비 내부의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신경숙 표절 행위가 창비의 문학 권력으로 이동한 데는 창비의 책임이 크다고 설명하셨는데요, 그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정리하셨습니다.
- 백낙청 선생의 1인지배체제의 지속화가 낳은 권위주의
- 작가 신경숙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두둔
- 창비의 진보적, 비판적 문학관의 포기
신경숙 사태 이후 문학동네(이하 문동) 가을호에서 작가 토론회(좌담)를 열었습니다. 사회는 신영철 평론가가 봤는데, 그의 발언 중 "출판사들 사이의 교집합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최 기자님께서는 이 부분을 해석하자면 출판사들 사이의 차이점이 크게 없어졌다는 것인데 그것은 문동이나 문학과 지성사(이하 문지)가 창비 쪽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문제는 창비는 문학주의, 문학지상주의, 문학을 위한 문학과 같은 태도가 아닌 문학에 담기는 내용. 그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색깔을 잃어버렸다는 점에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미학과 메시지, 문학은 양쪽을 같이 가져가야 한다."
현재 문학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창비는 조금 더 현실에 참여적이고 전투적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거론하며, 미학적 완성도 치우쳐서 커다란 것(사회, 인류)들을 놓쳐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든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최 기자님께서는 이런 점에서 올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작가는 논픽션을 쓰는 작가로 전쟁, 체르노빌 발전소 사고 등 인류사의 큰 사건들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접근하는 방식은 목소리의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관련자들을 적극적으로 인터뷰를 하고 그 중에서 그 목소리들을 꺼내서 자기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만약 이런 작품이 노벨상을 받기 전에, 한국 평론가들이 봤다면 뭐라고 이야기했을까? 미안하지만 '그건 문학이 아니다. 언론이다'라고 이야기 했을 것 같다고 답하셨는데요. 이 작가의 작업이 단순한 소재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대단히 문학적인 터치와 소화를 했다는 점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상상력으로 꾸려내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아픈 목소리들을 끄집어 냈고 작가가 자기 스타일을 내서 소화를 합니다. 스타일, 소재, 현실 등 이런 것들이 문학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글쓰기를 하고 있는 셈이죠.
우리는 '문학적이다'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최 기자님께서는 직접 현실 속에 들어가 마주보는 르포와 같은 글쓰기의 필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현재, 르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꽤 많지만 문제는 우리 문화에서는 이것을 문학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신경숙 표절 이후, 지금 한국 문단은 어디에 와 있는가?
그리고 창비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앞으로 창비가 살 길은 창비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수용해서 편집위원들이 다시 짜는 것이라고 말하며 창비 이외의 좋은 문학 잡지들을 소개하셨습니다. 먼저 <실천문학>은 8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자신의 출발에서 지켜나가야 하는 것들을 놓치고 있지 않다고 하셨고, 이어 부산에서 나오는 계간지인 <오늘의 문예비평>을 거론하셨습니다. 이 두 권의 잡지를 이야기 하시며 창비나 문학동네만큼 유명하고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계속해서 좋은 잡지들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잡지들을 응원하고 구독해주며 호응해주는 것이 창비와 같은 메이저들을 자극하고 본연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5년 현재, 우리 사회는 80년대 못지않은 위기와 절망의 시기라 생각한다. 문학이 그것에 비하면 너무 태평스럽고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창비가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와서 진보적이고 참여적인 작품의 큰형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의 문예비평 2015.가을 - 산지니 편집부 엮음/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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