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등단한 신예작가 이미욱이 총 8편의 단편을 묶어 첫 소설집을 펴내었다. 이미욱의 이번 소설집 『서비스, 서비스』는 다양한 소재들의 조합과 함께, 가독성 있고 흡인력 있는 문체로 신진 소설가의 탄생을 예고한다. 오타쿠, 외모지상주의, 동성애, 등교거부 현상, 은둔형 외톨이, 왕따 등 현대사회의 다양한 병리현상들을 젊은 감각으로 끄집어 올리고 있는 이 책은 상처를 안고 시대를 떠다니는 영혼들을 깔끔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들과 함께 펼쳐내 보이고 있다. 동시에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갖는 부단한 자의식을 통해, 시대가 품고 있는 병폐를 소설가 특유의 감성으로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이미욱 소설집


서비스

서비스



소설의 제목인 『서비스, 서비스』는 애니메이션 <신세계 에반게리온>의 TV판 차회예고에서 미사토라는 캐릭터가 던지는 멘트이다. 이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표제작 「서비스, 서비스」의 여주인공 코코미 또한, 프리허그, 메이드까페 등의 일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끊임없이 무형의 것을 제공한다는 소설 속 소재(서브컬쳐)를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다.


표류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를 끌어올리다

그들은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혈연이 아니라 같이 살면서 서로를 보살펴주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다. 이들의 위험한 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작가는 탄력 있는 구성과 속도감 있는 문장, 그리고 섬뜩하리만큼 예리한 인물들의 자의식을 통해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_조갑상(소설가·경성대 교수)

결여의 자리를 대타자의 규율로 채우는 과정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의 인물들이 성장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다만 그들이 결여 속에서 앓고 있는 그 고통을 방치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비정한 가학성이야말로 이 작가가 혹한에 대하여 말하는 어떤 방식은 아닐까? _전성욱(문학평론가)


핵가족화와 일인 가정, 동거가족 등 현대 사회의 ‘가족’이란 마냥 안온하고 따스한 위로의 공간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외로움’의 공간이자 ‘전장’의 공간일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싸움’이 끊임없었던 아픈 기억의 공간일 수 있다. 표제작 「서비스, 서비스」에서도 건담 프라모델에 집착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혼 후 각자 재혼해버린 부모로 인해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민재. 그렇게 부모의 사랑이 결핍된 채 살아온 민재는 자기 방의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건담 프라모델에 집착한다. 프라모델의 세계를 알려주었던 친구와 함께 떠났던 일본여행에서 민재는 메이드까페 소녀 코코미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런 그녀에게서 귀청소 마사지를 받으며 어린 시절 그가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상처들을 상기한다. 민재에게 있어 코코미의 다정한 ‘서비스’는 깊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으나, 코코미에게는 그저 감정이 결여된 공허한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가족해체 위기에 대한 젊은이의 보고서

이번 소설집을 통해 작가는 비정한 현대사회 속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소외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런 주인공들을 하나로 엮는 키워드는 바로 ‘버림받음’의 정서이다. 말 못할 사정으로 엄마를 언니로 알고 자라는 여주인공(「단칼)이나 태어나자마자 미혼모인 엄마에게서 유기 당하는 아이(「쎄쎄쎄」), 나이 어린 아빠한테서 집에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자고 오라고 문전박대 당하는 「분실신고」속 소녀는 각기 부모로부터 버림받는다. 메이드까페 소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는 소년(서비스, 서비스」),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부모와 친구, 연인으로부터 버림받는 은둔형 외톨이 여성(숨은 그림자」), 못생긴 외모로 인해 남자에게 거절당하는 여성(「미미」), 그리고 부모와 친구로부터 버려지면서 본인의 처지를 작은 먼지와 동일시하며 위안받는 청소년(「연애(涓埃)」), 이명 증세로 동시통역사 일을 할 수 없어 사회에서 고립된 채 홀로 살아가는 사내(「사막의 물고기」)까지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 나아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다. 작가 이미욱은 이러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 버림받고 있는 이들을, 마치 아슬아슬하면서도 세밀한 정물화를 그려내듯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상실된 결핍을 향한 부질없는, 그러나 의미 있는 몸짓

애니메이션 음악, 가게를 홍보하는 내레이터의 음성, 스피커에서 터지는 유행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거리에 퍼지자 형광 빛깔의 간판들이 들썩거렸다. 수많은 소리에 민재와 준세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인파로 흥청거리는 거리의 끝자락에는 노란 트레이닝복 재킷을 걸치고 블랙 미니스커트를 입은 빨간 머리 여자가 ‘Free Hug’(프리 허그)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프리 허그를 받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마치 벌 받는 자세처럼 보였다.

“저기 빨간 머리 여자애 얼굴이 우울해 보여. 누군가 안고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아.”

준세는 빨간 머리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듯 양손을 들었다.

“더 외로운 사람이 덜 외로운 사람을 안아 준다고 하잖아.” _「서비스, 서비스」, 55쪽.


이미 상실된 결핍이란 채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욱 소설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상실된 결핍을 무엇으로든 채우고자 필사적인 몸짓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몸짓은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기 상처 입은 등장인물들이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환부를 기꺼이 드러내며 서로를 위안하고, 그 과정 속에서 상처투성이 삶을 보듬는다. 결국 작가 이미욱은 버림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상처받은 이들이 건네는 위로가 아닐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상처를 겪어본 자들만이 타인의 상처에 공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비스, 서비스』가 가지는 둔중한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지닌다.




글쓴이 : 이미욱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05년 《국제신문》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단칼」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w-mioff@daum.net


차례


『서비스, 서비스』

산지니소설선 18
이미욱 지음
문학 | 국판 | 264쪽 | 12,800원
2013년 9월 24일 출간 | ISBN : 978-89-6545-226-3 03810

이미욱의 첫 소설집. 오타쿠, 외모지상주의, 동성애, 등교거부 현상 등 현대사회의 다양한 병리현상들을 젊은 감각으로 끄집어 올리고 있는 이 책은 상처를 안고 시대를 떠다니는 영혼들을 깔끔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들과 함께 펼쳐내 보이고 있다. 동시에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갖는 부단한 자의식을 통해, 시대가 품고 있는 병폐를 소설가 특유의 감성으로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서비스, 서비스 - 10점
이미욱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해피 투게더'

'열대병'

'브로크백 마운틴'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1997), 아핏차퐁 위라세타쿨의 <열대병>(2004) 그리고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 이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그 사랑이 슬픈 이유는 그들의 정념이 어떤 완고한 장벽에 가로막혀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저 영화들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애 영화, 이른바 퀴어 시네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은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처럼 서럽다.


모든 사람에게는 삶을 누릴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질서와 규율을 좋아하는 문명의 요구에 자주 제약되곤 한다. 문명은 야만의 퇴치를 빙자하면서 사람의 활력을 이런저런 제도적인 완력으로 제압한다. 그래서 야만으로 낙인찍힌 모든 비루한 것들은 문명 이전의 순수한 자연이라는 관념에 이끌리기 마련이다. <해피 투게더>의 이과수 폭포, <열대병>의 정글, <브로크백 마운틴>의 브로크백 설산은 문명을 압도하는 대자연의 위엄을 드러낸다. 이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문명이란 그리고 그 유치한 분별지들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살결에서 느끼는 깊은 즐거움과 그리움 속에서 얻는 서로에 대한 행복한 끌림의 감각들은 삶이, 누려야 마땅한 무엇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운다. 그럼에도 현실은 지극히 부조리하다. 언제나 소수의 삶은 다수적인 것의 횡포로 피멍들어있다. 타인의 행복을 질시하는 옹졸한 마음들이 모여 다수적인 것을 구성할 때, 그 횡포는 소수에 대한 잔혹한 폭력으로 비약하기 쉽다. 슬픔을 끝장내고 피멍든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행동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올바른 인식의 훈련이 있어야 한다. 난삽하고 어렵지만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제적 이성애 체계와, 성정체성 개념을 확립한 담론 범주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 특별한 동맹은 무엇인가? 만일 ‘정체성’이 담론적 관행의 결과라면, 젠더 정체성은 어느 정도까지 섹스, 젠더, 성 습관, 욕망, 즉 강제적 이성애로 규명될 규제적 관행들 사이의 어떤 관계로 구성될 것인가? 이런 설명은 우리를 또 다른 총체화의 틀로 되돌아가게 하는가? 강제적 이성애가 젠더 억압의 획일적 원인인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로 야기된다는 또 다른 총체화의 틀 말이다.” <<젠더 트러블>>, 117쪽.


사실 이런 생각은 놀라운 통찰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의 기원을 ‘강제적 이성애 체계’와 ‘성정체성 개념’에서 찾아왔지만 버틀러는 그것이 결국은 또 다른 편견에 지나지 않다고 말해버린다. 다시 말해 그런 담론들은 미리 정해진 ‘총체화의 틀’ 속에서 그 편견의 부정성을 확고하게 증명해버리는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를 바라보는 편견의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저 본질의 형이상학과 결별해야 한다. 잔혹한 문명의 폭력에 대항해 대자연을 맞세우는 따위의 방법은 결국 그 본질의 형이상학에 갇혀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문명을 피해 자연 속에서만 허용되는 동성의 사랑이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 자연이란 문명의 폭력에 지친 영혼에 짧은 위안이 될 수는 있겠지만 사람은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관념의 자연 속에서만 살 수가 없다. 안타깝지만 동성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라도 문명의 대낮을 활보할 수 없다. 그렇게 될 때 이성애라는 다수적인 사랑의 형식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험한 존재로 남아야 한다. 인지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의 불온한 존재성은 다수적인 삶의 형식을 자극하는 위험한 도발이다. 그 도발이 언제나 위험한 것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동성애가 소수적인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정되고 다수의 삶 속에서 평온해질 때 그들의 사랑은 진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외로움 속에서 애틋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랑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세상에 기여한다. 다수적인 것이 될 수 없는 서글픈 운명으로 당신들의 사랑은 오랫동안 숭고할 것이다.


Posted by 전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