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역사를 바로잡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현장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역사상에는 기쁨의 역사와 슬픔의 역사가 공존한다. 희비(喜悲)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재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도려낸 단정의 역사, 망각의 역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희망의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

  왜성은 임진왜란이라는 420여 년 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블랙박스다.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전남 여수까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분포해 있으며 이제는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일본 고유 양식 성곽의 원형이 남아 있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성은 임진왜란의 침략을 대변하는 유적으로 인식돼 홀대를 받아왔다. 이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은 31개의 왜성 전체를 취재하여, 임진왜란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책에서만 볼 수 있는 420여 년 전의 임진왜란, 왜성을 통해 역사가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을 깨워본다.

 

 

 왜성에 대한 오해와 진실

왜성, 어디까지 알고 있니?

 

  조선에 침략한 직후부터 부산에 전진기지 구실을 할 성을 쌓기 시작했던 왜군은 1593년 남쪽으로 후퇴한 이후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진행하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았다. 1597년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은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확보하기 위해 울산, 경남, 전남 등에 추가로 성을 쌓았다.

 

_ '들어가며' 중에서 (p.13)

 

  임진왜란 7년 동안 왜군은 울산에서 전남 순천까지 동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았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왜성은 부산 11개, 울산 2개, 경남 17개, 전남 1개 등 모두 31개이다. 왜군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설치한 군사시설은 훨씬 많지만, 관련 학계가 성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 31개의 성이 전부이다.

  ‘왜성’이라는 명칭은 왜군이 쌓은 성이라 하여 명명된 것으로, 대부분 강이나 바다 근처의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독립된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왜성은 조선의 읍성과는 달리 겹겹이 둘러친 성곽을 바깥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뚫어야 하는 구조로, 방어하기에 좋은 성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동안 조·명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왜성을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왜성은 존재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정적 인식을 주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만든 성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 치욕의 상징물이 인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군이 왜 왜성을 쌓았는지 그 역사적 사실에 다가가면 그 인식은 바뀌게 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이듬해부터 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은 것은 성에 의지해 조·명 연합군의 공격 등에 최대한 버티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안전하게 철수하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성은 치욕의 상징물이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난을 극복한 우리 조상이 자손들에게 당당히 물려준 전리품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p.14)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자 국난을 극복한 조상들의 당당한 전리품, 왜성. 이제 왜성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거두고, 새로운 역사 인식의 주춧돌을 놓을 필요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왜성을 사라지게 만들어…

 

  왜성은 16세기 말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이라는 한·중·일 동북아 3국간의 7년 국제전이 남긴 특수한 산물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성 전투에서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왜성을 통해 현장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를 겪은 국민들 사이엔 왜성을 ‘조선이 침략해 쌓은 부끄러운 역사의 상징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만연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삶의 터전 가까이에 있는 왜성을 방치하게 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왜성이라는 존재조차 잊게 했다. 즉,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사람들에게 왜성의 존재를 지우게 한 것이다.

 

  박문구왜성은 용두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용미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부산항 매립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현재 용미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다. (…) 추목도왜성과 박문구왜성의 위치는 여전히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개발 등에 휘말려 왜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들어선 건물 때문에 왜성 터로 추정되는 땅을 파헤쳐 조사할 수도 없다. 그렇게 왜성은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_ P.29

 

부산 박문구왜성 외 몇몇 왜성들은 관공서 건물과 지하철 기지창 건설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문화재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개발과 맞물려 왜성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왜성은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어 우리 역사에 있어 미아가 될 뻔한 적이 있으며, ‘허물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주장이 일 때도 있었다. 다행히 현재는 지방기념물로서 타 문화재와 동등하게 보호받고 있으나 아직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일반인들의 부정적 인식은 여전하다.

 

 

왜성을 통해 우리 역사의 아픈 과거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다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동래읍성 주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방어시설 ‘해자(垓字)’가 발견된 것이다. (…) 이렇듯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스러져간 조선 백성들의 주검이 동래읍성 해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우리 역사에서 잊혀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조선 백성들이 420여 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_ p.33~34

 

  부산도시철도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나온 81명의 유골, 성벽돌 없이 윤곽만 남아 있는 옛 동래읍성과 동래왜성, 그리고 전쟁 이후 쌓은 새 동래읍성 등은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증거물이자, 동시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고 이어져 오는 한국사의 증거물인 것이다. 더불어 일반인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왜성은 우리네 삶 속에서 자연스레 익힐 수 있는 역사 교육의 훌륭한 교재가 되기도 하고, 나아가 국제적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크다.

 

  왜성은 16세기 한・일 관계사의 규명되지 않은 역사적 비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게다가 왜성은 일반인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 이에 우리 가까이에 있는 왜성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_ ‘책을 펴내며’ 중에서 (P.5)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왜성에 대한 취재를 시작한 것에 대해 저자는 “우리의 입장에서 왜성을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었다”고 전한다. 더불어 “ 편견의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역사 인식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한반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왜성은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다. 우리 역사의 증거물인 왜성을 통해 선조들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하고 반성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지은이 :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 차례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지음  | 신국판 | 15,000원 | 978-89-6545-360-4 03910 | 2016년 7월 15

 

왜성은 임진왜란이라는 420여 년 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블랙박스다.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전남 여수까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분포해 있으며 이제는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일본 고유 양식 성곽의 원형이 남아 있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성은 임진왜란의 침략을 대변하는 유적으로 인식돼 홀대를 받아왔다. 이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은 31개의 왜성 전체를 취재하여, 임진왜란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책에서만 볼 수 있는 420여 년 전의 임진왜란, 왜성을 통해 역사가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을 깨워본다.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 신문스크랩 >> 420년전 역사 고스란히 간직한 '왜성의 재발견'(울산신문) 

 

+ [출간 전 미리보기] 사전답사 - 왜성 재발견 >> http://goo.gl/0HArrN

 

 

 

 

Posted by 비회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3화 :: 왜구를 막았던 '신라의성'에 왜성이 들어서다

 -부산 구포·양산·호포 왜성

 


 

 

  시인 김용호(1912~1973)는 그의 대표 장시 <낙동강>에서 “칠백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고 했다. 유구한 세월을 도도히 흘러 남하하면서 반변천·내성천·영강·위천·감천·금호강·황강·남강·밀양강·양산천 등 여러 지천을 품어안고 멀리는 가야와 신라 천년의 영욕에서부터 가까이는 6·25전쟁의 참상과 4대강 사업에 따른 몸살까지 겪으면서 영남인들에게 삶의 젖줄이 돼왔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도 낙동강 수로는 왜군에게 진격, 후퇴, 방어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특히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을 통한 서쪽 진격로가 봉쇄되자 왜군은 낙동강 하류 수로를 통해 서·북쪽 내륙으로 연결되는 길목인 김해, 구포, 양산 등지에 왜성을 쌓고 교두보를 마련하려 했다.

  대표적인 예로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 때 왜군은 부산 동래에 집결한 대규모 병력을 이 수로를 이용해 진주로 실어날랐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도 1592년 7월 한산도·안골포 해전에서 왜 수군을 대파한 뒤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쫓아 이 수로를 따라 김해, 양산, 구포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 신라 장군 의기 서린 ‘의성’(義城)에 들어선 왜성

 

  부산 북구 덕천2동 산93 일대에 있는 구포왜성은 왜군 제6군 수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휘하 장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이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뒤인 1593년 7월 낙동강 수로 확보와 인근 김해·양산지역 왜성과의 연락 및 지원을 위해 쌓은 왜성이다. 금정산 상계봉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지맥이 끝나는 곳의 해발 75.7m와 36.5m 높이 두 구릉에 각각 본성과 외성을 쌓아 연결했으나 1970년대 낙동강교 건설로 단절됐다. 외성은 2005년 북구 문화빙상센터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본성부 2만9548㎡만 보존돼 부산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다.

 

  구포왜성은 상계봉 쪽 능선을 끊어 북동쪽으로 방어망을 치고 서쪽과 북쪽으론 낙동강 수로를 통해 김해와 양산 방향으로 나가고, 동쪽으론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 방향과 연결되는 전략상 요충지에 자리잡았다. 본성은 낙동강과 주변을 잘 관망할 수 있는 정상부에 본곽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한두 단계 아랫쪽 주위까지 모두 5개의 성곽을 두르고, 그 아랫쪽에 다시 4개의 성곽을 배치한 형태다.

 

  본곽 주위 성곽은 60~70도로 비스듬히 쌓은 석축이 8~10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본곽 안에 성의 심장부요 지휘소 격인 천수각 터도 있다. 현재 본곽은 빈 터로 남아 있지만 주위 다른 성곽 터는 대부분 경작지 또는 사찰 터로 편입돼 관리 부실의 우려를 안고 있다.

 

 

 

■ 수륙교통 요지에 남긴 왜성

 

  양산은 조선 전기 경상좌도 남부의 중요 교통 요지로서 11개 속역을 거느린 황산역과 7개 원을 두고 있었다. 황산역은 조선시대 동래에서 한양까지 연결된 간선도로 구실을 했던 영남대로의 중요 거점으로서, 동래를 거쳐 올라온 관리들이 밀양이나 김해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이 됐다.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1 일대의 양산왜성은 바로 이 황산역의 교통로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왜군이 쌓은 성이다. 양산시 동면 가산리 산 56-1 일대에 있던 호포왜성은 양산의 7개 원 가운데 호포원이 섰던 교통의 요지를 이용해 왜군이 거점을 마련했던 곳이다.

 

  양산왜성은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깨지면서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해 일으킨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 왜장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남진하는 조·명연합군으로부터 부산의 본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양산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삼각주의 해발 133m 야산 두 봉우리 가운데 동북쪽의 높은 곳에 본곽을 쌓고 동북쪽으로 길게 부곽을 2개 붙였으며, 서남쪽으로도 능선을 따라 부곽을 5개 정도 길게 연결한 뒤 봉우리 쪽에 별도 중심곽을 배치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본곽 성벽은 4~6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부곽 쪽은 허물어진 곳이 많다. 성벽 둘레는 1.5㎞ 가량 된다.

 

  본곽 동남쪽 아래 산기슭에도 별도 성곽이 남아 있는데 터가 모두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밭 곳곳에서 삼국시대 토기와 조선시대 옹기 파편 등이 발견됐다. 양산왜성은 ‘물금 증산리왜성’이라는 이름으로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로 지정돼 있다.

 

  이 왜성은 뒤에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고쳐 쌓고, 구로다 죠수이(黑田如水)·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자가 주둔했다. 양산왜성이 있는 산은 부산의 증산왜성처럼 꼭대기를 깎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산으로 불린다.

 

  지역 행토사학계에선 이 왜성도 구포왜성처럼 <삼국사기>에 ‘사도성’(沙道城)으로 기록된 삼국시대 성터에 축성한 왜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산왜성과 양산천 및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호포왜성은 현재 철저하게 훼손돼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다. 서쪽 전반부는 35번 국도와 촌락 및 농경지 개설로, 동쪽 후반부는 부산교통공단의 지하철 기지창 건설로 인해 파괴됐다. 호포는 금정산 서쪽 끝자락에 양산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 있던 교통 요지의 나루로서, 조선 전기까지 호포원이 있다 폐원됐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 자리에 왜성을 쌓아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포왜성은 축성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호포원은 당시 양산군에 있던 7개 원의 하나였는데, 이미 북정원과 함께 폐원된 상태였다. 원으로서의 가치가 약화됐거나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 때문에 폐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성은 물론 이에 앞서 호포원과 관련한 유구도 충분히 나올 만한 가능성이 큰 곳인데도 사전에 문화재 발굴조사도 없이 국도나 지하철 기지창 건설 공사가 강행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호포원과 호포왜성은 그 이름과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개발 만능주의와 무지로 인해 소중한 역사문화자산을 잃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될 만하다.

 

>> 4화에서 계속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