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역사를 바로잡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현장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역사상에는 기쁨의 역사와 슬픔의 역사가 공존한다. 희비(喜悲)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재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도려낸 단정의 역사, 망각의 역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희망의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

  왜성은 임진왜란이라는 420여 년 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블랙박스다.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전남 여수까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분포해 있으며 이제는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일본 고유 양식 성곽의 원형이 남아 있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성은 임진왜란의 침략을 대변하는 유적으로 인식돼 홀대를 받아왔다. 이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은 31개의 왜성 전체를 취재하여, 임진왜란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책에서만 볼 수 있는 420여 년 전의 임진왜란, 왜성을 통해 역사가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을 깨워본다.

 

 

 왜성에 대한 오해와 진실

왜성, 어디까지 알고 있니?

 

  조선에 침략한 직후부터 부산에 전진기지 구실을 할 성을 쌓기 시작했던 왜군은 1593년 남쪽으로 후퇴한 이후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진행하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았다. 1597년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은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확보하기 위해 울산, 경남, 전남 등에 추가로 성을 쌓았다.

 

_ '들어가며' 중에서 (p.13)

 

  임진왜란 7년 동안 왜군은 울산에서 전남 순천까지 동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았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왜성은 부산 11개, 울산 2개, 경남 17개, 전남 1개 등 모두 31개이다. 왜군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설치한 군사시설은 훨씬 많지만, 관련 학계가 성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 31개의 성이 전부이다.

  ‘왜성’이라는 명칭은 왜군이 쌓은 성이라 하여 명명된 것으로, 대부분 강이나 바다 근처의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독립된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왜성은 조선의 읍성과는 달리 겹겹이 둘러친 성곽을 바깥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뚫어야 하는 구조로, 방어하기에 좋은 성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동안 조·명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왜성을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왜성은 존재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정적 인식을 주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만든 성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 치욕의 상징물이 인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군이 왜 왜성을 쌓았는지 그 역사적 사실에 다가가면 그 인식은 바뀌게 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이듬해부터 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은 것은 성에 의지해 조·명 연합군의 공격 등에 최대한 버티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안전하게 철수하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성은 치욕의 상징물이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난을 극복한 우리 조상이 자손들에게 당당히 물려준 전리품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p.14)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자 국난을 극복한 조상들의 당당한 전리품, 왜성. 이제 왜성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거두고, 새로운 역사 인식의 주춧돌을 놓을 필요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왜성을 사라지게 만들어…

 

  왜성은 16세기 말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이라는 한·중·일 동북아 3국간의 7년 국제전이 남긴 특수한 산물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성 전투에서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왜성을 통해 현장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를 겪은 국민들 사이엔 왜성을 ‘조선이 침략해 쌓은 부끄러운 역사의 상징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만연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삶의 터전 가까이에 있는 왜성을 방치하게 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왜성이라는 존재조차 잊게 했다. 즉,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사람들에게 왜성의 존재를 지우게 한 것이다.

 

  박문구왜성은 용두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용미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부산항 매립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현재 용미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다. (…) 추목도왜성과 박문구왜성의 위치는 여전히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개발 등에 휘말려 왜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들어선 건물 때문에 왜성 터로 추정되는 땅을 파헤쳐 조사할 수도 없다. 그렇게 왜성은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_ P.29

 

부산 박문구왜성 외 몇몇 왜성들은 관공서 건물과 지하철 기지창 건설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문화재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개발과 맞물려 왜성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왜성은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어 우리 역사에 있어 미아가 될 뻔한 적이 있으며, ‘허물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주장이 일 때도 있었다. 다행히 현재는 지방기념물로서 타 문화재와 동등하게 보호받고 있으나 아직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일반인들의 부정적 인식은 여전하다.

 

 

왜성을 통해 우리 역사의 아픈 과거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다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동래읍성 주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방어시설 ‘해자(垓字)’가 발견된 것이다. (…) 이렇듯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스러져간 조선 백성들의 주검이 동래읍성 해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우리 역사에서 잊혀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조선 백성들이 420여 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_ p.33~34

 

  부산도시철도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나온 81명의 유골, 성벽돌 없이 윤곽만 남아 있는 옛 동래읍성과 동래왜성, 그리고 전쟁 이후 쌓은 새 동래읍성 등은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증거물이자, 동시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고 이어져 오는 한국사의 증거물인 것이다. 더불어 일반인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왜성은 우리네 삶 속에서 자연스레 익힐 수 있는 역사 교육의 훌륭한 교재가 되기도 하고, 나아가 국제적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크다.

 

  왜성은 16세기 한・일 관계사의 규명되지 않은 역사적 비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게다가 왜성은 일반인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 이에 우리 가까이에 있는 왜성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_ ‘책을 펴내며’ 중에서 (P.5)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왜성에 대한 취재를 시작한 것에 대해 저자는 “우리의 입장에서 왜성을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었다”고 전한다. 더불어 “ 편견의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역사 인식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한반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왜성은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다. 우리 역사의 증거물인 왜성을 통해 선조들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하고 반성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지은이 :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 차례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지음  | 신국판 | 15,000원 | 978-89-6545-360-4 03910 | 2016년 7월 15

 

왜성은 임진왜란이라는 420여 년 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블랙박스다.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전남 여수까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분포해 있으며 이제는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일본 고유 양식 성곽의 원형이 남아 있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성은 임진왜란의 침략을 대변하는 유적으로 인식돼 홀대를 받아왔다. 이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은 31개의 왜성 전체를 취재하여, 임진왜란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책에서만 볼 수 있는 420여 년 전의 임진왜란, 왜성을 통해 역사가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을 깨워본다.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 신문스크랩 >> 420년전 역사 고스란히 간직한 '왜성의 재발견'(울산신문) 

 

+ [출간 전 미리보기] 사전답사 - 왜성 재발견 >> http://goo.gl/0HArrN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별과우물 2016.07.18 1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컬러책이라 왜성의 모습을 좀 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책이죠! ㅎㅎ
    많은 분들이 읽어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온수 2016.07.19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출간^^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5화 :: 왜군, 진해에 수군기지를 건설하다

-진해 웅천, 안골, 명동, 자마 왜성


 

 

  진해는 한·일 교류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전쟁 기간 내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격전지였다. 서해로 진출하려는 왜군이나, 왜군 본거지인 부산을 되찾으려는 조선 수군이나 진해 앞바다를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592년 5월7일 거제 옥포에서 벌인 첫 전투(옥포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달아나는 왜군을 진해 앞바다까지 쫓아가 왜선 5척을 격침(합포해전)시키고 회군했다. 같은 해 7월9일 한산도해전에서 또다시 대승리를 거뒀을 때도 조선 수군은 진해 안골포까지 왜군을 쫓아가 왜선 30척을 불사르고 철수(안골포해전)했다. 조선 수군은 다음해 3월3일부터 4월3일까지 한달 동안 진해에 주둔해 있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7차례나 출격(웅포해전)했다.

 

  고니시를 중심으로 그의 사위이자 쓰시마 도주였던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 여러 장수들은 진해에 웅천왜성, 안골왜성, 명동왜성, 자마왜성 등을 쌓아 조선 수군을 견제했다.

 

■ 왜군 제2거점, 웅천왜성

 

  웅천왜성은 해발 184m 진해 남산 꼭대기에 있다. 성벽 둘레 1250m에 면적 1만7930㎡로, 전체 왜성 가운데 울산 서생포왜성 다음으로 크다. 웅천왜성은 안골포, 마산, 가덕도, 거제도 등과 육로와 해로 모두 연락하기 좋은 위치에 있으며, 일본으로 철수하기에도 좋은 위치이다. 왜군은 이곳을 부산 다음의 제2거점으로 삼았다.

 

 웅천읍성은 세종 16년(1434년)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와 제포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됐다. 하지만 삼포왜란 때는 왜인들에게 함락돼 동문이 불탔고, 임란 때는 왜군에게 함락돼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사용됐다. 성벽 둘레에는 폭 4m가량의 해자가 있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4차례 조사가 이뤄졌는데, 적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박아놓은 나무말뚝(목익)과 들었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나무다리(도개교)가 해자에서 확인됐다. 웅천읍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현재 동문인 견룡문과 주변 성벽이 복원된 상태이다. 경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돼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는 웅천왜성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페인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웅천왜성에 초청하기도 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27일 부산에 상륙해 다음날 웅천왜성에 와서 1595년 6월 초순까지 1년6개월가량 머물며 웅천왜성과 주변 왜성에 있던 왜군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 집전과 교리 강론을 하고 이교도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사목활동을 폈다.

 

 세스페데스 신부도 웅천왜성에 도착한 직후 일본의 포르투갈인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에게 보낸 편지에서 “웅천성은 난공불락으로 조만간 거대한 성벽과 망루와 치성을 가진 대단한 공사가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 근처에는 아우구스티뉴(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 휘하의 모든 중신과 병사, 동맹자, 종속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매우 잘 지은 넓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저택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라고 웅천왜성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소개했다.

 

 하지만 성의 웅장함과 달리 웅천왜성에 주둔해 있던 왜군의 처지는 매우 곤궁했다. 조선 수군이 남해안 제해권을 철저히 틀어쥐고 있어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사실상 조선 수군과의 맞대결을 포기하고, 성에 틀어박혀 농성전으로 버텼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세스페데스 신부는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에게 두번째 보낸 편지에서 “굶주림, 추위, 질병 등 일본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 가톨릭교도들의 고난은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관백 전하(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식량을 보내준다 해도 이곳에 도착하는 양은 실로 보잘 것 없어서, 전군을 먹여 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일본에서 지원은 이미 중단된 지 오래이며, 최근 2개월 동안은 도착한 배도 없습니다”라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 왜군 해군기지, 안골왜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웅천왜성을 쌓을 때,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등은 해발 100m의 동망산 꼭대기에 안골왜성을 쌓았다.이들은 왜군 수군을 대표하는 장수들로, 해전에서 거듭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조선 수군을 막기 위한 수군 기지로 삼기 위해 안골왜성을 쌓은 것이다.

 

  왜군은 안골왜성을 쌓을 때 인근에 있던 조선 수군기지인 안골포진성의 성벽 돌을 가져다 썼다. 안골포진성 서쪽 성벽 일부는 아예 안골왜성의 성벽으로 이용됐다. 안골포진성은 성종 21년(1490년) 건설됐다. 앞서 이곳엔 세조 8년(1462년) 김해 가망산에 있던 만호진이 옮겨와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임란 때 제포진성처럼 왜군에 함락됐다.

 

  안골왜성은 웅동만을 사이에 두고 웅천왜성과 마주보며, 부산의 길목인 가덕수로를 지키는 구실을 했다. 현재 가덕수로는 부산신항 건설로 매립돼 대부분 메워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안골왜성을 고적 ‘웅천안골리성’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현재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돼 있다.

 

 

  명동왜성은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1593년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가 진해 명동마을 주변 구릉에 쌓고, 소 요시토시가 주둔했다. 마쓰우라는 일본 규슈지역에 있던 히라도번의 번주로, 고니시가 사령관으로 있던 왜군 제1군에 소속돼 있었다.

 명동왜성은 진해만 동쪽과 거제만 북쪽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크게 4개의 성곽으로 이뤄져 있다. 명동마을 앞 바다에 접한 나지막한 구릉에 성곽이 하나 있고, 명동마을 뒷산인 성실봉 꼭대기에 또 성곽이 하나 있다. 성실봉 꼭대기 부근에 외성으로 추정되는 성곽이 2개 더 있다. 명동마을 앞 구릉에 있는 성곽과 성실봉 꼭대기에 있는 성곽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축성됐는지 명확하지 않으며, 어느 성곽이 주 성곽인지도 불명확하다.

 

 

  웅천왜성의 또다른 지성인 자마왜성은 와성만 북쪽 해발 240.7m인 자마산 꼭대기에 세워졌다. 애초 이곳엔 삼국시대 때부터 산성이 있었는데, 소 요시토시가 기존 산성을 일부 고쳐 왜성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거진 숲에 파묻혀 성곽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태이지만, 산 위에서는 지금도 조선식 돌담이 발견된다. 자마왜성 터에서는 바다는 물론 웅천읍성 지역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6월 출간 예정 << 

 

곧 출간되는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을 통해

더 자세한 왜성 이야기와 사전답사로 둘러보지 못한 왜성들을 만나보세요!

 

 

*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잠홍 2016.05.27 15: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성 근처에서 가톨릭교 사목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재미있네요. 벌써 마지막 사전답사라니! 이제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요^^

  2. BlogIcon 별과우물 2016.05.30 09: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드디어 책으로 만나 볼 수 있겠군요 ㅎㅎ 기대가 됩니다.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4화 :: 왜장 가토, 우물 없는 ‘철옹성’에 갇히다

-울산왜성

 


 

 

 

■ ‘독 안의 쥐’를 놓치다

 

  “여러 적 중에 청정(淸正·가토 기요마사)이 가장 강하니 청정을 격파한다면 나머지 적은 셀 것도 못 되오이다.”

 

  임진왜란 6년째 정유재란이 터지던 해인 1597년 음력 섣달 그믐날, 조선 국왕 선조는 조선에 파견된 명군 최고지휘관인 군문 형개(邢玠)를 만나 조·명 연합군의 울산전투 승전 상황을 축하하면서 “곧 가토를 사로잡게 됐다”는 형개의 말에 고무돼 이렇게 답했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설 쇠고 9일째 되는 날 선조는 이미 닷새 전 조·명 연합군이 왜군에 대한 포위를 풀고 경주로 후퇴했다는 ‘허무한’ 보고를 받아야 했다.

 

  이 울산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왜란 끝무렵인 1598년 9월 육군 3로군에 수군까지 합해 ‘사로병진’ 작전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울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순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사천 등 3곳의 왜군 본거지에 총공세를 펴기 9달 전 먼저 울산을 전략적인 공격목표로 삼아 집중공격함으로써 벌어졌다.

 

  1597년 12월23일 새벽부터 이듬해 1월4일까지 12일 동안 명군 4만여명과 조선군 1만여명 등 5만여명의 연합군과 울산왜성 일대 왜군 1만여명 사이에 치열하게 펼쳐졌다. 뒤에 출동한 6만여 왜군 구원병력까지 치면 조·명·일 3국의 12만 대군이 12일에 걸쳐 벌인 왜란 기간 최대 규모 전투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는 도원수 권율이, 명군 및 연합군 총지휘는 명군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가 맡았다. 왜군은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했다.1597년 9월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 정유재란 이후 왜군의 승기를 꺾은 명과 조선은 다시 동남해안으로 쫓겨 수세에 몰린 왜군에 대한 막바지 총공세를 준비하면서 울산을 전략적인 우선 공격목표로 잡은 것이다. 왜군의 핵심 배후거점인 경상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조·명 연합군은 먼저 12월22일 언양과 태화강 하류 등 울산 외곽의 수륙 양쪽 길목부터 봉쇄한 뒤 23일 새벽부터 울산왜성을 포위하고 가토를 비롯한 성 안의 왜군 1만여명을 고립시킨 상태에서 이듬해 1월4일까지 대대적인 총공세를 퍼부었다. 가토는 애초 울산왜성에서 남쪽으로 35㎞ 가량 떨어진 자신의 본거지 서생포 왜성에 있다가 조·명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했다는 보고를 받고 23일 밤 뱃길로 태화강 하류에서 조·명군을 피해 울산왜성으로 들어갔다. 수적 열세에 물과 식량까지 바닥난 왜군은 갈증과 허기에다 한겨울 추위마저 겹쳐 극한 상황 속에 궤멸 직전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끝내 울산왜성 내성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산, 김해, 양산 등에서 왜군 구원병력들이 속속 울산으로 출동해 그 수가 6만여명에 이르자 역포위를 우려한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의 포위를 풀고 경주로 물러나고 말았다.

 

  명군이 후퇴하면서 부린 행패 때문에 인근 백성들 피해 또한 컸다. <선조실록>은 당시 명군 장수를 수행했던 접반사의 보고를 통해 “회군하는 군사는 다시 대오를 편성하지 못하고 그 행동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촌락에 들어가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고 부녀자들을 강범하며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 적이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어떤 마을의 노파는 울부짖으며 “굶주림을 참고 쌀을 찧어서 군량을 댄 것은 왜적을 평정하는 날을 기대해서인데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살아갈 길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1598년 9월 사천·순천 왜성과 함께 울산왜성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9월21일 명군 제독 마귀는 2만4000여 군사를 이끌고, 별장 김응서의 5500여 조선군과 함께 먼저 동래를 공격해 부산 쪽 왜군과의 연결을 차단한 뒤, 가토의 1만5000여 왜군이 지키는 울산왜성 공성에 나섰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마귀는 25일 경주로 말머리를 돌렸다가 10월6일 사천에서 명군이 왜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천으로 다시 후퇴했다. 11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따른 본국의 귀환명령을 받고 가토와 휘하의 왜군들이 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난 뒤에야 마귀는 이 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 천수각과 우물이 없던 왜성

 

  울산왜성은 지금의 울산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에 있다. 울산 도심을 가로질러 울산만과 연결되는 태화강과 동천 하류를 끼고 있는 곳이다. 이 성은 왜란 초부터 울산 울주군 서생포에 왜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아온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군의 남하공세에 대응해 동쪽 최전선에 전초 방어요새로 쌓은 것이다.

 

  가토가 설계하고 부장 오다 가쓰요시(太田一吉)가 감독을 맡았으며 1만6000여명을 동원해 1597년 12월 울산왜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40여일 만에 공사를 끝낸 것으로 기록됐다. 축성에 필요한 돌은 가까이 있던 경상좌도병영성과 울산읍성 성벽을 헐어 그 돌을 가져다 썼다.

 

  울산 중구 동·서·남외동 일대에 걸쳐 있는 경상좌도병영성(사적 제320호)은 1417년(태종 17년)부터 1894년(고종 31년)까지 존속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 영성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울산왜성 축성 때문에 파괴됐다가 왜란 뒤 몇차례 보수 및 복원공사가 이뤄졌으며, 현재 북문 터를 중심으로 동·서문 터까지 양쪽으로 성벽이 복원돼 남아 있다. 울산 중구 북정·교동 일대에 있던 울산읍성은 조선 성종 8년(1477년)에 쌓은 울산군수(종4품) 치소가 있던 읍성으로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된 뒤로 현재 성곽이 남아있지 않다.

  울산왜성은 공사를 급히 한데다 축성이 끝나자마자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본곽 안에 여느 왜성에 다 있는 지휘소 건물인 천수각이 없었다. 건물이라면 각 성벽 모서리마다 세운 12개의 전투용 누각과 거주용 막사 정도였다.

  정유재란 때 왜군 장수를 따라 조선에 파견된 뒤 이 왜성의 축성을 지켜봤던 왜군 종군승려 게이넨(慶念)은 일기에 당시 급박했던 축성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른쪽도 왼쪽도 성을 쌓느라 쇠망치소리 도끼질 소리로 잠을 이룰수 없다. 총을 쥔 사람, 깃발 든 사람, 뱃사람 할 것 없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오고 어슬렁거리는 자는 매를 맞고 때로는 적에게 목이 잘리우고…”

 

 

  울산왜성은 독립된 구릉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으로 성을 포위해 고립시키기는 쉬운 반면, 어느 방향에서도 공격로를 찾기 힘든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명군은 전투 초반, 쉽사리 성을 에워싸고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끝내 성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명군 경리 양호를 수행했던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은 보고를 통해 “석축이 깎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위로 쳐다보며 공격해야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 성은 이처럼 외부 공격으로부터는 철옹성 같은 요새였지만 성 안에 우물이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과의 전투 때 성 안에 고립됐던 왜군들이 갈증을 못 견디고 어둠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 물을 찾다가 매복해 있던 별장 김응서의 조선군에게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때문에 가토는 본국에 돌아가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을 때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도록 성 안에 우물 120여개를 파고 실내 다다미를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드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 성은 왜란 이후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됐고 1624년부터 30년간 전함을 건조하는 전선창을 두기도 했다. ‘울산학성’이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때엔 조선 고적 제22호(1935년 5월)로, 해방 뒤엔 국가 사적 제9호(1963년 1월)로 지정됐다가, 1997년 10월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에 따라 ‘울산왜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울산시문화재자료 제7호로 격하됐다.

 

  한삼건 울산대 교수(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는 “원래 학성은 나말·여초 때 우리 옛성인 계변성 또는 신학성을 일컫는 것으로, 울산왜성 북쪽 맞은편 학성산에 있었다. 이곳엔 고려 말·조선 초의 옛 읍성도 있었고, 울산왜성 전투 때 조·명 연합군 지휘부가 주둔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조·명군 지휘부가 있던 학성산엔 2000년 7월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울산지역 의병 239명과 그밖의 다수 무명의 위패를 봉안한 충의사가 세워졌다. 울산왜성은 왜란 당시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성’(甑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공간 구실을 하고 있으나 주변의 급속한 도시개발로 인해 본곽 동쪽 주출입구 주변의 성벽 등을 빼곤 아래쪽 제2곽과 제3곽 석축은 대부분 훼손돼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한삼건 교수는 “제3곽부터 성 아랫부분 석축은 일찌감치 조선시대부터 이미 뽑혀나갔을 것이다. 왜란이 끝난 뒤 경상좌병영성을 보수 또는 복원할 때 왜성 돌을 가져다 썼을 것으로 보인다. 병영성 돌이 왜성으로 갔다가 다시 병영성으로 돌아가기도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 5화에서 계속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별과우물 2016.05.23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부분 훼손 되어서 남아 있는 부분이 별로 없다는 점이 안타깝네요 ㅠㅠ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3화 :: 왜구를 막았던 '신라의성'에 왜성이 들어서다

 -부산 구포·양산·호포 왜성

 


 

 

  시인 김용호(1912~1973)는 그의 대표 장시 <낙동강>에서 “칠백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고 했다. 유구한 세월을 도도히 흘러 남하하면서 반변천·내성천·영강·위천·감천·금호강·황강·남강·밀양강·양산천 등 여러 지천을 품어안고 멀리는 가야와 신라 천년의 영욕에서부터 가까이는 6·25전쟁의 참상과 4대강 사업에 따른 몸살까지 겪으면서 영남인들에게 삶의 젖줄이 돼왔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도 낙동강 수로는 왜군에게 진격, 후퇴, 방어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특히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을 통한 서쪽 진격로가 봉쇄되자 왜군은 낙동강 하류 수로를 통해 서·북쪽 내륙으로 연결되는 길목인 김해, 구포, 양산 등지에 왜성을 쌓고 교두보를 마련하려 했다.

  대표적인 예로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 때 왜군은 부산 동래에 집결한 대규모 병력을 이 수로를 이용해 진주로 실어날랐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도 1592년 7월 한산도·안골포 해전에서 왜 수군을 대파한 뒤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쫓아 이 수로를 따라 김해, 양산, 구포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 신라 장군 의기 서린 ‘의성’(義城)에 들어선 왜성

 

  부산 북구 덕천2동 산93 일대에 있는 구포왜성은 왜군 제6군 수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휘하 장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이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뒤인 1593년 7월 낙동강 수로 확보와 인근 김해·양산지역 왜성과의 연락 및 지원을 위해 쌓은 왜성이다. 금정산 상계봉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지맥이 끝나는 곳의 해발 75.7m와 36.5m 높이 두 구릉에 각각 본성과 외성을 쌓아 연결했으나 1970년대 낙동강교 건설로 단절됐다. 외성은 2005년 북구 문화빙상센터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본성부 2만9548㎡만 보존돼 부산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다.

 

  구포왜성은 상계봉 쪽 능선을 끊어 북동쪽으로 방어망을 치고 서쪽과 북쪽으론 낙동강 수로를 통해 김해와 양산 방향으로 나가고, 동쪽으론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 방향과 연결되는 전략상 요충지에 자리잡았다. 본성은 낙동강과 주변을 잘 관망할 수 있는 정상부에 본곽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한두 단계 아랫쪽 주위까지 모두 5개의 성곽을 두르고, 그 아랫쪽에 다시 4개의 성곽을 배치한 형태다.

 

  본곽 주위 성곽은 60~70도로 비스듬히 쌓은 석축이 8~10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본곽 안에 성의 심장부요 지휘소 격인 천수각 터도 있다. 현재 본곽은 빈 터로 남아 있지만 주위 다른 성곽 터는 대부분 경작지 또는 사찰 터로 편입돼 관리 부실의 우려를 안고 있다.

 

 

 

■ 수륙교통 요지에 남긴 왜성

 

  양산은 조선 전기 경상좌도 남부의 중요 교통 요지로서 11개 속역을 거느린 황산역과 7개 원을 두고 있었다. 황산역은 조선시대 동래에서 한양까지 연결된 간선도로 구실을 했던 영남대로의 중요 거점으로서, 동래를 거쳐 올라온 관리들이 밀양이나 김해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이 됐다.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1 일대의 양산왜성은 바로 이 황산역의 교통로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왜군이 쌓은 성이다. 양산시 동면 가산리 산 56-1 일대에 있던 호포왜성은 양산의 7개 원 가운데 호포원이 섰던 교통의 요지를 이용해 왜군이 거점을 마련했던 곳이다.

 

  양산왜성은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깨지면서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해 일으킨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 왜장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남진하는 조·명연합군으로부터 부산의 본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양산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삼각주의 해발 133m 야산 두 봉우리 가운데 동북쪽의 높은 곳에 본곽을 쌓고 동북쪽으로 길게 부곽을 2개 붙였으며, 서남쪽으로도 능선을 따라 부곽을 5개 정도 길게 연결한 뒤 봉우리 쪽에 별도 중심곽을 배치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본곽 성벽은 4~6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부곽 쪽은 허물어진 곳이 많다. 성벽 둘레는 1.5㎞ 가량 된다.

 

  본곽 동남쪽 아래 산기슭에도 별도 성곽이 남아 있는데 터가 모두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밭 곳곳에서 삼국시대 토기와 조선시대 옹기 파편 등이 발견됐다. 양산왜성은 ‘물금 증산리왜성’이라는 이름으로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로 지정돼 있다.

 

  이 왜성은 뒤에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고쳐 쌓고, 구로다 죠수이(黑田如水)·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자가 주둔했다. 양산왜성이 있는 산은 부산의 증산왜성처럼 꼭대기를 깎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산으로 불린다.

 

  지역 행토사학계에선 이 왜성도 구포왜성처럼 <삼국사기>에 ‘사도성’(沙道城)으로 기록된 삼국시대 성터에 축성한 왜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산왜성과 양산천 및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호포왜성은 현재 철저하게 훼손돼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다. 서쪽 전반부는 35번 국도와 촌락 및 농경지 개설로, 동쪽 후반부는 부산교통공단의 지하철 기지창 건설로 인해 파괴됐다. 호포는 금정산 서쪽 끝자락에 양산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 있던 교통 요지의 나루로서, 조선 전기까지 호포원이 있다 폐원됐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 자리에 왜성을 쌓아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포왜성은 축성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호포원은 당시 양산군에 있던 7개 원의 하나였는데, 이미 북정원과 함께 폐원된 상태였다. 원으로서의 가치가 약화됐거나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 때문에 폐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성은 물론 이에 앞서 호포원과 관련한 유구도 충분히 나올 만한 가능성이 큰 곳인데도 사전에 문화재 발굴조사도 없이 국도나 지하철 기지창 건설 공사가 강행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호포원과 호포왜성은 그 이름과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개발 만능주의와 무지로 인해 소중한 역사문화자산을 잃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될 만하다.

 

>> 4화에서 계속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0화-  왜성, 어디까지 알고 있니?

 


 

S#1. 2015년 12월의 산지니 출판사

 

 

대표님 : (신문 한 꾸러미를 주시며) 이 기사 한번 읽어보고 담당 기자님들께 연락해보는 건 어떤가? 왜성 관련 서적도 별로 없는것 같은데... 

 

기획 가뭄에 허덕이고 있던 단디SJ 편집자,

대표님께서 건내주신 한겨레 기사에 눈이 번쩍 뜨이다.

 

 

단디SJ : (혼잣말로)  그동안 왜성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은 성'으로만 알고 있는데...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증명하는 사실상 유일한 역사적 증거물이자, 16세기 말 우리 조상이 절체절명의 국난을 마침내 극복하고 얻은 전리품이구나!

 

인터넷을 통해 그동안 연재된 '왜성' 기획기사를 찾아본다.

 

단디SJ :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왜성을 사라지게 만들었구나.

 

단디SJ는 부산 박문구왜성과 경남 양산시 호포왜성 편을 읽고 있다.

이 왜성은 관공서 건물과 지하철 기지창 건설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문화재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완전히 사라졌다. 나머지 왜성들도 대부분 묘지, 농경지 등으로 활용되면서 빠르게 훼손되고 있다. 멸실 직전의 왜성도 나타났다.

 

S#2. 2015년 크리스마스 이틀 전  

 

 

한 자 한 자 진심을 다해 출간 제의 메일을 쓰는 단디SJ 편집자.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누가 보면 애인한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는 줄 알겠다.

 

S#3. 2015년 12월 30일 (메일 발송 일주일 후)

 

단디SJ 편집자, 보낸메일함을 확인한다.

기자님은 메일을 읽었다. 하지만 답이 없다.

시무룩.

 

 

 

S#4.  2016년 1월 6일 (메일 발송 2주일 후)

 

대표님 : 거, 왜성 관련 해서 연락이 없는가?

단디SJ  : 네... 그러네요.

 

메일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산지니 출판사는 바쁘게 돌아갔다.

중국근현대사상총서를 비롯한 몇 권의 책이 나왔고,

출판사 식구들끼리 신년회를 가졌으며,

연말정산서류를 뗀다고 부산을 떨었다.

 

S#4.  2016년 1월 16일 (메일 발송 20 후)

 

여느때와 다름없이 메일함을 여는 단디SJ 편집자.

어딘가 반가운 메일주소에 오른손의 마우스질이 바빠진다. 클릭클릭!!

 

 

단디SJ : 아~ 메일이 왔어! 왔다고!!

 


 

 

2016년 4월 15일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는

독자 여러분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왜성'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한겨레> 기자 3인방이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31개 왜성을 심층 취재한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출간 전 여러분과 우리 지역의 왜성으로 사전답사를 떠나려고 합니다.

 

매주 금요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잠홍 2016.04.19 1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매주 사전답사라니 기대되네요. 왜성에 대한 책도 최초이지만 출간 전 사전답사도 산지니에서 최초 아닌지ㅎㅎ 시무룩 강아지에 빵터졌어요ㅋㅋㅋㅋ

  2. BlogIcon 별과우물 2016.04.20 09: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계기로 책을 만들자고 제안하게 되었고 답변을 받게 되었는 지 알 수 있는 포스팅이라 재밌는 것 같아요. 왜성이라는 주제도 참신하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