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아이들'은 제가 자주 가는 서점입니다. 좋은 어린이책이 구비되어 있고, 무엇보다 그림책이 많습니다. 그리고 뜻깊은 강연이나 행사도 자주 열립니다.

 

 

 

 

지난 토요일 저녁 무렵, 이 서점에서 또 하나의 행사가 열렸습니다. 바로 바로 그림책 <제무시> 출간기념 북토크였는데요, 저는 이 책의 제목을 듣고 '제무시'가 뭔지 몰라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랬습니다. 트럭 이름이라네요. 저는 처음 듣는데, 남자들은 군대에서 많이 들어봤다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그림책 뒤에 이 제무시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제무시 : General Motors Company

바로 회사 이름이 트럭 이름으로 쓰인 건데요, 이 트럭이 미군이 참전한 전장에 많이 보내졌다고 하고, 대한민국 곳곳을 누비며 전쟁물자와 사람 등을 수송했다고 합니다.

 

그림책 <제무시>는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보도연맹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요, 트럭 제무시의 입장에서 민간인 학살의 부당함과 아픔,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미어캣의 스카프>라는 책을 바로 이 '책과아이들'에서 발견하고 우리 사회 문제를 이렇게 그림책으로 담아내는 작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을 했었는데요, 바로 그 책의 작가가 <제무시>의 작가 임경섭 선생이라는 걸 알고 이렇게 만나게 되어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네요.

 

행사는 먼저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영령에 헌화와 헌책을 하는 순서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제주4·3평화재단 이사님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역사를 기록하는 것과 기억하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이어서 북토크가 시작되었는데요,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출판미디어국장님의 사회로 장편소설 <밤의 눈>을 쓰고 2013년 만해문학상을 받은 조갑상 작가와 그림책 <제무시>의 임경섭 작가, 그리고 독자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책과아이들에 처음 와보았다는 김주완 국장님. 본인이 살고 있는 동네에는 이런 서점이 없다며 서점에 대하여 부러움 섞인 찬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본인이 쓰시고 저희 산지니에서 펴낸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란 책을 보고 엄청 반가웠다는 소회를 밝히시네요. 민간인 학살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맡은 국장님의 유머러스한 달변에 시종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시간이었답니다.

 

우리가 유대인 학살은 알아도 한국인 민간인 학살은 잘 모르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보도연맹 사건을 알아보려면 바로 옆에 계신 조갑상 소설가의 <밤의 눈>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고, 책을 사시면 저자분께서 사인도 해주실 거라고 깨알 같은 책 홍보도 빼놓지 않으시네요. ㅎㅎ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밤의 눈>이나 <제무시>는 김해 지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부산 지역에서도 학살 사건은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히 김해지역 보도연맹 사건을 소설로 쓴 계기가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조갑상 소설가는 "전쟁 중에 점령지에서 일어난 사건도 많았지만 점령지가 아닌 곳에서 이렇게 학살사건이 일어난 것이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경섭 작가는 "은폐된 사건을 알리고 싶었다. 김해 지역은 자료가 많이 남아 있고, 조갑상 선생님께서 소설 작업을 먼저 해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움을 전하셨습니다.

 

임경섭 작가님이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과화해위원회' 보고서를 읽다 보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제무시였다고 합니다. 가해자의 시선이나 피해자의 시선이 아니라 무기체이면서도 사건의 현장에 항상 존재했던 트럭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의 진실이 더 극명하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아이들 대상의 그림책이다 보니 묘사와 설명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보다 상징적인 표현을 써서 느낌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조갑상 소설가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소설가가 본 그림책은 어떤 느낌인가"라는 질문에 "그림 재주가 있으니 참 좋구나, 나는 그런 재주가 없어 400쪽이나 되는 소설을 썼는데 선으로 그린 그림 몇 장 가지고 수백 마디 말 이상의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데에 감동을 받았다"하는 소감이셨습니다.

 

저도 그림책을 좋아하는데요, 흔히 그림책은 어린이가 보는 책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그림책은 남녀노소, 세대와 연령을 불문하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장르입니다. 한 권의 그림책에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고 어떤 주제라도 표현할 수 있는 게 바로 그림책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건 개별 독자들의 자유입니다.

 

 

행사가 끝나고 저자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책과 함께 저자 사인까지 받아 가는 독자들의 풍성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저도 임경섭 작가님께 사인을 받았는데요, 소설 <밤의 눈>이 <제무시>를 쓰고 그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출판사에도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으시네요. 편집자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시는 멘트,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림작가는 사인에 꼭 그림을 그려주시더라고요  ㅎㅎ

 

제무시 - 10점
임경섭 글.그림/평화를품은책

 

밤의 눈 - 10점
조갑상 지음/산지니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 - 10점
김주완 지음/산지니
Posted by 아니카

 

어린이책 시민연대 동부지회에서 주최한 저자와의 만남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6.25전쟁 당시 가상의 공간 대진읍을 배경으로

국민보도연맹과 관련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소설 『밤의 눈』

이 책의 저자이신 조갑상 선생님과 함께 저자와의 만남을 진행했습니다.

 

 

소설 『밤의 눈』은,

2013년 만해문학상을 받는 작품으로, 그 해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죠.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둔중한 인식을 바탕으로 어둠과 침묵 속의 두려움, 슬픔, 공포를 건져올리며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말을 읽고 기억을 저지당했는지 보여줍니다.

 

이 날 행사에서 잔혹하고 고통스런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차분한 문체와 어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조갑상 작가의 이런 어법이 주체하기 힘든 두려움을 더 극대화하고, 외면하고 싶은 대목에서도 책장을 넘기게끔 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민간인 학살과 처형. 그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용범'을 통해 망각되어가는 역사와 우리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 더 자세한 책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 )

 

“호롱불 킬 시간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밤의 눈』(책소개)

 

 

이 날 저자와의 만남에 참석하신 분들은 모두 책을 읽고 오셔서 그런지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밤의 눈』에 대한 감상과 저자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진정한 '저자와의 만남'이 아닐런지요)

모든 내용은 아니지만,

이날 주고 받은 이야기 중 인상 깊은 내용을 중심으로 여기가 옮겨볼까 합니다.

 

 

● 소설은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밤의 눈』이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 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쓴 작품인 것 같다. '보도연맹'이란 소재로 글을 쓰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전쟁을 보는 눈은 세월과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쟁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6.25전쟁,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지점에서 시작된 소설이 『밤의 눈』이다. '보도연맹'이라는 소재는 이 소설 외에도 여러 다른 작품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물론 같은 소재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6.25 전쟁이 일어남에 따라 반대편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을 처형하는 것, 전선이 무너질 때마다 이어진 학살. 이를 통해 '무언가를 보여줘야겠다',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전쟁에 이런 일이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 현실을 다루는 작품을 집필할 때의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검열에 대한 부분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역사의 내용을 가져올까'부터 시작해서 인물, 배경, 스토리를 구성하는 데 스스로 검열을 많이 하게 된다.

 

 

● 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많은 발품을 팔아 취재를 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밤의 눈』은 실제 사건을 다룬만큼 취재하는 작업이 녹록치 않았을 것 같다.

 

책 가장 앞에 있는 '이슬람의 어느 이야기꾼과 청중들의 대화'를 넣었다. 그 이유는 『밤의 눈』이 진짜도 가짜도 아닌 이야기라는 점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이것은 어느 곳에서 있었던 일을 재구성하여 쓴 것이 이 소설이다. 즉, '어느 곳에 있었던 일' 이것은 진짜가 될 것이고, '재구성' 하였단 것은 가짜가 될 것이다. 소설을 쓰기 전 가장 고민한 것은 '진짜'에 대한 부분이었다. 알아야 쓸 수 있고, 재구성 할 수 있으니까.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해 책자와 같은 큰 자료들을 많이 이용했다. 여기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내가 어떻게 소설에 앉힐 것이가 하는 부분이 관건이었다. 마산에서 희생자의 자제 분을 만나 취재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 작품을 쓰는 데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재구성하여 가짜를 만드는 부분에 있어 불편한 부분도 있었다. 지역 답사는 따로 하지 않았다. 대진읍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서 소설을 이끌어가도록 했다. 

 

 

● 유족회가 만든 무덤을 파헤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대목에서 너무 충격적이고 심장이 턱턱 막혔다. 국가의 폭력에 말없이 꾸역꾸역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희생자의 가족)의 모습이 읽기가 힘들었던 점도 있다.

 

인상 깊게 봐주셨다니 감사하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희생된 역사 속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다.

 

● 소설을 쓰면서 작가 본인도 쓰기 힘들었던 대목이 있는지 궁금하다.

 

글을 쓸 때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그게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밤의 눈』에서는 노인과 손녀가 나오는 대목이 있는데, 그 부분을 쓸 때 감정이 들어가다보니 좀 힘들었던 것 같다.

 

 

● "전쟁이 난 뒤 대진에서 예비검속을 당한 민간인들의 첫 처형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또한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 모두 전쟁이 전방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첫 순간이기도 했다" (p.45) 이 구절이 인상적이다.

 

말 그대로다. 전쟁은 군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후퇴를 하면서 잠재적으로 반대편이 될 수 있는 이들을 학살했는데 이 사건 하나만 봐도 전쟁이 일반인들의 삶 속에 들어온 것이다.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전쟁이 전선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순간 전쟁은 마을로 들어가 있었다.

 

 ● 끝으로 여자들만 있는 공간(조갑상 작가님은 청일점이셨습니다ㅎㅎ)에서 행사를 진행했는데 어떠셨는지.

 

매우 즐거웠다. 오늘 함께한 분들이 모두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시는 분들인 것 같아 보기가 좋았다. 독자들과의 만남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 행사 뒷 이야기

저자와의 만남이 끝나고,

조갑상 작가님의 작은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밤의 눈 - 10점
조갑상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꿈의 마지막은 언제나 바다였다. 바다는 움직임 없이 굳어 있어 마치 잔디에 불이 붙듯 붉은 보랏빛으로 띠를 두르며 타들어갔다. 그 불길 속에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키 작은 여자와 싸우기도 했는데 그곳은 바다가 아니라 쓰레기 날리는 바닷가 가까운 매축지일 때도 있었다."(314쪽)

"무색무취의 소시민.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니더라도, 세상살이 전반에 걸쳐 자신의 색채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또는 비겁한 건지 아닌지는 뒤로 하더라도, 다소 애매하게 다수의 편에 서거나 중도에 서는 게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렇게 손해 본 적이 없었던 것도 사실인 듯 했다."(247쪽)

중견 소설가 조갑상이 첫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을 25년 만에 재출간했다. 조갑상의 데뷔작 '혼자웃기'와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사라진 하늘'을 비롯해 총 17편의 중단편이 담겨 있다.

그의 처녀작들은 '소설은 시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여실히 증명해냈다. 우리 사회에 있을법한 인물들이 등장해 묘한 현실감으로 공감하게 된다.

소설 '사육'에서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50대 남자와 아무 일 않고 소설만 읽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20대 여자의 동거 생활을 담았다. 

몇 년 전부터 회자되고 있는 '취집'(여성들이 취직 대신 결혼을 택한다는 뜻의 신조어)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로, 인간의 심연을 깊이 파고든다. 남자는 철저한 교환가치로 여자를 대하며, 앞으로도 결코 소설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 날 밤은 내게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했다. 왜 사람은 끝이 없는 것일까. 연이는 나와 정식 결혼이라도 원하는 걸까. 그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고상하게 살 수 있는 여건. 그 이상이 뭐 그렇게 필요하단 말인가. 사람은 어쩌면 원래부터 제 입장과 분수를 모르고 태어나는 존재일지도 몰랐다."(64쪽)

'바다로 가는 시간'에서는 퇴직 후 안주할 곳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삶을 보여준다. 냉혹한 현실과 함께 가족들의 반응이 씁쓸함을 자아낸다.

"그는 눈을 떴다. 눈이 당기고 무겁다. 아내는 여전히 어둠을 부풀리고 있다. 어쩌면 아내는 자신의 퇴직 후 더 잘 잠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엉뚱한 생각이 방 안의 썰렁한 공기와는 다르게 맹렬하게 그의 가슴에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106쪽)

조갑상은 작가의 말에서 "다시 읽으면서 몇 십 년 전의 이야기 내용과 형식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면서도 긴장되었다"며 "서툴기는 해도 들뜬 열정의 흔적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 또한 지나온 세상을 다시 바꿀 수는 없지만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도 해 본다"고 말했다. 


신효령| 뉴시스ㅣ2015-07-11


원문 읽기


다시 시작하는 끝 - 10점
조갑상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소설 『밤의 눈』의 제목은 오랫동안 『그 여름의 그림자』였습니다. 『밤의 눈』이 막 출간된 지난주 부산에는 송이가 굵기도 한 첫눈이 내렸는데, 그늘 드리워진 여름과 눈 오는 겨울 사이의 그 무던한 섭리에서  다소 억지스럽게나마 어떤 상징성을 느끼며 감회에 잠깐 젖어 보았습니다.

 

첫눈과 함께 출간된 <밤의 눈>

 

『밤의 눈』은 6․25전쟁 당시 가상의 공간 대진읍을 배경으로 국민보도연맹과 관련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소설입니다. 이 한 줄 때문에 '뒤로 가기' 버튼이 아른아른거리신다면, 잠깐만 서 계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얼른 읽고 책을 손에 잡으시면, 그때는 망설임없이(가끔 등장인물 이름이 헷갈릴 때는 예외) 앞으로 앞으로만 가게 되실 겁니다.

 

 본서 정보과 소속인 그는 한용범에게 이른바 담당이었다. 정보과 형사는 10월 17일 비상계엄령 선포와 같이 유신헌법이라고 이름 붙여진 헌법 개정안이 발표된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읍에 들락거렸다. 어제 오후에도 한용범은 투표에 빠지지 말라는 그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기관의 선거 개입은 음으로 양으로 있어 왔지만 이번 투표만큼 노골적인 건 처음이었다. 장례 날이 투표일과 겹치는 걸 두고도 형사가 투덜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담당지역 투표율을 신경 쓰고 있다는 소리였다.

-망자가 산 사람을 만나게 하다(1972)

 

“도장은 와?”
“읍에서 내일 아침까지 군에 보고해야 할 끼 있다고 사람이 안 왔나.”  
“무신 소리고? 뭘 알아야 내주제.”
“아따, 춥은 한데 세워 놓고 구장보고 따질 끼요.”

구장 옆에 서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통계 잡을 일이 있든지 비료를 나나 주든지, 뭐가 있은께네 그러는 거 아이겠소. 관에서 하는 일에 협조 안 할라 카몬 하지 마소, 누가 손해 보는가.”
목소리는 낮았지만 위협적이었다.
“내가 시방 몇 집을 더 돌아댕기야 하는지 아나? 고마 자네 집은 뺄까?”
구장이 다시 나섰다. 
“그 참, 자다 봉창 뚜드리는 소리도 아이고…….”
그러면서 부친은 방으로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도장을 찾아 왔다. 구장은 미리 도장 찍을 데를 접어 왔는지 서류 종이를 내밀며 “여기, 여기.” 하고 말했다. 부친이 구장이 내민 인주에 도장밥을 묻혀 도장을 찍고 있는 동안 벙거지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사내는 두어 발짝 떨어져 서 있었다. 뒷날 고시돌의 부친은 그 사내가 근동 마을에 사는 사람인 것 같았다고 애매하게 기억했다.

“그기 다라. 호롱불 킬 시간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고시돌은 눈에 훤한 그때의 일이 아직도 얼척이 없는지 혀까지 차며 한숨을 쉬었다.
“그날 밤에 도장 찍은 게 보련 가입원서였단 말 아니가!”

-그해 여름(1950)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다시 켜보지예.”
아내가 라디오 쪽으로 다가갔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일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아내도 처음 듣는 말들에 놀랐는지 자신이 다시 켠 라디오를 서둘러 껐다. 놀란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아내에게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정변이 났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거야.”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아내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마요. 읍장을 그만두게 되겠지.”

-표적(1961-1968)

 

꼭 십 년 됐네요.”
“예?”
옥구열이 거울을 보고 말한 것처럼 거울 속에서 주인이 되물었다.
“육이오 나던 7월달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부친이 저기 건너편 미창에 갇혀 계셨거든예. 길가 땡볕에 앉았다 여기 와서 사장님 손에 머리를 깎았더랬습니다.”
(중략)
“이상하게도 그때 기억이 자주 났어요. 내가 들어올 때 친구하고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나 때문에 그친 것 같았고, 내하고 몇 마디 주고받은 뒤로 그 친구분은 내가 머리를 다 깎고 나갈 때까지 내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나는 내대로 두 분 중 적어도 한 분은 보련 가족이구나,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하고 그랬습니다.” 

 -유족회(1960)


 

“시내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학생들 데모하는 걸 싫다 안 하니 경제가 안 좋기는 안 좋은기라.”  
“우리 같은 서민들 사는 것도 팍팍해졌지만, 그동안 너무 틀어막았지.”
“어제 장사하는 사람들이 학생들 숨겨 준다고 셔타 문 올리고 내리느라 바빴다니 민심이 무서운 거라.”
“그래 말이야. 먹자골목 아줌마들이 학생들한테 김밥을 그냥 주었다잖아.”
(중략)
스크럼을 짠 시위대의 머리가 보였다. 선두는 어깨동무를 하고 충무동 육교 쪽으로 뛰어왔다. 몰려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옥구열도 박수를 쳤다.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사람의 시민이면 되었다.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며 할 말을 하는 국민이고 싶었다.

- 밤하늘에 새기다(1979)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대부터 5․16쿠데타의 1960년대, 그리고 부마항쟁이 일어난 1970년대 등 한국의 많은 시간이 이 소설에는 녹아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면서, 정치적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사건의 양상은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과거는 고착되는 대신 현실로 이끌려옵니다.

국가는 전장에서 죽은 이들을 나누어, 어떤 이들은 기억하고 어떤 이들은 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적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은 국민의 이야기로 기념되지만 대진읍(소설의 배경)에서 죽은 이들은 이러한 국민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밤의 눈』을 통해 전쟁이 전방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최근 「남영동 1985」와 「26년」등 잘못된 과거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하며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공원 조성, 합동위령제, 특별법 촉구, 피해 배상 판결 등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다 직접적인 노력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밤의 눈』은 이러한 노력의 문학적 일환이자 우리가 응당 함께 기억해야 할 고통의 기록이고, 희생을 위한 위로입니다. 등장인물이 ‘따뜻한 가슴을 지닌 독자들을 많이 만나 위로받고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는 저자의 바람에 독자 여러분들도 귀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밤의 눈 - 10점
조갑상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