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달이 아주 크고 아주 둥글고 유달리 밝게 빛나는 어두운 밤에,

르싸네가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올 때면,

따금 저 멀리서 누군가 마니석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사 없는 민요처럼 고요한 울림이었다.”

 

 

티베트 작가 페마체덴의 소설 『마니석, 고요한 울림』.

작가는 그 속에서 대화의 중첩과 생생한 묘사로,

오늘날 티베트인에게 들이닥치는 삶의 변화를 잔잔하게 그려냈습니다.

 

이번 북토크는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한국에 소개한 김미헌 역자와 함께,

품 속에 있는 티베트인의 삶과 죽음, 종교와 일상을 나누려 합니다.

 

낯설지만 매력적인 티베트 문학을 번역자와 함께 알아가는 시간,

티베트의 문화를 소설의 내용과 함께 엿볼 수 있는 시간을 함께할

독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일시: 11월 18일(월) 저녁 7시 ~ 8시 반

 

*장소: 책방 밭개 (부산시 부산진구 서전로37번길 26)

 

*신청 방법
책방 밭개 인스타(@narlrlrlr)나 블로그에서 신청 (최대 15명)

 

*참가비용
참가비 10,000원 (현장 지불) or
책방 밭개에서 <마니석, 고요한 울림> 도서 구매 + 참가비 5,000원

 

 

마니석, 고요한 울림 - 10점
페마체덴, 김미헌/산지니
Posted by 실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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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니석, 고요한 울림ㅣ페마체덴 지음, 김미헌 옮김ㅣ산지니ㅣ336쪽

 

*마니석: 중국의 소수민족인 장족은 돌에는 영혼이 있어 꾸준히 노력하고 매일 밤 석판에 육자진언을 새기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사람들은 도필을 가지고 힘든 작업을 계속하며 석판에 경전의 문장, 각종 불교, 행운을 불러오는 문양을 다양한 색으로 표현한다. 작업이 끝나면 평범했던 돌과 석판은 마니석(瑪尼石)으로 재탄생된다.

 

 

▶ 티베트의 이야기꾼 페마체덴,
   그가 들려주는 낯설고도 가까운 티베트 문학을 만나다

 

티베트 출신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페마체덴의 단편 소설집 『마니석, 고요한 울림』이 출간됐다. 이 책에는 표제작 「마니석, 고요한 울림」을 포함해 모두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페마체덴은 티베트를 소재로 한 영화들을 주로 연출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도 줄곧 소설을 썼고, 그의 영화는 대부분 자신이 쓴 소설에서 연유한 이야기들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마니석, 고요한 울림」도 영화로 각색되어 벤쿠버 영화제 및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 상영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2018년 75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오리종티 각본상을 받았다.


페마체덴의 소설은 우리를 신비한 티베트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러나 티베트의 ‘다름’을 과장해서 억지 감동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페마체덴의 소설에는 스펙터클한 사건이 존재하지 않지만, 삶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근원적 물음이 있다. 작가는 대화의 중첩과 생생한 묘사로 잔잔하게 오늘날 티베트인에게 들이닥치는 삶의 변화를 그려낸다. 그 속에는 티베트인의 삶과 죽음이 있고 종교와 사상이 있고 또 일상이 녹아들어 있다.

 

 

 

▶ 묘하게 닮은 두 단어
   마술적 사실주의와 티베트

 

페마체덴의 소설을 말하며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라는 용어는 중요하다. 『마니석, 고요한 울림』에서는 현실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들, 현실의 법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과를 그려낸다. 소설 속에서 티베트는 현실적 공간이기도 하면서 판타지적 공간이기도 하다.


표제작 「마니석, 고요한 울림」에서는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이 빛을 발한다. 소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마니석 두드리는 소리에 르싸네가 귀를 기울이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문득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동기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조각공을 꿈속으로 불러낸다. 죽은 조각공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마니석에 육자진언을 새기는 행위를 통해, 아들 르싸네는 부모의 죽음에 대한 의례를 치른다. 이야기는 르싸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판타지로 풀어내며 독자를 마술적 사실주의의 체험으로 이끈다.

 

 

 ▶ 작품을 거니는 인물들
    활불, 돌마, 그리고 이방인

 

『마니석, 고요한 울림』에는 수많은 형상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셋으로 모아진다. 바로 활불, 돌마, 이방인이다.


활불은 「마니석, 고요한 울림」, 「우겐의 치아」, 「기억 속 두 사람」에 등장한다. 활불은 덕행이 아주 높은 승려를 이르는 말로, 티베트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의 정점에 있는 인물로서 티베트의 전통을 대표한다. 그러나 활불은 고상한 체하는 존재가 아니다. 활불은 언제나 티베트 사람들 곁에서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걱정하는 인자한 존재다.


돌마는 티베트 불교의 대표적인 여자보살을 지칭하는 단어로, 「낯선 사람」, 「오후」, 「죽음의 색」에 등장한다. 작품 속에서 돌마는 작품 전체에서 삶의 처처에 자리하고 있는, 그러나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욕망을 대표한다.


이방인은 ‘낯선 사람’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낯선 사람」의 ‘낯선 사람’은 티베트 마을에 문득 나타나 마을을 휘젓고 사라지는 사람이다. 이방인은 티베트 마을 밖, 대도시 또는 소도시에서 들어온다. 「아홉 번째 남자」에서 용우파엔이 만난 트럭 기사, 잘생긴 남자 등은 모두 도시에서 왔다. 티베트 공간에 들고 나는 ‘낯선 사람’이란 존재는 티베트 바깥의 모든 이들로 상징된다. 그들은 한족 중국인, 티베트를 행정구역화한 공무원, 푸른 눈의 이방인 등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이들을 처음으로 경험하며 놀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티베트 바깥사람들은 티베트 사람들을 오히려 무언가 신비에 둘러싸여 있는 인물들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마체덴의 단편집은 티베트에 대한 이해의 현실적 반영이다.


페마체덴은 이처럼 활불과 돌마, 이방인이라는 상징과 표상을 통해 티베트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티베트 안과 밖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교차하는 시선을 그려내고 있다.

 

 

▶ 인민과 장족 사이
   티베트인의 정체성을 말하다
 
「타를로」에서는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중국과 티베트의 관계를 보여준다. 「타를로」에서 타를로는 신분증을 만들러 도시에 나갔다가 다양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생 첫 경험과 마주한다. 신분증을 만드는 행위는 티베트의 전통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건 중국의 행정구역 안에 사는 ‘인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위치시키는 일이다. 타를로가 티베트 바깥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건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이라는 공식적인 둘레 안으로 전치하는 과정이다. 그는 행정력이 요구하는 대로 머리를 잘랐다가, 땋았다가 한다. 그리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마오쩌둥의 어록을 외움으로써 ‘중국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자네, 《인민을 위해 봉사하다》 한번 읊어보게. 우리 경찰들 시야 좀 넓혀줘.”
타를로는 경찰들의 표정을 보면서 군소리 하지 않고 거침없이 암송하기 시작했다.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 1944년 9월 8일, 마오쩌둥. 우리 공산당과 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 신사군은 혁명 대오입니다. 우리 혁명 대오는 오로지 인민의 해방을 위해, 철저히 인민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장쓰더 동지는 우리 혁명 대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같지 않습니다. 중국 고대 문학가인 사마천은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있고 깃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다 맞는 죽음은 태산보다 훨씬 무겁고, 파시스트를 위해 일하거나 인민을 착취하거나 핍박하다 맞는 죽음은 깃털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장쓰더 동지는 인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다 숨졌으므로 그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 「타를로」 중에서

 

티베트 사람으로서 타를로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불통의 경험을 반복한다. 그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티베트의 전통은 마치 그의 꽁지머리처럼 잘려나간다. 중국이라는 행정구역의 지도가 그의 삶으로 다가올 때, 그는 혼란을 경험한다. 중국식 교육에 어쩔 수 없이 함몰돼 있는 그이지만,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지식과 경험은 마오쩌둥 어록이 아니라 ‘양치기 방법론’이다. 작품에서는 티베트가 맞닥뜨린 정체성의 위기가 그렇게 그려진다.

 

 

▶ 그럼에도 어디에나 있는
   인간의 보편적 이야기

 

소설 속 이야기는 티베트에서 일어났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의 삶에 관해 말한다. 『마니석, 고요한 울림』 속 작품들은 ‘티베트’라는 소재에 기대어 ‘낯선 티베트의 종교 혹은 문화’를 그럴듯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 소재를 경유해 인류 보편의 일상적 물음인 삶과 죽음, 우정과 사랑을 진솔하게 다루어,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아홉 번째 남자」에 있는 용우파엔의 아홉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티베트 사람들의 온갖 형상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는 티베트에서 일어났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의 삶에 관해 말한다. 용우파엔이 만난 남자들은 우리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비(allegory)다. 아홉 남자, 그러니까 인생은 각각 종교, 사랑, 재물, 타향, 외모, 섹스, 권력, 자식, 지식을 추구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티베트, 티베트 소설은 낯설다. 그러나 인류 보편의 일상적 물음을 담은 『마니석, 고요한 울림』속 작품들은 풍부한 상징성과 문학성을 띠면서도 독특한 티베트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런 페마체덴의 작품들은 한국 독자들에게 선물과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 이 책소개 글은 임대근 교수의 해설 ‘티베트의 이야기꾼 페마체덴 그리고 활불, 돌마, 이방인의 유비(allegory)들’을 인용·편집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책속으로 / 밑줄긋기

 

 

저자 소개                                                                      

지은이 페마체덴(萬瑪才旦)

티베트인으로서 작가이자 영화감독, 번역가다. 시베이 민족대학에서 티베트어와 문화를, 베이징 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1991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티베트어 소설집 『유혹诱惑 』, 『도시 생활都市生活 』과 중국어 소설집 『방랑 가수의 꿈流浪歌手个梦 』, 프랑스어 소설 『Neige』, 일본어 소설 『영혼을 찾아서寻找智美更登 』가 있다. 그의 작품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체코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2002년부터 티베트의 문화와 생활을 깊이 있고 세심하게 그려낸 영화를 만들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고요한 마니석静静的嘛呢石 >, <진파撞死了一只羊 >, <영혼을 찾아서 寻找智美更登>, <올드 독老狗 >이 있다.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각본상, 상하이영화제 아시아 신인 최고감독상, 중국 진지상 최고연출가 데뷔작상, 도쿄 FILMeX영화제 최고영화상, 브루클린 영화제 최고영화상 등을 수상하며 활발한 활동 중이다.

 

옮긴이 김미헌
성신여대 중문과와 제주대 통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으며 한국외대 중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국 안칭직업기술대학 외국어과 교수를 지낸 바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에서 영상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목차                                                            

 

 

 

 

마니석, 고요한 울림 - 10점
페마체덴, 김미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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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의 특이한 빛 - 페마 체덴과 티벳영화 ⑤ 

 

 

 

산지니에서는 중국 티벳 출신 영화감독이자 소설가 페마 체덴의 소설 작품집(원제: <嘛呢石静静地敲>)을 준비 중입니다. 페마 체덴은 최근 영화 활동을 주로 하고 있지만, 그의 예술적 근원은 소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에게 있어 영화와 소설은 둘이 아닌 하나로 통하는 길이니까요.

 

총 7회 연재될 '중국영화의 특이한 빛 - 페마 체덴과 티벳영화'는  2016년 출간된 <중국 청년감독 열전>(강내영 지음)에 실린 글입니다. 이를 통해 페마 체덴의 소설집 출간 전, 그의 작품 세계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무어화(無語話), “말하지 않고 티벳스러움(Tibetan-ness)을 드러내기 

 

 

 

페마 감독의 작품에 드러난 주제의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티벳의 문화정체성을 표현하는 진실한 티벳영화라는 데 있다. 그의 장편영화 다섯 작품 중에서 중국 국영중앙방송 영화채널(CC-TV6)에서 출품한 2009나팔바지 휘날리던 1983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 전부가 티벳어 영화이다.

 

 그는 2014101차 인터뷰에서, 왜 티벳영화를 찍느냐는 질문을 하자, “무엇보다 내가 가장 찍고 싶어 하기 때문이며, 내가 제일 익숙하고 잘 아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특히, 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티벳언어이다. 티벳어는 언어이지만 티벳민족을 구성하는 근간이 된다고 티벳어 영화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현재 티벳 전역의 학교, 공장, 기업에서 표준어로 중국어를 사용하는 시대에 그가 티벳어를 강조하는 것은 민족 자존감과 민족 정체성의 발로로 보인다.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영화에는 중국스러움(Chineseness)’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고향인 티벳 마을을 배경으로 티벳 전통문화와 가족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티벳인 영화배우, 영화제작자, 영화 스태프들과 티벳어 영화를 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의 티벳스러움(Tibetan-ness)’은 대부분 영화에서 티벳 전통풍습을 곳곳에 배치하여 내러티브의 플롯으로 활용하거나, 티벳 정신을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성스러운 돌에서 활불(活佛)’의 존재나, ‘쿤둔 왕자의 설화를 등장시키거나, 오색신전에서 랄롱 페도로의 활쏘기 전설과 전통 장희(藏戱) 가면극을 내러티브 속 에피소드로 배치한다.

 

 

중국 시짱자치구의 라싸에 있는 조캉사원의 풍경

 

활불의 사례를 보면, 활불은 티벳불교에서 라마가 전생(轉生)한 화신(化身)이며 미륵불이 출현하기 전까지 대대손손 다시 태어나서 도탄에 빠진 민중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불교 윤회사상과 티벳의 고대무속신앙이 결합된 독특한 제도로서, 티벳의 신정(神政)체제와 티벳정치를 상징하는 제도이다. 1950년 중국이 티벳을 무력침공할 때 활불들의 존재는 공산주의 유물사관과 민족단결에 저해된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규정했고, 지속적으로 단속하여 한때, “마을마다 사원이 있고, 마을마다 활불이 있다고 알려진 티벳의 활불은 20세기 초 1만여 명에서 현재 수백 명으로 줄어들었다.

 

티벳인들에게 활불은 민족의 영혼을 상징하는 심장과 같은 존재이며, 페마 감독이 성스러운 돌에서 활불을 등장시킨 것은 티벳의 민족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티벳 불교에서 불세출의 전설적인 영웅에 대한 숭배와 출현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는데, 성스러운 돌오색신전에서 쿤둔 왕자’, ‘랄롱 페도르를 등장시켜 이를 재현해내고 있다. 이와 같이, 페마 감독은 이러한 티벳스러움을 영화 속 모티브로 삼아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티벳인들의 염원과 삶에 들어 있는 우애, 평화, 단결, 정의의 아름다운 정신세계와 가치관을 보여준다.

 

중국 5세대 황지엔신 감독은 이러한 티벳 소재의 영화는 우리들이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영화이다. 티벳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우리들의 감성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베이징영화학원 시에페이 교수는 페마 감독의 시나리오는 그가 티벳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둘째, 티벳인의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가 내러티브의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성스러운 돌에서는 소년 라마승과 고향의 아버지, 늙은 개에서는 티벳 유목개를 팔려는 반항적인 아들과 이를 지키려는 아버지, 오색신전에는 신전대회의 가치보다는 승부에 집착하는 아들과 이를 지켜보는 아버지의 관계가 주축을 이룬다. 페마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 속 가족관계는 불교적 가치관과 정신세계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나와 아버지뿐만 아니라, 형제와 모녀지간에도 그러한 자상하면서도 사랑을 나누는 전통문화와 정신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201411212차 인터뷰 중에서) 이러한 자상한 아버지의 가르침과 이에 순응하고 스스로 깨우쳐 성장해나가는 아들과의 관계는 티벳인들의 전통적인 가족윤리를 보여주는 한편, 티벳인의 전통문화와 가치관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전승되고 이어지는가를 보여준다.

 

 

▲ 영화 <성스러운 돌>에서 활불들이 TV를 시청하는 장면

 

 

셋째, 현대 문물의 범람 속에 충돌하고 소멸되는 안타까운 티벳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페마 감독은 서부대개발과 현대화로 대변되는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열풍 속에서 티벳인과 공동체가 어떠한 험난한 여정을 겪고 있으며, 또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를 보여준다. 페마 감독의 작품 속에는 티벳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고 있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성스러운 돌에서는 활불이 텔레비전과 VCD를 보는 것을 즐기고, 티벳 소년들은 새해맞이 쿤둔 왕자전통공연보다는 총과 폭력이 난무하는 홍콩액션영화를 더 보고싶어 한다. 늙은 개에서는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티벳 마을에서 티벳 유목개를 팔아서라도 돈을 벌려는 물질주의 가치관이 난무하고, 초원에서 유목을 하고 전통을 지키려는 노인들은 소외되고 밀려나 있다. 오색신전에서는 활쏘기대회의 가치관보다는 승부에 집착한 나머지 양궁을 사용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서부대개발 열풍, 그리고 한족의 대량 이주는 티벳 커뮤니티의 변화와 해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교를 미신으로 규정하는 사회주의 국민교육은 전통 불교중심의 티벳 신정체제(神政體制體) 와해를 불러왔으며, 사회주의 현대화가 부른 물질주의 가치관은 우애, 단결, 자존감의 정신문화를 구가하던 티벳인들의 삶에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늙은 개에서 표현하듯이, 중국 한족들의 티벳 지역으로의 대량 이주와 상업 정착은 티벳 공동체 해체를 초래하고 위협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대략 800만 명 이상의 한족이 티벳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라싸의 경우, 13,000여 개의 상점과 호텔 중 티벳인이 운영하는 곳은 수백 개에 불과한 현실이다.

 

현재 티벳은 사회주의체제 대 불교체제, 현대화 개발 대 전통풍습 고수, 한족 중원문화 대 티벳 전통문화 존속, 물질주의 가치관 대 인간중심의 가치관이라는 대립과 갈등이 현실화되고 있다. 페마 감독은 바로 이러한 시대와 지점에서 순수하고 자존감 높은 티벳 공동체와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영화 속에 담아냄으로써, 작금의 세태와 현실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만든다. 페마 감독이 영화 속에서 드러내는 티벳인들의 고귀한 공동체문화와 가치관은 티벳 지역뿐 아니라, 중국을 넘어 인류보편적 가치관으로서 우리 시대의 관객들에게 문제의식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으로, 페마 감독은 티벳이 직면한 정치적 주권문제, 한족화문제, 현대식 개발 문제, 물질주의 가치관의 범람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말하기방식, 무어화(無語話)’로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페마 감독은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중국/티벳 사이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탈()정치적 영화이며, 사회성보다는 예술성을 강조하는 풍격을 보여준다. 그저 티벳 전통풍습과 에피소드를 통해 그 속에 깃든 티벳 정신문화를 담담히 사실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가장 강렬한 현실비판적 영화인 늙은 개에서조차 마지막 6분의 롱테이크 장면을 통해 대사 한 마디 없는 장면으로 마무리할 뿐이다.

 

페마 감독은 말하지 않고 드러내기는 직접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제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대신 티벳인들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삶과 인생관을 보여주면서, 말없는 외침을 던진다, “이 티벳과 티벳인들을 보라!” 역설적으로 그의 말하지 않는 외침이 우리 시대 티벳 문제에 대한 더욱 강렬한 도덕적 정치적 성찰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 페마 체덴 (萬瑪才旦, Pema Tseden; 1969~ )

 

 중국 칭하이(青海) 하이난티벳자치주(海南藏族自治州)에서 태어났다. 티벳인으로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이다. 티벳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주로 연출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서북민족대학과 베이징영화대학(전영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유혹(誘惑)>이라는 소설로 하이난티벳자치주 제1회 문학작품창작상 2등상으로 받았다. 1999년에는 <자리()>라는 소설로 제5회 중국현대소수민족문학창작 신인 우수상을 받았다. 2002년에는 단편영화 <고요한 마니석>(靜靜的嘛呢石)을 연출하여 대학생영화제 제4회 경쟁부문 드라마 우수상을 받았다. 2004년에는 35mm 칼라영화 <초원>(草原)을 연출하여 제3회 베이징영화대학 국제학생영상작품전 중국학생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장편 <고요한 마니석>을 선보였다. 2008년에는 다큐멘터리 <바옌카라의 눈>(巴颜喀拉的雪)을 연출했고, 2011년에는 <올드 독>(老狗)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부르클린영화제 최우수영화상을 수상했다. 2014년 연출한 <오채신전>(五彩神箭)은 제8FIRST청년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2015년 연출한 <타로>(塔洛)는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으며, 52회 대만 금마장에서 최우수감독상, 최우수 극본상과 최우수 극영화상 등에 동시에 노미네이트됐다.

 

 

출간 예정작 소개

<(가제) 마니석, 고요히 두드리다>(원제: 嘛呢石静静地敲)

 

  티벳은 자신이 나고 자라난 공간이자 역사이자 삶이다. 고유한 자신만의 전통을 지켜오던 자신의 고향이 중국이라는 이름과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변모하고 있을 때, 그 전환의 과정을 소설과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로 기록하며 창작하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활불의 전통, 그러나 인민폐를 앞세워 들이닥치는 한족의 문화로 인해 벌어지는 변화들을 바라보는 현실과 상징이 녹아 있다.

  특히 그의 소설 <마니석, 고요히 두드리다>는 동명의 영화로도 각색된 바 있다. 단편 표제작 마니석, 고요히 두드리다를 비롯하여 모두 10편의 단편 모음집이다. 소설은 우리를 신비한 티벳의 세계로 데려간다. 마치 인류 문화의 시원으로 향하는 문처럼 거기에는 스펙터클한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삶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근원적 물음이 있다. 그러나 소설은 결코 진지함에 매몰되지 않는다. 작가는 영화 연출의 솜씨를 뽐내듯 물 흐르는 듯한 대화의 중첩과 생생한 묘사로 잔잔하게 오늘날 티벳인에게 들이닥치는 삶의 변화를 그려낸다. 티벳인의 삶과 죽음이 거기에 있고 종교와 사상이 있고 또 일상이 녹아들어 있다. 한국 독자에게 한 번도 소개된 바 없는 티벳 소설은 각박한 경쟁의 삶 속에서 심신이 지쳐 있는 이들에게 작은 안식과 휴식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청년감독 열전 - 10점
강내영 지음/산지니

 

 

 

중국영화의 특이한 빛 - 페마 체덴과 티벳영화 ⑥에서 계속 >>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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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글동글봄 2018.07.06 1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티벳의 이야기가 많이 없는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티벳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는데 라마가 환생한 사람으로 대대손손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굳게 믿고 있고요. 전생을 기억한다고 이야기하는 라마도 많이 있다고 하네요. 저도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무형을 유형에 담는다는 게 쉽지 않은데 글에 담아 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2. chlgurwn33 2018.07.27 1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82. 윤회사상은 어디까지나 사상일 뿐....


    道, 無, 空, 해탈, 열반, 깨달음
    이러한 말이 무수히 많지만
    이러한 말은 한마디로 통틀어
    죄를 짓지 않는 경지라는 생각입니다
    번뇌, 업(業), 죄를 짓지 않는
    계시종교의 완전함에 비한다면
    자연종교의 불완전함이 있기는 하지만
    인도는 힌두교나 불교나 윤회를 믿으니까
    불교는 힌두교 문화권에서 발생한 종교지만
    그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경지라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시’ 책 제4권 106번 155페이지에서
    예수님께서 “윤회는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의 시’ 책 제7권 221번 645페이지에서
    피타고라스의 학설은 오류라고 말씀하셨듯이
    또 영혼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말씀해주셨듯이
    윤회사상은 어디까지나 사상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윤회 없는 공사상도 역시 사상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책 제4권 ‘106. 가나의 집에서’ 편 155페이지 16-24째 줄까지【“오! 유다야! 유다야! 너는 죄인들과 사람들에 대해서 정말 엄격하겠구나! 사람들도 그들이 한 생명과 또 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그 생명을 둘 다 서슴지 않고 위태롭게 한다.”
    “우리가 두 생명을 가졌습니까?”
    “너도 알다시피 육체의 생명과 영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아! 저는 선생님이 윤회(輪廻)를 암시하시는 줄 생각했습니다.”
    “윤회는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생명이 있다. 그런데도 사람은 그 두 가지 생명을 모두 위태롭게 한다. 만일 네가 하느님이라면, 본능 외에 이성을 타고난 사람들을 어떻게 심판하겠느냐?”】, ‘154. 게라사에서 출발’ 편 602페이지 10째 줄에서 603페이지 25째 줄까지【“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많은 이교도들이 믿는 영혼이 다른 육체에 환생한다는 이론을 확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딴 뜻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주님, 이제는 그것도 설명해 주십시오.”
    “똑똑히 들어라. 너는 정신이 진리를 자발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로 그것이 우리가 여러 일생을 산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네가 사람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어떻게 죄를 지었고, 어떻게 벌을 받았는지를 알 만큼 넉넉히 배웠다. 동물적인 사람 안에 어떻게 유일한 영혼이 하느님에 의해서 합해졌는지 설명해 주었다. 영혼은 매번 창조되고 절대로 계속적인 화신(化身)을 위하여 이용되지 않는다. 이 확실성이 영혼들의 기억에 대해서 네가 단언한 것을 무효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에 대하여도 그래야 할 것이다. 동물은 한번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다. 사람은 비록 한번밖에 나지 않지만 기억을 할 수 있다. 그 안에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인 영혼으로 기억한다. 영혼은 어디서 오느냐? 사람의 영혼은 어느 영혼이나 말이다. 하느님에게서 온다. 하느님은 누구시냐? 지극히 지적이고, 지극히 능하신 완전한 영이시다. 영혼이라는 이 기묘한 것, 그분의 부성(父性)의 명백한 표로 사람에게 당신의 모습을 닮게 하려고 창조하신 이것은 그것을 창조하신 분 자신의 특성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영혼은 그것을 창조하신 아버지처럼 지능이 있고, 신령하고, 자유롭고, 불멸의 것이다. 영혼은 하느님의 생각에서 완전한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그것이 창조되는 순간에는 천분의 일순간 동안 첫사람의 영혼과 같다. 즉 공으로 받은 선물로 인하여 진리를 이해하는 완전한 존재이다. 천분의 일 그리고는 형성이 되고 나서는 원죄로 손상을 입는다. 네게 이것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시는 영혼을 가지고 계신데, 그 창조되는 존재는 나면서 지워지지 않는 표로 상처를 입는다고 말이다. 내 말 알아듣겠느냐?”
    “예, 영혼이 생각되는 동안은 완전합니다. 창조된 이 생각이 천분의 일순간. 그리고 생각이 사실로 나타나면, 그 사실은 죄로 인해 생긴 법칙을 따르게 됩니다.”
    “잘 대답했다. 그러므로 영혼은 사람의 육체에 결합할 때에 그의 신령한 존재 안에 그 비밀의 싹인 창조주신 존재, 즉 진리의 기억을 가지고 온다. 아기가 태어난다. 아기는 착하고 훌륭할 수도 있고 불성실할 수도 있다. 아기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그의 ‘기억’에 천사들의 임무는 빛을 비추어 주고, 덫을 놓고 다니는 자는 어두움을 던진다. 사람이 빛을 추구하고, 따라서 점점 더 큰 덕행들을 추구하여 영혼을 자기 전체 존재의 주인이 되게 하는 데 따라서 영혼 안에는 마치 그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가로질러 있는 장벽을 점점 얇게 만드는 것처럼 기억하는 기능이 발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나라의 덕행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느끼는 것이다. 반대되는 주장이나 치명적인 무지로 인하여 흐려져 있기 때문에 완전히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속해 있는 민족들에게 윤리적 지식의 글들을 공급할 만큼은 넉넉히 깨닫는다. 알아들었느냐?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느냐?”
    “예, 결론을 내리자면, 영웅적으로 실천한 덕행을 가진 종교는 영혼에 참 종교와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소질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군요.”
    “바로 그것이다. 이제는 가서 쉬고 축복을 받아라. 어머니도, 또 너희 자매들과 여자제자들도. 하느님의 평화가 너희들의 휴식 위에 내리기를.”】,

  3. chlgurwn33 2018.07.27 1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7권 ‘221. 자캐오의 집에서 회개한 사람들과 같이’ 편 642페이지 18째 줄에서 646페이지 29째 줄까지【“도대체 무엇을 알고자 하오?”
    “저희들은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적어도 그것을 알고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옛날 작가들이…. 그러나 저희들은 고대 작가들의 책을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짐승같은 인간들이거든요…. 그래서 그 영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희는 그걸 모릅니다. 영혼은 무었입니까? 혹 이성인가요?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왠고하니, 그렇다면 저희는 영혼이 없어야만 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저희들은 영혼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영혼이라는 것이 이성이 아니라면, 무형의 것이라고 하고 불사불멸의 것이라고 하는 영혼은 무엇입니까? 생각은 형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과 더불어 끝나니까 불멸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죽은 다음에는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거 보시오. 영혼은 생각이 아니오. 영혼은 영이고, 생명의 무형의 근원이고, 어떤 사람에게도 생명을 주고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만져서 느껴지지 않는, 그러나 참된 근원이오. 그것은 하도 숭고한 것이어서 아무리 강력한 생각도 그것도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오. 생각은 끝이 있소. 그러나 영혼은 비록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소. 더없이 행복하게 되거나 지옥에 떨어지거나 계속해서 존재하오. 그 영혼을 깨끗하게 보존하거나 더럽게 했다가 다시 깨끗하게 해서, 창조주께서 사람에게 그의 인성에 생명을 주라고 주셨던 대로 그분께 돌려드릴 줄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하오.”
    “그렇지만 영혼이 우리들 안에 있습니까?, 또는 하느님의 눈처럼 우리들 위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소.”
    “그러면 죽을 때까지 갇혀 있군요? 노예로?”
    “아니오. 여왕으로 있소. 영원하신 분의 생각에는 영혼, 즉 영은 사람 안에, 사람이라고 불리는 창조된 동물 안에 군림하는 것이오. 영혼은 모든 왕중의 왕이시고, 모든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신 분에게서 왔고, 그분의 입김과 그분의 모습, 그분의 선물과 그분의 권리이며, 사람이라고 불리는 피조물을 가지고, 위대한 영원한 나라의 왕을 만들고, 사람이라고 불리는 피조물을 가지고 이 세상의 생명이 끝난 다음 신(神)을 만들라는 사명을 가졌고,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가지고 지극히 높으시고 오직 한 분뿐이신 하느님의 집에서 ‘사는 사람’을 만들라는 사명을 가졌으며, 영혼은 여왕으로, 여왕의 권위와 운명을 가지고 창조되었소.
    그의 하녀들은 사람의 모든 덕행과 기능이고, 그의 대신은 사람의 착한 뜻이고, 하인은 생각이고, 하녀와 생도는 사람의 생각이오. 생각은 영으로 능력과 진리를 얻고, 정의와 지혜를 얻고, 훌륭한 완전에 올라갈 수가 있소. 영의 빛이 없는 생각에는 언제나 결함과 어두움이 있을 것이고, 절대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할 거요. 과연 영혼의 왕권을 잃었기 때문에 하느님과 헤어진 사람에게는 그 진리들이 신비들보다도 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오. 세상을 떠나서 높은 곳으로 비약하면서, 완전한 지능, 완전한 능력, 한마디로 말해서 천주성을 만나러 올라가고 이해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지렛대의 받침점이 없으면 사람의 생각은 눈이 어둡고 얼이 빠질거요. 데메테스, 이것은 당신에게 하는 말이오. 그것은 당신이 항상 환전상만은 아니었으므로 알아들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오.”
    “선생님은 정말 예언자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환전상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 내리막길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만일 영혼이 여왕이라면, 왜 군림하지 못하고, 사람의 나쁜 생각과 나쁜 육체를 굴복시키지 않습니까?”
    “굴복시키는 것은 자유도 공로도 아닐 것이고, 압제일 거요.”
    “그러나 생각과 육체는 자주 영혼을 괴롭힙니다. 이건 저와 저희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만, 그래서 영혼을 노예를 만드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영혼이 우리 안에 노예로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도 고상한 ―선생님은 그것을 ‘하느님의 입김과 그분의 모습’이라고 정의하셨지요.― 것이 하등의 것에 의해서 품격이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하느님께서 허락하실 수 있습니까?”
    “하느님의 생각은 영혼이 노예상태를 겪지 말라는 것이었소. 그러나 당신은 하느님과 사람의 원수를 잊고 있소? 하등(下等)의 영들은 당신들도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영들은 모두가 잔인한 욕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제가 어떤 아이였는지를 기억하면서 제가 이런 인간이 돼서 늙음의 문턱에까지 이른 것은 오직 지옥의 영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 때의 길잃은 어린 아이를 다시 찾아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그 때처럼 깨끗하게 될 만큼 어린 아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혹 뒤로 돌아 걸어가는 것이 허용됩니까?”
    “뒤로 돌아갈 필요는 없소. 당신이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거요. 흘러간 세월은 다시 돌아오진 않소. 흘러간 시간을 돌아오게 할 수도 없고, 흘러간 시간으로 돌아갈 수도 없소. 그러나 그것은 필요하지 않소.

  4. chlgurwn33 2018.07.27 1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피타고라스학파의 학설을 아는 곳에서 왔소. 그것은 틀린 학설이오. 영혼들은 세상에 머무르는 기간이 지난 다음에는 절대로 이 세상의 육체로는 돌아오지 않소. 어떤 동물 안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은, 그와 같이 초자연적인 것이 짐승 안에서 사는 것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오. 어떤 사람 안으로도 돌아올 수 없는 것은, 만일 그 영혼이 여러 육체 안에 들어 있을 수 있었다면, 최후의 심판에서 육체가 영혼과 다시 결합한 다음에 어떻게 갚음을 받겠느냐 말이오. 그 학설을 믿는 사람들은 계속적인 생(生)을 누리며 계속해서 깨끗해지는 동안에 최후의 재생*(여기서「재생」(再生)이라고 번역한 것은 réincarnation, 즉 영혼이 다른 육체에 들어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임.)에서야 영혼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완전에 이르기 때문에 그 마지막 육체가 즐거움을 누린다고 말하오. 이것은 오류이고 모욕이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제한된 숫자의 영혼밖에 창조하지 못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류이고,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오. 또 사람을 하도 타락해서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얻기가 힘들다고 판단함으로 오류이고 사람에 대한 모욕이오. 사람은 곧 상을 받지 못하고, 백의 아흔 아홉은 죽은 다음에 깨끗하게 함을 거쳐야 할 거요. 그러나 깨끗하게 하는 것은 기쁨을 준비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벌써 구원을 받은 사람이오. 그리고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마지막 날 이후에 그의 육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릴 거요. 사람은 그의 영혼을 위하여 육체를 하나밖에 가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한 생명밖에 가질 수가 없으며, 그를 낳아준 사람들이 만들어 준 육체와 그 육체에 생명을 주라고 창조주께서 창조해 주신 영혼을 가지고 상급을 받으러 갈 것이오.
    시간은 뒤로 거슬러 걸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과 같이 재생*이라는 것은 허락되지 않소. 그러나 자유로운 의지의 충동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허락되오. 그렇소. 하느님께서는 이 의지에 강복하시고 그것을 도와 주시오. 당신들은 모두가 이 의지를 가졌었소. 그러니까 죄인이고 악습에 젖고, 더럽혀지고, 사악하고, 도둑질 하고, 타락하고, 타락시키고, 살인자이고, 독성자(凟聖者)이고, 간통자인 사람이 뉘우침의 목욕을 하고 나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마치 자신의 죄를 갚고자 하는 의지가 그 속에 어떤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병적인 껍질을 산(酸)이 침식해서 부수어 놓는 것과 같이 묵은 사람의 타락한 본질을 부수고, 한층 더 타락한 정신적인 자아를 흩어버리고, 다시 건강하게 되어 새로운 생각과 깨끗하고 좋고 어린애다운 새 옷으로 꾸며진 자신의 깨끗해진 영을 드러내 좋소. 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다시 만들어진 영혼을 훌륭하게 덮어 그를 완성된 거룩함인 그의 초월적인 창조에까지 지키고 도와 줄 수 있는 옷이오. 그 완성된 거룩함이 내일에는 ―인간적인 정신과 인간적인 시간의 단위로 보면 먼 장래이겠지만, 영원의 생각으로 보면 매우 가까운 내일―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울 것이오.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면 모든 사람이 그들 안에 어린 날의 깨끗했던 어린 아이를 다시 만들 수 있소. 어머니가 가슴에 껴안고,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하느님의 천사가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바라보시던 다정스럽고 겸손하고 솔직하고 착하던 어린 아이를 말이오. 당신들의 어머니들! 그 어머니들은 어쩌면 덕행을 많이 가진 여인들이었는지 모르오…. 하느님께서는 그 어머니들의 덕행에 상급을 주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지는 않으실 거요. 그러므로 모든 덕행있는 사람을 위하여 오직 한 가지, 즉 착한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나라만이 있을 때, 그 어머니들과 같이 있게 같은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오. 혹 어머니들이 좋지 않아서 당신들의 파멸에 이바지했을 수도 있소. 그러나 그 어머니들이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당신들이 사랑을 알지 못하고, 이 사랑이 없는 것으로 인해서 당신들이 나쁘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들을 거두어들인 지금, 당신들은 거룩하게 되어서, 천상의 기쁨 속에서 어떤 사랑도 초월하는 사랑을 누리도록 하시오.
    다른 것 물어볼 것이 있소?”
    “없습니다, 주님. 저희들은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참조.
    ※ 인터넷 굿뉴스 성경본문검색「영혼」: 구약성경 총141절 + 신약성경 총17절 = 구, 신약 총158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