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최고의 서화가였던 해강 김규진(1868~1933)이 그린 산수화 대작인 금강산만물초승경도. 창덕궁 희정당을 장식하고 있는 궁중벽화다. 부산일보 DB


조선 후기 서화가의 삶과 예술을 연구해 온 이성혜 부산대 한문학과 강의교수가 새로운 성과물을 내놓았다.


시문에 뛰어났고 서화에도 능했던 조희룡을 다룬 '조선의 화가 조희룡', 김해에 뿌리를 둔 범상치 않은 문인 서화가였지만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불우한 화가 배전을 소개한 '차산 배전 연구'에 이어 최근 '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해피북미디어)을 펴낸 것이다. 

책은 '생산과 유통'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왕실과 양반의 전유물이던 서화가 어떻게 대중적인 문화상품으로 변모했는지를 추적한다. 

조선 후기 양반의 전유물이던 서화 
기성품으로 대중화되는 과정 조명 
주체성 잃은 일제강점 암흑기 회고


조선 시대에는 화원(畵員)과 사자관(寫字官)이 기능으로서의 서화를 주로 담당했고, 예술로서의 서화는 문인서화가로 불리는 양반이 주로 맡았다는 데 먼저 주목한다.

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 / 이성혜
하지만 후기로 오면서 서화 취미가 경화세족을 중심으로 양반 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데다 중인과 서민에게까지 확산하면서 생산과 유통에 일대 변화가 나타난다. 첫째 서화가 주문으로 제작되는 상품이 되었고, 둘째 기성품으로서의 서화를 상설 판매하는 공간인 서화포가 등장했으며, 셋째 서화를 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중개하여 판매하는 중개상이 나타나면서 상품화 및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은 갑오개혁 이후 근대 전환기에 와서는 신식 연활자 인쇄술과 석판 인쇄술의 도입으로 서화 관련 책이 대량 보급되었고, 서화에 대한 근대 매체의 관심이 크게 높아지면서 일반의 인식도 저변화 된 데다 서화가 학교 교과목으로까지 채택되는 등 상품화 대중화에 날개를 달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조선 미술 부흥의 신운동'이라 언론에서 부를 만큼 서화가 인기를 누렸지만 일제 강점기를 맞아 주체성을 잃은 채 식민화의 그늘에 들어서는 등 엇갈린 명암도 고찰하고 있다.


임성원 기자부산일보ㅣ2014-12-29

원문 읽기: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41229000052

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 - 10점
이성혜 지음/해피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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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이성혜 지음/해피북미디어/301쪽/2만 5000원

요즘 그림·글씨를 포함한 미술품을 팔고 사는 시장과 공간은 도처에 수두룩하다. 인터넷에선 그림이며 미술 작품을 팔고 사는 거래가 붐을 이룬다. 그런데 이 땅의 미술품 거래 역사, 이른바 상품으로서의 미술이 등장한 건 100여년 역사에 불과하다.


‘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은 그 상품 미술의 역사를 들춰냈다. 조선시대, 특히 조선 전기 극도로 제한됐던 미술품, 즉 서화의 생산과 유통이 어떻게 대중화되고 상품화됐는지를 추적해 흥미롭다.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 서화를 만들어내고 향유한 건 직업화가인 화원과 양반가 사대부들에 국한됐다. 도화원 소속인 화원(畵員)과 사자관(寫字官)은 지극히 기능적인 생산만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명을 받아 몽유도원도를 그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대부들이 즐겼던 서화도 그냥 즐기고 선물하는 향유 차원에 머물렀고 대중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글씨로 유명했던 문인 김구라는 사람은 자신의 글씨가 매매의 대상이 됐다는 소식에 수치심을 못 이겨 절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 들어 양상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도화원 폐지와 중국 서적 수입이라는 문화현상이 큰 원인이었다. 서화예술이 서울 양반 문벌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고 부를 획득한 중인·서민들 사이에서도 대중화됐다고 한다. 매매 중개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서울 광통교 부근에는 서화를 판매하는 서화포도 생겼다. 주문생산과 대량생산 단계에 든 것이다. 책에는 도화원 폐지로 먹고살기가 힘들어진 직업 화가들의 생활상이 비중 있게 포개진다.

저자는 결국 한국 미술 대중화가 신분사회가 해체된 근대 전환기의 생존 방편 중 하나였음에 주목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일제강점기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서화가들의 애환과 한국 서화에 미친 영향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김성호서울신문ㅣ2014-12-27

원문 읽기: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1227018001





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 - 10점
이성혜 지음/해피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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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문화총서 04


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



왕실 위한 기능품·사대부의 취미이던 서화, 대중이 향유하는 문화상품이 되다

왕실과 양반계급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던 서화는 어떻게 대중적 문화상품이 되었을까? 『저자 이성혜 교수는 근대 전환기 신문과 잡지를 살펴 조선시대부터 일제 시기까지 국내 서화계의 변화를 실증적으로 규명한다.

조선시대의 서화는 관에 소속된 서화가들이 왕실의 주문을 받아 제작하거나, 사대부 양반들이 여기(餘技) 활동으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증여하였다. 하지만 직업화가인 화원을 관리했던 국가기관 도화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서화가는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신분제의 해체로 양반 문인서화가 또한 증발하였다. 이로써 서화가는 생계를 오직 자신이 해결해야 하게 되었고, 서화는 대중들 또한 비용을 지불하고 향유하는 ‘상품’으로 거듭난다. 근대국가 체제로의 전환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서화가들이 어떻게 생존을 모색했는지 엿볼 수 있는 이 책은 한국 서화의 특수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양반 계층의 전유물이 기성품이 되기까지

조선시대에는 화원(畵員)과 사자관(寫字官)이 기능으로서의 서화를 주로 담당했고, 예술로서의 서화는 문인서화가로 불리는 양반이 맡았다. 안평대군의 명을 받아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도 타인의 감흥을 대신 그려주는 기능인이었다. 반면 사대부 사이에서는 서화를 취미로 삼고 벗이나 지인에게 작품을 증여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글씨가 유명했던 문인 김구는 자신의 글씨가 매매 대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치심을 느껴 다시는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전기의 서화는 대중들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서화예술은 서울의 양반 문벌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다. 이는 중국 서적을 수집하던 문화현상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중인과 서민들이 상업경제의 발달로 부를 획득하면서, 서화는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서화를 매매하는 중개인도 등장했으며, 서울 광통교 부근에는 서화를 판매하는 서화포도 생겼다. 증여를 위한 서화 생산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서화는 주문생산 또는 대량생산되기에 이른다.

김명국은 도화서 화원이면서 개인적으로 그림을 주문받아 그렸다. 도화서 화원은 정규적인 녹을 받는 것이 아니어서 그들의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주문 제작에도 제재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관의 요구가 있을 때는 이에 응하여 일정한 보상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때에는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지옥도를 특히 잘 그렸던 김명국은 사찰의 승려들에게 많은 그림 주문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_본문 43~44쪽


광통교 그림 시장에서 팔린 속화는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특정한 주제 혹은 제재를 반복한 것이었으니, 이것의 감상 방식은 서울 거주민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즉 이런 그림들은 집안의 장식물로 감상되었던 것이다.

_본문 54쪽


근대 전환기 서화가의 생존 방법 모색

민간 서화가 양성 기구 출현과 작품 판매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 사회의 배경을 상실한 서화가들은 여러 방면으로 생존을 도모했다. 먼저, 민간 서화가들이 중심이 된 서화가 양성 기구와 서화가 조직의 출현은 서화 생산․소비자의 폭을 넓혔다. 조선시대와 달리 근대 전환기의 민간 서화 교육기관에서는 학생을 신분에 관계없이 공개적으로 선발했다. 서화가 김규진이 자신의 호를 내건 해강서화연구회는 1918년에 실력이 인정된 회원에게 수업증을 수여하였는데, 1회 수업인원은 조선인·일본인·남자·여자를 포함했다.

또한 서화가들은 개인 및 그룹전을 열어 서화의 대중화를 꾀하고 작품을 판매하였다.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고, 주최 모임에서 회비를 받고 출품된 작품을 한 점씩 주는 판매 목적의 전람회도 있었다. 전람회라는 행사 자체도 전근대시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현상이었지만, 이름난 서화가들이 모여 주최한 휘호회는 당시 신문에서 명명했듯이 ‘조선미술부흥의 신운동’이라 할 만하다. 즉석으로 작품을 제작해 참석자에게 증정한 이 행사는 큰 인기를 얻었다.

낮 12시경에 (…)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고, 서화가들은 사람과 종이 속에 묻혀 땀을 흘리며 쉴 틈도 없이 붓을 휘둘렀고, 서화재료는 서화가의 앞마다 산과 같이 쌓였으며, 오후 7시가 지나도록 서화가는 붓을 놓지 못했다고 한다.

_본문 104쪽


한국 서화에 드리워진 일본 식민의 그늘

일제 시기, 한국 서화 역시 일본 식민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22년부터 총독부가 주도한 조선미술전람회는 한국 서화를 좌지우지하면서 한국 서화의 주체성을 사라지게 했다. 미술계 신인 등용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 전람회의 심사위원단은 11회부터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인에게 한국적인 것을 평가하게 하여 한국 근대 미술의 식민화를 촉진한 것이다.

서화가들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일제와 친일 관료의 권력을 이용해야 했다. 이 부분이 한국 근대 서화 발전에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근대성과 함께 드리워진 일제 시기 식민의 그늘이 한국 근대 서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고자 하였다.



글쓴이 : 이성혜

부산대학교 한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강의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연구 초기, 조선후기 서화가의 삶과 예술에 골몰하여 그 결과물을 조선의 화가 조희룡(한길아트, 2005)으로 출간하였으며, 부산 김해에 뿌리를 둔 범상치 않은 문인서화가, 그러나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불우한 화가 배전을 고찰한 차산 배전 연구(보고사, 2002)도 출간하였다.

이후, 이들 조선후기 서화가들이 중세가 해체된 근대전환기에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며 경제적 문제를 해결했는지에 대한 관심으로‘근대전환기 서화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물이 곧 이 책이다. 최근에는, 조선후기 역관들의 근대전환기 행방을 쫒고 있다. 근대전환기 역관들의 행방은 아마도 한국의 근대와 그 성격 및 이를 둘러싼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이를 정치·사회·문화를 포함하는 지성사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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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

이성혜 지음 | 학술 | 국판 양장 | 301쪽 | 25,000원

2014년 12월 24일 출간 | ISBN : 978-89-98079-08-6 93600

왕실과 양반계급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던 서화는 어떻게 대중적 문화상품이 되었을까? 저자 이성혜 교수는 근대 전환기 신문과 잡지를 살펴 조선시대부터 일제 시기까지 국내 서화계의 변화를 실증적으로 규명한다. 근대국가 체제로의 전환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서화가들이 어떻게 생존을 모색했는지 엿볼 수 있다.



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 - 10점
이성혜 지음/해피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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