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비의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160층 초호화 백화점 비상구 계단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다.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 소설의 유일한 공간이다. 한 가족과 그들이 갇힌 건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상계단을 오르내리다 만난 몇몇 사람들이 등장인물의 전부다. 주인공 남수의 과거가 회상으로 채워지긴 하지만 소설 속 현재의 시간은 한나절에 불과하다. 단편이나 중편이라면 모를까 장편소설로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소재다. 

▲  김비의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표지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연거푸 읽었다. 박진감 넘치는 내용에 압도되어 한 번. 결말을 보기 위해 쏜살 같이 달려온 인생을 뒤늦게 후회하듯, 상징과 은유와 우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섬세한 문장 하나하나를 느긋이 즐기면서 다시 한 번. 그렇다고 평온한 마음으로 읽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이 갇힌 건물 비상계단의 안과 밖이 별반 다르지 않듯이, 작가의 절망적 상상력이 그려낸 소설 속 이야기가 우리네 현실 속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내레이터이기도 한 남수는 개인사업자로 트럭을 매입해 택배 일을 시작했지만 그의 삶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현실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집착을, 그의 몸은 버티지 못했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허리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세금은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거기에 "온전한 삶을 부여받지 못한 채 태어난 아들 환이"는 "그의 삶을 옭아매기 위해 운명이 내던진 결정적인 한 수"였다. 그의 아내도 몸이 성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수가 그의 가족을 이끌고 초호화 백화점을 찾아간 것은 '마지막'이라는 그의 아내 지애의 간청 때문이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불우한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가족 동반 자살이라고 하는 최후의 결심을 이행하기 전, 근사한 한 순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화점 부실공사로 사고가 났고, 비상계단에 갇히게 된 것. 

하지만 남수 일행이 가족 동반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 딱히 절망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의사로부터 아이가 뇌손상으로 평생 장애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남수는 "이상하게도 담담"했던 것이다. 

아이의 증상이 경도의 근무력증을 반복적으로 앓은 경력이 있는 아내가 복용한 약물에 대한 부작용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그저 문밑으로 던져진 체납고지서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희망 없음 속에서도 그가 한 일이란 "그저 소독약 냄새가 나는 벽을 힘없이 몇 번 걷어찬 것이 전부"였다. 

그럼 그를 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내몬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희망'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신념을 잃지 않으면 무엇이든 다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며 희망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에게 희망은 "어떻게든 세상이 돌아가야 하니까, 모두들 제자리를 지키도록 세뇌시키는 속셈"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의 눈앞에서 아래위로 끝도 없이 뻗어 있는 나선형 계단도 누군가 "그에게 쏘아올린 조롱"일 뿐이었다. 

"그나마 아이가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고 말을 배워가면서 누군가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했을 때, 남수의 두 손에 자신도 모르는 살의가 가득했다. 주민센터의 사회복지사가 놓고 간 자세 교정용 의자에 구겨진 채 틀어박혀 있는 아이를 보면서, 그는 희망이란 것의 비틀린 몸체를 상상하고 있었다."(15쪽)

"여기 이 문. 이렇게 꼼짝도 않는 이 문! 아무리 걷어차고 발길질해도 꿈쩍 않는 이 문! 바로 이 문 앞에서 서 있는 게 어떤 건지. 그게 어떤 느낌인지 줄 알아? 이런 문 앞에 서서 당당하다고 어깨를 펴는 꼴이... 희망을 잃지 말아야한다고 억지웃음을 웃고 있는 꼴이 얼마나 엿 같은 줄 너 같은 놈이 알기나 하냐고!"(93쪽)

남수가 발설한 '너 같은 놈'은 그날 백화점에 들어왔다가 갇힌 사람 중 한 하나다. 이름은 수현. 그가 백화점에 들어온 이유는 성전환 수술을 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절도를 하기 위해서 건물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 사실은 안 남수는 "기껏 그 따위 인생 망치는 수술이나 하려고 도둑질을 해?"라고 쏘아붙인다. 하지만 수현은 마치 "봄 햇살을 쬐는 것처럼 고즈넉한 눈빛"으로 이렇게 항변한다. 

"그래도 난 아저씨가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살 수 있는 삶이라도... 태어나보니 그 어떤 혼란도 없이, 그저 돈 벌면 행복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그런 삶이라도, 난 아저씨 인생이 전혀 부럽지 않아요.(...) 누군가에게는 그 따위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거든요."(84쪽) 

남수가 괴변이라고 일축한 수현의 말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일종의 포석이다. 그 포석의 핵심은 삶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남수가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자신을 조롱하는 희망에 대한 앙갚음을 도모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선택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건물 안이나 밖이나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라면 지금의 상황을 재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구원에 도달하는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남수의 아들 환이가 전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소설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환이를 통해 이 세계와 독자들에게 내보이는 회심의 카드는 다름 아닌 '다름'이다. 여섯 살 먹은 환이의 손에는 크레파스가 들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인 남수에게 자주 듣던 말을 떠올려 벽에 '다시'라는 글자를 적게 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탈출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남수를 지치게 하는 요인이 되지만 곧 상황은 반전된다. 계단에 오줌을 질질 흘리며 애물단지 노릇을 하던 환이는 일행 중 누구보다도 먼저 계단을 올라가 크레파스로 벽에 글자나 숫자를 쓰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붉은 빛깔의 벽에 매달려 환이는 천천히 글자를 따라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누군가에겐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글자들을, 아이는 획을 세고 서로 다른 곳에 획을 교차하며 그리듯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쉽게 한 번에 써내려간 글자라면 쓰는 사람의 습관에 따라 일정한 형태가 있겠지만, 가까스로 손을 움직여 아기가 적고 있는 글자들은 모두가 다 다른 모양이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휘어지고 기울어지면서, 그 선들이 맞닿아 만든 글자들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170쪽)

"희망이나 꿈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여섯 살짜리 아이가 행복이나 미래를 가늠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서로에게 말을 잃은 채 등을 지고 있던 그와 아내 사이에서, 아이는 스케치북 안에 혼자만의 세상을 조용히 그려나가고 있었다. 모두가 달라서, 그래서 아이에겐 더욱 예쁘고 신나는 세계였다."(171쪽)

"정화는 아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다가, 꼭 안아 주었다. 이 좁고 혼란스러운 공간 속에 아이가 만들고 싶은 것이 얼마나 거대한 세계였던 건지. 그녀는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 모두가 포기해버린 여기 이 공간을, 그 작은 손으로 얼마나 열심히 다시 짓고 있었던 건지. 이미 환이의 눈 속엔 갖가지 생명체로 가득한 또 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234쪽)

정화라는 인물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다. 그녀는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직장을 얻게 되어 기뻤는데, 그로 인해 기초수급 대상에서 탈락해 오히려 살림이 더 곤궁해진다. 고작 10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 엄마의 병원비며 동생들의 학비며 생활비에 집세까지 마련하다보니 구두 하나 살 돈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새로 들어간 사무실의 선배언니가 채근하여 구두를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비상계단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었다. 

소설 말미에 정화와 수현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건물 속 갇힌 상황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거나, 이미 죽음 이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를 공간에서 그동안 수현을 괴롭힌 성 정체성의 문제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런 사실을 은연중에 알게 된 일행 중 한 사람이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래. 마음껏 잘 살아. 여기에서 돈이 의미가 있겠니, 그깟 몽뚱이가 의미가 있겠지? 그렇다고 먹고사는 일이 의미가 있니? 가정을 꾸리고 새끼 낳고 잘 사는 그런 미래가 의미가 있겠니? 그저 이 징그러운 계단을 같이 오르내려줄 사람이면 되겠지. 흔들리지 않고, 서로에게 의지해 서로를 토닥이면서 살아."(232쪽)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작가 김비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쓴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읽은 적이 있다. 하여, 나는 그녀가 사용하는 '불안'이나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절망이라는 단어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그녀가 나보다는 훨씬 진실에 더 가까운 지점에 서 있을 것 같아서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면 줄행랑을 치고 말겠지만 말이다. 소설이 끝나고 곧바로 작가의 말이 이어진다.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될 만한 작가의 경험담이 먼저 소개되고, 뒤이어 그녀는 이렇게 술회한다.  

"잠깐이었지만, 그때 그 두려움은 이상하게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일상은 맴을 돌 듯 매일매일이 닮아 있었고, 타인이 만들어놓은 세계 속에서 나는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얄팍한 희망의 말들을 위안으로 삼고 있을 뿐, 내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남몰래 숨을 골랐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갈 자격은 없는 걸까? 이 이야기는 그런 비관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앞으로 발을 내딛는,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264쪽)

철없는 낭만자주의자인 나의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입에서 발음된 '이상한 절망'이라는 말이 전혀 칙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 획일적이고 천박한 세상에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재건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진실하고 고유한 그녀만의 품격이 느껴진다.  작가 김비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다.


안준철 | 오마이뉴스 |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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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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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만도 못해.” (98쪽)

노력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간절한 시대지만, 어느새 희망은 ‘고문’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어두운 현실을 견디는 데 이야기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의 방식은 정면 돌파다. 이 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다른 언어로 삶을 비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는 장편소설 『빠스정류장』,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등을 통해 꾸준히 위태로운 삶 속에서 반짝이는 힘에 주목해 왔다. 신작『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가난의 쳇바퀴를 도는 데 지쳐 동반자살을 택하지만, 자살이라는 출구조차 막혔음을 깨닫는 한 가족의 ‘후련한 절망’에서 시작한다.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

우리의 현실을 빼닮은 비상계단과 등장인물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주인공 남수는 달동네에서 자랐고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가장이다. 택배기사로 매일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비관으로 가득 찬 그는 무기력에 빠진 아내 지애, 그리고 뇌 손상을 가지고 태어난 여섯 살 아들 환이와 동반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 만찬을 위해 들른 160층 초호화 백화점 건물의 비상계단에 갇혀버리고 만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자살시도마저 실패로 끝나나 싶지만, 남수는 오히려 꼭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느낀다. 생에 대한 그의 의지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 아니라, 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커멓게 끈적거리기만 했던 생각의 늪 속에서, 남수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남루하기만 했던 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떠올랐다. (…) 기필코 여기에서 탈출하는 것. 그리하여 나를 억압했던 생을 농락하며, 망설임 없이 내 손으로 내 삶의 마지막을 선택하는 것. (18쪽)

남수 가족 외에도 계단에 갇힌 이들은 여럿이다. 비정규직으로 취직하면서 기초수급대상에서 탈락한 20대 여성 가장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명식, ‘일류대학 교수님 사모’이지만 남모를 아픔을 가진 해숙 등,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우리와 비슷하거나 우리가 일상에서 스쳐지나갔을 법한 사람들이다.

남수와 이들 일행은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좌절하지만, 더 위쪽에 있는 공중통로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계단을 오른다. 그러다 아래에서 구조가 진행되고 있으니 내려오라는 구조대의 방송 소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오히려 지진처럼 사방을 뒤흔드는 진동과 불길이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여러 재난들의 메아리이다.



“비상등이었다. 그런데, 붉은 색이었다”

한 편의 영화처럼, 강렬한 이미지와 빠른 전개를 갖춘 소설

비상계단이라는 한정된 장소 내에서 장편을 풀어가는 것은 난관이 될 수 있으나, 작가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남수 가족 이외의 인물들을 적절히 등장시켜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한다. 문이 열릴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남수 일행이 버렸을 때 공중통로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새로운 인물들이 제시하는 비상계단에 대한 정보는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색과 이미지가 중요한 상징으로 쓰이기 때문에 소설은 한편의 영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붉은 빛으로 계단 안 모든 것을 물들이는 비상등이 파란 바다색으로 바뀌면서 이야기의 반전이 시작된다.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각자 어떻게 이 계단에 갇히게 되었는지 털어놓으면서 모두가 붉은 띠로 가로막힌 문을 통해 이곳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정확히 몇 층에서 비상계단으로 들어왔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의 기본 설정에 대한 의문들과 이에 대한 힌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재미를 더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작가가 쓴 소수자 문학

몸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 돋보여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저자 김비 작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에도 참여한 바가 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 여성 등 마이너리티의 삶에 꾸준히 주목하면서 김비 작가는 작품 속에 소수자로 살아오며 쌓은 통찰을 담아왔다. 이 소설에서는 희망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특별히 눈에 띈다.

공중통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주요인물 ‘수현’은 성전환 수술비용을 마련하려는 스무 살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성별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남수는 그를 괴물 취급한다. “인생 망치는 수술이나 하려고” 한다며 남수가 그를 비난하자, 수현은 ‘아저씨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며 이렇게 말한다.

난 아저씨가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살 수 있는 삶이라도… 태어나보니 그 어떤 혼란도 없이, 그저 돈 벌면 행복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그런 삶이라도 (…) 아저씨한테는 그게 전부인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85쪽)

한편, 남수의 아들 ‘환’이는 기형적인 팔다리를 가진 아이다. 남수는 한때 환이의 탄생에서 희망을 보았지만, 환이는 남수가 동반자살을 결심하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지애 또한 환이가 “족쇄” 같은 몸에 갇혀 살고 있다며 마음 아파한다. 하지만 환이는 오히려 “나… 안 이상한데? (…) 나, 지금처럼 예쁜… 내가 좋은데?”라고 말하며 웃는다.

‘비정상’의 몸을 가지고 있는 수현과 환은, ‘비정상’의 몸이란 본질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상’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해 부여한 의미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삶과 죽음을 가로질러

암흑 속으로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딘다

절망의 바닥에 가닿은 상황에서, 남수를 일으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신’이다. 남수는 열리지 않는 문이 끝을 의미한다는 것을 의심하고, 그가 딛고 선 현실을 비관하며 삶을 꿈꾼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의 아내 지애는 “당신이 나를 믿지 않든 (…) 지금 우린 당신이 필요해”라고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서로가 필요하다는 고백, 그곳에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다.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아갈 자격은 없는 걸까.” 김비 작가는 이런 질문에서부터 이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찬란한 희망이 아니라, 어두움과 위험이 깃든 희망을 이야기하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지금 암흑 속으로 발걸음을 디디려는, 디뎌야만 하는 독자라면, ‘우리는 같은 곳에 있다’ 말하며 내민 이 손을 기꺼이 잡아도 좋을 것이다. 


지은이: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 함께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문학 | 국판 268쪽 | 13,000원 

| 2015년 10월 20일 | 978-89-6545-319-2 03810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 '고문'이 된 시대, 이 장편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후련한 절망'에서 첫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 



차례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표지 일러스트와 캘리그라피,

그리고 본문 내 각 장의 제목에 쓰인 캘리그라피는 모두 김비 작가의 작품입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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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온수 2015.10.22 1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이랑 책 소개랑 너무 잘 어울려요^^ 저도 얼른 읽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