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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란 출구조차 막힌, 이 시대의 자화상과 재난의 메아리 (경향신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1. 4.




160층에 이르는 초호화 백화점, 매장에서 철문을 열면 들어서는 비상계단에 한 가족이 갇혔다. 아무리 내려가고 또 올라가도 계단은 끝이 없고 문은 열리지 않는 이곳에서, 동반자살을 결심했던 가족은 어떤 선택을 할까.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을 쓴 김비씨(44)는 서른에 여자가 된 트랜스젠더 소설가다. 김씨는 위태로운 삶에 관한 이야기나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삶에 관한 소설과 에세이를 꾸준히 써왔다. 이 책은 김씨의 4번째 장편소설이다.

여섯 살 아들을 둔 부부,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은 마지막 추억을 위해 백화점 레스토랑을 찾았다가 건물 비상계단에 갇힌다. 비상계단에 들어선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수와 지애 부부, 아들 환은 160층 중 몇 층으로 이곳에 들어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택배기사로 일하다 허리가 망가진 남수, 근무력증을 앓아 매사 무기력한 아내 지애, 뇌 손상을 가지고 태어난 여섯 살 아들 환. 살 이유가 없어 죽으려던 이들이지만 붉은 비상등 빛을 받은 계단만이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지고, 어느 층의 문도 꿈쩍하지 않는 이곳에 갇혀서야 꼭 살겠다는 의지가 찾아온다. 그것은 철문 밖 삶에의 의지나 희망이 아니라, 실패만 했던 인생에서 적어도 죽음만큼은 내 손으로 끝내겠다는 욕망이다. 자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에서, 남수는 세상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열리지 않는 문이 끝이라고 믿지 않기에 일어선다.

남수는 달동네에서 자랐다. 술에 취해 주먹을 휘두르던 아버지는 길에서 죽었고 어머니는 일찍 도망쳤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살면 보상받으리라 믿었지만 삶은 제자리였다. 아내 지애는 언제나 이불 속에 누워 등돌리고만 있었고, 아들 환은 희망이 아니라 쇠사슬이었다. “철컹거리며 무겁게 그를 짓눌러, 마침내 외마디를 듣고야 말겠다는 신의 겁박이었다.” 마지막엔 택배기사로 매일 수백 개의 계단을 올랐지만 남은 건 병과 빚뿐이었다.

출구를 찾으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중, 남수네는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지반이 침하되면서 건물이 기우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한순간에 비상계단에 갇혔다고 했다. 가슴이 달린 스무 살 청년 수현, 비정규직인 20대 여성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50대 명식, ‘일류대학 교수님 사모’지만 행복하지 못한 해숙 등 모두 사고가 아니라도 죽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비상계단은 끝이 없고, 현실의 고층 빌딩인 줄 알았던 공간의 정체는 갈수록 불분명해진다. 아무리 내려가고 올라가고, 층을 똑바로 세어도 계단은 이어진다. 가끔 철문 밖에서 비웃음을 들었다거나 구조대의 신호를 들었다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다 불확실하다. 남수 일행이 출구가 없다고 확신할 때마다, 구조대의 방송이 나오거나 공중통로가 있다는 희망 어린 소문이 전해진다. 그러면 잔인해도 희망이라고,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지만 매번 기대는 좌절된다. 반복되는 계단과 희망과 절망 사이, 독자도 긴장에 동참하도록 소설은 풀려 나간다. 

비상계단 밖에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과 재난의 메아리가 비치는 이야기다.



김여란 | 경향신문 | 201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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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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