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저자와의 만남 | 이벤트

"밤에 언어를 나누는 즐거움":: 김비 작가와 함께한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낭독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3. 29.

3월 11일 저녁, 

부산 남산동의 작은 도서관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자리가 열렸습니다. 



바로 '아름다운 낭독회'.

남산역 근처에 있는 금샘마을도서관에서 매달 열고 있는 행사인데요. 

평소에는 도서관 식구들이 오손도손 모여 서로 책을 읽어주신다고 하는데

이번 낭독회는 작가님과 함께한 자리라 더욱 특별했습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김비 작가님께서 함께해주셨어요. 

소리내어 작품을 읽다 보면 눈으로는 휙휙 지나갔던 단어들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고 

목소리로 전해지는 말은 정말 그 자리, 그 시간에만 있으니 세상에 하나뿐 아닐까요.

그래서! 저 잠홍 편집자 이 자리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ㅎㅎ 



길치인 나머지 약간 길을 헤메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작가님과 몇몇 독자분들께서 담소 나누고 계셨습니다. 도서관 구경 조금 하다가 

낭독 시작하기 전에 와인 한 잔! 


왼쪽이 김비 작가님이세요.


그러면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문이 닫히자, 세 사람이 섰던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흙 같은 빛이었고 이상한 암흑이었다. 그들을 뒤덮은 묵직한 어둠은 지독히도 끈적거렸다. 늪에 몸을 빠트린 듯 버둥거리기라도 하면,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더욱 깊은 곳으로 침잠할 듯했다. 

(...) 

순간 어둠에 갇힌 사방이 몸을 떠는가 싶더니, 그들의 머리 위에서 파팍 불꽃이 튀었다. 비상등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붉은 빛이었다. 침이 고이는 주홍색 불빛은 순식간에 작은 공간을 삼켜버렸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세 사람은 이제 빛의 피를뒤집어썼다. 시뻘건 불빛 아래 겁에 질린 아내의 모습이 어쩐지 사자(使者)를 닮았다고 남수는 생각했다.

_프롤로그 '벌레' 중에서


소설의 도입부를 읽어주시고 작가님께서는 『붉 닫 출』의 배경으로 착안하게 된 실제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부산 도심부에 있는 *** 영화관은 겉은 휘황찬란하지만 내부는 오래된 건물입니다. 

그곳의 비상계단을 올라가면서 작가님께서는 

'어쩌면 나갈 수 없는 공간을 그저 앞에 가는 사람의 뒤꿈치만 보며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셨다고 해요. 그 느낌이 우리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셨고 

그렇게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초호화 백화점의 비상계단'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독자분들과 『붉 닫 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소설의 주인공 남수는 사실 좋아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요. 

저도 동의합니다. 남수는 공장의 생산직, 택배기사 일 등을 전전하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줄지 않는 빚 때문에 가족과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장입니다. 불신과 열패감으로 가득한 남수는 결코 순수하거나 정의로 똘똘 뭉친 멋진 주인공이 아니죠. 

그런 남수에 대해 제가 연민이랄까 공감을 느끼게 된 지점은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남수에게 어떤 의자로 기억되는데요. 작가님께서 읽어주신 부분을 옮겨 볼게요.


이미지 출처: http://alamode.news/user/nopynalda

남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엔 언제나 그 의자가 있었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며 판잣집에 대한 기억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는데, 유독 그 의자의 모습은 항상 기억 속에 선명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의자엔 언제나 그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도망가버린 엄마를 찾아오라며 술에 취해 어린 남수에게 주먹질을 해대고 온 집안의 물건들을 엉망진창을 만들어놓고 나면, 그는 언제나 이백 원짜리 청자 담배를 물고 그 의자에 앉았다. 한쪽 다리가 부러져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데, 벽에 기대어선지 그 의자는 용케도 아버지의 몸뚱이를 버티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그 의자에 앉아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공장 벽을 타고 오르는 시커먼 흙먼지와 곰팡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술에 취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남수는 더욱 더 자주 그 의자에 앉아만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했다.

-'의자' 중에서


이 부분을 읽고 나니 어느 독자분께서 '아버지의 의자' 라는 노래도 있다고 알려주시더라구요.



"아버지는 의자 하나 남겨 놓은 채 / 지금 그 어디로 떠나셨나요" 

라는 가사는 남수가 할 것 같은 말이네요. 


혐오스럽지만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기억을 떨치려 애쓰며, 

남수는 끊임없이 계단을 오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올라왔는지 알 수 없고 다리가 무감각해졌을 때쯤,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붉은색 벽 위에 쓰인 두 글자.


'다시'


너의 구구절절한 투정 따위 알겠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_'의자' 중에서


김비 작가님이 말하시길, 

'다시'는 누군가를 길어올리기도, 농락하기도 하는 말입니다.


'다시 시작해보자', '다시 일어나자'.

희망의 언어로 자주 쓰이지만 때로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의 표지에도 '다시'가 여러 번 적혀 있는데요. 


 

가운데 부분에 연한 회색 글씨로 쓰여진 '다시'들. 보이시나요? 

참고로 표지에는 작가님께서 직접 그리신 일러스트와 캘리그라피가 쓰였습니다.


위 인용문의 '다시'는 탈출구를 찾아 고통을 견디며 계단을 오른 남수를 무너뜨리는 말이지만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또 다른 모양으로, 체온으로 다가옵니다.

'다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 중 하나는 장애가 있는 남수의 아들 환이 이구요. 


작은 테이블 여럿을 이어붙여 만든 낭독의 장. 하나둘 독자분들이 모여 테이블 주위를 꽉 채웠습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아름다운 낭독회에 참석하신 어느 독자분께서는 

"작가님이 낭독해주시고 이야기해주시는 것 들으면서 책을 읽으니 

소설인데 에세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하셨어요. 

작가님이 책을 직접 읽고 그 맥락을 나눠 주시고,

독자분들이 스스로의 배경을 모아 책을 이야기해주시니 

저도 몇 번 읽은 이 작품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낭독회가 마무리될 즈음, 노란 공책 하나가 테이블 주위를 돌았습니다. 

공책에는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그 날의 감상을 적었어요. 


+

저는 집 근처에 시립도서관이 있어서 큰 공립도서관을 이용하는 편이라

마을도서관 방문이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금샘마을도서관처럼 작은 도서관들은 책을 읽고 빌리는 공간뿐만이 아니라 

마을의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지요.

사진출처: 금샘마을도서관


'아름다운 낭독회'에서 저에게 놀라웠던 건 

작은 공간에 예상보다 많은 분들께서 찾아와주시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함께해 주셨다는 점이었어요. 

구비하고 있는 도서가 많고 다양한 것도 중요하겠지만, 

에 대한 어떤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지야말로 

책과, 공간과 관계를 맺고 이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어느 독자분께서 말씀하셨듯, "밤에 언어를 나누는 즐거움"을 만들어주신 

금샘마을도서관 활동가 여러분, 그리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금샘마을도서관 찾아가는 길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