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물건의 옹호 


전성욱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주간·문학평론가





무소유가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속의 삶이란 늘 이런저런 것들의 소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분쟁들로 시끄럽다. 실은 그 소유의 욕망이야말로 이 거대한 소비의 체제가 지탱될 수 있는 바탕인 것이니까. 버려야 채울 수 있다는 위대한 역설에도 불구하고, 갖고 싶다는 그 채움의 물욕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버림과 비움을 통해 자제를 실천하는 빈자(貧者)의 행복이란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경지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무소유라는 궁극의 가르침보다, 제대로 소유하는 것의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 비천한 우리들의 일상에서는 더 절실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나는 왠지 '물건'이라는 말이 참 좋다. 그렇다고 내가 물신주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낭패를 맞은 얼굴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친구가 편의점으로 뛰어가 사다 준 그 싸구려 우산이 나에겐 아직도 무척이나 아끼는 물건이다. 스승의 날에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 하나가 내게 건넸던 황기찬의 시집 '구관조 씻기기'가 또한 그렇게 나를 흐뭇하게 하는 물건이다. 그 시집의 속표지에는 "앞으로도 이처럼 이따금씩 시집을 선물할 수 있는 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물건들에는 이처럼 모두 어떤 아련한 사연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어떤 시인은 우리 시대의 병폐를 '생명에서 물건으로'라는 짧은 시구에 압축하기도 했지만, 사실 물건의 소비주의를 탓하고 나무라는 것은 너무도 진부하고 식상한 일이다.




어떤 기자가 성공한 기업가의 인터뷰 기사에서, 오직 사업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그에게 '몰스킨 다이어리의 질감과 몽블랑 만년필의 필기감에서 작은 행복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고 쓴 문장을 보고 짜릿한 통쾌함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다. 좋은 물건을 소유하고 그것에서 삶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여유는, 단지 값비싼 물건들을 잔뜩 갖고 있으며 그것을 마음껏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잘 들고 다니지도 않는 명품 가방을 잔뜩 사 모으는 누군가들의 호사스런 취미와도 물론 다르다. 그러니까 물건에서 오는 삶의 행복이란,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나날이 더 각박해지고 그 속내는 모두 외로움으로 곤궁하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물건을 누리지 못하고 물건이 사람을 부리는, 사람과 물건의 그 전도된 관계 때문이리라.


소설가 김훈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물건애호자가 아닐까 싶은데,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천만 원이 넘는 고가의 자전거를 타고, 독일제 스테들러 연필로 원고지에다 글을 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김훈의 그런 사치가 좋아 보인다. 억대의 자동차 대신에 그는 명품 자전거를 타고, 값비싼 노트북을 두드리는 대신에 그는 품질 좋은 외제 연필로 또박또박 글을 쓴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자전거로 누비고 다닌 사연들이 그 연필로 쓴 문장으로 만날 때, 나는 그 명품의 글쓰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물건에 대한 집착이 없어요. 다만 귀하다는 것은 알아. 명품은요, 내 몸에 딱 맞는 게 명품이에요." 좋은 물건이 좋은 임자를 만나면, 그렇게 그 물건은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한다.  더 자세히 읽기



이 글은 국제신문에 3월 23일자 본지 26면에 실린 글을 일부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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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중국현대문학>의 제67호(2013. 12.)에 수록된 글입니다.

 

중국몽에 이르는 길: 이종민, <<흩어진 모래>>(산지니, 2013)

 

 

1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발견한다. 동아시아는 서구와의 교섭과 충돌을 거치며 그 나름의 모더니티를 모색하고 형성해나갔다. 그것은 이른바 외재적인 이식근대화론이나 내재적인 자생근대화론의 이념적 서술들로 단순화될 수 없는 복잡한 계기들의 난조건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니까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순조로운 이행이나, 서세가 동점하는 매끄러운 동일화의 과정이 아니라 전통의 계승과 단절, 서구문물의 이입과 퇴거가 교착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혼란스런 이질화의 과정이었다. 자기 안에 들어온 낯선 타자는 굴절된 형상으로 주체의 내면에 맺힌다. 특히 그 타자가 자기의 이윤축적에 혈안이 된 폭력적인 존재라면 그 굴절은 한층 심해진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근대성은 분열된 주체의 뒤틀린 내면성으로 현상할 수밖에 없었다.

흑선의 기괴함으로 출현했던 서양에 대해 일본은 탈아입구로 응대했다. 그러나 탈아를 통해 도달한 것은 전통과의 우악스런 단절과 함께 아시아의 패권을 거머쥔 맹주가 되는 것이었고, 입구로 실현된 것은 서구적 근대성의 일본 잠식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통과의 심각한 교착을 거치지 않고 들어온 서구의 사상이 일본 사상의 잡거성을 만들어냈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 잡거의 무질서를 통어하는 국체로서의 천황제를 불러왔음을 예리하게 논증하였다.잡거는 이질성들의 창조적인 절합인 잡종과 구분되는 것으로, 이질성을 배격하는 부정적인 동일화의 기제로 작동한다. 동서의 융합이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유기적인 총체화를 지향하는 잡거는, 그 내부의 이질적 사상들이 서로 교통하지 못한 채로 그저 뒤섞여 있을 뿐인 상태를 지칭한다. 문제는 일본 사상의 그런 잡거성이 이질성들의 창조적 혼란을 동질화, 추상화, 단순화시키는 천박한 주체성의 주조로 귀결되었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마루야마가 도달한 결론은 새로운 주체성의 확립이다. “잡거를 잡종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에너지는 인식으로서도 역시 강인한 자기제어력을 갖춘 주체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 주체를 우리가 산출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혁명의 과제이다.”

이양선의 격퇴와 더불어 쇄국의 길로 나아간 조선은 위정척사의 사조가 개화파의 사상을 압도했다. 그럼에도 거세게 불어닥친 만국공법의 명분 앞에서 위정(衛正)은 척사(斥邪)에 이를 수 없었다. 열강의 침탈 야욕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강과 독립 그리고 애국의 계몽으로 대응했으나 대세는 이미 망국과 식민화로 기울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관철되는 가운데, 처절한 저항과 적극적인 순응 사이를 요동치며 조선은 그렇게 근대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가혹한 식민지 수탈에 광범위한 항거로 궐기했던 1919년의 소위 만세사건 이후 최남선, 김성수,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서구의 자유주의적 개인의 개념에 입각한 민족개조론을 제기했다. 민족성의 개조를 통해 문명의 선진화를 꾀하는 발상은, 약소민족으로서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일종의 실력양성론이다. 민족의 개조로써 도달하려는 목표형의 인간은 서구에서 발아한 자유주의적 개인이었으며, 실력의 양성은 그것을 실현하는 유력한 방법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그런 바람은 그 의도와는 다르게, 조선의 인민을 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 주조하려했던 식민통치의 역학 안에 흡수되고 말았다.

아편전쟁의 패배로부터 이월된 20세기 초의 중국도 역시 망국의 위기 앞에서 변법과 자강의 모색으로 분분했다. 쇄신의 기운은 위기의 근원을 고루한 사상에서 찾았고, 유학이 그 고루함의 중심으로 지목되었다. 유교는 전통이데올로기의 모체였으며, 그 경전은 모든 가치 기준의 원리로서 막강한 권위를 발휘했다. 송명이학과 경서는 합리성의 근거이자 규범이었고, 그것을 향한 시비와 논란은 바로 그 격렬한 반전통주의의 한 표정이었다. 예컨대 금문경학파의 캉유웨이는 경서 해석의 기투를 통해 전통을 재구성하려 했다. 그는 경학의 경세 전통을 근간으로 불학과 서학을 융합함으로써 난세를 대동세로 역전시킬 원대한 기획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변법으로 자강을 실현하려고 했으나 대동세계의 유토피아는 끝내 실패한 기획이 되고 말았다. 캉유웨이의 금문경학과 대립했던 고문경학은 유학의 전통을 사수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보수적 학풍이다. 캉유웨이가 대동의 정신으로 난세를 헤쳐 나가려 했다면, 고문경학파의 장타이옌은 반청을 내세운 민족의식으로 난세의 풍조와 맞섰다. 그러나 천하를 다스리는 정명의 존엄은 이미 그 기세를 탈진해버렸고, 이런 국수적 사상으로 버티기엔 역부족이었다. 고사변운동에 이르러 경학은 일종의 역사학이 되었고, 향촌건설의 실험을 도모했던 량수밍과, 유학을 일종의 인생철학으로 전유했던 슝스리의 신유학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유학은 그 현실적 실효성을 다했다. 유학의 권위가 해체된 이후의 다원화된 사상계에서, 심학과 결합한 불학의 정주학 비판과 더불어 신문화운동 세대의 공격적인 반전통주의가 그것을 분명한 사실로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 난세의 극복은 경서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서 벗어나 주체의 문제로 옮겨간다. 중국의 근대 사상사에서 사회의 변혁은 무엇보다 주체의 거듭남이라는 문제로 사유되었다. 근대의 불학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난 주체, 그러니까 “‘무아로써 혁명 도덕을 건립하는 것은 불학입세가 가능한 방식이라는 명제를 제출했고, 옌푸와 후스를 비롯한 서학파 지식인들은 서구의 과학적 방법론과 더불어 전제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천부인권의 개인을 근대적 국민국가의 주체로 입론했다. 중국의 근대 사상사는 봉건주의적 타락과 서양열강의 침탈 야욕 앞에서 도도했던 계몽적 지식인들의 사상적인 고투로 치열했다. 그러나 중국의 근대화는 이런 고투를 뒤로하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인간학으로 귀결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로 마감되었다.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는 패권을 거머쥔 일본에 의해 유린되었다. 일본은 탈아입구에서 대동아공영권의 구상으로 전향해 서구적 근대의 초극으로 내달리며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비탄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이제 21세기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 G2로 부상한 중국은 대국굴기의 기세로 세계사의 중심으로 우뚝 올라섰다. 시진핑은 국가주석으로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통해 국가부강과 민족진흥, 인민행복을 실현하는 이른바 중국몽(中國夢)을 중화민족의 미래비전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중국 인민의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목표가 국가의 부강과 민족의 진흥이라는 자칫 도발적인 전략과 함께 거론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와 민족의 부강과 진흥이라는, 낡았지만 여전히 위험한 그 발상은, 그것이 다만 선동적인 수사가 아닌 한 주변의 국가들에게는 불안과 의혹의 시선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경험했고, 그 이후 열전과 냉전의 교차 속에서 분단체제로 고착된 한국은 삼대세습의 전제정치와 호전적인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불안을 조장하는 북한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대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저 중국몽의 정체를 고뇌하는 일은 단순한 지적 사역 이상의 긴요한 과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종민(경성대학교 중국학 교수)의 근작 <<흩어진 모래>>(산지니, 2013)는 그 긴요한 과업의 중요한 사례로 거론될 만한 저작이라 하겠다.

 

2

 

현대 중국인의 고뇌와 꿈을 부제로 하고 있는 이 책은, ‘중국몽이 지향해야 할 옳은 방향을 모색하는 한 중국학 연구자의 고뇌어린 작업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에게 중국몽의 실현이란 타국들 위에 군림하는 패권국가로의 도약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 덕성을 지닌 인민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나가는 보편적 복지사회이다. 중국의 경제성장 모델이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성숙한 공공의식을 갖춘 인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사회분배와 공동체사회를 실현하는 보편적 복지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 보편적 복지의 실현을 위해서는 적정 수준의 생산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이와 더불어 인민들이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의 역할이 우선되어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보편적 복지사회의 구축을 통한 중국몽의 실현을 위해서, 사회통합의 정치를 실행할 인민들의 주체성에 대해 천착한다.

책의 표제이기도 한 흩어진 모래(散砂)’는 저자가 중국 특유의 민족성 내지 국민성을 탐구하는 사유의 밑절미다. 원래 흩어진 모래는 공동체 의식을 결여한 채 단결하지 못하는 중국인들의 결함을 야유하는 서양인들의 표현에서 유래했다. 순원은 <<삼민주의>>에서 그것을 전유해 중국인들의 자유개념을 비판적으로 논술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서양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중국인들 각자는 서로 자유롭지만, 하나의 단체를 구성해 그 안에서 더불어 함께하는 자유의 의식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흩어진 모래는 공공의식이 부재한 중국인들의 국민적 품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저자는 이 비하와 멸시의 표현을 역전시켜, 그 의미를 긍정적인 것으로 다시 정의하려고 한다. 한 권의 시집(<<눈사람의 품>>, 오늘의문학사, 2006)을 갖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수행할 그 작업의 대강을 자작시에 담아 머리말에 수록했다. “나는 한 알 한 알 작지만 단단하고/ 우리들이 모이면/ 흩어진 듯 넉넉합니다”(13) 흩어진 것이 넉넉할 수 있는 역설은 모이면이라는 연합(association)의 단서를 통해서만 비약할 수 있는 경지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작지만 단단한 모래알 하나하나의 품성 안에 이미 그 연합의 계기가 잠재해 있기에 가능한 경지다.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중국인을 향한 저자의 이런 선량한 믿음은, 이제 근현대사상사의 눈 밝은 탐색에 담겨 중국몽에 이르는 구체적 실상을 드러낼 것이다.

이 책은 그 자체로 한 권의 근현대사상사 저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전부 11편의 독립된 아티클을 묶었음에도, 책의 전체는 통시적 흐름에 의한 순차적인 구성과 더불어 연속적이고 일관된 문제의식에 따라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 책은 량치차오에서부터 왕후이에 이르기까지 중국 근현대의 사상적 자원에서 이른바 주체성의 문제를 탐색한다. 특히 국민성 담론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것의 부상하고 소멸하는 부침의 역사적 맥락을 알뜰하게 드러내 보인다. “본래 중국 국민성 담론은 외국인 선교사인 아더 스미스에 의해 제기되어 중국 지식인들이 이를 자각의 근거로 삼은 것이고, 또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개혁이 실패한 후 그 원인을 낙후한 국민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218). 다시 말해 중국인의 국민성에 대한 사상사의 비판적 논구들은, 사회변혁의 동력을 주체성의 재건을 통해 얻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더 스미스와 같은 서양인을 비롯해 일본에서의 중국인론은 물론, 변법유신파의 그것에서부터 신문화운동 세대를 거쳐 1980년대의 신계몽주의 지식인들의 논의에 이르기까지, 국민성 담론은 사상의 역사에서 단속적인 형태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물론 저자는 사회의 변혁이 국민성 개조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생존환경의 변혁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142)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첨언해 두었다. 변혁은 주체의 자각만으로 완수되지 않는다. 사회구조의 모순을 자각한 주체의 투쟁 역량과 함께,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의 성숙 또한 변혁의 중요한 기반이다. 달리 말하자면, 주체의 역량은 구조 속에서 발생하고 구조를 통해 발현된다,

주권의 지배에 저항하는 피지배 주체의 역량에 대한 논의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진보사상의 주요 의제였다. 예컨대 은폐된 자본주의의 착취구조에 대한 <<자본>>의 치밀한 폭로와, 그 착취구조의 간교함에 대한 주체의 인식을 방해하는 오류인식(false-understanding)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이른바 사회구조의 분석이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의 유적 존재(The spcies being)의 개념이 환기하는 공동체의 결사에 대한 정치적 의욕과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공산당 선언>>의 선명한 구호에는 혁명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신뢰가 담여 있다. 특히 주체의 혁명에 대한 전략과 전술의 방침에 대해서는, 주지하다시피 레닌의 전위적 발상이 한때 맹위를 떨쳤다. 그런데 객관적인 구조의 분석이 논증적인 치밀함을 보인다면, 주체의 역량에 대한 논의들은 대체로 논증보다는 역사적 신념과 혁명적 열정의 정념으로 들떠 있다. 예컨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전환이라는 자본주의의 형질변화를 거시적인 차원에서 엄격하게 분석하고 있다면, 혁명의 새로운 주체 개념으로서 대중과 구분되는 환원 불가능한 특이성의 존재로 다중(multitude)’을 제시하고 있는 <<다중>>은 시적인 문장과 미래에 대한 낙관의 파토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국민성 담론을 비롯한 주체성의 통찰이 내포하고 있는 어떤 내밀한 주관적 성격을 예시한다. 다시 말해 주체에 대한 논의는 합리성의 차원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공백을 남긴다. 그러므로 주체성의 탐구는 정합적인 이론의 과제가 아니라 성찰적인 사상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책은 1중국인은 무엇이 문제인가2중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가 주로 중국인의 국민성을 논한 주체성의 사상적 탐색이라고 한다면, 2부는 대체로 중국의 사회구조적 실상을 진단하고 분석한 논증적인 성격의 글들이다. 이 책의 이런 구도는, 중국몽을 중화민족주의를 넘어 인류애의 실천에 가 닿는 미래의 전망으로 정립하려는 저자의 사유를 반영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식의 실천으로 공공성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의 구성은 물론, 개혁개방 이후 저임금 산업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이룩한 고도성장의 비루한 구조를 극복함으로써 중국몽의 이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몽은 주체와 구조의 비유기적인 변증법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잠재적인 미래의 희망이다.

 

3

 

이제는 좀 더 본격적으로 본문의 내용들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먼저 흩어진 모래라는 개념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서양인에 의한 중국인의 국민성 담론을 들여다본다. 루쉰은 서양인들의 중국 담론에 내재하는 서구 중심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아더 스미스의 <<중국인의 성격>>을 번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미국인 선교사 아더 스미스가 20여년의 중국 체류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책에는, 서양의 근대를 보편으로 인식하는 편파적인 시각이 관류하고 있다. 그럼에도 루쉰은 이 책의 무엇에서 유언으로 남길 만큼 긴급한 번역의 가치를 발견한 것일까. “선구자의 적막과 대중의 우매는 루쉰이 평생에 걸쳐 천착한 주제였으며, “루쉰이 다른 계몽운동가들과 진정으로 구별되는 지점은 국민성 발굴과 인성 탐색이었다.” 그런 그가 이 책에 주목한 것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비평만을 가지고 해결할 수 없는, 타인의 비하를 받을 만한 중국인 내부의 결함에 대해 성찰”(27)할 필요성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인 우월감으로 중국인을 비하하는 아더 스미스의 노골적인 서술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적 텍스트에는 이런 비하의 시선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 루쉰은 바로 이 양면적 시각의 엇갈림 속에서 중국의 자기 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 해석학의 통로를 발견했던 것이다. 아더 스미스가 기술한 중국인론의 요지는 대체로 열악한 자연경제하에서 형성된 생존능력과 이기적이고 폐쇄된 성격, 고대문명국의 습속에 의해 형성된 보수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성격 그리고 국가의식의 부재와 관련된 공공정신 결핍”(51)으로 정리할 수 있다. 소농경제적 생산조건에서 유래하는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기질, 전근대적 전제정치 아래에서의 체제순응적인 자족과 낙관의 정서가 공공성의 결핍을 가져왔고, 그것이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을 어렵게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농촌과 농민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적 견해를 가져와, 아더 스미스의 이런 분석이 세계사의 일반적 현상을 중국인의 특수한 자질로 한정해 자의적으로 서술한 것임을 꼬집는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아더 스미스의 분석이 갖는 논리적 정합성이 아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더 스미스라는 타자의 시각을 전유해 중국의 자기 분석을 수행하는 루쉰의 해석학적 태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점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루쉰은 아더 스미스라는 타자의 거울을 통해 중국인의 결함을 비춰보며, 그것을 관찰대상이나 선교의 대상이 아닌 국민성 비판의 차원에서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있었던 것이다.”(52)

루쉰은 소위 환등기 사건을 통한 회심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굴욕을 통해 자각하는 비범한 정신의 인간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의 그런 풍모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문학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자각인 듯하다. 종교인을 가능케 하는 것이 죄의 자각인 것처럼 어떤 자각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 자각으로 종교인이 신을 보는 것처럼 그는 말을 마음대로 한다. 말에 지배되지 않고, 반대로 말을 지배하는 위치에 선다. 이른바 그 자신의 신을 창조한다.” 루쉰은 타자의 굴욕적 시선에 자기를 맡김으로써 성찰의 주체도 거듭나는 것에 대해 사유했다. 쩡자(掙扎)란 바로 그 굴욕을 견디며 버팅겨 내는 것이다. 쩡자로 인해 자아는 드디어 반성적인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루쉰은 아더 스미스라는 타자의 거울에 비췬 굴욕적인 중국인의 상을 통해 자기 분석으로서의 중국인 비판을 수행했다. 그러니까 대중의 우매에 대한 루쉰의 장구한 비판이란 동족에 대한 감정적 혐오의 발로가 아니라, 굴욕 속에서 거듭나기 위한 고통스런 회심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자의 불편한 시선을 회피하는 주체는 새로이 거듭날 수가 없다. 사상사의 악전고투란 이처럼 타자의 거울에 비친 자기의 불편한 모습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사상사의 악전고투는 중단 없이 이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거울 속의 미혹과 유혹의 소환을 부단히 의식하고 각성했다. 하지만 여전히 거울 속에 있는 듯하다. 폭력을 거부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아직 선명한 핏자국으로 이미 거무튀튀해져 버린 옛 흔적을 용서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입장과 선택의 차이, 대립의 해소와 화해는 또 다른 거울성으로의 심취를 뜻할 뿐이다.” 거울 앞의 어떤 각성 속에서 용서와 화해를 거절하는 다이진화의 이 결기는, 자기에게로 육박해 오는 타자성을 감당해내겠노라는 쩡자의 다짐이다.

아더 스미스에 의해 제기된 중국의 국민성 담론은 20세기 초의 일본에 전해져 그곳에 체류하던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거나 유학하던 만청 지식인들은 <<중국인의 성격>>을 일본어 번역본을 통해 읽으며 중국 국민성에 관해 사유할 수 있는 타자의 거울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그 거울을 통해 중국 국민성을 비춰보던 이가 바로 량치차오였다.”(52) 서구열강으로부터의 국권침탈과 청일전쟁의 굴욕적 패배를 경험한 만청 지식인들은 근대적 국민국가의 건설을 통한 변법자강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수구파의 거센 반발로 그런 모색은 좌절되었고, 변법자강파의 캉유웨이를 비롯해 그 충실한 제자였던 량치차오는 망명객의 신세로 전락했다. 굴욕과 고난을 자각의 계기로 역전시킴으로써 경험은 사상으로 올라선다. 량치차오는 그 고단한 망명을 통해 일본이라는 거울앞에서 중국을 응시하게 된다. 그 거울에 굴절된 중국의 현재를 바라보면서 그는 다시 조국의 미래를 내다본다. 망명기의 두 저작은 그렇게 망명의 고뇌를 미래의 모색으로 역전시킨 사상의 산물이다. “하나는 입헌국가가 된 중국의 미래를 상상하는 정치소설 <<신중국미래기>>이고, 다른 하나는 입헌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신민(新民)이 구비해야 할 자격을 논한 <<신민설>>이다.”(55)

입헌국가의 구상이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당시 봉건적인 중국 현실과의 간극을 상상의 비약을 통해 넘어서기 위한 서술전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구의 이야기임에도 그 구상은 대단히 치밀하다. 량치차오는 신중국 건설의 과정을 여섯 시기의 발전단계로 체계화하면서 지방자치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로서의 입헌군주국을 상상한다. 이처럼 <<신중국미래기>>가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구상한 일종의 사회 구조론이라면, <<신민설>>은 그 이상적 국가의 바람직한 주체로서 신민을 제시한다. 주권재민의 나라에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그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라는 생각은,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의 신민을 사유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지금까지 중국인들은 국가를 사유화하는 전제정치로 인해, 천하개념에 가로막혀 근대적인 국가개념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배만(排滿)의 배타주의를 넘어 종족의 차별 없는 신민으로서의 국민을 배양해 제국주의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를 왕조의 소유물로 오해하는 노예근성은 자치능력과 독립심의 결여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흥망과 개혁의 성패 여부는 공덕을 갖춘 신민을 육성하는 것으로 판가름 나게 된다. 이때 공덕이란 신민이 지녀야 할 가장 핵심적인 덕목으로서 개인 수양의 측면에 치중하는 사덕과는 달리 사람들이 서로 합심해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종의 사회윤리다. 그러니까 저자는 량치차오의 공덕 개념을 국민성 담론의 차원으로 가져와, 그것을 공동체정신 내지는 공공의식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다.

공덕의 주체로서 신민은 법률로 명시된 그들의 권리와 의무에 입각해,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공공성에 근거를 둔 자유를 구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전제정치의 산물인 사인과 부민을 민주적인 권리와 책임의식을 지닌 공인과 국민으로 양성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윤리로서의 공덕을 배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민의 배양을 통한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개혁 구상에서, 량치차오는 특별히 지식인의 계몽적 역할에 주목한다. 중국인의 고질적 결함으로 지적되어온 공공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근대국가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국민성을 개조할 계몽 주체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개입한다. “하지만 이것은 장기간 중국인의 결함을 형성시켜온 정치경제적 조건을 변혁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러한 삶의 조건에 대한 변혁 없이 지식인의 계몽운동만을 통해 단기간에 새로운 국민성을 배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90) 이것은 역시 사회 변혁에 있어 주체와 구조의 비유기적 변증법과 관련이 있는 문제다. 이 책의 저자는 신민(주체)의 양성을 통한 입헌국가의 수립이라는 량치차오의 정치적 개혁구상이 경제적 토대(구조)의 개혁과 병진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식인의 계몽과제는 정치경제적 조건의 점진적 개선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토대로서의 경제적 성장(생산력의 발전)의 바탕 위에서 상부구조로서의 정치적 성숙(민주주의의 확립)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그 실행 주체로서의 인민(프롤레타리아)의 역능이 결정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를 읽을 수 있다. 덧붙여 인민을 선도할 전위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강조 역시 마찬가지다. 뒤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중국 근현대사상사의 지층을 굴착하는 저자의 입론이 어떤 기반 위에 있는가를 엿보게 된다. 다시 말해, 생산력의 사회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적 민주주의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보편적 사회복지에 합의하는 국민성의 문제를 계몽(교육)의 차원에서 강조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량치차오의 신민설 이후 오랜 동안 국민성 담론은 그 자취를 감췄다가, 그것이 다시 출현하게 된 것은 신해혁명 이후 수구적 퇴행으로 인해 중국 정치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한 신문화운동 시기였다. 그러나 신문화운동 세대가 담론의 출발점으로 착안한 것은 만청 국민성 담론의 신민이 아니라 외부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서 개인의 개념이었다.”(92) 양무운동, 무술변법운동, 신해혁명의 잇따른 좌절을 경험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은 기존의 제도개혁과 부국강병책과는 다른 근본적인 변혁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구적 개인주의의 영향 아래서 새로운 국민성 개조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이른바 5·4 이후의 신문화운동 세대였다. 그 중에서도 천두슈는 기존 변법파의 정치혁명이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에 매몰된 당파운동이었음을 비판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입헌정치를 제안했다. 천두슈의 개인은 전통의 예속에서 자유롭고,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권위적인 결사에 선행하며,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다. “신문화운동 세대의 담론 속에는 개인, 인간, 자아, 개성, 내심요구, 주관, 정감과 같은 유사계열의 말들이 충만한데, 이것은 세계의 중심이자 진리의 담지체, 실천의 주체로서 개인의 탄생을 선언”(99)하는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천두슈가 새로운 시대의 주체로 제시한 신청년은 자주, 진보, 실리, 과학의 정신으로 무장해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낡은 전통과 맞서 싸워야할 시대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서구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신문화운동 세대의 개인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일종의 이상적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난세의 현실에서 그 개인은, 변혁의 주체로 자리 잡기엔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저자는 루쉰의 <광인일기>를 신문화운동 세대의 그 좌절 위에서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는 일종의 알레고리로 독해한다. “광기는 사물의 은폐된 부분을 꿰뚫어보는 통찰의 눈이다.”(108) 광인은 그 광기의 통찰로 가족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식인예교의 전통을 해체하려고 한다. 그러나 광인이 시도했던 계몽의 기획은 소박한 도덕론으로 봉합되어 도피적인 내성화로 귀결되었고, 광인은 광기를 상실하고 체제 순응적인 관리로 주저앉는다. “그 누구도 식인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 인식과 식인하지 않은 진정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상 사이에서 빚어지는 모순과 혼란”(117)은 그 계몽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제시되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 이상으로 내면으로의 도피와 침잠이른바 계몽의 내성화이야말로 좌절의 진짜 이유다. 그것이 중국 대중과 계몽주체로서 신문화운동 세대 사이의 소통의 위기”(124)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쉰은 그 좌절과 실패의 자리에 그냥 주저앉지 않고 새로운 전투의 길을 탐색한다.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노라는 가출한 후 어떻게 되었나>의 어떤 구절에서 적극적으로 읽어낸다. “일시적으로 짧게 놀라게 하는 희생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묵묵(深沈的)하고 끈기 있는(韌性的) 전투를 하는 쪽이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125쪽에서 재인용) 이 책의 저자는 내성화된 계몽에서 묵묵하고 끈기 있는 전투로의 그 창조적 방향전환에서 루쉰의 현실적 고뇌를 보고 있는 것이다. 루쉰의 그 고뇌를 일러 계몽의 아포리아라고 한다면 어떨까.

국민성 비판을 영구혁명의 과제로 인식했던 루쉰에게 계몽의 아포리아는 더 철저한 사상적 고투를 요구한다. 그는 먼저 만청 지식인들의 국민성 담론을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민을 이용한 사이비 담론으로 격하하고, 주체적인 성찰 없이 서구문명의 표피를 숭상하는 신문화운동 세대의 경박함을 비판했다. 그리고 중국 국민성의 병근을 구경꾼 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집약한다. 저자는 여기서 다시 구경꾼 의식의 극복이 국민성 개조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생존환경의 변혁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142)을 지적한다.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가능한 존재이므로, 주체와 타자가 더불어 사는 그 생존환경은 주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따라서 경제적 토대의 다른 표현인 생존환경은 생산력의 진보와 함께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해야만 한다. 생산력이 일정 정도의 규모로 성숙되면, 이제는 생산력의 사회화를 통해 생산의 과잉을 통제하고 자기의 노동을 타인에게 착취당하지 않는 자유의 나라’(마르크스)로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 이행은 물론 사람의 몫이다. 역사를 추진하는 것은 역시 구조 속의 주체인 것이다. “여기서 루쉰은 흩어진 모래의 비유를 전복시켜, 통치자들이 바로 사리사욕으로 인해 단결할 줄 모르는 모래이며 민중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알기만 하면 단결할 수 있는 존재로 반전시키고 있다.”(150) 이처럼 이 책의 저자가 국민성에 대한 루쉰의 인식론적 전환에 주목하는 것은, 이제 인민을 혁명의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공산국가로 귀결된 중국의 현대사로 논의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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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운동의 민중 대연합을 경험한 이후, 변혁주체로서의 인민에 대한 지식계의 시각 전환 속에서 청년 마오쩌둥은 1927년의 후난농민운동을 시찰하고 나서 농민의 자발적 혁명 역량을 발견한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과 항일투쟁을 거쳐 대장정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농민의 동원이 혁명의 성공에 중요한 전략적 요인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마오쩌둥의 꿈은 흩어진 모래를 민족주의로 통합하여 거대한 사막으로 만들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인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 국가의 형태를 띠었지만, 정작 인민공화국의 주체로서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시켜나갈 수 있는 인민은 결핍되어 있었다.”(176)

중국 근대사상사의 여러 정치적 구상들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중국의 국가체제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 체제로 성립되었다. 이제 건국 이후의 중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국가적 보호 장치를 확립한 조건 위에서 신중국이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신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이행하여 궁극적으로 계급이 소멸된 대동 사회를 실현”(178)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사례를 참조할 때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강제적인 사회화 추진으로 생산력은 급격하게 추락했고, 레닌은 어쩔 수 없이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을 잠시 유보하고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이른바 신경제정책을(NEF)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전례를 알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과도기적 단계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부 수용하고 소자산계급까지를 아우르는 계급 협력적 노선을 인민민주주의 독재라는 개념으로 제기했다. 문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으로 일정 정도의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적 요소를 허용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역작용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정 수준의 생산력의 성숙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방식의 생산력 발전이 축적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결국은 과잉 생산으로 공황을 불러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산권 국가들은 대체로 생산력의 증강을 위해 중공업정책으로 생산재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소비재의 궁핍을 초래한다. 결과적으로 인위적인 생산력의 증강은 이처럼 경제적 파행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개체농민 소유제가 불러온 소유제의 모호성, 즉 토지소유자이면서 노동자인 농민의 부르주아적 요소가 가져온 폐해를 확인함으로써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급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개체농민 소유제를 농업합작화로 전환함으로써 집단소유제를 확립하는 수순으로 전개되었다. 생산력의 성숙 없이 갑작스럽게 생산수단을 사회화할 때, 부르주아적 폐해를 능가하는 경제적 피해가 속출할 수 있다. 실제로 레닌 사후의 소련에서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을 폐기하고, 강력한 계획경제와 농업의 강제집단화를 밀어붙임으로써 결과적으로 경제를 황폐화시켰고 인민들의 삶을 빈궁으로 내몰았다. 저자는 그런 실상을 농촌의 합작화 사업을 다룬 저우리보의 <<산향거변>>을 통해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농촌의 강제적 합작화와 마찬가지로 도시에서는 단위라는 조직형태를 통해 국가의 노동력 통제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급진적 집단화의 과정으로 인해 공공정신을 지닌 사회적 인간보다는 집단의 보호 속에 자족하는 인간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200) 사회적 구조의 모순은 이처럼 주체의 구성에 불온한 결과를 가져온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좌경적 오류의 파고 속에서 중국의 인민이 겪은 고난의 체험이 그들의 주체성에 끼친 폐해에 대해서는, 개혁개방 이후의 계몽주의 지식인들로부터 비판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들은 문혁을 비롯한 사회주의 자체를 집단주의와 봉건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리저허우는 중국의 지난 역사에서 서구적 개인주의에 입각해 봉건잔재의 극복을 추진하는 계몽이 반제적 민족해방운동이나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계급해방운동과 같은 구망에 압도되어왔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그는 국가, 인민, 계급과 같은 거대한 관념에 구속되어온 개인의 해방이 급선무라고 보았던 것이다. 진관타오 역시 서구적 근대에 미달하는 중국 사회주의의 봉건적 체질을 비판했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집단주의를 농민들의 봉건적 소농의식과 결부시킴으로써 사회주의의 오류를 중국의 국민성과 연계했다. 대륙에 출판된 보양의 <<추악한 중국인>>이 그 길을 텄고, 류자이푸의 <<전통과 중국인>>에서 중국의 국민성 문제를 학술적으로 보다 심화시켰다. 그러나 “80년대 국민성 담론은 현실 속의 중국인이 처한 구체적인 생존 조건 및 중국사회가 급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존재로 성장·전화할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하여 80년대 말 이후 점차 담론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220) 저자는 80년대의 국민성 담론을 포함해 20세기 중국의 근대화 담론이, 국민성의 개조라는 문화적 차원의 개혁에 몰두함으로써, 경제의 문제와 같은 사회구조의 변혁을 등한시 결과로 새로운 주체 형성이나 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하의 논의를 중국의 현실 경제를 비판적으로 논구하는데 할애하고, 그 논의의 기반 위에서 중국몽의 실현을 위한 제언을 제공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제발전을 추진해온 결과, 특혜와 비리는 물론 지역별·계층간의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공동체의식의 침식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이 사회적 연대를 방해하고 조화사회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저자는 위화의 소설 <<형제>>를 검토함으로써, 개혁개방 이후의 이 같은 문제들이 소설에서 어떻게 묘파되고 있는지를 비판적인 관점으로 분석해 보여준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가 야기하는 삶의 불안정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회보장체제의 수립이 긴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저자는 광둥이나 충칭과 같은 지역의 발전모델을 넘어, 중국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추진해야 할 목표로서 중국식 사회주의 복지사회의 수립을 제안한다. 이것은 미비한 분배시스템의 혁신을 통해 자본의 민주적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장전략의 극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망국의 위기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국가와 국민의 창안이라는 중국 사상사의 고투를 탐색해온 저자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그 기획을 이제는 21세기 중국몽의 화두 속에서 고뇌한다. 그 고뇌는 왕후이의 사유에 대한 비판을 매개로 드디어 저자의 중국몽에 대한 구상을 입안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왕후이에게 1990년대는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현사회체제의 모순을 배태한 근원지로 지목된다. 왕후이의 비판이론은 90년대 중국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성장이 가져온 갖가지 비리와 모순을 비판하면서,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 사회주의의 경험에서 그 해악들의 해법을 모색해 왔다. 그런데 그는 언젠가부터 “90년대에 대한 기존의 이해방식과 상이해 보이는 평가와 아울러 2008년 이후를 ‘90년대의 종언이라고 명명하는 모종의 시각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278) 왕후이는 사회주의 시기의 경험과 유산 그리고 국가의 능동적 역할이 중국 굴기의 성공요인이라고 하면서, 이른바 반현대성의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의 요지는 마오쩌둥의 사회주의를 부강한 현대 민족국가 건립이라는 현대성의 목표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방식인 사회주의 소유제를 통해 이루어 나가려한 운동”(282)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입장에 반대하면서, 마오 시기의 사회주의가 갖는 불미함의 사례를 열거한다. 그러니까 중국의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가 통제를 통해 부강한 민족국가 건설을 추구한 특수한 발전방식의 하나”(285-286)일 뿐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굴기는 오히려 사회주의의 유산이 아니라 덩샤오핑의 탈사회주의적 성장 방식을 통해 구현된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마오가 구상했던 사회주의의 기획은 실제로 그것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왕후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사회주의의 기획과 현실화 사이의 간극에 대한 몰이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왕후이의 입장에 대해서도 저자는 국가가 자본의 효율적 관리능력은 탁월하게 발휘하지만 경제성장과 공정한 분배능력이 취약하다는 점”(290)을 들어 반대의견을 제시한다. 저자는 왕후이에 대한 이런 반대와 비판을 근거로, 보편적 복지사회에 이르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성숙이라는 기반 위에서 공공의식에 눈뜬 인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인민민주주의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정치적 구상으로서의 기획을 실현하는 정치화의 과정에 대한 통합적 사유가 중국몽을 한갓 미몽이 아닌 현실로 실현하는 바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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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난 세기는 난세를 극복하고 굴기를 이룩하여 중국몽에 이르는 힘겨운 도약의 과정이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 과정을 중국 사상사의 고투에서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사상사의 고투는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으나, 도전과 기투는 멈추지 않고 이어져 왔다. 이 책의 저자는 국가와 국민의 바람직한 모델을 모색해온 그 위대한 실패의 과정을 뒤따르다가 지금 중국이 당면한 중국몽의 전망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그리고 중국의 꿈이 다만 그들만의 국가, 민족,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꿈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국의 도전과 실험을 시기하는 마음이나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실험은 우리들의 미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상사의 거시적인 안목 속에서 중국의 미래를 예감한다. 그 예감 속에서 우리의 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꿈을 당장에 실현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실용적인 공구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에서 부족한 것을 지적하기보다는 이 책 이후의 공부 속에서 저자가 고안해낼 실천의 방안들에 기대를 걸고 싶다.

 

 

 

 

 

참고문헌

 

이종민, <<흩어진 모래>>, 산지니, 2013

다이진화, 주재희·김순진·임대근·박정원 옮김, <<거울 속에 있는 듯>>, 그린비, 2009,

다케우치 요시미, 서광덕 옮김, <<루쉰>>, 문학과지성사, 2003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일본의 사상>>, 한길사, 1998

천샤오밍·단스롄·장융이, 김영진 옮김, <<근대 중국사상사 약론>>, 그린비, 2008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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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우길 수밖에 없게 된 데에는, 책 읽는 것이 그렇게 계몽의 대상이 될 만큼 비범한 일처럼 되었기 때문이리라. 국민이 근대적 지식을 다함께 나누어 갖는 무리라고 할 때, 독서국민의 탄생 이래로 국어의 습득과 함께 국어로 된 출판물의 독해는 근대화의 중한 과제여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학교는 독서 인구를 창출하는 근대화의 유력한 기구였다. 그러나 식자층의 확대가 그대로 독서 인구의 양적 확대로 이어질 순 없었고, ‘을 읽는 독서는 단순한 동사적 행위를 넘어 근대국가의 장구한 기획 안에서 중대한 계몽의 대상으로 재편되었다.

 

물론 독서를 근대적 기획의 전부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오래 전부터 글을 읽는 것은 식자층이라 불렸던 엘리트들의 가장 몰두한 일이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최한기(崔漢綺, 1803~1879)와 같은 사람은,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한역서학서와 태서신서에 이르기까지 가산을 탕진하면서 두루 섭렵해 읽었던 열렬한 독서인이었다. 그가 체계화한 기학(氣學)의 어법을 빌려 말한다면, 글을 읽는 것은 글의 문기(文氣)와 그 글을 쓴 사람의 신기(神氣)가 글을 읽는 사람의 영기(靈氣)를 활동운화(活動運化)케 하는 역동적인 기의 교섭운동이다. 홀로 책을 읽는 고매한 독서의 과정은 조용한 인내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한 즐김의 시간이며, 책 읽는 사람은 바로 그 시간 속에서 활동운화함으로써 교양과 함께 성숙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적 의미의 독서론이 책읽기를 일종의 자위행위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할 면이 있다면, 그것은 글읽기에서 일어나는 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하여 하나의 구성적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김우창, 홀로 책 읽는 사람, <<책, 어떻게 읽을 것인가>>, 412) 그러나 김우창은 그 구성적 가능성에서 독서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 있는데, 책을 읽는 가상적인 구성의 체험이야말로 현실적인 실천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서의 바로 그 구성력은 실재성(reality)에 이르는 잠재성(virtuallity)이다. 최한기의 천지운화(天地運化)가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노동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는 타인(자본가)을 위한 노동을 멈추고 자기본위의 노동을 위해 책을 읽고 토론하는 혁명적인 준비태세의 시간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을 핑계 삼아 책을 읽히려는 범국민적 독서운동이란, 그 외피적인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에 연루된 세속적 이해관계로 민망할 때가 있다. 때로는 반정치적으로까지 여겨지는 자유주의적 교양으로서의 독서에 매한 맹목적인 권장이 거슬리고, 그것이 지배계급의 교육 이데올로기와 공모하고 있다는 낌새와 함께 관변적인 연례행사로 동원되고 있다는 데에서는 어떤 공분을 느끼게도 된다. 물론 그 운동의 맥락 안에는 출판산업의 진흥이라는 현실적인 고려도 포함되어 있어 독서권장이란 대단히 복잡한 정치문화적 의미의 난맥상을 이룬다.


 

97일과 8일 이틀 동안 번화한 남포동 거리 일대에선 ‘2013 가을 독서문화 축제가 열렸다. 여하한 사정으로 나는 이틀 동안 두 개의 행사에 직접 참여했다. 첫날의 개회식 행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남포동 거리에서, 관련된 행정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화려한 초대 공연과 함께 시작되었다. 바로 그 행사의 하이라이트가 초대 작가인 김진명 소설가와의 대화였는데, 내가 그 대화의 상대자이자 진행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의 소설들에서 역사적 팩트는 소설적 공상으로 쉽게 왜곡되고 국제관계학의 복잡한 맥락들은 모종의 음모론으로 극히 단순화된다. 극우 민족주의적 발상을 일종의 음모론으로 풀어내는데 능한 김진명 소설가를 초대 작가로 선정한 주최측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그것은 큰 고뇌를 필요로 할 것도 없이, 대중적 인지도를 고려한 통속적인 섭외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주최측에서는 행사 전에 내가 보낸 질문지가 대중적인 흥미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염려의 뜻을 내비췄다. 아마도 나의 모난 질문들로 대화가 가열되면 행사의 흥행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저 예전에 경험했던 독서토론회 정도로 예상했던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화려한 무대 분위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결과적으로 흥행에는 성공한 무대였으나 독서의 진정한 의미를 추궁하는 성실한 대화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기보다는 그 취향의 세속적 의미들을 토론하는 시간이 되었어야 했지만, 나는 역시 그런 행사의 창조적인 난동꾼이 되기엔 아직 소심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첫 날에 비할 때 이튿날의 행사는 참신했다. 오랫동안 부산의 소설 지리학을 탐구했던 조갑상 소설가(경성대 국문학과 교수)부산의 이야기를 걷다는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자리도 전날처럼 야외무대가 아니라 청중들로 꽉 찬 소담한 실내였고, 오랫동안 곁에서 알고 지내온 작가라 편안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정담에 가까운 대화들을 실속 있게 할 수 있었다. 작가는 부산의 동구 수정동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며 20여년을 살았다. 등단작인 <혼자 웃기>와 중편 <은경동 86번지>에는 그 살가운 장소체험의 사랑(토포필리아)이 오롯이 담겨있다. 단편 <누군들 잊히지 못하는 곳이 없으랴>는 그 제목에서부터 잊히지 못하는 곳이라는 장소의 애환이 느껴진다. 특히 1930년대의 실화를 재구성한 이 소설은 부산의 역사 지리를 고증하는 가운데 초량의 남선창고가 철거된 현재의 장소상실(placelessness)에 대한 애틋함을 담았다. 장소의 삶과 소설 쓰기를 주제로, 작가가 겪었던 생생한 체험과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었던 귀중한 대화의 시간이었다. 지역에 밀착된 주제, 저자와 독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화를 매개하는 평론가, 이런 식의 허심탄회한 문학 행사라면 더 자주 열려도 좋을 것 같다.

 

그날 오후에는 보수동의 어떤 헌책방에서 한 일간지의 문학담당 기자로 활동했던 분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행사가 있었다. 나는 잠시 참석을 했다가 번잡한 자리가 힘들어 이내 자리를 떴다. 언론인의 파워가 새삼 느껴질 만큼 셀러브리티들로 가득 찬 자리였다. 이번처럼 연례적인 독서행사에 이틀에 걸쳐 정식으로 참석하긴 처음이다. 사건을 겪어내는 경험 속에서 사고할 수 있는 그런 기회였고, 책을 읽는 행위의 의미와 독서권장의 사회적 운동이 갖는 정치성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위한 유능한 도구로 전유하기 위해선, 독서의 교양적 의미를 넘어 그 정치성에 대한 치열한 사유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느 이른 가을 날, 나는 또 그렇게 어떤 만남들 속에서 결기의 다짐과도 같은 생각에 빠져든다.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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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김종신 2013.10.05 0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위한 유능한 도구로 전유하기 위해선, 독서의 교양적 의미를 넘어 그 정치성에 대한 치열한 사유가 우선되어야>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

 

 

세 번째 중국행이었지만 베이징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여행 전날에 있었던 학술대회에서 사회를 맡았다. 여느 때처럼 선후배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술자리를 하고 싶었지만, 다음 날의 여행을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접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에 활동한 이른바 전후 작가들 중에서도 장용학을 이중 언어적 관점에서 분석한 한 후배의 발표에 대해서는 토론할 거리가 많았다. 식민지기에 일본어 교육을 받고 해방 이후에 한글로 소설을 창작했던 이른바 전후 세대 작가들의 언어적 심층에 대한 해명은 문학사의 긴요한 과제다. 그러나 언어적 감각의 심층에 접근하는 일은 당시의 교육과 언론 매체들과 같은 언어의 물적 토대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이중 언어적 상황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정치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사전 조사를 요구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중 언어의 주체가 구성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정교한 서술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중 언어적 상황의 객관적 분석과 더불어 언어적 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이 동시적으로 요구되는 어려운 연구과제라 할 수 있다. 세계화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지금 새로운 이중언어적 상황과 다중언어적 주체들의 출현이 긴요한 연구의 과제라고 할 때, 그 거시적인 대상과는 달리 연구의 방법에 있어서는 극히 미세한 관점의 수립이 긴급하다. 어쨌든 부산에서 베이징으로 향하는 내 물리적 이동 자체가 이미 이중 언어적인 관계 속으로의 진입이었다. 모국어의 세계 바깥에서 내 주체성은 어떤 변이를 겪게 될 것인가. 여행이란 그렇게 우발적인 경험들에 스스로를 내 놓는 일이므로, 결과를 알 수 없는 시간들 앞에서 우려와 기대로 들뜨는 것은 모든 여행자의 공통된 심사이리라.

 

이번 베이징행도 역시 지난 해 상하이를 함께 다녀온 K와의 동행이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명분은 제20회 베이징 국제 도서전의 참가였다. 그가 대표로 있는 출판사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나는 아시아 부문에 주력해온 이 출판사의 향후 진로에 대한 고뇌로부터 무심할 수 없다. 내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잡지 또한 아시아라는 시좌를 근간으로 지역적 사유를 심화해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국제 도서전의 참여는 나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유의미한 것이었다. 다만 개강을 목전에 두고 먼 출장을 떠난다는 것이 내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두 시간 남짓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기온은 선선했고 공기도 그 악명을 무색하게 할 만큼 무척 맑았다. 택시를 타고 도서전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역시 그 규모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만 했다. 그러나 명색이 국제 도서전임에도 암표 장수가 버젓이 활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행사의 규모와 조응하지 못하는 그 운영의 디테일이 아쉬웠다. 이런 도서전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넓은 행사장의 어디서부터 무엇을 체험해야 하는지를 도통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 나에게 K는 책은 읽어야 아는 것인데 전시된 것을 눈으로 대강 훑어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그 출품된 책의 목록과 표지 디자인 그리고 내부의 편집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흥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행사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눈앞에 보이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의 부스를 향해 흥분한 채로 달려가 카달로그를 챙겼다. K는 벌써부터 그렇게 카달로그를 모으다보면 나중엔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민망해졌지만 팜플렛과 자료들을 챙겨 가방에 넣고는 연신 카메라의 셔트를 눌러댔다.

 

 

이번 도서전의 주빈국은 이탈리아였는데 중세의 책 표지를 본뜬 것에서부터 최근의 신간까지 다양한 콜렉션이 전시되어 있었고, 한쪽에선 이탈리아 전통 요리를 소개하는 코너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2013년 볼로냐 어린이 도서전의 일러스트들을 소개하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중세 유럽을 뒤흔들었을 때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전쟁>>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 시대의 문헌이란 대체로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고 그 장정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종교에서 인간으로, 화려함에서 수수함으로 종이와 인쇄술의 발달이 문헌의 세속화를 불러왔을 때 유럽은 이미 역사의 한 분기점을 지나고 있었다. 어찌 보면 현대의 출판문화는 저 위대한 세속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책은 한 편으로 그 세속화를 심화시키는 가운데 다른 한 편으로는 소수의 고급화라는 양극단의 갈래로 나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자책의 부상이 전자의 유력한 증례라면 소량의 인문사회학 서적들이 고가로 출간되어 유통되는 것은 후자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세속화가 저질화가 아닌 것처럼 책의 소수화가 곧바로 고급화는 아니다. 어쩌면 지금 출판의 화두는 세속적인 것의 저질화를 우려하면서 소수적인 것의 고급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 하는 데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구텐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나라답다고 해야 하나, 유럽의 책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것은 독일의 부스에 전시된 것들이었다. 장정이 깔끔하고 책 한권 한권이 공들인 예술품처럼 여겨졌다. 페트 한트케와 마르틴 발저와 같은 익숙한 이름들도 눈에 띠었다. 개성 있는 표지들에 홀려 한참을 둘러보다 프랑스 부스로 발길을 돌렸다. 발자크의 <사라진느>를 주제로 1967-1969년까지 2년에 걸쳐 고등연구원에서 있었던 롤랑 바르트의 세미나를 정리한 책에 눈길이 갔다. 이 책은 번역서들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한국의 모 출판사에서 <<S/Z>>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기도 하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부스가 이처럼 문학과 인문사회 분야의 책들로 다양했다면 일본이나 한국의 부스는 좀 단조로웠다. 일본에서는 업계 1위의 고단샤를 비롯해 여러 부스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주로 실용서나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강한 저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참여한 출판사들은 대개 어린이책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기독교 서적을 전시하고 있는 홍성사는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도서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북한의 부스였다. 사람들이 거의 오가지 않는 구석말단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 부스는 초라함을 넘어 진정 비참했다. 구색을 맞추지 못하고 모아놓은 빈약한 전시 내용도 그렇지만, 책의 물성 자체는 마치 식민지기의 3류 인쇄물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조잡한 표지에 조악한 편집의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듯 독재자를 숭앙하는 거친 구호들이 물색모르고 새겨져 있었다. 고대의 어떤 왕이 저질렀다는 분서와 갱유나, 마찬가지로 책을 모아 불살랐다는 유럽의 한 독재자가 그랬던 것처럼 정신의 탄압은 언제나 책이라는 물리적 실체에 대한 폭력으로 표현되곤 했다. 북한의 부스에서 내가 본 것도 다름 아닌 바로 그 폭력의 잔해였던 것 같다.

 

 

주최국 중국은 다양한 카테고리와 엄청난 규모로 떠오르는 신흥 출판강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자랑하고 있는 듯 했다. 중국 전통의 서적문화를 엿보게 하는 전시에서부터 지역별, 대학별, 분야별로 전시된 출판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배치가 돋보였다. 그리고 현재 중국출판의 나아가고 있는 향방을 집약하고 있는 듯한 현대화, 대형화, 국제화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한쪽 자리에 크게 나붙어 있었다. 현대화나 국제화라는 상투적인 문구보다는 대형화라는 조금은 의외의 그 문구에서 출판을 산업의 차원에서 크게 확장하고 있는 중국의 어떤 진로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넓었기에 오래 걸어야 했고, 그래서 우리는 지치고 허기졌다. 쉬었다 걷기를 되풀이하다가 행사장 한편의 카페로 들어가 주린 배를 채웠다. 이번에도 나는 입맛에 맞지 않는 중국 음식 대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K는 내심 오랜만에 현지의 음식문화를 체험해보고 싶었겠지만, 그도 중국음식에 대한 나의 극렬한 거부반응을 알고 있는 터라 고맙게도 샌드위치에 콜라로 타협해 주었다.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문화의 체험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교섭과 교통의 실패를 의미한다. 양식을 보편적인 입맛으로 알고, 한국식을 가장 맛있는 것으로 익숙해진 이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음식취향이란 반드시 극복되어야할 내 문화의 아비투스가 아닐까.

 

심양에서 막 베이징에 도착한 이종민 교수가 우리를 데리러 행사장으로 와 주었다. 우리는 함께 예약해둔 숙소가 있는 우다커로 향했다. 우다커는 베이징대와 칭화대가 인접한 곳으로 왕징과 함께 한국 상인들의 진출이 가장 활발한 곳이라고 한다. 나지막한 호텔은 좀 낡았지만 있는 동안 큰 불편 없이 그런대로 지낼 만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우리는 호텔 앞에 있는 중국음식점으로 가려했지만 다행이도(?) 그곳이 공사중이라 맞은편에 있는 한국식당으로 갔다. 이날 저녁은 인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있는 김병철 교수와 함께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퇴근 시간대라 차가 밀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김 교수는 나보다 세 살이 위였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마치 오래 만나온 형처럼 친근한 분이었고 대화는 시종 유쾌했다. 사실 이번 출장의 또 한 가지 목적은 김 교수를 인터뷰어로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쩡꽁청 교수와의 대담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 인터뷰와 번역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전공인 중국의 사회복지 문제에 대해서 깊은 대화들이 오갔고, 앞으로 우리 잡지 및 출판사와 가능한 공동의 작업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첫날의 저녁은 언제나 그렇듯 어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많은 말들과 함께 과음하게 된다. 빠이주(白酒)를 세 병이나 마셨고 그것도 모자라 자리를 옮겨 양꼬치에 맥주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식당에서 라면에 소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대만 자오통대의 천꽝싱 교수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연대와 교류를 기록하는 자리에 이렇게 적었다. “지식, 감정, 믿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은 사실 어느 곳에서든 음주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천꽝싱, <화해의 장벽-2008 동아시아의 비판적 잡지 회의 후기>,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 애정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다음 날 나는 마지막 자리의 시간들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고 심한 숙취로 종일 쓰라린 속을 부여잡고 괴로워해야 했다.

 

 

숙소 앞 한국식당에서 내가 라면으로 쓰린 속을 달랠 때 K와 이 교수는 김치찌개와 순두부를 시켜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게다가 그들은 마치 물을 마시듯 칭다오 맥주를 끊임없이 마시는 것이었다. 물론 도수가 좀 낫기는 했지만 비워지는 그들의 술잔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속이 메스꺼웠다. 특히 이 교수의 주량과 체력은 가히 혀를 내두를 만큼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아마도 누구나 이 교수의 술 마시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애주가란 과연 저런 것이구나,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에게 반주와 본격적인 음주의 경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였고, 누가 말리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끝없이 술을 마시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 음주의 시간이 언제나 즐겁고 흥이 돋는 것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도 늘 학문과 현실의 현안들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을 치열하게 떠들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우리들의 그 명정(酩酊)의 시간들은 방탕하지 않은 호탕함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맨 정신의 나는 반주를 거나하게 걸친 이들과 함께 베이징의 명소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광장은 모든 인민에게 열린 장소지만 주변의 경비는 삼엄했고 곳곳에 공안들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3배라고 하는 광장의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삼엄한 경비와 마찬가지로 광장 한쪽의 대형전광판에서는 국가시책들이 점멸하고 있었고, 하늘 드높이 오성홍기가 위압적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하면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마오쩌둥의 초상, 그것은 이 교수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 좀 더 푸근하고 인자한 것으로 교체된 것이라고 했지만 일개 지도자의 사후 군림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마침 보수공사 중인지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초상화의 양 옆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만세세계 인민 대단결 만세라는 글귀가 보였다. 영상기록물로도 본 적이 있지만, 저 천안문의 발코니에서 마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천안문 사태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동구권의 몰락이 도미노처럼 이어지고 있던 그때 세계사적 격변의 기운은 여기 베이징에서도 움터 올랐고 마침내 대중봉기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봉기는 처참하게 진압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때의 사건들은 발설되어서는 안 되는 불온한 기억으로 봉인되어 있다. 광장과 봉인이라는 역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저 초상화 옆의 글귀들이란 그저 허허로운 구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안문을 지나면 자금성이 바로 이어진다.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붐비는 고궁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 왕푸징 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전혀 딴 세상이다. 거리엔 외국인 관광객들과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넒은 대로의 양 옆으로는 상점들이 즐비하고 쇼핑을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물건 고르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해결할 요량으로 야시장 분위가 나는 먹거리 골목으로 들어갔다. 전갈이 꼬치로 전시되어 있는가 하면, 각양각색의 음료와 군것질거리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다. 우리는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면요리와 만두를 사 먹었다. 물론 나는 그 음식들의 향과 비주얼에서 전혀 호감을 느낄 수가 없었고, 열대 과일을 갈아 만든 음료를 주문했는데 그것도 역시 한 모금 마시고는 K에게 넘겨버렸다. 안 그래도 속이 좋지 않았던 나는 그 음식들의 냄새 때문에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교수와 K는 두어 병이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여기서마저 맥주를 반주로 곁들여 마시고 있었다. 시원한 것이 너무 마시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넓은 길로 나와서 노상의 카페를 찾아 둘은 커피를 나는 생수를 주문해 마셨다. 그제야 갈증을 달랠 수 있었는데 그 생수야말로 어떤 문화적 편견과도 무관한 보편 그 자체였다.

 

 

다음 목적지는 다산쯔에 있는 798 문화예술구. 모두들 지쳤는지 택시 안에서는 여느 때와는 달리 아무도 말이 없었다. 1950년대 동독의 기술자들에 의해 지어졌던 군수공장이 이제는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지금은 공장의 빈 건물들에 갤러리, 작업실, 디자인 회사, 카페, 레스토랑, 미니 숍들이 들어와 있고 아직도 이곳저곳에선 입주를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거리엔 옛 공장 시절의 철골구조물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공장의 빈 터를 채우고 있는 재미있는 조각들은 공장의 그런 삭막한 풍경과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공장의 벽면들도 그래피티와 장식들로 꾸며져 흥미로운 볼거리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몇몇 갤러리들을 둘러보다가 화장실이 급한 나를 위해 우리는 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이 교수는 또 맥주를 주문했다. 날씨도 쾌청했고 거리의 풍경도 호젓했으며 음식점의 젊은이들도 쾌활했다. 모든 것이 유쾌한 그런 오후였다. 그래서인 두 사람은 정말 즐거운 표정으로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마신 맥주가 또 얼마나 될는지. 겨우 속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나도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 맛은 일품이었다. 향기가 좋았고 속이 풀리는 듯 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서 이러저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서로를 좀 더 알아갈 수 있는 대화들이었고 서로의 어려움을 조금 더 이해하고 격려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해가 저물어갈 때쯤 해서 우리는 다시 몇몇의 갤러리와 가게들을 둘러보고 저녁식사를 하러 인근의 음식점을 찾았다. 퇴근시간대라 차도가 꽉 막혀서 우리는 그냥 걷기로 했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의 한국식당을 찾아갔는데, 입구에는 흥미롭게도 관운장의 상과 함께 제단에 향을 피워놓았다. 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삼국지의 관우가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재물신으로 재탄생한 것이란다. 우리도 그 앞에서 복을 빌며 발원했다.

 

 

베이징에서의 삼일 째 날도 역시 숙소 앞의 한국식당에서 시작되었다. 이제는 주인아저씨도 제법 친근한 느낌이 들었고, 김치찌개를 시켰더니 계란찜과 짬뽕탕까지 서비스로 내 온다. 역시나 이 교수와 K는 맥주를 물처럼 마시고 있었고, 주인아저씨는 그런 우리를 보며 중국 종업원들은 아침부터 이렇게 맥주를 물마시듯 하는 걸 보면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농을 던진다. 과연 해장술이란 논리 따위를 넘어서는 엄청난 역설의 문화가 아닌가.

 

아침을 먹고 우리가 향한 곳은 숙소 가까이에 있는 베이징대학교였다. 중국의 여느 대학들이 그렇듯이 캠퍼스의 규모는 압도적으로 컸고, 유서 깊은 학교인 만큼 오래되어 낡은 건물들이 꽤 있었다. 공원처럼 잘 꾸며진 교정과 큰 호수를 산책하며 담소를 나누던 중에, 20여 년 전 이 교수가 이 대학에 유학을 왔을 때의 심란했던 심경을 토로한다. 그 때만 하더라도 아직은 열악했던 시설과 삭막한 학교 분위기에 그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막 학문의 초입에 들어선 그에겐 무엇보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견디기 힘든 고뇌를 안겼던 모양이다. 탄탄대로의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공부는 끝이 없고 그 공부 길의 고뇌도 끝이 없다. 지금 이들과 낯선 대학의 캠퍼스를 거닐고 있는 나는 무엇을 더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할까. 갑작스런 두려움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공부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세속의 인정에 이전투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 대한 혐오 속에서도 나 역시 별다를 것 없다는 열패감이 끈질기게 나를 괴롭혀왔다. 그렇게 산란한 망상들에 사로잡힐 무렵 오래 걸었던 다리가 무거워졌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베이징에서 나는 내 정신의 스승 루쉰의 흔적을 만나고 싶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아쉬움 속에서 베이징의 마지막 날 저녁은 깊어갔다.

 

 

 

나에게 여행은 책상머리를 벗어나 익숙한 삶의 패턴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경험이다. 낯선 풍토와 당황스런 상황 속에 놓일 때 나는 리트머스에 떨어진 시약처럼 숨겨왔던 것들을 속절없이 드러내 놓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자백하게 만드는 추궁이다. 모국어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소통하지 못하는 고립감에 고독했어야 했지만 내 곁엔 언제나 모국의 벗들이 함께 있었다. 입맛의 취향과 같은 생존에 밀접한 이문화적 경험 속에서 놀라고 당혹스러워야 했지만 나는 그 당혹스러움에 손사래만 쳤을 뿐이다. 베이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무엇인가. 내 완악한 습속의 버팅김은 낯선 것들과의 교섭을 방해했고, 논리적인 것으로 환수되지 않는 것들을 내 익숙한 감각에 억지로 우겨넣음으로써 주체의 동일성을 보존하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여행에서 나는 지극히 수동적이었던 것 같다. 술로도 말로도 나는 제대로 대작하지 못했고, 무방비 상태에서 대취하고 만 첫날을 빼고는 그저 술잔을 따르고 그들의 말을 고분하게 들었을 따름이다. 더 마시고 싶었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피로했고 사실은 너무 우울했다. 나는 모국어의 세계로부터 이미 너무 시달려왔고 그래서 매우 지쳐 있었다. 학위논문을 쓰고 다시 내 공부를 돌아볼 틈도 없이 주어지는 대로 응하고 흘러가는 대로 휩쓸렸다. 그리고 다시 그 지긋지긋한 생활의 반복을 앞두고 떠나는 여행은 설렘보다는 사실 부담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 여행은 병이 낫기 직전의 고열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베이징에서의 며칠 동안 나는 제대로 앓고 돌아온 것인가.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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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전복라면 2013.09.06 1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침에 이 글 때문에 출판사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선생님은 모르시겠죠? 언젠가 선생님이 평론집 사이에 여행서도 집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꼭...

  2. 전성욱 2013.09.06 1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담에 산지니 식구들이랑 여행을 가면 전복라면과 엘뤼에르와 온수입니까가 등장하는 그런 여행기를 써고 싶네요^^

  3. BlogIcon 김종신 2013.09.13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성욱님의 말씀에 벌써 기다려지네요...

 

 

늦둥이로 태어나 생각이 또렷해질 무렵 내 부모는 마치 조부모처럼 느껴졌다. 나고 자란 곳마저 워낙 벽촌이었던 터라 어린 시절 나는 내 또래의 감수성과는 좀 다른 느낌으로 이 세계를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흔히들 근대라고 부르는 그런 세계 이전의 시간적 감각 속에서 나는 홀로 외로웠다. 그래서일까? 나는 방학이 되면 한 번쯤 방문하게 되는 인근 도시의 그 화려함에 매혹되어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저주의 마음을 품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매혹이란 문명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근대를 향한 동경이었으리라.

 

나를 낳고 자라게 한 그 세계는 자연에 가까웠고 인정의 세태 또한 지금과는 많이 다른 원시성의 연대로 교감하는 그런 시공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면 그리운 그때 그 자리가 왜 그 당시엔 때때로 저주의 염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교과서와 텔레비전 그리고 이따금의 도시 방문으로 발심하게 된 문명에의 매혹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비교함으로써 분별할 수 있었고, 그 분별 속에서 저주하거나 동경하면서 성장했던 것이다.

 

지금 나는 이 완악한 세계를 살아가면서 가끔 그때가 가슴 시리도록 그립다. 그 누추함의 아늑함은 물론 현재로 소환되어 재구성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꼭 그 재귀적인 회상의 낭만성이 내 추억의 전부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이제 그 추억은 지금의 이 세계를 인식하는 일종의 분별지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 때 그 시절의 감각들을 여기로 현상함으로써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한다. 내가 나고 자란 삶의 감각을 되돌려 사유함으로써 현재를 보는 해석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기 체험과 경험에서 비롯된 삶의 감각을 애써 외면하면서, 비교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매혹된 세계를 모방하기에 바쁜 사람들을 보면 화가 치민다. 이런 분노는 역시 내 우울한 성장기의 상흔이리라. 자라지 못한 어른을 보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른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이런 분별이 가짜라고 할지라도 그 분별이 초래하는 분쟁이란 여전히 만만치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근대에 매혹되었던 나는 드디어 도시로 와서 유년의 시절을 통과했고, 마침내는 그 매혹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졌고 끝내 그 매혹을 저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마음 한 곳엔 또 여전히 내 누추한 삶의 구원을 열망했던 모던에의 그 치명적 매혹이 깊은 상흔처럼 남아있다. 이런 착종과 분열 속에서 지금도 나는 불안하다. 그러나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기 전에 나는 그 불안을 착실하게 감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공부란 불안을 견딤으로써 영혼을 보호하는 숭고한 사역인지도 모르겠다.

 

엉뚱한 말을 길게 하고 말았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만남에 관한 것이다. 서울대 김민수 교수와의 만남은 다시 내 어린 시절의 시간들을 되돌아보아야 할 만큼 그렇게 비범한 것이었다. 그는 디자인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학자이고 비평가였지만, 김민수라는 인물은 무엇보다도 내가 그토록 동경했던 모던의 정체에 대해 깊이 몰두하여 탐구한 연구자였고 동시에 겉치레로 변질된 모던의 속물성을 그 누구보다도 신랄하게 비판한 평론가였다.

 

처음 읽은 그의 책은 <<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1987)였다. 나는 이 책을 학부 시절에 읽었는데 내용뿐 아니라 책이라는 물리적 실체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디자인 문화 상징의 변증법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디자인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의 틀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지금까지 디자인이 산업의 효율적 수단으로만 취급되어온 한국 디자인계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문화로서의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문화로서의 디자인은 통계적인 수치로 계량화될 수 없는 복잡한 일상생활에 밀착된 개념이다. 그는 기존의 한국 디자인이 복잡한 소비의 양상을 단순화 시키고 소비자의 주관을 무시한 객관적 계량주의에 기울어 있었음을 대단히 공격적인 어투로 비판했다. 디자인이라는 모던한 모드는 일상의 혁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그 기원에 대한 망각이 오늘날 디자인의, 더 나아가 모더니즘의 천박한 퇴폐주의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비평과 글쓰기에 있어 모더니즘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젊은 비평가 포럼의 세 번째 게스트로 그를 초대했다.

 

무더위에다 박한 초청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그 먼 거리를 흔쾌히 달려와 주었다. 오래전 책으로 만났던 저자를, 게다가 많은 일깨움으로 가슴 벅찬 시간을 주었던 저자를 한참 만에 시간이 흘러 직접 대면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부산역에서 그를 기다리며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프로필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그의 얼굴은 역 앞의 약속 장소에 서 있던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긴 머리에 단단한 인상의 얼굴과 함께 세련된 차림으로 서 있던 그의 모습은 머릿속으로 그려온 그대로였다. 간단한 인사로 그를 맞았고 차를 준비해간 일행과 함께 대화의 장소로 이동했다. 갑자기 좁은 차 안에 같이하면서 약간의 어색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조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부산의 도시개발을 화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는 22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디자인 철학을 풀어낸 <<필로디자인>>(2007)이라는 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내가 그 책을 읽고 준비해간 이야깃거리는 대강 이런 것이었다. 출력해간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런 것이다.

 

1. 시인 김수영은 신동엽의 시를 고평하는 자리에서 “50년대에 모더니즘의 해독을 너무 안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그 한계를 꼬집기도 했는데, 여기서 김수영이 모더니즘을 해독이라고 한 것은 무척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전통의 고답을 부정하는 모더니즘의 정신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이 있다는 인식은 대단히 예리한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글에서 김수영이 말했던 바의 바로 그 모더니즘의 해독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읽었습니다. 모더니즘이 보여준 창신의 정신을 긍정하면서도 일상의 생활 감각과 동떨어져 기교에 치우치는 치명적인 결점을 대단히 치밀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선생님에게 에토레 소트사스는 무엇보다 디자인을 비인간적인 중립적 대상이 아니라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일상적 의식(RITUAL)’으로 복원하는 길을 모색”(189)한 디자이너입니다. 이처럼 굳이 리얼리즘이란 말을 쓰고 있진 않지만 디자인에 대한 선생님의 사유 기저엔 실사구시의 마음이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2.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긍정과 더불어 전통의 계승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나름의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조성룡과 안상수는 물론이고 스기우라 고헤이와 뤼징런에게서 전통과 혁신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살피고 있는데, 특히 뤼징런을 언급하면서 그의 삶과 작품세계가 역사와 전통을 빛바랜 민족주의 내지는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국적 불명의 이상한 한국인들과 북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442)고 꼬집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피닌파리나의 성공의 요인 역시 전통과 혁신의 상보적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235)으로 평가하시고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에 대한 사유의 부족이 옛 것을 일방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문화적 천박성을 노출한다는 비판은, 새 것 콤플렉스에서 비롯되는 트렌드 추수적인 모더니즘 추종을 우려하는 마음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3. 22명의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는 첫 자리에 밀턴 글레이저를 앞세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디자이너의 사회적 발언이 갖고 있는 함의, 즉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디자인에 필요한 철학으로서의 필로디자인이란 바로 그 공공성의 가치에 대한 깊은 탐문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이 책 전반을 가로지르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 민주화를 위한 이념만큼은 사회적 선을 실천하는 공리적 가치에 두었”(59)던 윌리엄 모리스나 새로운 예술만이 사회를 구원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거라 믿었”(73)던 발터 그로피우스가 모두 그 사례들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롤로그의 이 마지막 대목은 그 비판의 서늘한 기율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부조리와 폭력에 대해 한국의 대부분 디자이너들은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 비즈니스로 돈을 벌어 성공할 순 있었어도 사회적 발언권을 갖고 불의에 저항할 줄도 아는 존경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39) 디자인의 공공성은 물론이고 예술가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은 무척 단호해 보입니다.

 

4. 이 책의 곳곳에는 한국 디자인계의 부박함과 천박함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비판의 에토스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학이 부재한 디자인의 허영에 대한 분노라고 여겨집니다. 선생님은 전작인 <<김민수의 문화 디자인 탐사>>(2002)에서도 기술은 손색이 없는데 내공과 철학이 문제라고 꼬집었습니다. 철학 없이 기술과 스타일로 승부하려는 속물적 욕망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예컨대 선생님은 장 누벨을 일컬어 그의 스타일은 결과적 산물로서의 형태가 아니라 사고 과정에 있는 것”(309)이라고 하면서 그의 건축이 첨단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기술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이야기와 시적 감동을 자아낸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국의 디자인에 결여되어 있는 것과 한국의 디자인이 빠져있는 것이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많은 질문과 답변이 있었고 시종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대화들이 오갔다. 그도 그날의 대화가 나름 만족스럽고 즐거웠는지 뒤풀이자리가 있는지를 먼저 물었다. 뒤풀이는 더 유쾌했고 더 깊었고 더 뜨거웠다. 우리들은 이런 공개적인 글에 다 담을 수 없는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는 우리가 준비했던 민망할 정도의 초청료를 뒤풀이 비용으로 쓰고 자리를 떠났지만, 그가 진정으로 남기고 간 것은 여기 말로 풀어서 옮기기 힘든 어떤 것이었다. 공부와 글쓰기의 윤리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의 정치성에 대하여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나는 그의 글과 행동의 연관에 대한 치밀함에 더 깊이 생각을 기울였다. 불안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해여 하나, 나는 이번의 만남과 대화들을 통해 진정으로 치유된 기분이었고 위로받은 느낌이었다. 머리 숙여 존경할만한 학인을 만나기 힘든 시속의 세태를 감안할 때, 나는 감히 그 만남이 그 세태를 거스른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서 우리들 앞으로 같이 찍었던 사진 파일과 함께 한 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어제 만나서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함께 한 모임은 그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과 작업들을 잠시나마 뒤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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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온수입니까 2013.08.26 0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월요일 아침부터 뜨거워지는 글이네요. 한국 디자인이 복잡한 소비의 양상을 단순화시키고 소비자의 주관을 무시한 객관적 계략주의에 기울었다는 말이 공감갑니다.
    사유와 성찰이 없는 디자인이 일상의 조경을 얼마나 끔찍하게 파괴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예민함과 불편함은 사라지고 자꾸만 길들여지네요.



 

 

현기영의 순이 삼촌(1978)을 읽지 않은 대개의 사람들은 아마도 제목의 그 삼촌이라는 말을 쉽게 오해하고 될 것이다. 남녀 구분 없이 가까운 이웃을 일컫는 이 말에 대한 뭇 사람들의 오해만큼이나 제주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일천하다. 제주에 대한 내 인식의 기초는 국민국가의 논리로 학습된 네이션의 감각에 깊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제주란 나에게 경험을 초월한 저 아득한 관념의 지평 어딘가에 있다. 화산의 섬 제주가 대한민국의 국토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제주에 대해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심상들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제주는 역시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한 것처럼 가 닿기 힘든 심원한 기표다.

 

이런 저런 독서와 공부로 얼룩진 내 심상의 지리 속에서 제주는 무엇보다 43의 장소다. 인식의 이런 편향이란 제주를 삼다도나 국내 제일의 허니문 관광지로 떠올리는 그 자동화된 환기의 습벽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제주를 역사적 사건의 장소로 환기하는 내 인식의 편향이야말로 어쩌면 더 간교하고 영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반성적인 회고 속에서도 역시 43은 나에게 제주의 그 난존하는 모든 이질성들을 압도하는 주인기표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 제주에 가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제주는 실감이 아닌 감상이다. 그리고 그 감상이란 아마도 몇몇의 텍스트들이 상호텍스트적인 맥락 속에서 대화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리라. 그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근원적인 것은 현기영의 단편들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억눌러온 슬픔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터져버린 울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순이 삼촌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이런 주해는 그 울음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순이 삼촌은 그렇게 발설되지 못한 그 죽음의 풍문을 세상에 알린 용감한 역작이었다. 이야기꾼으로 더 깊어진 현기영은 마지막 테우리(1994)43의 현재성을 탁월한 구성과 문체로 풀어냈다. 이 단편은 마치 지금의 강정을 예감이라도 한 듯 침범당한 순수에 대하여 이렇게 적어놓았다. “그리하여 초원은 이제 다시 한 번 환란을 맞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서 솔씨 하나만 날아와도 발 못 붙이게 완강하게 거부하던 초원이 사방에 아스팔트도로로 절단되고, 야초를 걷어내어 그 자리에 골프 잔디가 심겨지고 있었다.”

 

아직 한국에서 완간조차 되지 못한 김석범의 <<화산도>>는 조총련계라는 이유로 입국이 불허한 작가의 처지에서 40여 년 전 고향의 기억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현지조사 없이 이룩한 대작이다. 물론 작가의 정치적 ()의식이 작품의 어떤 편향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 자체로 그 작가와 작품을 정신적으로 해금하지 못하는 우리 문화의 열악함을 반증한다. 그렇게 43은 여전히 일종의 금기이며 좌우의 이념 대립으로 소란스런 격전의 장소다. 그렇다면 지금 독립영화 <지슬>돌풍이란 무엇을 함의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른바 천만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들의 흥행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의 수상이 가져다 준 세속적인 요인마저도 저 작은 규모의 영화가 가져온 돌풍의 의미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억압된 것의 회귀를 말했던 프로이트를 빌리지 않더라도, 억압된 것은 언제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상 밖의 그 돌풍이란, 나에게는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집단적 무의식의 한 증상으로 여겨진다.

 

<지슬>(2012)은 애도의 영화다.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소지(燒紙)라는 네 개의 챕터(시퀀스)는 이 영화의 구성이 제의적 구조를 차용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망자의 원혼을 떠나보냄으로써 산 자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의가 갖는 애도의 기능이다. 영화라는 형식으로 제의를 치르겠다는 연출의 발상은 엄중하지만, 동시에 그 합목적적인 제례의 의식이란 진정한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합적인 틀이다. 작위적인 제례가 일종의 낭만적 허위라면 그 제의의 플롯을 그대로 내러티브로 한 구성은 영화적 진실의 단면들을 훼손할 수 있다. 애초에 애도란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 연출의 의도는 이미 무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스토리는 저 제의의 구조를 느슨하게 용접함으로써 어떤 미학적 결손을 제어한다. 제작비의 고충과 제작 여건의 불미함은 오히려 연출의 방법을 창신하는 역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지슬>의 토벌작전을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씬처럼 연출할 수 있었다면 학살은 그저 스펙터클로 전락했을 것이다.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는 투박함으로써 오히려 핍진했고, 정적인 미장센의 연극적인 장면들은 수동적인 몰입을 방해함으로써 흥미로운 소외효과를 연출했다. 그것은 마치 피트 왓킨스의 실험적인 영화 <코뮌>(2000)의 흔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적 형식의 이런 성취는 진혼과 애도라는 목적과 창발적으로 불화하는가.

 

<지슬>43을 순결한 여성에 대한 겁간으로 유비한다. 토벌군에게 겁탈당하는 순덕이 직접적이라면 오름의 곡선을 여성의 나신과 오버랩하는 장면은 좀 더 은유적이다. 토벌군의 일원이면서 가마솥에 김 상사를 삶아 죽임으로써 신화적 폭력을 청산하는 신적 폭력의 상징성을 암시하는 정길은 사실 여자다. 이 같은 원형 상징적 표현은 전래하는 제주의 할망(대지모신) 신화를 의도적인 재현한 것이다. 폭력의 재현을 젠더 정치학의 차원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외지인과 섬사람, 가해자와 희생자의 위상은 분법의 논리로 선명해진다. 죽은 어미가 남긴 아이의 울음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해원과 상생의 표상으로써 모성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죽임의 폭력에 대한 살림의 상징성으로 드러나는 지슬(감자)이라는 사물로 집중된다. 끝내 마을을 버리지 못했던 어머니가 지슬을 남기고 죽임을 당하자 마을을 찾았던 아들은 다시 산으로 돌아가 그 지슬을 마을 사람들에게 먹인다.

 

제주 무속본풀이의 여신들은 육지의 여신들과는 유사하면서도 나름의 독자적 개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다산과 풍요의 원형으로서 여신의 의미는 보편적이다. 생명의 살림에 닿아있는 여신의 모성적 상징성은 <지슬>에서 43이라는 특이성의 사건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해소시킨다. 신위에서 소지에 이르는 유교적 제의의 구도 안에서 과연 이런 여신적 주술이란 논쟁적이라 할만하다. 애도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그 불가능한 애도의 제의를 집전하는 사제가 요구되며 <지슬>은 그것을 전래하는 샤머니즘의 여신으로 충족했다. 불가능한 것의 재현은 역설적으로 그 불가능함의 진솔한 고백이라는 아포리아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지슬>은 애도와 제의라는 정합적 내러티브와 함께 여신의 상징성으로 그 아포리아에 맞선 작품이다.

 

<지슬>이 제의적인 영화인 것처럼 <비념>(2012)은 역시 주술적인 다큐멘터리다. 비념이란 비나리고, 그러니까 그것은 곧 민초의 소망이 담긴 소규모의 굿이다. 첫 장면에서 보여준 종이 가면을 쓴 사람들은 귀신이며, 카메라는 마치 그 귀신들의 시선처럼 지금 이 망령의 세계를 배회한다. 43의 희생자들을 대변이라도 하듯 카메라는 학살이 있었던 장소들을 찾아가 이리저리 비춘다. 영화는 43 당시의 기록 영화를 거꾸로 되감는 장면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비가역성을 표현한다. 역사는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들은 역사의 그 흔한 오류들을 속절없이 되풀이 하곤 한다. <비념>이 유념하는 것은 바로 그 어리석은 반복에 관한 것이다. 43을 강정과 병치함으로써 오류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한국의 현대사는 일종의 질문이 된다. 기억은 망각되기도 전에 벌써 또 다른 기억으로 대체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기억은 다시 또 다른 기억에 잠식당한다. 강정이란 역시 땅의 훼손이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는 국가의 법집행은 빨갱이들을 축출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하기 위해 치렀던 43이라는 폭력적 제의의 사후적 반복이다.

 

<비념>은 조용하지만 격렬한 영화다. 결혼한 지 겨우 이태 만에 강상희 할머니는 남편을 잃었다. 역사적 수난의 시간은 유독 여성에게 가혹하다. 난리를 피해 오사카로 이주한 여성들의 목소리도 그 가혹한 시간을 담담하게 증언한다. 서울과 제주의 거리, 지구와 달의 거리는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급하게 가까워졌지만 43에 이르는 우리들의 역사적 회고의 거리는 멀고 또 멀다. 영화는 그 거리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영상과 사운드를 기교적으로 운용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한 필사적인 발화의 실험인 것이다. <비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쉬이 말해지지 않으므로 영화는 내내 조용하다. 그러나 그 말 없음 속에는 말하고자 하는, 그리고 말해야만 하는 의지의 긴장이 팽팽하기에 그 조용함은 대단히 격렬하다.

 

<지슬>이 과거로 돌아가 원혼의 넋을 달래려 한다면 <비념>은 그 원혼을 현재로 불러와 산 자들의 망각을 고통스럽게 추궁한다. <지슬>이 역사의 폭력을 대모신의 순결에 대한 훼손과 회복의 서사로 말하고 있다면 <지슬>은 여성들의 몸과 기억에 각인된 현재적 상처를 어루만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의 3일은 왔고 앞으로도 43은 반복될 것이다. <지슬>이 지난 시간을 위로했다면 <비념>은 깊은 여운으로 지금의 우리들을 추궁했다. 43의 그 시간들처럼 <지슬><비념>은 잊혀진 사건이 되겠지만 다시 또 다른 발설들이 이어질 것이다. 그 발설들의 반복을 통해 우리는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의 비경(秘境) 속에서 비경(悲境)을 발견하고는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제주를 제대로 걷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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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비념, 지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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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지층에서 5월은 무엇보다 광주에 대한 기억으로 들끓는 시간입니다. 물론 그 역사적인 5월도 유족을 비롯한 피해 가족들에게는 상처로 얼룩진 가족사의 어떤 질곡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컨대 강풀의 카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26>의 서사가 역시 그 가족들의 원한을 복수라는 형식으로 해원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요즈음의 한국소설은 늘 그래왔지만 특히 가족에 예민합니다. 당대의 주류적 서사들이 가족에 어떤 집착을 보인다는 것은 우리사회에 대한 일종의 증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월을 맞는 저에게도 가족이란 진정으로 곤란한 아포리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며칠 전엔 어버이 날을 맞아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애틋함 가득한 시간이었음에도, 나의 그 방문이란 아마도 간교한 도덕적 책임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부도덕한 방문의 일정을 마치고 밤늦게 저는 아내와 함께 심야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습니다. 마음의 부담을 훌훌 떨치고 어떤 해방감이라도 누리려는 듯이 말이지요. 우리가 본 것은 천명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고령화 가족>이었습니다. 영화는 이 난세에 그래도 가족이란 거의 유일한 희망이 아닌가,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건 마치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적으로 비춰준 낡은 맨션의 담벼락에 홀로 허허롭게 핀 민들레꽃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은유는 너무 진부해서 그냥 무시할만한 것이었지요. 영화의 내러티브는 방향을 잃고 위태로웠지만, 그 위태로움 자체가 바로 가족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가진 작위성의 파탄을 예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억지스런 결말의 행복을 보고 아마 누구라도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탈냉전 이후의 일상은 거대한 역사의 서사들을 무용하게 만들어왔습니다.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들마저도 실은 냉전에 대한 알레고리로 분분했습니다만, 이제 서사화되는 것은 그런 역사가 아니라 미세한 욕망들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한 가운데 가족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족이란 저 냉전 시대의 몰락 이후 인류가 기대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낙원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핍은 채움의 욕동을 일깨우고 동물과 속물로 분기된 주체들은 그 결핍의 보충을 위해 집착 속에서 분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체들은 진정성의 상실로 더 공허할 따름입니다.

 

다음 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아침부터 또 영화를 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규환 감독의 <불륜의 시대>는 여유와는 좀 거리가 먼 심각한 영화였습니다. 존 카사베츠의 <얼굴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주제의식은, 교차편집이라든가 롱숏의 앵글로 잡은 이국적인 풍경의 미장센에 대한 감상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영화 속의 부부는 서로 말하고 듣지만 그건 얼굴의 진정한 마주함이 아니기에 대화라 할 수 없는, 그저 응답 없는 독백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서로가 어긋나는 가운데 그들은 외도로 각자의 비밀스런 관계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끝내 탈로날 수밖에 없는 그 비밀은 일종의 단죄처럼 폭로되고 맙니다. 그리고 아내는 마치 처형이라도 당하듯 살해당하지요. 이 영화에서 가족은 이처럼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한 결사체입니다.

 

영화에서 사람들의 일상으로 분주한 바라니시의 풍경은 남루하지만 그래도 어떤 열기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강도와 테러가 혼재한 그곳에서 일상은 폭력 속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영화의 여운은 오래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책을 하고 돌아와 어떤 이끌림처럼 같은 감독의 <댄스 타운>이라는 영화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탈북자의 이야기였음에도 역시 그 서사 안에는 가족의 해체라는 모티프가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탈냉전 이후에도 여전히 분단이라는 역사적 조건은 한반도의 민중들에게 가족 해체의 폭력으로 엄존합니다. 물론 이 영화에는 북한의 전체주의에 못지않은 남한 사회의 배타성과 속물성에 대한 비판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저는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탈북과 망명이 전체주의적 국가로부터의 도망이라고 할 때, 그 도주의 선을 가로막고 버티어 선 또 다른 괴물이 가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전체주의적 국가 역시도 사실은 가족 유사성의 체제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결코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시대에 가족으로부터 망명하지 않는 주체는 결코 자유로운 삶에 이를 수 없다는 엄혹한 인식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족주의의 공격성과 배타성 너머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사유들이 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주의 이후의 가족에 대한 사유는 곧 새로운 연합에의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봅니다. 결사항전하다 스러져간 5월의 그 공동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론으로 일반화될 수 없는 그 정체에 대한 탐문들이 저를 사로잡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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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2012)는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했던 것처럼 역시 엄숙한 사유를 요청한다. 죽음 가까이에 닿아 있는 노년의 삶이란 적요한 가운데서도 격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삶은 지속되고 있으나 죽음이 언제 그 일상을 덮쳐올지 모르는 막연한 시간들 속에서 말년의 삶은 불안으로 만연해 있다 

<아무르>의 첫 장면은 충격적이다. 시체의 부패 냄새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가 문을 뜯고 들어가자 여자의 시신이 수의를 입고 누워있다. 그리고 영화는 피아노 연주회에 참석한 관객들을 오랫동안 비춘다. 그것은 아마도 이 연주회에 참석한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일들을 예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느의 발병과 그 후에 겪게 되는 인간적 존엄의 훼손을 지켜보아야 하는 조르주의 처지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지켜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사유를 요구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연주회가 끝나고 부부가 돌아온 집의 현관문이 뜯겨져 있다. 노년의 불행은 이처럼 도둑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노부부의 집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이 영화의 미장센은 대단히 단조롭다. 미장센의 그 폐쇄성은 노년의 삶이 그러한 어쩔 수 없는 어떤 단조로움을 표현한다. 그리고 노년에 맞는 질병은 곧 모든 관계들의 단절을 가져오는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은 얼마나 외로운 시간인가?

 

안느의 병세는 위중해지고 그녀 스스로 자기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조르주도 조금씩 지쳐간다. 조르주는 어느 날 열려 있던 창문으로 들어온 비둘기 한 마리를 내쫒는다. 발병과 함께 서서히 망가져가는 아내의 모습이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처럼 반갑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조르주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그는 자기의 손으로 아내를 죽이고 염습을 한다. 그리고 다시 날아 들어온 비둘기를 이번엔 조심스럽게 품어 안는다. 그리고 그도 아내의 영혼과 함께 집을 나선다. 여기서 조르주의 행동은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안락사와 마찬가지로 존엄을 지키기 위한 죽임은 허용될 수 있는가라는 해묵은 논란을. 그러나 <아무르>는 그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윤리문제보다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쪽에 더 절실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우리들에게 사랑이란 지켜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스런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물론 행복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몸과 마음이 모두 쇠락하여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지극히 힘겹고 고통스런 일이다. 사랑이란 바로 그 아름다움이 무너지는 과정을 껴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랑이란 타인의 죽음을 끌어안는 일이다.

 

아내를 죽이고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 홀로 남겨진 조르주는 담담하게 글을 쓴다. 그것은 아마도 죽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리라. 무엇인가를 적는다는 것, 대화의 상대를 잃은 외로운 사람은 글쓰기로 그 외로움을 견뎌보려 애쓰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역시 애도의 한 방법이리라. 전후 일본의 문예비평을 대표하는 에토 준이 역시 그러했다. 그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아내와 나>>(국역본으로 <<당신의 손이 아직 따뜻할 때>>)를 썼다. 그러므로 그 글은 한 인간의 애절한 그리움과 절절한 외로움이 빚어낸 것이다. 에토 준은 말기암인 아내에게 끝내 병명을 고지하지 않음으로써 홀로 쓸쓸하게 그녀의 두려운 마음을 위로하려했다. “지금 아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저렇게 편안히 숨쉬면서 자고 있지 않은가? 사람의 살고 싶다는 의욕과 희구(希求)를 그처럼 쉽게 빼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나는 아내에게는 오직 한 사람의 가족이자 남편인데 말이다.”(29)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다만 한 마리의 애완견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에토 준은 아내의 병세가 위중해지는 그 시간들 속에서 일상의 시간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역시 20년간 월평 쓰기를 지속했던 일본 우익문단의 대표적 비평가였던 것이다. 아내를 간병하면서도 <<소세키와 그의 시대>>의 원고 집필에 매달리는 그의 모습은 가히 경이롭다. 하지만 그는 곧 일상의 시간에 대한 욕망을 후회하게 된다.

 

입원하기 전에 집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그때 아내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시간은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말하자면, 삶과 죽음의 시간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일상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저 멀리 창 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흐름과 함께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삶과 죽음의 시간이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아내의 옆에 있는 한, 그것이 정말로 흐르고 있는지 아닌지 잘 알 수가 없다. 그 시간은 어쩌면 찰랑찰랑 가득 차 정체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흐르고 있는지 정지해 있는지 분명하지 않은 시간 속에 아내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언가 감미로운 경험처럼 여겨진다.

이 시간은 어쩔 수 없는 용무로 병실을 떠난다거나 하면 곧 바로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병상 옆에 돌아와 마비되지 않은 아내의 왼손을 꼭 잡고 있노라면 또 다시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호수 같은 고요함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살며시 채워준다.

우리는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 한번도 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도, 죽음을 화제로 삼지도 않았다. 집안 살림의 정리에 관해서도, 거기에 부수되는 법률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어느 것 하나 의논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함께 있었다. 사실, 함께 있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별이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는 가능하면 함께 있고 싶었다. 전문의가 예측한 바, 길어야 일 년이라는 기한은 이미 2개월이 지났다. 이아 같이 아직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기적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특별히 종교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나 만약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의식(意識)의 종언(終焉)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순간까지 아내를 고독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나라는 사람만이 옆에 있어 주어 어떤 경우에도 혼자가 아니라고 믿어주기를 바라고 싶다.(74-76)

 

아내를 고독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에토 준의 바람이야말로 미카엘 하네케가 <아무르>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에토 준은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곧바로 중증 감염증이라는 심각한 상태로 수술을 받는다. 수술에 앞서 그는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까지 미리 작성해 놓는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는 일상의 시간에 대한 미련으로 치열하다. “기어서라도 서재에 돌아가 소세키와 그의 시대를 완성해야만 한다. 여기서 죽고 말면 대학에서 대학원생을 연구 지도하는 일도 못하게 되지 않을까?”(117) 그리고 무사히 수술을 끝내고 회복이 된 뒤에 그는 <<아내와 나>>를 집필한다. “이런 상태로 있으면 미칠 것만 같은 생각, 어찌됐든 무엇인가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123) 그러나 글쓰기로 진짜 삶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 에토 준은 집필을 완료한 바로 그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말년의 삶이란 무엇일까? 외로움은? 아니,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서로 사랑하지만 결국 말년은 또 다시 외로움과 대면하게 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년의 사상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비약하는 그 질적 전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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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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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온수입니까 2013.02.06 09: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인생의 허무와 권태. 그리고 반복되는 이 사이클. 다시 시작되는 전성욱의 문학 읽기 좋아요^^ 이제 멀리 가지 않고 산지니에서도 문학과 문화를 나눌 수 있기를.

  2. 전복라면 2013.02.06 18: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컴백 축하를 기념하며 신나서 키보드로 풍악 한 번 울리려고 했는데, 죽음과 사랑과 고독에 대한 감상을 읽고 있으니까 흔들거리던 손이 절로 차렷하네요. 죽음과 고독은 모든 이의 것일 텐데, 죽음을 끌어안는 사랑은 누가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세상의 모든 여행은 위험하다. 떠남과 만남, 그 구체적 사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상념과 관념으로 존재하던 여행은, 바로 그 떠남의 순간부터 무수한 만남들의 지평을 연다. 그러므로 여행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경험 속으로 자기를 내던지는 기투이며, 이 때문에 모든 여행은 그 알 수 없음의 암흑 가운데서 두려운 마음으로 떠도는 방황인 것이다. 그러니 예정된 ‘일정’이란 언제나 배반될 수밖에 없으며, 우발적인 사건들의 터무니없는 전개로 여행의 시간이란 극히 혼돈스러운 것이다.

6월의 끝자락은 무더웠고, 학기말의 일정들로 마음은 몹시 빠듯했다. 작은 여행 가방에 억지로 쑤셔 넣은 물건들처럼, 분주한 일상을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내 마음은 영 거북하기만 했다. 그것은 공항에서 만난 K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출판사의 여러 형편들이 떠나는 그의 마음을 부담스럽게 붙들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어차피 이렇게 떠나게 되었으니 잘 다녀오자고 서로를 위안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그만큼 우리들의 여행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륙과 함께, 기체 밖의 작아진 영토만큼이나 마음의 거북함은 점점 멀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약간의 설렘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들의 여행은 난삽한 관념으로부터 구체성의 경험으로 서서히 이륙하고 있었다.

상하이의 푸동공항에는 이틀 전에 이미 도착해 있던 이종민 교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물론 그 마중은 K의 간곡한 요구를 따른 것이니 환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먼 이국땅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불안한 처지의 우리들로서는, 그 마중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요금이 좀 비싼편이었지만,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 우리는 자기부상 열차를 탔다. 그것도 상하이에서 해 볼 수 있는 여러 경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열차 안에서 이종민 교수는 이틀 동안의 음주기담을 펼쳤고, 그것은 곧 앞으로 우리가 보내게 될 상하이의 밤들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숙소에 도착, 호텔은 의외로 훌륭했다. 짐을 풀고 간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일행과 함께 와이탄 거리로 향했다. 신혼여행의 첫 여행지가 바로 이곳이었던 나에게 와이탄 거리와의 재회는 남다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초 유럽풍의 건축물들이 풍기는 고풍스런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 무렵, 어느새 화평반점 앞에 도착한 우리는 길을 건너 황푸공원으로 갔다. 몇 컷의 어색한 사진을 찍고, 이종민 교수의 또 다른 지인들을 기다렸다가 합류한 후, 우리들은 번화한 난징로를 걷고 또 걸었다. 거리를 가득 매운 정말로 많은 인파, 그리고 당연한 소란스러움과 이방인에게는 익숙지 않은 독특한 냄새들. 난징로를 걷는다는 것은, 그 모든 낯선 감각들과의 갑작스런 조우였다.

여행은 무엇보다 낯선 풍경들과 만남이라고 할 만큼 시각적인 것의 우위로 점철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번 여행은 풍경보다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것이 여행의 묘미라는 것을 일깨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4박 5일의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또 그들과 어울렸다. 물론 길거리에서 만난 그 익명의 사람들과의 종적 없는 부딪힘이란 또 얼마나 귀한 것이었던가.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구성철 형과의 만남은 특별하게 기억해 두고 싶다. 특히 형과 함께 했던 비오는 밤, 푸단대 유학생 거리의 노천에서 먹고 마셨던 양꼬치 구이와 칭다오 맥주의 맛은 미각이 아니라 온몸에 아로새겨질 추억의 한 조각임에 틀림없다. 처음엔 역했던 그 양고기의 맛처럼, 현지의 음식들은 대단히 괴로운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적응이 되어갔다. 이렇게 되풀이되는 경험 속에서 단련되고 익숙해지는 것, 적응이란 수동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반복되는 경험의 교류 속에서 대상을 치열하게 이해하게 되는 능동적인 받아들임의 과정이 아닐까.

  

대전 지역의 한 국립대에서 이종민 교수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는 구성철 형은, 푸단대에서 국제관계학으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이에 특히 민감했지만, 고달픈 유학생활을 잘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견뎌낸다니, 하지만 어쨌든 저 기약 없는 유학생활이란 나에게 분명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마음은 아마도, 장춘에서 이제 막 유학을 끝내고 돌아오는 아내에 대한 감상 탓이리라. 끝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공부의 시간이란, 그렇게 우리들을 한 없이 기다리게 만드는, 가혹하게 지루한 바로 그런 것이니까.

상하이에서의 첫날 저녁, 그 낯선 시공간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활달한 청년들이었다. 이종민 교수의 학부 제자들은 그들의 외모만큼이나 밝고 환한 선남선녀들이었고, 구성철 형의 친구들(그 중에 한 사람은 한국에 유학했던 중국인이었다.)은 유머와 위트로 시종 즐거웠다. 그런 분위기 탓이었을까, 나는 과음했고 안 해도 좋을 가벼운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다음 날은 역시 고통스런 숙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즐거움이란 없는 것일까? 주흥이 다하자 고통이 찾아왔다. 아침 날이 밝았는지도 모르게 누워있는데, K는 벌써 일어나 씻고는 TV를 켜 놓고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겐 이른 시간이었지만, 늘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한 K에겐 늦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호텔을 빠져나와 골목길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상하이 사람들의 생활을 엿보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떠돌다보니, 눈앞에 지하철 입구가 나타났다. 매표기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여학생의 도움을 받아 표를 끊고 지하철을 탔다. 상하이의 지하철 풍경은 부산의 지하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전날 거닐었던 난징로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았다. 과음으로 속이 거북했던 나는 한국식 해장국이 너무나 그리웠지만, 도저히 중국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햄버거나 콜라가 보편적인 음식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나니 다를까 그 맛은 한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현지화된 것이었다. 맥도널드 따위의 패스트푸드를 보편적인 맛으로 여기고 있는 나의 입맛이란 정말 한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감각하는 내 천박한 감수성이란 어디 음식뿐이겠는가. 맥도널드와 함께 시내 곳곳에는 KFC가 자주 눈에 띠었는데, 그곳의 메뉴에는 한국에 없는 죽들이 아침 식사로 팔리고 있었다. 그 역시 중국 인민의 생활에 맞게 변용된 것이리라. 숙취로 고달픈 중에도 문화의 유통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처지라니.

30위안이면 하루 종일 탈 수 있는 이층짜리 시티 투어 버스는, 이번 상하이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그것을 타고 무려 두 바퀴 반을 돌았는데, 처음엔 노선을 따라 상하이 시내를 유람하였고, 두 번째는 내리고 타기를 반복하면서 예원과 상하이 박물관, 미술관 등 몇몇 장소를 관람했다. 체력이 바닥나 박물관에서 무척 지쳐보였던 K는, 미술관에서는 활력을 되찾은 듯 그림들 앞에서 휴대폰 카메라의 셔트를 마구 눌러댔다. 역시 너무 먼 과거의 유물들보다는 화폭에 그려진 동시대의 삶이 우리에겐 더 매혹적이었던 것 같다.

상하이의 도심은 큰 길 주변으로, 격조가 있어 제법 그럴듯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그런 건물들로 외곽을 이루고 있는 도심 내부의 생활공간은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세월의 때가 그대로 느껴지는 낡은 가옥들, 꾀죄죄한 느낌이 들 정도의 독특한 냄새들, 그 집의 살림살이를 짐작하게 만드는 늘어놓은 빨래들, 후텁지근한 날씨에 웃통을 벗고 있는 남자들, 한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늙은이들, 재잘거리며 뛰노는 아이들... 이방인의 눈에 그것들은 그저 지저분하고 남루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의 가난한 삶이란 원래 그렇게 난삽하게 펼쳐진 가재도구들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상하이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인화의 소설 <<하비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 모든 풍경에 대한 인상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과 사물 모두가 퀴퀴하고 구질구질하고 편안해 보였다.”

미술관 관람을 끝으로 상하이 투어를 끝낸 우리는, 미술관 주변 거리를 거닐다 지하철을 타고 호텔 근처로 되돌아 왔다. 이종민 교수와 구성철 형이 호텔 로비로 찾아왔다. 중국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위해 그날 저녁은 한국 음식점으로 데려가 주었다. 소주에 고기를 구워먹으며 김치찌개에 밥을 먹으니 참 좋았다. 나의 이문화적 감수성이란 이렇게도 많이 편파적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자리는 이차로 이어졌고, 구성철 형의 기숙사 로비에 하얀 물보라가 뿜어져 나오는 성능 나쁜 에어컨 앞에서, 우리는 배달시킨 양꼬치에 칭다오 맥주를 마셨다. 물론 나는 양꼬치의 역한 냄새 때문에 전혀 먹지를 못했고, 구성철 형이 공들여 끓여준 계란까지 곁들인 라면에 얼큰하게 소주를 마셨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K는 역시 3일 째 날에도 일찍 일어나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편의점에 들러, 나는 컵라면을 K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대충 아침을 때웠다. 버스를 타고 우리는 루쉰 공원으로 갔다. 여행 첫날 프랑스인들이 조성했다는 어느 공원에 들렀을 때, 이종민 교수는 중국의 공원은 모두 노인공원이라 농담을 했었다. 역시 루쉰 공원엔 노인들로 가득했고, 음악에 맞추어 집단으로 춤을 추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넓은 공원을 거닐며 담소를 하다 보니 어느새 루쉰 묘지에 이르렀다. 소박했지만 역사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묘소 참배 후 드디어 루쉰 기념관으로 갔다. 한국에도 많은 작가들의 기념관이 있지만, 작가의 삶과 문학적 일대기를 이렇게 잘 정리해 놓은 곳을 보기란 참으로 드물다. 나중에 이종민 교수에게 들으니, 기념관의 배치를 새롭게 해 루쉰의 혁명적 성격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했다. 그 전의 모습을 알 수 없으니 뭐라 할 수 없지만, 듣고 보니 일대기 위주의 전시물 배치가 조금은 단조롭게 여겨졌다.

기념관을 나오니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면서 휴식을 취했다. K는 책을 읽고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달콤한 휴식 뒤에 우리는 비오는 거리를 걸어 일본 조계지를 찾아갔다. 한국의 인사동에 비견할 수 있는 그곳에는 일본식 적산가옥과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했다. 몇 컷의 사진을 찍고 다시 서둘러 길을 나섰다. 택시를 타기 전 서점에 들러 오후에 만날 작가 왕안이의 소설 <<장한가>>를 한 권 샀다.

 

호텔로 가서 젓은 옷을 갈아입고 푸단대로 향했다. 왕안이는 상하이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로 장아이링의 뒤를 잇는 것으로 평가받곤 한다. 곡절 많은 인생을 살았던 장아이링과는 달리 지금 왕안이는 푸단대 문예창작과의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이번 만남은 상하이 대학에 방문 교수로 와 있는 목포대학교 임춘성 교수와의 대담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종민 교수와 임춘성 교수, 그리고 대담의 정리와 한국어 번역을 맡은 유학생이 동석했다. 이번 대담은 내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잡지에 실릴 것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고, 잡지에 실을 사진을 몇 컷 찍고는 자리를 떠났다. 대담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라운지에서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 대담이 끝나고 다시 임춘성 교수와 합류한 우리는 학교 근처의 음식점에서 이번 대담을 연결해준 상하이 대학교의 왕광동 교수를 접대해 저녁 만찬을 가졌다. 향이 센 시앙차이도 먹어보고 냄새가 지독한 취두부도 먹었다.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니 모든 음식들이 다 먹을 만했다. 결국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세상을 편협하게 받아들이는 자기 안의 옹졸함이 아닐까. 이차는 유학생촌 앞의 노천에서 양꼬치에 맥주를 마셨다. 이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양꼬치 맛의 매력에 눈떴다. 양꼬치의 매콤함과 구운 마늘줄기의 담백함은 천상의 조합이었다. 깊은 밤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데, 좋은 사람들과 시끄럽게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생활의 여러 시름들은 잠깐 잊고 오직 즐거움으로 충만했다.

벌서 4일 째 날. 상하이 대학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이종민 교수의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상하이 대학에 도착한 우리는, 전날 만났던 왕광동 교수의 환대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대접받았다. 이제는 음식에 어느 정도 적응이 돼 황소개구리 요리 마저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날 자리에는 <<문화/과학>>의 편집인인 중앙대학교 영문과의 강내희 교수가 함께 했다. 그곳에 체류한 지 4개월째라고 한다. 그날 하루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서 좌파 지식인의 결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구소에 젊은 연구원들이 속속 모여들자 이종민 교수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발제문은  <<오늘의 문예비평>> 지난 여름호에 실렸던 「왕후이의 중국 개혁개방 서사에 대한 질의」였다. 이 글은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 왕후이의 사상적 변화의 의미를 되짚어 보면서, 그 변화의 바른 방향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다. 왕후이가 중국 굴기의 성공 요인으로 꼽은 두 가지, 즉 개혁개방 이전의 사회주의 시기의 경험과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언급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이종민 교수는 그것이 왕후이의 사상적 전회가 아니라 일관된 논리라고 이해한다. 바로 그 지속되는 부분(개혁개방 서사)에 대한 근본적 사유를 통해, 이종민 교수는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면서 최종적으로 왕후이가 구상하고 있는 인민민주주의 정치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안이란 ‘사회적 통합을 정치적 수단으로 재창조’하는 셰리 버먼 식의 사회민주주의의 길이다. 쉽게 말해 이종민 교수는 북유럽 식의 사회민주주적 복지국가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민 교수의 발제에 대해 토론을 맡은 연구원은 발표시간보다 긴 토론으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 그 무례한 열정은 중국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나에게도 아주 뜨겁게 전해졌다. 칭화대에서 왕후이의 지도로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그 토론자는 이종민 교수가 왕후이의 논지를 오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내희 교수는 토론자에게 사회주와 공산주의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고, 토론자는 역시 교과서적인 답변을 했다.

그 날 행사에 참석했던 젊은 연구원들과의 뒤풀이는 대단히 유쾌했다. 특히 낮에 왕광동 교수가 선물한 수정방을 꺼냈을 때의 열기는 뜨겁다 못해 활활 불타올랐다. 강내희 교수는 탁월한 술꾼이었고 이종민 교수는 엄청난 술꾼이었다. 지레 겁먹은 나는, 자작을 자제하며 젊은 연구원들의 건배 제의에 답례하는 술잔만 기울였다. 그날의 술자리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흥겹고 신명이 나는 자리였다. 열정적인 토론을 보여주었던 친구와는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차후를 기약할 만큼 정다운 교감을 나누었다.

자리를 옮겨 우리는 이차로 상하이대학 개천가의 노천 술집에서 양꼬치에 술을 마셨다. 강내희 교수는 흥에 겨워 가곡을 불렀고 모두들 즐거워했다. 분위기가 차분해지자 진지한 이야기들도 오갔는데, 강내희 교수는 이종민 교수의 발표에서 사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 부분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했다. 선생은 격앙된 어조로 “사민주의는 가능한 것이 아니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발제에서 이종민 교수는 왕후이에게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원리주의적 접근을 지양할 것을 제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종민 교수의 입장에서 보자면 강내희 교수의 비판은 사민주의를 수정주의로 보는 지극히 원리주의적 입장에 다름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토론은 한국의 좌파 지식인 내부의 논쟁과 갈등을 재연하고 있는 것 같아 무척 인상 깊었다.

흥이 깊었는지 그날은 이차에 만족하지 못하고 술자리는 삼차로 이어졌다. 드디어 나는 지쳤고, 자리를 피해 혼자 바람을 쐐며 개천 거리를 거닐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땐 강내희 교수가 민요를 부르고 있었는데, 특유의 소리 꺾임이 구성지게 들렸다. 모두들 웬만하게 지쳐 술자리가 파하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양꼬치에 맥주를 외치는 이종민 교수를 뒤로 하고 우리는 호텔로 갔다. 상하이에서의 마지막 밤, K는 “마지막인데 맥주 한 잔 해야지요?”라고 했고,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들고 숙소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

여행 내내 K는 출판사에 대한 생각들로 쉴 틈이 없었다.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했던 마지막 날 밤은 지난 시절을 더듬어 젊은 날의 자기를 추억하는 듯 했다. 늘 같은 패턴으로 되풀이되던 지겨운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풍물과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짧은 여행의 시간들, 그것은 말 그대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처럼 만의 해방감 속에서 유유자적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이 여행이 끝나더라도 K의 고뇌는 계속될 것이고, 나도 역시 세속의 어떤 어려움들로 자주 외로울 것이다. 대사동 백탑 주변에 모여 살았던 이덕무와 박제가, 아홉 살의 나이 차이에도 그들은 깊은 우정을 나눈 벗이었으며, 함께 연경을 다녀오기도 했던 그들은 이따금 운종가의 시끌벅적한 시정을 유람할 만큼 세속의 인정에 관심이 많았다. 나보다 열 살이 많은 K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우리는 책을 좋아하고, 그렇게 공통의 밑변 위에서 만나다보니, 어느새 이처럼 나이 따위는 무관한 벗이 되었다. 우리의 짧은 여행을 고난이라고 말할만한 그들의 여정에 빗대는 것이 무리인 줄 알지만, 이덕무와 박제가의 연경행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들의 삶은 그 고단한 여정 이후 어떻게 달라졌을까? K와 나에게 이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귀국과 함께 다시 돌아온 일상은, 이런 질문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변한 것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이 가혹한 시간들 속에서 이따금 상하이의 밤을 떠올릴 때, 나는 기꺼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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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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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복라면 2012.07.09 0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생님 여행기에 멋진 문장이 많아서 감탄하며 읽었는데 머릿속에 가장 오래 남는 건 왜 '양꼬치에 맥주를 마셨다' 인지ㅋㅋㅋㅋ선생님 양꼬치 왜 이렇게 많이 드셨어요?ㅋㅋㅋㅋㅋ 상해는 저도 언젠가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도시라 부럽네요!

  2. 전성욱 2012.07.09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응하지 못했던 양꼬치의 맛이 점점 좋아지는 것, 그것이 이번 여행의 포인트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행을 다녀왔으니 뭐라도 남겨야 할 것 같아 글을 썼는데, 글에서 언급된 분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네요^^;;

  3. 목련 2012.07.10 1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여행은 새로운 만남이죠. 좋아보이내요. 여행지의 표정들이 ... 잘보구갑니다^^

  4. 박형준 2012.07.10 2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정의 기록이 아닌가 합니다.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간이 되면 칭따오에서의 시간들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5. BlogIcon 비디아 2012.07.12 04: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성철입니다. 술기운에 이런 사진이 찍힌 줄도 몰랐네요. :) 기숙사 1층에서 에어컨 바람쐬며 서핑하다가 제 이름을 검색하다 블로그 발견! 주간 산지니를 비롯, 몇몇 재미있는 카테고리들이 있네요. 종종 놀러올게요! 부산으로 돌아가신 다음, 매일매일 무더위에 사우나하면서 지내고 있답니다. 근데 제가 다니는 학교가 푸동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나 봅니다. ㅋㅋ 생각해 보니 푸동대학이란 명문도 하나 생기면 근사하겠어요. 그리고 제가 나이에 민감했던 건, 두 분 교수님이 각각 한 분은 40대로, 한 분은 30대에 묻어가려는 경향이 엿보여 반박의 차원이었답니다. ;)

  6. 전성욱 2012.07.12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고, 너무너무 반갑습니다^^ 평생 잊지못할 추억의 시간이었고 좋은 인연이었습니다. 학교이름은 상하이에서도 헷갈리더니^^; 바로잡겠습니다. 내가 볼 때 형은 아주 젊어보였고 옷도 아주 캐주얼하게 잘 입으셨습니다^^ 한국에 오시면 꼬~옥 연락주시고, 내내 평안하십시오~

  7. BlogIcon 가로수길서점 2012.07.16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을 만드는 사람과 글을 쓰는 사람의 여행기?라는 말이 참 좋네요.
    여름휴가를 중국으로 가야할 것 같아요. 저희서점 페이스북에도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

  8. 온수입니까 2012.07.17 0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에 글을 공유해주셨더라구요. 멀리 있지만 이렇게라도 자주 왕래해요.

 

 

 

<은교>(정지우 연출, 2012)는 나쁜 영화다. 박범신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으므로 그것과의 관련성을 말 할 수는 없다. 다만 은교는 베아트리체가 아니고 그러므로 노시인 이적요는 단테가 아니다. 은교는 그저 어린 소녀고, 그래서 늙은 이적요는 청춘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절망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저 그런 일종의 탄로가(歎老歌)로 전락한다. “늙는다는 건 이제껏 입어본 적이 없는 나무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라 시인 로스케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는 벌이 아니다......” 결국 영화는 예술의 영원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동경을 외면하고, 육체의 노쇠라는 그 유한성에 편파적으로 집착한다. 그리하여 영혼에 대한 고담준론을 피하는 대신, 내러티브의 흐름은 젊은 육체에 대한 애착으로 집요할 뿐이다. 카메라의 동선은 게걸스럽게 은교의 몸을 훑기에 바쁘고, 그렇게 은교는 영화에서 시종 풋풋한 몸뚱이로 전시된다. 연출의 이런 불미함이 은교라는 인물을 성격 없는 육체로 만들어버렸다.

 

유한한 생명의 세계에서 넘치는 활력의 시간인 청춘은 아름답다. 그러나 몸에 대한 에로스로 축소된 청춘, 그 애욕에 달뜬 이적요는 치정의 번뇌로 고달플 뿐이다. 이런 번뇌 속에서 은교는 다만 관능적인 육욕의 대상이고, 제자 서지우는 연적이나 다름없다. 이런 가운데 극중의 소설 <은교>는 예술과는 무관한, 치정극의 서스펜스에 봉사하는 하나의 소품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 영화는 문학을 저급하게 사물화한다. 이적요가 때때로 펼쳐 읽고 있는 시집은 그 유명한 문지시선이고, 서지후가 스승이 쓴 <은교>의 원고를 도적질 해 발표한 매체는 <<문학동네>>2011년 가을호다.(박범신의 장편소설 <<은교>>는 문학동네에서 발간되었다.) 서지우는 이 작품으로 문단의 인정을 받고 상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문학사상에서 주최하는 제35회 이상문학상이었다. 그리고 이적요가 서지우를 대신해 써 준 <<심장>>이라는 소설은 80만부가 넘겨 팔렸고, 극중에서 서지우는 그것이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에서 다 1등을 했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이런 고유명은 상품명에 다름없으며, 소녀의 몸이 볼거리가 되는 것처럼 문학은 여기서 저 유명한 브랜드들의 후광을 받으며 매혹적인 상품으로 소재화되었다.

 

이적요와 서지우, 그러니까 사제 간의 그 영향의 불안’(해롤드 블룸)에 대한 이전투구는 그나마 이 영화에서 볼 만한 장관이다. 예술은 홀로 이룩하는 역사다. 그래서 예술가는 언제나 심심한 고독 속에서 괴롭게 희열한다. 그 지독한 외로움이 제자를 받아들여 키우게 하고, 스승을 떠받들어 모시게 한다. 그러나 모든 제자는 언제나 저 네미 숲의 황금가지로 스승의 등을 찌른다. 그러므로 존경과 애정으로 단단한 사제의 정이란, 늘 그렇게 파탄 날 운명을 숨기고 가증스럽게 따뜻하다.

 

영화를 보기 전, 사실 나는 <은교>에게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을 기대했다. 물론 그런 일방적인 기대는 폭력적이고 또한 무례하다. 하지만 <은교>는 지극히 피상적으로 젊은 육체에 대한 갈망을 표현할 따름이었고, 그리하여 영원한 청춘의 꿈은 무망한 것이 되고 말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부터 에로스(eros)는 영원한 청춘에 대한 동경이었다. 에로스는 의 유한성을 초극하는 영원불멸에 대한 동경이다. 그러므로 에로스의 대상(타자)의 영원불멸을 위한 매개적 존재다. 그렇게 주체는 타자를 동일성의 힘으로 끌어안는다. 낡고 진부한 것은 예술일 수 없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늙은 작곡가 아센바하의 한 소년에 대한 동성애적 정념은, 예술의 영원성으로 자기의 유한성을 초극하려는 형이상학적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그 영화의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생생하다. 그러나 <은교>는 쉽게 망각되고 말 그런 영화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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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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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이 있던 어느 사서로부터 청소년 인문학 강좌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다. 조금의 망설임 뒤에 바로 수락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기회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것은, 쓰고 읽어야 하는 계기들에 나를 접속함으로써, 그 부담 속에서 쉬지 않고 공부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번다하지만 그 많은 청탁들에 쉬이 응하곤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지식의 전체주의적인 통합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연대와 교섭이다. 그래서 첫 책으로 최재천 교수의 <<통섭의 식탁>>을 골랐다. 백양산 자락 어딘가에 있는 구포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마치 등산을 하는 것처럼 유쾌했다. 토요일 아침 도서관 앞마당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은 한가로워 보였고, 나도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약간의 설렘까지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강의실에서 들어갔고, 나는 그렇게 처음 만난 아이들과 서로 다정하게 상봉했다.

최재천 교수는 스스로를, 시인을 꿈꾸다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생물학자로 소개한다. 자기의 근본이 통섭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통섭(統攝)은 저자의 지도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consilence'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든 조어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건너기 힘든 장벽에 대해서는 C.P.스노우의 <<두 문화>>가 이미 고전적인 견해를 내 놓지 않았는가. 굳이 기존의 문제의식을 마다하고 신조어를 유통하는 데 대한 여타의 정치적 견해들에 대하여, 저자는 여러 차례 그 이유를 해명하곤 했다. ‘통합이 물리적이라면 융합은 화학적이고, 그러므로 자기는 살아 움직이는 학문 간의 소통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으로 생물학적인 통섭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비빔밥을 예로 들며 우리가 통섭에 능한 민족이라고 설명한 대목에 이르면, 그의 통섭 개념이 유기적인 전체의 조화를 소망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예감하게 된다.

56권의 저작에 대한 감상과 단평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개의 책들은 동물 생태에 대한 것으로 집중되어 있지만, 때로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저술도 포함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서양식의 서빙 순서로 유기적으로 짜여있다. 유기적 전체의 서술은 생명사랑(biophilia)’의 실천을 통한 종 다양성의 보존이라는 저자의 생각으로 수렴된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 개발과 성장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교란하는 데 대하여, 생명 존중과 지속 가능한 삶이라는 테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응대한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의 교만함을 드러내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버리고, 공생과 협동의 삶을 지향하는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로 거듭날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이 모든 주장을 다른 생명에 대한 사랑이 곧 나를 사랑하는 길이라는 문장에 고스란히 담았다.

책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표현이 둘 있다. “가장 훌륭한 공부는 공부하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알면 사랑한다라는 문장이다. 인간의 교만함을 반성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앎에서 사랑으로의 비약에 담긴 참뜻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처럼, 나도 모르게 알아가는 기쁨 속에서, 앎은 지식의 축적을 통한 주체의 오만이 아니라, 세계(생명)에 대한 겸허한 사랑으로 따뜻해진다. 그런 앎의 과정 가운데, 우리는 개미와 벌과 침팬지 같은 군집 동물들의 생태로부터 사랑과 정치의 어떤 이치를 생각하고, 이타적인 행위의 심연에 자기를 위한 이기적 동기가 있음을 배운다. 배움의 길엔 응당 앞서 간 선각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인간과 동물의 우정과 교감을 감동적으로 보여준 제인 구달이나, 종의 보존이라는 DNA의 작용을 해부한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누구보다 생물학적 앎의 위대한 선각자로 다윈을 맨 앞자리에 놓는다. 비글호를 타고 위대한 앎의 여정을 떠나, 드디어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꽃피운 진화론, 그것은 자연 선택설성 선택설로 구체화되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결국 환경에 적응한 하나의 개체일 뿐이며, 이런 상대적 인식 안에서 자연 생태계의 모든 종은 질적으로 평등하다. 나아가 저자는 인간이 자연에서 배워야 함을 역설한다. 자연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학문으로서의 의생학(擬生學)’이 그것이다.

최재천 교수의 글은 쉽고도 투명하다. 아마, 사유보다는 사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조화와 공생의 정신에 투철한 그 생태적 사유에는, 미시적인 생존투쟁의 참혹함에 대한 주의가 결여되어 있다. 생명이라는 것을 너무 거시적인 관점으로 보면, 구체적인 실감을 놓치고 일종의 관념으로 추상화된 이념으로 기운다. 그러므로 자연과 생명의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거시적 시야와 함께 조화 불가능한 실태에 대한 냉정한 감각의 수양이 필요하다. 

강의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이어서 질의응답이 있었고, 한 학생이 과학의 대중화와 다른 대중의 과학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질문했다. 최재천 교수는 카이스트의 정재승 교수와 더불어 한국에서는 꽤나 명망 있는 과학 저술가다. 본문에서 그는 과학의 대중화를 빌미로 과학에 물을 타서는 안 된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과학의 대중화를 과학의 통속화와 구분하고 있다. 이런 자의식은 충분히 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학생의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설명했다. 어려운 과학적 지식을 대중들의 눈높이로 낮추어 전달하는 것이 과학의 대중화라면, 대중의 과학화란 대중들의 눈높이를 과학의 심층 지식으로 끌어올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과학적 사유를 실천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그렇게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또 시간이 한참 흘러버렸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진정으로 즐거운 일이다가장 훌륭한 공부는 공부하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는 것이다.” 

'기타 > 전성욱 평론가의 문화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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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온수입니까 2012.07.05 1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구절 너무 와닿네요.가장 훌륭한 공부는 공부하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는 것이라.

 

<건축학 개론>(이용주, 2012)은 기억에 대한 영화다. 기억이 환기의 힘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되살려내는 힘이다. 그러나 기억이 고착의 힘으로 작용하면 그것은 붙들어 매는 폭력이 된다. 세속의 이해는 이 영화를 풍속의 고고학으로 향수하지만, 실로 그 향수가 바로 기억의 나쁜 사례인 것이다.

음대를 다녔지만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여자는, 그 이루지 못한 꿈을 지체 높은 남자와의 결혼으로 보상받으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결혼이 오래가기는 힘든 법. 여자는 가까스로 두둑한 위자료를 받아내고, 이제는 첫사랑을 찾아 기원의 자리를 더듬는다. 덧없는 이상을 좆아 살아왔던 여자에게, 세속의 난삽함이란 그렇게 상처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철들지 못한 여자는, 세속을 버리고 기억으로 만든 과거의 어떤 장소로 들어가 숨고 싶다. 다시 말해 ‘첫사랑고향의 옛집이란 여자의욕망이 빚어낸 기원으로서의 기억이 터하는 바로 그 장소다.

기원에 고착함으로써 세속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자. 그러나 남자는 그 애달팠던 정념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여자를 단번에 알아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기원에 대한 그런 무심함이야말로 남자의 미덕이다. 여자가 들추어내고 자극한 기억 속에서 첫사랑의 정념은 다시 되살아나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남자의 현재는 결혼과 이민으로 펼쳐질 미래의 시간으로 충만하다. 남자에게 과거의 시간들은 가난과 실연의 상처로 얼룩져 있으며,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은 부담이고 압박이다.(제주공항에서의 고성(高聲)은 그 부담과 압박에 대한 일종의 발작이다.) 그 고통스럽고 진부한 세계로부터 벗어나고픈 열정이 탈주의 공간을 열어준다. 이처럼 남자에게 삶이란 공간(space)의 구축인 탈주이지만, 여자의 삶은 기억의 장소(place)에 대한 고착이다.

형이상학적 기원으로서의 고향집에는, 키를 쟀던 벽의 표시와 수돗가 바닥의 작은 발자국이라는 흔적(trace)이 남아있다. 그 흔적은 현실에서는 채울 수 없는, 영원히 상실해버린 그 무엇에 대한 대리보충의 대상물이다. 여자에게 건축은 공간의 장소화이며, 그것은 결국 저 흔적들을 보존함으로써, 채울 수 없는 욕구를 채우려는 덧없는 시도다. 아버지의 '상실’(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 두려움 속에서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여자는 절박했을 것이 분명하다. 출렁이는 바다가 앞에 보이고 유년의 기억이 흔적으로 남아있는 제주의 고향집, 그 집을 첫사랑이 다시 복원해 짓는 이 프로젝트는, 여자의 그런 절박함으로 기획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자는 상실의 위기로부터 벗어나 다시 행복할 수 있을까? 여기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그렇게 진부한 노래로 들어서는 안된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그러나 여자는, 마음이 지쳐도 기억은 그저 흘려보냈어야 했다. 그러므로 여자는 병든 아버지와 함께 그렇게 그 모든 흔적들의 집에서,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기억의 습작>을 들을 때, 그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지 말았어야 했다.

남자는 어머니와 첫사랑을 뒤로 하고, 지금의 사랑에 대한 충실함으로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너무 커버린 내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나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그는 그렇게 탈주함으로써 공간을 구축한다. 그러나 여자는 흔적들로 가득한 그 장소에서, 옛시절의 그 달콤한 기억들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을까? 여자는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었지만, 언젠가 아버지는 죽고, 첫사랑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기억으로 만든 향수의 장소가 진정한 위로가 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건축은, 때로 파괴함으로써 지어 올리는 그런 탈구축(deconstruction)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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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복라면 2012.05.29 0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영화가 보통 남자들이 많이 공감하는, 남자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첫사랑에 대한 영화라고들 하던데 이런 비판적 시각도 신선하네요. 기억, 구축, 탈주...저라면 아무리 싸게 해준다고 해도 첫사랑에게 집을 지어달라기는커녕 연락도 못할 거 같아요!

  2. BlogIcon 엘뤼에르 2012.05.29 1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제목은 건축인데, 전선생님은 '때론 파괴함으로써 지어올리는 탈구축'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시군요. 뭔가 말은 어렵지만...영화도 평론가님의 해설을 읽으면서 바라보니 한층 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게 되네요.^^





나에게 영화의 재미, 그러니까 줄거리나 볼거리에서 그저 얻는 즐거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다시 능동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영화의 존재론적 , 그 놀라운 향락의 희열에 눈 뜨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고다르였다. 말하자면 나는 고다르의 영화를 만나기 이전에 영화를 통해 사유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타르코프스키는 너무 아득했고, 베리만은 너무 현학적으로 느껴졌으며, 무엇보다 나는 영화를 사유의 대상으로까지 생각할 만큼 영화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격렬하리만큼 작위적으로 분방한 고다르의 영화는, 노모스의 극한에 대한 열정으로 언제나 뜨거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정념이 영화에 대한 내 사념의 단초였고, 드디어 그것은 예술의 개념에 대한 내 상투적 관념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처음 본 것은
<내 멋대로 해라>(1959).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로 시작되는 <<이방인>>(1942)의 첫 구절. 카뮈는 정말 과감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통곡해야 마땅한 사건을 앞에 두고, 오늘과 어제라는 시간 사이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 허세를 떨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의 감정을 인과적인 상투성으로 규율해온 낡은 관습에 대한 냉소다. 다시 말해 고다르가 처음 만든 영화는, <<이방인>>의 저 도발적인 첫 구절을 영화라는 형식으로 다르게 되풀이한 것이었다. 이후로 나는 <비브르 사 비>, <여자는 여자다>, <사랑과 경멸>, <미치광이 피에로>, <알파빌>,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만사형통>에 이르기까지, 낡고 진부한 그 모든 비루한 체제/체계에 대한 고다르의 유쾌한 도발과 전복으로 즐거웠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나는 1930년생의 고다르가 2010년에 만든 <필름 소셜리즘>을 보았다. 예술가의 젊은 영혼은 육신의 노쇠마저도 창작의 새로움으로 전유하게 만든다. 그렇게 고다르는 한결같이 젊은 사람이었다.


자막이 없는 영화라서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은 차라리 말이 아니라 웅얼거림이었고, 소음이 아니라면 그저 소리였다. 그리고 영화에서 단어는 불완전한 형태의 문자조합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라는 언어의 물질성은 의미의 장벽을 난폭하게 찢어버리고, 어느 새 나에게로 거칠게 난입해 들어왔다. 이 영화에서 언어란 독해의 대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탈존하는 것으로 유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Des Choses(사물들)’와 ‘Des Paroles(언어들)’이라는 챕터의 작명에서 시사된 것이었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언어학적 의미의 해독 불가능성은, 영화의 감상을 방해하기는커녕 영화의 해독을 도와주는 것으로까지 여겨졌다.


그의 영화가 자주 그렇듯
<필름 소셜리즘>은 인과성의 합리로 배열되는 서사의 흐름에 무관심하다. 이미지들의 산만한 배치가 이미지들 사이의 충돌을 가져오고, 그 충돌이 만들어내는 불연속의 운동은 세계의 시간을 낯설게 조직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 들뢰즈가 사유의 충격(noochoc)’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 사유의 가능성을 창조해내고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며 우리의 사유를 진동하게 한다.”(쉬잔 엠 드 라코트, 이지영 옮김, <<들뢰즈: 철학과 영화>>, 열화당, 2004, 72.) 영화로 하여 이처럼 세상을 다르게사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넘실거리는 바다
, 그 위로 유람하는 호화로운 배. 저 바다의 물은 모든 경계를 출렁임 속에서 지워버린다. 너와 나,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엄격한 구별로 유치하다. 그리하여 유람선 안의 사람들을 찍은 영상이 때때로 매우 거칠고 조잡하게 나타날 때, 우리는 고다르의 어떤 적의를 직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명한 적대로 정치적인 것’(칼 슈미트)을 정의할 때, 고다르는 영상의 정지와 흐름, 화면의 선명함과 불투명으로, 혹은 사운드의 지속과 단속 그리고 무음과 소음의 선명한 대비로 정치적인 것을 실현한다. 고다르는 언제나 그렇듯 이 영화에서도 푸른색과 붉은 색을 즐겨 사용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소품들과 인물들의 복장으로 드러나는 그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 아닐까. 아니면 박애(화이트), 자유(블루), 평등(레드)을 의미하는 프랑스 국기의 상징성을 재현한 것이거나.


육지
, 그러니까 땅위의 삶. 이집트, 팔레스타인, 오뎃사, 나폴리, 바르셀로나. 모두 학살과 전쟁, 폭력의 역사가 흔적으로 남은 장소들이다. 자료화면으로 보여주는 과거와, 다시 돌아와 보여주는 현재의 시간. 언뜻 스쳐지나가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영상,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 인간의 역사는 잔혹한 분별 속에서 약탈과 살육으로 얼룩져 있다. 인물들의 대사와 내레이터의 해설 그리고 인터뷰. 책의 어떤 구절에 대한 인용. 발자크와 라신, 그리고 비극의 원리. 심지어 알랭 바디우까지. 난삽하게 절합되어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유기적인 인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 세계의 비참함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한다. 이념과 자본의 욕망으로 들끓는 폭력의 세기, 그러니까 <필름 소셜리즘>은 그 속악한 세계의 구원을 바라는 한 유럽 좌파 예술가의 고해성사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고 나는 숙연한 마음으로 생각들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에 대한 단상을 남긴다.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그 예술이 촉발시킨 사유의 운동이다.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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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품이란 무엇일까? 어쩌다보니 심사라는 걸 하게 되었고, 그 심사라는 ‘사건’ 속에서 나는 ‘좋은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물음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어느 강연에서 ‘비평은 비교다’라고 했던 김윤식 선생의 말씀을 기억한다.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비평은 절대적인 척도로 환원될 수 없으며, 가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읽은 작품들 간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비평이 올바른 해석의 감수성으로 단련되기 위해서는, 읽고 또 읽어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의 지평을 넓혀야만 한다. 그것은 결국 치열한 감상의 수련을 통해 해석의 주체로서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좋은 작품은 그렇게 좋은 사람만이 비로소 어렵게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비평가는 작가나 작품에 좋고 나쁨을 따져 묻기 전에,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공부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 또 얼마나 더 많은 탐독의 수련을 거쳐야만 할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미한 나는 강동수의 <<금발의 제니>>에서 좋은 어떤 면을 본다.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이 소설집이 나를 매혹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 소박하면서 단아한 문장이었다. 과잉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애써 멋 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표현할 줄 아는 절제의 그 자의식에 공감했다. 비우면 채워지는데 채우려다 망치는 것은 덧없는 열정 때문이다. 열정이 지나쳐 탐욕으로 가득한 문장에 매혹을 느끼는 것은 역시 그것을 읽는 자의 헛된 자의식, 예의 그 탐욕 때문이다. 그런 탐욕에 물든 헛된 자의식은 화려한 기교에 끌리는 만큼 소박한 표현의 미덕에는 둔감하다. 그러나 소박함의 아름다움이란 과잉과 결여를 넘어선 여하한 경지에서나 겨우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집의 문장들이 주는 소박함 역시 단순함이나 평범함이 아니라 오히려 비범함의 결과다.


하지만 언제나 완벽함이란 천상의 몫인가 보다. 지상의 우리 인간에게서 천의무봉은 일종의 규제적 이념일까? 문장이라는 살결과 함께 구성(plot)이라는 골격으로 소설의 신체는 이루어진다. <<금발의 제니>>는 보드라운 살결의 문장들로 사람을 매혹시키지만, 그 속사정은 좀 더 단단해져야 할 것 같다. 치명적인 것은 대개의 단편들이 과거의 어떤 인연으로부터 이야기를 전개하는 일종의 유형화된 서사전략이다. 그것은 자칫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수도원 부근>, <7번 국도>, <호반에서 만나다>, <금발의 제니>는 모두 옛사랑의 기억이 현재를 규정한다. 사랑의 기억은 아니지만, <태풍> 역시 폭력적인 옛 기억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한다. 과거의 기억에 구속되어 있는 현재는 미래의 시간으로 달아날 수 없는, 그러니까 길이 막혀버린 막다른 골목과 같다. 현재는 미래로 개방되지 못한 채 과거의 규정 속에서 폐쇄적으로 고착된다. 이처럼 답답한 서사의 구성은 사건의 복잡성과 특이성들을 정형화된 이야기의 틀 속에서 질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틀을 벗어날 때 강동수의 소설은 아연 활기를 띤다. 지역 문단의 비루한 행태를 신랄한 풍자로 그리고 있는 <청조문학회 일본 방문기>가 그렇고, 폭력과 열등감으로 얼룩진 참담한 비극 <아를르의 여인>이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현재의 활력을 무력화시키는 그 옛날의 기억들은 강동수의 소설에서 결정적인 급소다. 급소란 가장 위험한 곳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부위다. 그래서 나는 그 위험한 장소가 어떤 불온한 도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부각될 수 있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당신들과 함께, 그렇게 우리는 좋은 관계 속에서 좋은 작품으로 이어져 좋은 사람으로 되어 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학의 유의미함이란, 관계를 만들어 우리를 이어주는 그 '공감'의 기능에 있다.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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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형준 2012.01.02 1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거의 1년만에 다시 만나게 된 전성욱 평론가의 문화읽기가 반갑습니다. "비평은 절대적인 척도로 환원될 수 없으며, 가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읽은 작품들 간의‘관계’속에서 구성되는 것"이기에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탐독의 수련을 거쳐야만 할 것"이라는 문장을 수첩에 옮겨 놓습니다. 다시 문학적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당신들과 함께, 그렇게 우리는 좋은 관계 속에서 좋은 작품으로 이어져 좋은 사람으로 되어 갈 것"이라는 문장을 평론가의 신념이나 각서가 아니라 연서에 가깝게 읽었습니다.

  2. BlogIcon 박변덕 2012.01.02 1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딴 건 모르겠고 <청조문학회 일본 방문기>는 제목만 들어도 재밌을 거 같은데요?ㅎㅎ

  3. 카라 2012.01.02 2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가을이 깊어간다. 날이 차가워지고 어두운 시간이 길어지는 기온의 변화가 나의 몸과 마음에도 큰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킨다. 우주의 변화는 이처럼 내 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때는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지고 따라서 마음이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나는 요즘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심란하다. 이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엇에라도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할 것만 같다. 나는 때마침 공연 중인 연극 <바보각시>를 관람하는 것으로 마음을 추슬러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2010년 10월 30일 저녁 7시 30분. 후배들과 저녁을 함께 먹고 거제에 있는 가마골 소극장에서 <바보각시>를 관람했다. <오구>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의 작품인 <이순신>에 이르기까지 이윤택의 작품들을, 연희단 거리패의 공연을 자주 관람해왔던 나에게 역시 이 작품은 그 낯익음, 어떤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전통과 현대를 교섭시키려는 이윤택의 열정은 <바보각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맹인 악사의 노래와 하모니카 연주가 서구 전통극의 코러스를 대신한 것이라면 극 전체의 구조는 씻김굿을 본뜬 것이다. 극의 절정부에서 현대인의 악마적 본성을 표현할 때는 전통 연희인 탈춤의 형식을 가져왔다.


이 작품은 전통극의 형식을 현대화하면서 연극이 초연되었던 1993년 당시의 구체적 정황을 담아내려 애쓴다. 이른바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냉전이라는 이념적 대립구도가 해체되기 시작하던 때, 누군가에게 역사는 종말을 고한 것처럼 보였고 이제 세상은 자본의 신천지 속에서 즐거운 한 때를 열어갈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세상의 그런 변화는 세계의 종말이라는 묵시록(Apocalypse)으로 여겨졌고 이제 삶은 절망으로 기울어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만이 남은 듯 보였던 그 때에, <바보각시>는 철지난 이념이나 세속화된 종교 따위가 가짜 희망을 내세우며 판치는 비루한 세태를 냉소하면서 초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그 냉소는 초연 당시의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제 그런 식의 냉소는 하나의 상투적 유형이 되어버렸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교섭이라는 발상 역시 지금에 와서는 그리 신선한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보각시>는 한 시대의 특수성 안에 머물고 만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내가 본 <바보각시>에서는 초연 당시의 시대적 조건을 보편으로 비약시킬만한 연극적 에너지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다만 나는 이 연극이 예수의 수난사를 바보각시의 수난사로 재연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인류의 원죄를 자기의 죽음으로 대속함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준 예수의 수난사는, 이 연극에서 타락한 현대인들의 속악한 욕망과 더러운 죄악들을 제 몸 안에 잉태해 사산하는 바보각시의 수난사로 다르게 되풀이된다. <오구>의 대단원에서 상여가 나가면서 현세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것처럼, 죽어서 사산하는 바보각시의 수난은 마지막에 이르러 장례와 함께 인간들의 그 모든 죄악을 씻어간다. 이런 연극적 형식은 몇 달 전 보았던 <창작뮤지컬 이순신>(이윤택 작, 연출; 2010년 6월 11일 저녁 7시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도 이어졌던 것 같다. 그 연극의 대단원이 임진왜란이라는 대재앙을 이순신이라는 한 개인의 죽음으로 치환하여 해소하는 씻김굿의 형식이었던 것처럼, 바보각시의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폭력과 패악을 대속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은 ‘우리 모두 사랑합시다’라는 맹인의 대사로 끝난다. 그러므로 <바보각시>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찬양했던 신약의 복된 소리를 한국적 감수성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협애함을 깨뜨리고 보편의 사랑이라는 신약의 복음으로 비약할 수 있었던 기독교라는 종교와 이 연극 <바보각시>를 서로 대등하게 맞세울 수 있을까? 예술로 종교를 넘어서고 싶었던 이윤택의 예술가적 열정은 아직 종교의 보편이라는 위대한 경지를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뜨거웠던 것은 아닐까? 내면적 성찰이 사회적인 정의로 이어지거나, 자기에 대한 탐구가 보편적인 것으로 일반화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려운 일을 결국 해내고야 만 사람들을 일컬어 기꺼이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깊어가는 가을, 지금 나의 이 심란한 마음은 개인적인 우울을 넘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각성의 계기로는, 그러니까 진정한 멜랑콜리에는 미달하는 것이다. <바보각시>를 보고 나는 생각한다. 보편에 이르는 길은 참으로 멀고 아득하구나.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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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투게더'

'열대병'

'브로크백 마운틴'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1997), 아핏차퐁 위라세타쿨의 <열대병>(2004) 그리고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 이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그 사랑이 슬픈 이유는 그들의 정념이 어떤 완고한 장벽에 가로막혀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저 영화들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애 영화, 이른바 퀴어 시네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은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처럼 서럽다.


모든 사람에게는 삶을 누릴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질서와 규율을 좋아하는 문명의 요구에 자주 제약되곤 한다. 문명은 야만의 퇴치를 빙자하면서 사람의 활력을 이런저런 제도적인 완력으로 제압한다. 그래서 야만으로 낙인찍힌 모든 비루한 것들은 문명 이전의 순수한 자연이라는 관념에 이끌리기 마련이다. <해피 투게더>의 이과수 폭포, <열대병>의 정글, <브로크백 마운틴>의 브로크백 설산은 문명을 압도하는 대자연의 위엄을 드러낸다. 이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문명이란 그리고 그 유치한 분별지들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살결에서 느끼는 깊은 즐거움과 그리움 속에서 얻는 서로에 대한 행복한 끌림의 감각들은 삶이, 누려야 마땅한 무엇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운다. 그럼에도 현실은 지극히 부조리하다. 언제나 소수의 삶은 다수적인 것의 횡포로 피멍들어있다. 타인의 행복을 질시하는 옹졸한 마음들이 모여 다수적인 것을 구성할 때, 그 횡포는 소수에 대한 잔혹한 폭력으로 비약하기 쉽다. 슬픔을 끝장내고 피멍든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행동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올바른 인식의 훈련이 있어야 한다. 난삽하고 어렵지만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제적 이성애 체계와, 성정체성 개념을 확립한 담론 범주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 특별한 동맹은 무엇인가? 만일 ‘정체성’이 담론적 관행의 결과라면, 젠더 정체성은 어느 정도까지 섹스, 젠더, 성 습관, 욕망, 즉 강제적 이성애로 규명될 규제적 관행들 사이의 어떤 관계로 구성될 것인가? 이런 설명은 우리를 또 다른 총체화의 틀로 되돌아가게 하는가? 강제적 이성애가 젠더 억압의 획일적 원인인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로 야기된다는 또 다른 총체화의 틀 말이다.” <<젠더 트러블>>, 117쪽.


사실 이런 생각은 놀라운 통찰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의 기원을 ‘강제적 이성애 체계’와 ‘성정체성 개념’에서 찾아왔지만 버틀러는 그것이 결국은 또 다른 편견에 지나지 않다고 말해버린다. 다시 말해 그런 담론들은 미리 정해진 ‘총체화의 틀’ 속에서 그 편견의 부정성을 확고하게 증명해버리는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를 바라보는 편견의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저 본질의 형이상학과 결별해야 한다. 잔혹한 문명의 폭력에 대항해 대자연을 맞세우는 따위의 방법은 결국 그 본질의 형이상학에 갇혀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문명을 피해 자연 속에서만 허용되는 동성의 사랑이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 자연이란 문명의 폭력에 지친 영혼에 짧은 위안이 될 수는 있겠지만 사람은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관념의 자연 속에서만 살 수가 없다. 안타깝지만 동성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라도 문명의 대낮을 활보할 수 없다. 그렇게 될 때 이성애라는 다수적인 사랑의 형식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험한 존재로 남아야 한다. 인지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의 불온한 존재성은 다수적인 삶의 형식을 자극하는 위험한 도발이다. 그 도발이 언제나 위험한 것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동성애가 소수적인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정되고 다수의 삶 속에서 평온해질 때 그들의 사랑은 진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외로움 속에서 애틋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랑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세상에 기여한다. 다수적인 것이 될 수 없는 서글픈 운명으로 당신들의 사랑은 오랫동안 숭고할 것이다.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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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형준 2010.09.24 17: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로움 속에서 애틋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랑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세상에 기여한다."는 비평가의 감성적 통찰. 균열 지점을 응시하는 소수자의 삶을 해석해내는 통찰력, 이는 분명 비평가의 감성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 평생, 하나의 대상을 향해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어느 순간에 쉽게 그 열정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방향을 돌려 다른 대상에 열정을 쏟게 마련이다. 열정이란 사실 이처럼 변덕스럽다. 그러므로 우리는 긴 세월을 견뎌 무엇 하나에 그의 삶을 오롯이 바친 사람들을 볼 때 놀라움을 참지 못한다. 때로 그것은 단지 놀라움에 그치지 않고 어떤 경이로움, 그리고 마음의 깊은 존경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20세기 세계영화사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에게서 그런 마음을 느낀다.


지금 해운대에는 무더위를 피해 모여든 인파들로 북새통이다. 나는 그 인파들을 피해 해운대 인근의 ‘시네마테크 부산’으로 간다. 지금 거기선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2010. 8. 10-8. 29)이 한창이다. 몇몇 작품은 35mm 필름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라 마음이 설렌다. 내가 설렐 정도로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의 영화는 내가 본 어떤 누구의 작품들보다 문학적이다. 선명한 이미지와 휴머니즘을 드러내는 다이내믹한 서사는 그의 영화의 분명한 개성을 표현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리어왕>을 일본의 중세로 가져와서 만든 <거미집의 성>(1957)과 <란>(1985),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뻬쩨르부르크를 훗카이도로 옮겨서 만든 <백치>(1951)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주정뱅이 천사>(1948)에서 구로사와의 페르소나라고 할 만한 미후네 도시로가 맡았던 젊은 깡패 마츠나가의 그 광기어린 파멸, <이키루>(1952)에서 역시 구로사와의 많은 작품에 출연했던 시무라 다카시가 연기한 와타나베의 죽음이 묻고 있는 삶의 의미, 이런 것들은 정말 어떤 소설만큼이나 문학적인 감성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나는 시네마테크의 커피 테이블에 앉아 구로사와의 자서전을 읽는 가운데 그의 영화가 가진 문학성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그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아마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힘은 기억력일지도 모르겠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아버지의 사무라이 기질, 어릴 때부터 심취했던 검도의 매력, 중학교 시절 관동 대지진의 현장에서 보았던 끔찍한 주검들과 그로 인한 공포, 뭐 이런 어린 시절의 체험과 기억들은 분명 그의 예술적 상상력의 중요한 발원지다. 아니, 그는 자기의 지나온 삶 전부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일 만큼 영화는 곧 그의 삶에 육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감독이 되기 전까지의 자신의 삶을 영화의 길을 예비했던 운명의 시간으로까지 생각한다.


“미술, 문학, 연극, 음악, 그 밖의 여러 예술들에 열렬히 심취했던 나는, 영화 예술을 구성하는 온갖 요소들로 머리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라는 예술이 내가 배운 이 모든 것들을 다 활용해야 되는 매체인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그 무슨 운명이, 내가 걷게 될 인생의 길에 대해 그토록 나를 잘 준비시켜 줬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런 사후적인 생각은 현재를 합리화하는 일종의 착각일 수 있지만, 영화의 길로 들어서기까지의 그 모든 방황의 시간들은 영화와의 만남과 함께 위대한 준비의 시간으로 되살아난다. 중요한건 그 방황마저도 유쾌하게 역전시킬만한 그의 뜨거운 영화 사랑이다. 그는 1943년 처녀작 <스가타 산시로>로 시작해 여든넷의 나이에 만든 <마다다요>(1993)까지 50년 동안 모두 31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우리들에게 그 인생이 오롯이 영화에 바쳐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 “나에게 영화를 뺀 합계는 0일 뿐이다.”라고 한 그의 말은 과연 과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예순하나의 나이에 영화제작의 어려움을 느끼고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에게 영화 창작의 어려움은 곧 삶의 곤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작품 <마다다요>를 끝내고 5년 뒤인 1998년에 여든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저 오랜 시간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을 놀라운 열정으로, 마지막까지 진정한 사랑을 갖고 간다는 것은, 결코 누구에게나 흔한 일이 아니다. 지금 이 무더운 열기 속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보러 가는 길은, 바로 그 예외적인 인간의 위대함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지금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바로 그것을 향해, 과연 당신은 언제까지 그 열정을 쏟아낼 수 있겠는가? 쉽게 지치고 또 쉽게 매혹당하는 우리들에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한다는 것의 위대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Posted by 전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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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산지니북 2010.08.24 1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갑습니다. 산지니 블로그 필자가 되신 것 축하드려요.^^
    진지하고 재밌는 문화 이야기 앞으로도 많이많이 기대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