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아일랜드』,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어 서평을 쓸 세 번째 작품은 제9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받은 『밤이여 오라』입니다. 저희 산지니에서 지리산 용유담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배경으로 우정을 그린 생태 동화, 『나는 강, 강은 나』를 출간한 작가님이 역사소설을 집필했다는 소식에 이 마지막으로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세 편의 작품 모두 제주 4.3을 다루고 있지만 초점을 맞춘 부분이 다릅니다. 『레드 아일랜드』는 4.3 속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건의 비극성을 강조했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노사이드를 기억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잊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번에 다룰 소설 『밤이여 오라』는 ‘국가 폭력’ 그 자체에 집중합니다.
제주 4.3사건의 피해자인 한나의 아버지, 대통령의 권력 유지를 위해 자행된 좌파 몰이에 희생된 한나, 그리고 한나가 발칸반도에서 만난 스레브레니차의 피해자들까지. 『밤이여 오라』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의 국가 폭력을 다룹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베트남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를 언급했지만 주된 포커스는 제주 4.3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밤이여 오라』는 다양한 국가 폭력에 주목합니다. 국가 폭력을 겪은 이가 어떻게 변했는지,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 속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나는 떨고 있었다.
시작과 유래를 알 수 없는 파동이 나의 몸을 관통하며 흔들어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는 듯, 자는 날개 없는 새처럼 파들거렸다.
이토록 낯선 나라에서 이토록 비슷하게 반복되는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설계인가.
p134
『밤이여 오라』에 등장하는 피해자들은 모두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한나의 아버지와 한나는 악몽과 착란 증세에 시달립니다. 한나의 어머니와 오빠는 빨갱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살했으며 마르코는 내전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비무장 적군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전쟁 성폭력의 결과로 태어난 남자, 자신의 눈앞에서 아내와 자식을 잃고 평생 자살 시도를 하는 남자 등 권력 유지를 위해 다양한 이유가 동원된 학살 앞에 그들은 무참히 밟혔고, 일어날 의지조차 빼앗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트라우마는 사람을 학살할 때 벽에 새겨진 총알 자국처럼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살인마들이 정당성을 주장하는 걸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나.
그런 자들의 변명을 지켜보고 있어야 되다니.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되는 거 아니야?
그들에게는 언제 한번 마이크를 줘봤냐고.
p31
국가 폭력의 주도자들 중 적절한 처벌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가해자들의 변명을 듣는 사이 피해자의 목소리는 가려졌습니다. 심지어 왜곡 당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장애인 교통권을 주장하는 지하철 시위에 서울교통공사 홍보실 언론팀에서 시위자들을 적으로 규정해 ‘시민 불편’ 프레임을 씌워 여론전을 벌인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언론들이 사실 여부 확인 없이 기사를 내보낸 것으로 확인되어 파장이 커졌습니다. 일본군 성 노예 피해자는 처음 피해 사실을 알릴 때 돈을 노린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인종우월주의를 주장하며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관동 대지진의 원인을 조선인의 탓으로 돌리며 학살한 일본까지 약자에게 ‘적’의 이미지를 씌우고 굴복시키는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밤이여 오라’라는 제목은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피해자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외면하거나 순응했던 상처를 직면하고 무기력에서 벗어나 그들을 부순 권력에 대항하는 결심을 합니다. 한나는 재심을 결정하며 제주로 돌아갑니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그 기억을, 그 밤을 마주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와 용기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은 피해자의 주장에 피로감을 느끼곤 합니다. “아직도 그 얘기를 하고 있어?”, “너무 잔인해서 안 듣고 싶어.” 등의 말이 종종 들립니다. 제주 4.3은 올해로 일어난 지 74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의는 30여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2019년이 되어서야 4·3 생존 군사재판 수형인은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습니다. 아직 피해자들의 유해조차 수습이 되지 않았습니다.
4.3 평화기념관에는 백비가 있습니다. 백비는 적혀 있지 않은 비석입니다. 백비 아래에는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라고 적혀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부마민주항쟁과 달리 제주 4.3은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립니다. 이름을 붙일 만큼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주 4.3의 역사성을 담은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한나와 같이 용기를 낸 사람들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제주 4.3 문학을 읽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4월 3일 제가 그 동안 소개했던 책들 중 한 권을 읽어보는건 어떨까요?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연민, 동정, 안타까움과 같은 감정들이 다른 행동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쟈처럼요.
나의 냉소는 단절이겠지만, 나쟈의 연민은 다른 시작일 수도 있잖아.
p193
앞서 다룬 4.3 관련 소설 서평
레드 아일랜드 부산에서 책 만드는 이야기 : 산지니출판사 블로그 :: 폭력 속의 인간애, 제주 4.3사건을 다룬 김유철의 『레드 아일랜드』서평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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