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밤의 눈』의 제목은 오랫동안 『그 여름의 그림자』였습니다. 『밤의 눈』이 막 출간된 지난주 부산에는 송이가 굵기도 한 첫눈이 내렸는데, 그늘 드리워진 여름과 눈 오는 겨울 사이의 그 무던한 섭리에서  다소 억지스럽게나마 어떤 상징성을 느끼며 감회에 잠깐 젖어 보았습니다.

 

첫눈과 함께 출간된 <밤의 눈>

 

『밤의 눈』은 6․25전쟁 당시 가상의 공간 대진읍을 배경으로 국민보도연맹과 관련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소설입니다. 이 한 줄 때문에 '뒤로 가기' 버튼이 아른아른거리신다면, 잠깐만 서 계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얼른 읽고 책을 손에 잡으시면, 그때는 망설임없이(가끔 등장인물 이름이 헷갈릴 때는 예외) 앞으로 앞으로만 가게 되실 겁니다.

 

 본서 정보과 소속인 그는 한용범에게 이른바 담당이었다. 정보과 형사는 10월 17일 비상계엄령 선포와 같이 유신헌법이라고 이름 붙여진 헌법 개정안이 발표된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읍에 들락거렸다. 어제 오후에도 한용범은 투표에 빠지지 말라는 그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기관의 선거 개입은 음으로 양으로 있어 왔지만 이번 투표만큼 노골적인 건 처음이었다. 장례 날이 투표일과 겹치는 걸 두고도 형사가 투덜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담당지역 투표율을 신경 쓰고 있다는 소리였다.

-망자가 산 사람을 만나게 하다(1972)

 

“도장은 와?”
“읍에서 내일 아침까지 군에 보고해야 할 끼 있다고 사람이 안 왔나.”  
“무신 소리고? 뭘 알아야 내주제.”
“아따, 춥은 한데 세워 놓고 구장보고 따질 끼요.”

구장 옆에 서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통계 잡을 일이 있든지 비료를 나나 주든지, 뭐가 있은께네 그러는 거 아이겠소. 관에서 하는 일에 협조 안 할라 카몬 하지 마소, 누가 손해 보는가.”
목소리는 낮았지만 위협적이었다.
“내가 시방 몇 집을 더 돌아댕기야 하는지 아나? 고마 자네 집은 뺄까?”
구장이 다시 나섰다. 
“그 참, 자다 봉창 뚜드리는 소리도 아이고…….”
그러면서 부친은 방으로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도장을 찾아 왔다. 구장은 미리 도장 찍을 데를 접어 왔는지 서류 종이를 내밀며 “여기, 여기.” 하고 말했다. 부친이 구장이 내민 인주에 도장밥을 묻혀 도장을 찍고 있는 동안 벙거지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사내는 두어 발짝 떨어져 서 있었다. 뒷날 고시돌의 부친은 그 사내가 근동 마을에 사는 사람인 것 같았다고 애매하게 기억했다.

“그기 다라. 호롱불 킬 시간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고시돌은 눈에 훤한 그때의 일이 아직도 얼척이 없는지 혀까지 차며 한숨을 쉬었다.
“그날 밤에 도장 찍은 게 보련 가입원서였단 말 아니가!”

-그해 여름(1950)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다시 켜보지예.”
아내가 라디오 쪽으로 다가갔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일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아내도 처음 듣는 말들에 놀랐는지 자신이 다시 켠 라디오를 서둘러 껐다. 놀란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아내에게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정변이 났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거야.”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아내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마요. 읍장을 그만두게 되겠지.”

-표적(1961-1968)

 

꼭 십 년 됐네요.”
“예?”
옥구열이 거울을 보고 말한 것처럼 거울 속에서 주인이 되물었다.
“육이오 나던 7월달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부친이 저기 건너편 미창에 갇혀 계셨거든예. 길가 땡볕에 앉았다 여기 와서 사장님 손에 머리를 깎았더랬습니다.”
(중략)
“이상하게도 그때 기억이 자주 났어요. 내가 들어올 때 친구하고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나 때문에 그친 것 같았고, 내하고 몇 마디 주고받은 뒤로 그 친구분은 내가 머리를 다 깎고 나갈 때까지 내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나는 내대로 두 분 중 적어도 한 분은 보련 가족이구나,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하고 그랬습니다.” 

 -유족회(1960)


 

“시내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학생들 데모하는 걸 싫다 안 하니 경제가 안 좋기는 안 좋은기라.”  
“우리 같은 서민들 사는 것도 팍팍해졌지만, 그동안 너무 틀어막았지.”
“어제 장사하는 사람들이 학생들 숨겨 준다고 셔타 문 올리고 내리느라 바빴다니 민심이 무서운 거라.”
“그래 말이야. 먹자골목 아줌마들이 학생들한테 김밥을 그냥 주었다잖아.”
(중략)
스크럼을 짠 시위대의 머리가 보였다. 선두는 어깨동무를 하고 충무동 육교 쪽으로 뛰어왔다. 몰려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옥구열도 박수를 쳤다.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사람의 시민이면 되었다.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며 할 말을 하는 국민이고 싶었다.

- 밤하늘에 새기다(1979)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대부터 5․16쿠데타의 1960년대, 그리고 부마항쟁이 일어난 1970년대 등 한국의 많은 시간이 이 소설에는 녹아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면서, 정치적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사건의 양상은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과거는 고착되는 대신 현실로 이끌려옵니다.

국가는 전장에서 죽은 이들을 나누어, 어떤 이들은 기억하고 어떤 이들은 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적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은 국민의 이야기로 기념되지만 대진읍(소설의 배경)에서 죽은 이들은 이러한 국민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밤의 눈』을 통해 전쟁이 전방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최근 「남영동 1985」와 「26년」등 잘못된 과거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하며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공원 조성, 합동위령제, 특별법 촉구, 피해 배상 판결 등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다 직접적인 노력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밤의 눈』은 이러한 노력의 문학적 일환이자 우리가 응당 함께 기억해야 할 고통의 기록이고, 희생을 위한 위로입니다. 등장인물이 ‘따뜻한 가슴을 지닌 독자들을 많이 만나 위로받고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는 저자의 바람에 독자 여러분들도 귀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밤의 눈 - 10점
조갑상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