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밀러 지음, 이민경 옮김 『임신중지』(아르테)를 읽고 산지니 열무 편집자가 씁니다..

 

11월 말부터 한겨레 젠더팀은 특별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바로 '낙태죄 폐지' 페이지.(http://www.hani.co.kr/arti/delete 뷰 수가 올라갈 수록 관련 이슈를 다루는 기사가 늘테니, 한번씩 방문해주자)  

일단 접속하면 관련 기사들과 이슈타임라인, 화보 등이  정렬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오른쪽 상단의 숫자들이다. 낙태죄 폐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즉각적으로 보여주는 이 숫자들은,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1 7 3을 화면에 띄우고 있다. 어쩐지 폭탄에 새겨져 있을 것만 같은 디자인이다. 헌재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를 내린 것이 2019년 4월 11일이었는데, 어느덧 폐지까지 173시간이 남았다니. 새롭다.  

가끔 언어는 정말 유기체 같다. 내가 단어를 골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가 자신의 쓰임을 조정하며 나를 사용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한 단어가 다른 어떤 단어와 친한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며, 우리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더 거시적인 다음 논리(법, 제도, 정치 등)를 구성하게 만든다. 이성과 논리는 감정을 수호하기 위해 개발된다.

임신중지 문제에 있어서 나는 보통 프로초이스 편에 서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선택을 자유와 거리낌 없이 등치시켰다. 그러나 ‘자유‘에는 설명과 정당화가 필요 없는 반면, ‘선택‘은 왜 하필 다른 옵션이 아닌 바로 이것을 택했는지에 대한 변명을 요구한다. 그리고나선 그 설명ㅡ호소ㅡ이 주류질서 아래 편입될만한 여지가 있는지 여부를 가르고 선악을 판단한다. 이 책에 따르면, 임신중지 문제에 있어서 주류질서는 바로 모성이다. 이 질서는 결과를 조금씩 다르게 도출할 뿐, 친임신중지든 반임신중지든 관계없이 통용되어 왔다. 프로라이프가 태아의 현재적인 생명을 다룬다면, 프로초이스는 태아의 미래적인 생명(원치 않는 임신이 어떻게 ‘불행한 아이‘를 만들어내는지)을 다루는 식이다.

임신중지를 법적으로 규제하든, 그렇지 않든 임신중지를 ‘필요악‘이나 ‘차악‘으로 여기는 관점은 바로 이렇게 선택이라는 수사에서 창조되며, 본능적 모성이라는 환상을 존치시킨다. 또한 동시에 모성과 결부되지 않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상상하는 일에 한계를 부여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선택‘이란, 결과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거론하기 위한 수사적 전략에 불과하다. 국가와 가부장제는 이익을 골라 누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개인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도용하고 약자의 삶을 방치한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듯, 개인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생애사건에 총체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은 현대사회의 망상이다.

사실 ‘선택‘이라는 수사는 그것이 예외적 사항이라는 전제 위에서 사용된다. 임신중지란, 다른 어떤 사안들(안정적 양육이 어려운 경제사정, 백인국가 만들기에 방해되는 재생산:식민지에서 자행됐던 강제낙태)을 감안하고 나서야 지지할 수 있는 사건인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다. 이 책의 원제가 Happy abortion인 것을 받아들이자. 

임신중지가 아니라, 임신중지를 하지 않는 것ㅡ모성과 임신이야 말로 선택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여성은 여성의 의지를 좀 더 개입시켜야 한다. 생리하는 여성을 가임기 여성으로 치환해서는 안되듯[각주:1], 착상이라는 일시적 상태의 여성을 모두 임신한 여성으로 일원화해서는 안 된다. 임신(과 그에 따른 이벤트)을 선택한 여성이 임신한 여성이다. 임신중지는 그 어떤 모성적 판단 없이 모성의 경계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모성과 관계없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임신이지, 임신중지가 아니다. 행복한 임신중지가 가능해질 때, 행복한 임신도 가능해진다. 

그나저나 판형도 크고 본문도 한 쪽에 27줄이나 되는데 심지어 352쪽 짜리인 책을 교정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있어야 할까? .. 다음주부터 400쪽 짜리 1교 들어가는데 살짝 두렵다!



  1. 정신나간 朴정부, 출산 지도 만들어 여성을 도구 취급?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47272?no=147272&ref=nav_search#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본문으로]
Posted by _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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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동글동글봄 2020.12.28 1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독서하고 (독서)일기를 써야지 하면서 올해가 다 지나갔네요ㅠㅠ 노력해서 독서일기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행복한 임신중지가 가능해질 때, 행복한 임신도 가능해진다." 공감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