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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와 함께 말과 글이 질펀하게 익어 가는 '어산재' (부산일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5.
최원준 시인의 부산일보 연재글 [최원준의 '주유천하']
이번 주 주인공은
 『감꽃 떨어질 때』의 저자 정형남 선생님이십니다.

감꽃 떨어질 때의 영광독서토론회를 마무리하며 
시원한 창으로 소설의 한 부분을 낭독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역시나 최원준 시인님과의 만남에서도 창이 빠지지 않았나 봅니다 ^^ 


보성 정형남의 서재


▲ 서재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다녀가고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난무하는 곳. 그리하여 천 가지의 생각과 만 가지의 말이 발효되고 끓어 넘친다. 사진은 정형남 작가의 서재에서 작가와 필자가 판소리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최원준 시인 제공

'그때 나는 연속 사진 컷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전남 보성군 조성면에 있는 소설가 정형남 선생의 집이었다. 우리는 부산에서 마산을 거쳐 순천을 훑어가면서 곳곳의 막걸리 맛을 순례했고 그로 인한 취기에 몸을 편하게 실었다. 그것의 절정이었던가, 이슥한 밤까지 통음한 다음 날 아침에 드디어 토방의 한쪽에 있는 북에 눈길이 갔던 것이다. 아슴한 기억으로는 한쪽은 개가죽이고, 다른 쪽은 소가죽이어서 이를테면 개도 짖고 소도 음메하고 우는 그런 북이었다. 최원준 형이 그 북을 쳐대기 시작했다. 북소리는 느리고 빠르게 둥기덩 울리고, 그 장단을 따라 영판 고개를 주억거리고 흔들며 고소한 흥을 자아내는 원준 형의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최학림의 산문집 '문학을 탐하다'중에서)

남도의 그윽한 소설가 정형남 
토굴 같은 서재에 묻혀 
세월 이기고 창작에만 몰두 

주인장 마음을 닮은 풍광 
늘 열려 있는 '방담의 장소'라 
'제자백가'들 부담 없이 다녀가


아마도 판소리 '춘향가' 중의 '쑥대머리'인 것 같다. 국창 임방울 선생이 생전에 즐겨 부르던 소리로, 아침나절 정형남 작가는 '쑥~대~머리~.'구수하게 소리 한 소절 뽑아내고 있었고, 필자는 흥에 취해 '두둥~'북을 타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밤새 서재에서 마신 막걸리가, 뱃속에서 제대로 도도하게 익어가는 와중이었다. 그날 정형남 작가의 '쑥대머리'는 걸쭉하기 이를 데 없는 절창(絶唱)이었다. 소리가 길~게 길을 이끄니, 북이 뒤따르며 한판 춤이 어우러지는, '무아지경의 절정'을 경험한 것이다.



'어산재'에서는 그리운 사람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어우러진다.
소설가 정형남. 전남 완도 조약도에 태를 묻은 남도의 그윽한 사람. 30여 년의 부산 생활을 접고 귀향하던 중, 보성에 눌러앉은 지 7년째 쯤 됐겠다. 자연과 동하며 소설이나 맘껏 써 볼 심산으로 '말(語)하는 산'이 버티고 있는 집 '어산재(語山齋)'를 짓고, 지척인 고향 쪽으로 창을 내고 살고 있다.

이후로 본격적인 장편소설을 두 권이나 펴냈다. 젊었을 때 '장돌뱅이' 마냥 해볼 것 다 해보고, 가볼 것 다 돌아보며 전국을 주유(舟遊)한 탓에, 이제는 조용히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됐다고. 그 후로 토굴 같은 서재, '어산재'에서 면벽안거(面壁安居) 중이다.

"하루에 원고지 3장만 써부러. 그럼 한 달이면 백여 장이 되제~? 그러다 보면 소설 한 편이 나오는 거여. 소설가는 게으르면 못 쓰는 법이여. 장편 굵은 놈으로 뽑아낼라먼 부지런해야 혀. 글고 나가 평생을 일기를 쓰는디, 이게 소설의 단초가 돼야. 소설은 기록 문학이라 하잖어. 늘 기록하고 꾸준히 쓰는 버릇을 들여야 하는 거라."

작년 펴낸 장편소설 '감꽃 떨어질 때'도 이 '어산재'에서 작업을 끝냈다. 항일 의병에 가담하고, 한국전쟁 소용돌이 속 빨치산으로 '이데올로기에 희생'되는 한 남자. 그 남자의 부인과 딸로, 집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간 두 모녀의 일생을 그려냈다. 

이 모녀를 상징하는 피사체가 감나무다. 한 집안을 묵묵히 지켜낸 여인과, 집을 지키고 선 감나무는 '지킴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하여, 시집간 딸은 집안의 내력이 서로 다른, 친정과 시댁의 '감꽃 맛'을 구분해내는 것이다.

'내가 친정을 찾은 것은 감꽃이 떨어질 때였다. 이상하였다. 친정 감나무에 열린 감꽃과 시댁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꽃 맛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달착지근하면서도 입술 위에 떫은 여운이 감도는 맛. 나는 친정집에 들어서자마자 감꽃부터 주웠다.'(정형남의 장편소설 '감꽃 떨어질 때' 중에서) 

집과 땅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성정을 닮는다고 했던가? 감꽃마저 그 맛이 다를진대, 사람의 생각과 삶은 오죽했을까? 그래서 '어산재'는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닮고, 그 주인장의 마음을 닮아, 소설집 두 권의 이야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해인가, 비가 질척이던 겨울. 일단의 무리가 따뜻한 온돌의 그리움에 못 이겨 '어산재'로 난입을 한다. 양손에는 막걸리를 잔뜩 들고 통영의 싱싱한 해산물들도 허리에 꿰차고 말이다. 갑작스러운 무뢰배의 방문에 뒤늦게 서재 아궁이에 불길이 들어가는데, 온갖 방법을 써도 좀체 온돌은 데워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급기야 가당찮은 일을 모의하는데, 분서(焚書)를 감행한 것. 서재에 잘 꽂혀있던 무르익은 시집들을 훑어보다가, 가장 따뜻해 보이는 시집들을 아궁이에게 공양하기로 한 것이다. 

'쩝쩝 입맛을 다시던 아궁이놈이요, 이 맛이로구나, 무릎 치며 펄펄 끓는데요, 활활~ 제 몸 태우기 시작하는데요, 세상사 삼라만상 다 읽어내고요, 산길물길 다 짚어 길을 내는데요, 붉은 혓바닥은 경구 읊듯 넘실거리고요, 뜨거운 불길은 서재의 모든 시집들 다 깨우는데요, 몸을 태운 시집들이 일시에 입을 맞춰 게송을 하는데요,'(졸시 '시집아궁이' 중에서)

이렇게 시집으로 몸을 덥힌 서재에서 우리는 밤새 '막걸리파 문인들의 거두' 정형남 작가를 좌장으로, 문학과 개똥철학과 막걸리로 비 오는 겨울밤을 견뎌낸 것이다. 이처럼 정형남 작가의 서재는 사람들에게 늘 열려있는 방담(放談)의 장소이다. 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다녀가고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난무하는 곳이기도 하다. 

서재는 정신적 경운(耕耘)과 철학적 수확을 이루는 곳. 때문에 복잡다단한 논리가 간결하게 정리되기도 하고, 질서정연한 철학이 수만 갈래 잔물결로 흩어지며, 제각각의 생각으로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래서 서재는 불가마 같은 것. 천 가지의 생각과 만 가지의 말이 발효되고 끓어 넘친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문장과 말씀이 술처럼 '뽀글뽀글~'익어 가면, 궁극의 이치와 그리운 사람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질펀하게 회자되고, 거방하게 어우러진다. 

정형남 작가와 서재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막걸리는 제 지역의 정서를 가장 잘 반영하는 음식. 그 지역의 산과 강과 들판을 두루 거치며 어우러지는 물과, 그곳 땅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 곡식과, 햇볕과 바람이 함께 발효 과정을 거쳐야 지역의 막걸리가 익어간다. 말씀으로 발효되고 문장으로 끓어 넘치는 서재와 다름 아닌 것이다.

막걸리가 조성면 대곡리의 바람 소리를 닮아 청량하게 흔들린다. 오호라! 어느결에 막걸리 한 잔이, 어산제의 책 한 권으로 일어나 죽비소리로 '탁~!' 때린다. 그 한 잔이 삶의 나태함을 꾸짖고 맑은 정신을 일깨운다. 그렇기에 서재의 막걸리가 익을수록, 정형남 작가의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도 점점 깊어가는 것일 게다. cowejoo@hanmail.net


최원준 시인 ㅣ부산일보ㅣ2015-02-04

원문 읽기

감꽃 떨어질 때 - 10점
정형남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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