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 그가 가진 야성에 대해

 

 

최영철 작가 하면 『문학을 탐하다』에 나오듯이 야성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과거, '왜 야성을 잃어가냐'는 말을 듣고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을 먹으면서 야성을 날카롭게 갈았다고 합니다. 야성이라는 단어에서 품겨져 나오는 의미(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 때문에라도  더욱 그의 작품이 궁금해집니다.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20여 년이 넘도록 꾸준한 시작 활동을 펼쳐온 작가인 그는 창녕에서 태어나 줄곧 부산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산의 정취가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쳣다고 하는데요. 산문집과 몇 편의 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

산문집으로 작가가 느낀 부산 곳곳의 모습들을 애정 있게 실어놓은 책입니다. .

-제1부 풍경들

무궁화에게는 그것이 명예로운 훈장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부채일 수도 있으리라. 이 꽃이 화사하고 강건하기까지 어떤 풍상을 견뎌왔는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무궁하는 역사의 아픈 생채기를 거름으로 먹고 피었다.

 

부산 대청 뜰에 핀 나라꽃 무궁화를 보고 작가가 느낀 감정입니다. 좌천동 수정동 영주동 대청동으로 이어지는 산복도로의 구비마다에는 전쟁을 피해 남하한 피난민을 생각나게 하는 집들이 아직도 골목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차를 타고 지나갈 때 미안한 감정이 듭니다. 대청공원으로 오르는 길 앞만 보고 오르는 게 아닌지, 앞만 보고 급하게 달려, 놓친 것들이 있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봅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무궁화에는 단순히 예쁘다라고 느끼는 감정만 있지는 못합니다. ‘국가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의미가 드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린 아팠던 과거를 회상하는 매개물로서 무궁화를 보기도 합니다. 일제시대 때 무궁화를 키워서도 단순히 꽃으로서 예뻐해서도 안되었기에 안타까웠던 우리 민족의 모습을 무궁화에게도 투영시켰나봅니다. 우리는 보통 무궁화를 생각할 때 만개한 꽃의 모습만을 기억합니다. 져서 떨어진 모습도, 봉우리의 모습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는 작가가 말하는 무궁화의 화사하고 강건한 이미지를 우리가 부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길을 가다 무궁화를 본다면 눈짓으로라도 ‘고생했지’, ‘잊지 않고 있어’ 라는 위로의 말을 던져 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방법일테니깐요

강물은 이 하구에 이르러 바닷물과 섞이기 전 흘러온 먼 시간을 반추하며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 잠깐 몸서리를 친다. 그렇게 구부러지고 멈칫대며 저 먼 바다로 나아간다.

강물이 바닷물과 섞이기 전 잠깐 몸서리를 치며 바다로 나아간다고 생각해보셨나요? 저의 경우는 하염없이 강물만을 바라 본적은 어릴 때나 있는 기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물을 보며 흘러온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고도 바다와 섞이기 잠시 동안 그 시간을 반추한다고도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단지 강이 그 자리에 있다고만 느꼈기 때문입니다. 시냇물의 경우가 아니라 큰 강의 경우는 물살의 흐름이 쉽게 잡히진 않습니다. 또한 강과 바다를 별개로 생각하길 마련이죠. 이런 면에서 작가는 부산의 끝자락인 낙동강을 애정있기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강을 볼 때는 산에서 시작해온 조그만 물줄기를, 바다를 볼때는 물줄기가 모아져서 생긴 강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모천(母川)을 말입니다.

길을 가는 것은 발의 노동이다. 지난 세기, 머리의 욕망을 쫓아가느라고 발은 너무 고단했다. 발은 머리의 강압에 못 이겨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갔고 가지 않아야 할 길을 갔다. 그렇게 마지못한 전진을 거듭하면서 하부의 발은 상부의 머리를 향해 뭐라고 물만을 터트렸겠지만 좀 쉬었다 가자고 정중히 건의해보기도 했겠지만, 머리는 발의 멱살을 부여잡거나 등을 떠밀며, 때로는 채찍을 휘두르기도 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발의 기운을 붇돋우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경건한 평화를 느꼈다. 발에게 경배하는 하심은 상부에 자리한 머리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이다. 맹렬한 전진의 시대를 거치며 우리의 발은 차가웠고 머리는 뜨거웠다. 그 역행이 파생시킨 불상사가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불협화음들이다. 겨울 끝자리의 바깥바람은 머리를 차게 했고 지하 깊숙한 암반에서 솟구치는 온천수는 발을 따뜻하게 했으니, 길을 나서기에는 호사스럽고도 평온한 준비였다.

작가가 우리 몸의 발에 대해 느낀 부분입니다. 우리는 흔히 손의 고생에 대해서 말을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발의 불만, 노동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생각하는 머리와 가장 떨어져 있어서 무관심을 받는지, 아니면 몸에 가려 눈이 보기 힘든 곳에 있기 때문인지 여하튼 글을 읽고 나니 참 불쌍하기 그지없는게 바로 발인 것 같습니다. ‘머리는 발의 멱살을 부여잡거나 등을 떠밀며, 때로는 채찍을 휘두르기도 하며 여기까지 왔다’ 라는 구절을 보면서 제가 한 홍콩여행이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요. 4박5일의 여정동안 학생인 저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웬만한 곳은 걸어다녔습니다. 지하철 한 두정거장 정도는 발에게 부담해버렸는데 한 이틀이 지나니깐 서서히 이 아이가 말을 안 듣기 시작했습니다. 무릎도 아프고 발바닥이 아파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중간 중간 뭐라 하고 때려가면서 여행을 마쳤습니다. 고맙게도, 끝까지 여행을 마쳤지만 저는 발의 기운을 붇돋우고 있는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 발의 차가움을 무시하고 그의 고통을 담보로 머리, 눈의 즐거움만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이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불협화음으로 나타났고 저의 여행도 끝에는 균형이 깨지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발만 다그치느라고 머리가 과부화가 걸린 것인지, 아니면 발의 반란으로 머리가 져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새벽 2시에 떠나야되는 비행기를 오후 2시로 착각하고 비행기를 놓쳐버렸습니다. 교통비 1000원 아끼겠다고 애쓰다가 비행기값 몇만원을 날려버린거죠. 참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의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은 제 살 파먹기에 불과함을 이 책을 빨리 봤다면 저 자신 또한 발에 기운을 붇돋우는 사람에 속하지 않았을까요?

 

간절곶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그렇지만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그 사실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해는 나날이 새롭게 생성되어야 할 희망의 다른 이름이어서, 해가 늘 그 자리에 있다면 희망 역시 참으로 진부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절망이 없다면 희망도 없고, 서편으로 넘어가는 해가 없다면 동녘을 밝히는 찬란한 광명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어제보다 오늘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이의 눈에 비친 해는 어느 자리에서 보든 그것은 가장 먼저 뜨는 해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이의 눈에 비친 해는 어느 자리에서 보든 그것은 가장 먼저 뜨는 해이다’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해를 보는 이유가 내안의 희망을 다지기 위해 본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고 굳이 새해를 보기위해 수많은 인파에 싸여 아등바등 하는 것보다는 어느 자리에서 보든 그것이 가장 먼저 뜬 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의 경우는 매년 새해를 보기위해 산이나 바다를 다녔는데요. 왠지 첫해의 해를 봐야지만 내 자신에게도 그리고 남들에게도 부지런한 새해 첫날을 맞았다고 자부했던 것 같습니다. 올해만큼은 해를 보러가지 못했는데 매일 뜨는 해이기 때문에 별로 의미가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낭만 따위를 따지기에는 현실을 알아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점은 상징적인게 중요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새해 첫날에 뭐했어? 어디 갔어?’ 이런 질문에 떳떳하게 ‘여행 갔다왔어’라든지 ‘부지런했어’. 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간 것은 아닐찌. 라는 생각이 들자 굳이 마음을 다지는게 아니라면 갈 필요가 없기도 하며 그건 어디서나 내 마음에 따라 달려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건 작가가 말하는 마음을 품고 새해를 보며 다짐하는 거겠지만. 혹시라도 그럴만한 시간여유가 없으신 분은 다시한번 구절을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당!!

 

 

대학은 가장 처음의 자리이며 종교는 가장 나중의 자리이다. 처음과 끝은 대부분 그렇게 서로 통한다. 대학은 개성에 물들지 않은 상대적 순수성이고 종교는 현실의 더께를 벗은 절대적 순수성이다.

앞에 작가가 말하는 구절은 제가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만 발췌해 올린 것인데 제 느낌을 같이 적은 글입니다.^^ 특히 이 구절이 무엇보다 더 와닿았는데요. 공감도 가며 현실은 그렇지 못한 부분마저 이처럼 됐으면 하는 마음였습니다. 대학과 종교는 정말로 순수해야 하는데 요새는 그러지 못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대학의 취업의 장이 되어버렸고 종교는 돈에 휩쓸려 현실의 무게와 같아져버렸습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았으나 지성을 가진 이들을 품고 있는 대학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순수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어린시절, 대학, 사회 이 모든 현실을 거쳐서 씻음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변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순수성이겠지요.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아직 이 둘의 낱말이 주는 의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한 건 사람인 것 뿐이구요.

-2부 작품들

 

강건하면 자신만만하기 쉽고 애절하면 구차하기 쉽다. 그러나 동백은 강건하면서도 애절하다. 강건해지려고 이를 악무는 사이 안은 애절해졌고, 그 애절함이 남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다시 이를 악무는 사이 밖은 더욱 강건해졌다. 강건하나 자신만만하지 않고 애절하나 구차하지 않다. 그렇게 단련된 것이 동백이고 그 동백이 부산을 상징하는 꽃과 나무가 된 것은 필연이었다.

바다는 그것들을 다 품고 있기에 숨이 차 조금씩 땅을 위로 내보냈을 것이다. 장성한 자식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듯이 말이다. 땅은 그러니까 바다가 분가해 보낸 자식들이고, 바다는 땅의 아주 오래 전 어머니였다.

동백과 바다는 부산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다하면 해운대나 광안리를 떠올릴 것이며 부산 해운대에 와본 분들이라면 동백섬에 펴있는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회상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들이 부산을 상징하는 것은 부산사람의 기질과도 닮아 있기 때문이겠죠. 바다같이 드센 면이 있으나 분가하여 나와 땅에 살면서 동백마냥 강건하고 애절한 마음을 가지게 됬습니다. 전쟁통에 피난민을 감싸 안는 그 혼란 속에서 부산 고유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동백과도 같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찔러본다』

‘찔러본다’ 시집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강아지를 찔러보는 햇살, 다랑이를 찔러보는 비, 열매를 찔러보는 바람처럼 시적 화자인 ‘나’를 찔러보는 존재들, 그 소외된 소수자들이 갖고 있는 강렬한 응시의 힘과 에너지로 충만합니다. 이 ‘찔러봄’을 통해 시인은 황폐한 삶의 굴레 속에서도 야성으로 빛나는 강인한 생명력과 건강한 삶의 천진성을 발견하고 자연의 진정성과도 만납니다. 황폐한 삶의 굴레 속에서도 시인으로 하여금 자연에 눈을 돌리게 하고 자연과 화합하게 합니다. (책 소개에서)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 『찔러본다』

자연-인간-리듬 이 세가지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3요소입니다. 특유의 리듬감이 통통 튀며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햇살, 비, 바람 자연을 상징화하는 것들을 통해 물체를 찔러본다고 표현하면서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는 윗도리 하나를 척 걸쳐놓듯이

원룸 베란다 옷걸이에 자신의 몸을 걸었다

딩동 집달관이 초인종을 누르고

쾅쾅 빚쟁이가 문을 두드리다 갔다

그럴 때마다 문을 열어주려고 펄럭인

그의 손가락이 풍장되었다 (중략)

- 『풍장

시인은 일상에서 일어나기 쉬운 일들을 소재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격한 표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하지도 않습니다. 일상적인 모습을 구체화 시켜 덤덤하게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의 시적 세계는 어떠한 것인지 시인의 표현을 보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시는 견디며 흔들리고 견디며 꽃 핀다. 견디며 울부짖는다. 나의 시는 결실과 풍요를 노래하지 않는다. 수확과 충만을 노래하지 않으며 높고 청아한 하늘과 맑은 새소리를 노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곧 다가올 퇴락과 소멸의 지점에 먼저 마음이 가 있다. 모든 결실과 절정은 곧 다가올 파국에 대한 불안과 상실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아지 못할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또는 뻔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날의 일상들과의 줄다리기이다. 막연한 희망과 절망을 보다 절실하게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내가 붙잡고 있는 그 끈은 자신을 옭아매는 힘겨운 오라일 수밖에 없다.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오라를 쉽게 놓을 수 없는 것은 누가 명령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그 끈을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처음 부여잡던 각오 그대로 쉼 없는 자기갱신으로 더욱 단단히 더욱 팽팽히 그 끈을 바투 쥐어야 할 책무가 나에게는 주어져 있다.  

앞에서 최영철 시인에 대해서 야성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자연 그대로를 견디어 울부짖는 모습을 표현하는 그의 시를 보면 왜 야성이 어울리지는 느껴집니다. 소개한 작품 외에도 찾아보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문학을 탐하다 - 10점
최학림 지음/산지니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 - 10점
최영철 지음, 박경효 그림/산지니
찔러본다 - 10점
최영철 지음/문학과지성사

 

 문학을 탐하다』는 2014 '원북원부산운동' 후보 도서입니다.
책 읽는 부산을 만드는 소중한 한 표 부탁드립니다.

2014 원북원도서 올해의 책 투표하러 가기>> http://www.siminlib.go.kr/onebookone2/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