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 지나고 곧 따뜻한 봄, 4월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70년 전 제주는 따뜻한 봄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 군경이 서북 청년단의 탄압 중지와 통일 정부 수립을 슬로건으로 건 무장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해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많은 제주도민들이 학살당하였습니다. 7년 7개월 동안 이어진 학살과 구금은 한라산 금족 지역이 개방되면서 막을 내립니다.
김유철의 『레드 아일랜드』는 4.3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각기 다른 행동을 담았습니다. 기회주의적인 김종일, 체제에 순응하는 김헌일,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방만식, 양심을 지키는 지식인 홍상수가 이에 속합니다. 이 서평에서는 ‘방만식’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방만식은 주인 영감, 김헌일 아버지의 부탁으로 김헌일 대신 일본으로 강제 징용을 갑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폭력 속에 고된 노동을 합니다. 같이 강제 징용을 당하고 있는 석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p.81
방만식은 석호와 친밀한 사이가 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제주도에서 마주한 현실은 자신이 그리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고 화북지서에서 고문을 받은 뒤 강제 징용 때의 의지를 잃어갑니다. 하지만 석호를 다시 만나 민중을 위해 싸울 결심을 합니다.
“어차피 내겐 똑같은 삶이었주.”
“제주가 이런 난 속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자네의 운명은 달라진 게 없을 거란 소린가?”
“자네에게 난이지멍 나한텐 아니주.”
“그럼 뭐라고 생각하나?”
“해방이주. 양키들 밑에서 권력 행사하는 늠으로부터 친일 했던 늠들로부터…….”
“그래서 새로운 세상이 올 거라 믿고 있나?”
“중요한 건 지금 세상이 잘못됐단 거우다……. 게매 이렇게 행동하고 있주. 여기서 죽도록 맞으멍 속으니 희망을 가지멍 싸우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우꽈.” p.328-329
김헌일과의 대화에서 방만식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자주적인 대한민국을 위해 혁명을 일으켰음을 말합니다. 해방이 된다면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이 부서졌음에도 그는 행동했습니다. 잘못됐기에 싸운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과 행동은 큰 울림을 줍니다.
‘보복이 보복을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거주. 하멍 그 속에서 희생당하는 사람은 제주도민이우다.’ p.203-204
하지만 방만식은 자신이 정말로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에 빠집니다. 무장 봉기대의 행동에 제주도 민중이 학살당하거나 자신들이 어느 마을의 청장년을 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고 따르던 석호가 제주도 민중보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중요시하는 인물로 변질되면서 방만식은 고뇌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경찰과 무장 봉기단 사이에는 완벽한 악도 완벽한 선도 없음을, 그리고 그 피해는 오로지 제주도민이 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방만식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인해 제주도민 같은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바람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지금도 권력층의 갈등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망명을 가거나 박해당하고 죽고 있습니다. IS사태, 티베트 억압 그리고 최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그 예입니다. 지배층 모두가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는 가운데 그 피해는 오로지 민중들이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은 참사 속에서의 인간애를 보여줍니다. 방만식을 구해준 김헌일, 김종일을 구해준 방만식, 최기호를 도와준 홍상수처럼 책 속의 인물들은 서로를 돕습니다. 서로를 구해준 이들과 다른 제주도민들로 인해 제주도는 더 많은 비극을 겪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등에서는 우크라이나 망명인을 허용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집을 제공해 주는 시민들도 있습니다. 많은 다국적 기업들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견디고, 이겨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인간애만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복잡해진 세계정세 속에서는 지배층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지배층, 권력층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공생’을 우선시할 때 우리와 방만식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층의 행동을 주시해야 합니다. 비서부장, 사찰주임과 석호 그리고 그보다 위에서 이를 지시한 사람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제주 4.3사건을 그리고 있다는 역사적인 의미 외에도 많습니다. 자세하고 섬세한 묘사와 현장감 넘치는 제주도 사투리는 독자가 사건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과거와 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교차되는 빠른 호흡으로 독자를 책에 빠져들게 합니다. 소설의 리얼리티를 담기 위해 많은 책을 읽은 작가의 노력으로 사건 고증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책의 저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고 말합니다. 다가오는 4.3희생자추념일을 기리며 더 이상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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