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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니 책/문학

(미남) 평론가의 사무─전성욱 산문집 『현재는 이상한 짐승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4. 10.

 

 

 

 

『현재는 이상한 짐승이다』 작업 중, 책을 어떻게 홍보하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한강 이남에서 가장 잘생긴 평론가" 뭐 이런 농담적 리얼리즘의 카피를 몇 개 뽑아보았지만 아무래도 경박해보여 공론화하진 않았습니다. 위 포스터도 SNS에만 한번 올렸었고요. 하지만 농담적 '리얼리즘'에서 알 수 있듯  카피는 비록 폐기되었으나 지극히 사실에 기반합니다. (선생님 보고계시죠?)

그리고 책에 얽힌 비밀이 하나 있는데 비밀이니 우리만 압시다. 『현재는 이상한 짐승이다』 에 수록된 글 몇 편은 지금 이곳, 산지니 블로그 중 <전성욱 평론가의 문화 읽기>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권디자이너님의 불란서영화 같은 표지와 저의 불란서출판사 같은 편집력이 더해진 책으로 보시기를 권합니다.

각종 문화 탐방기인 1부(영화), 2부(문학), 3부(전시, 공연, 대담, 여행)를 지나면 비평의 역할과 정체성을 치밀하게 고민하는 첨언 세 편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현재는 이상한 짐승이다』의 백미가 바로 이 첨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희고 우뚝한 눈썹 하나를 뽑아 올립니다.

 

 

 

 

비평가의 사무


이 글은 책을 만드는 일에 간여하는 자로서 문학평론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답해달라는 어떤 청탁에 대한 응답이다. 책이라는 공통적인 것의 세계에서 비평가는 하나의 특이성으로 참여한다. 한 권의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저술은 저자의 몫이지만, 책이라는 하나의 세계에는 숱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몫으로 참여한다. 여기엔 때때로 문학평론가라는 사람들도 그 협업의 일부로 함께한다. 그 광대한 책의 세계에서 문학평론가는 주로 문학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활동한다. 평론이란 나름의 척도로 내리는 적극적인 가치판단이되, 물론 그것은 재판관의 엄중한 판결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일본의 저명한 문예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가 평론을 일컬어 칭찬하는 기술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비평을 비난이나 경멸로 이해하는 어떤 오해들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문학평론가는 책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독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넓고 깊은 독서를 통해 가치를 비교하고 또 판별할 수 있게끔 잘 훈련된 특별한 독자다.


문학평론가는 시집이나 소설집의 말미에 ‘해설’을 써서 출간에 관여하기도 하지만, 더 적극적으로는 작품 원고를 검토하여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데 의견을 보태기도 한다. 특히 특정 출판사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평론가들은, 창작집의 출간 전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작품의 출간 여부에 대한 판단에서부터 해설 집필을 비롯해 출간 이후의 문예지를 통한 주목과 조명에 이르기까지, 유력 문예지의 편집위원들은 그야말로 막강한 결정력을 갖는다. 이런 연유로 때때로 문학평론은 ‘비평권력’이라는 힐난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뿐만 아니라 창작집의 말미에 수록되는 ‘해설’을 일컬어 문단의 일각에서는 비판 없이 칭송으로 일관하는 ‘주례사 비평’이라 조롱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속악한 비난들에는 인정투쟁의 비루한 욕정 말고도 정당한 선의가 담겨 있다. 그러나 문학평론은 가치 판단을 글로써 표현해 책의 출간 전후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런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그만큼 비평은 곤혹스럽고, 그러하기에 평론은 윤리적인 고뇌 속에서 심각하게 이루어져야만 하는 글쓰기다.


문학평론은 무엇보다 작품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글쓰기다. 다시 말해 비평의 행위는 평론이라는 글쓰기로 표현된다. 그래서 문학평론은 역시 그 자체로 일종의 작품으로서 한 권의 책으로 공간(公刊)되기도 한다. 이때 문학평론가는 다른 이의 글쓰기(작품)를 통해 자기의 글(평론)을 써낸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문학평론집’이란 예의 그 비평적 실천의 소출(所出)인 것이다. 어쩌면 문학평론은 문학이라는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가 문학으로 되어가는 그런 독특한 글쓰기라 할 수 있겠다.  


문학평론가에게 비평의 대상은 문학작품이고, 그 작품들은 대체로 책의 형태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평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엄청난 양의 문학 출판물들 중에서도, 가치 있는 어떤 한 권의 책을 탐하고 누려 그것을 공적인 지반 위에서 풀어내는 일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석’이 작품의 가치를 기존의 지식으로 환원하거나 재단하는 ‘해설’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평이 때때로 해설이 되기도 하지만, 비평의 존재론적 위상은 비평가와 텍스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그 팽팽한 해석의 기투에 있다. 더불어 문학이라는 개념이 환기시키는 어떤 편견의 시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 문학이란 어떤 정형화된 실체로 판명되거나 확정될 수 있는 옹골찬 개념이 아니다. 문학이라는 기표에 경로의존(path dependency)적으로 고착되어 왔던 기의들은 이미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왔다. 시나 소설을 읽고 평하는 사람을 문학평론가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일부분만 맞고 전체적으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란 고답적 장르의 경계를 가로질러 인간의 심성과 세계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을 아우른다. 비유컨대 문학은 주체와 구조 사이의 장막이며 통로이고 그 양쪽을 사유하는 사상의 오솔길이다. 그러므로 문학을 비평한다는 것은 글의 이모저모뿐 아니라 글 너머의 가늠하기 어려운 지대까지를 더듬어 살피는 섬세함을 필요로 한다. 


평론가는 출판의 동향과 흐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선대의 이름 높은 평론가들이 유수의 출판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사례들을 돌이켜보면 그 사정을 쉬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가치를 헤아려낼 수 있는 감각과 논리를 벼리기 위해서는, 읽고 사유하고 쓰는 공부에 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공부가 홀로 고고할 때, 비평은 대중들과의 접점을 잃고 난해한 문장들 속에서 고립되다가 결국은 외면되기도 한다. 명성을 얻은 몇몇 문학평론가들이 누리는 세속의 권위에 비할 때, 실제로 비평은 우리의 일상에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이것이 오늘날 비평의 곤혹스러움이다. 지금 비평은 읽히겠다는 의지보다 예술로 우뚝 서겠다는 글쓰기의 욕망에 들려 쉽게 읽을 수 없는 자족적인 장르로 퇴화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것은 비평을 계도의 도구로 알았던 앞선 시대의 어떤 진부한 진술들에 대한 항의인 측면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그것은 깊은 사유가 사상으로 숙성되어 고매한 관념의 차원에 이르렀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상이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사유의 총화라고 할 때, 경험으로부터 고도로 추상화된 사상의 그 난해함이란 피하기 힘든 불가피함이다. 그러므로 난해함 그 자체로 반대중적인 엘리트주의라는 면박을 주는 것은 성급한 비난이다. 곤란한 것은 예의 그 추상화라는 고도의 사유 정련과정이 면피와 속임의 과정으로 오용되기 때문이다. 부족한 읽기와 소박한 독법을 유사 시적인 문장의 도움으로 아리송하게 추상화시킬 때, 외려 그 글들은 대단한 철인이나 사상가의 근엄함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런 눈속임으로 고고한 사람들이야말로 성실한 저술가들의 열정을 좀먹는 해충이다. 이 해충의 글쓰기는 진보적 의제들마저 자기의 글쓰기를 위한 자재로 이용하면서, 기예로 유별난 문장들로 현란한 요술을 부리곤 한다. 현실의 연관성을 잃은 그런 글들은, 그 과잉된 자의식으로 깊어진 추상화의 늪에서 기어코 독자를 익사시킨다.


지금 문학은 몰락의 소문으로 시끄럽고 구원의 열망으로 간절하다. 그 소문들의 진상을 살피고 더 나은 세계로의 변혁에 이르려는 상상력의 여러 차원들을 해석하고 사유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제라도 비평은 글쓰기의 차원으로 맴돌 것이 아니라, 저 책의 운명들 속으로 들어가 그 활자들의 물질성과 더불어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짐승남의 저녁 ─전성욱 산문집 『현재는 이상한 짐승이다』(책소개)

 

 

현재는 이상한 짐승이다 - 10점
전성욱/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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