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8일, 전포에 있는 다정한 서점 책방 밭개에서 <마니석, 고요한 울림>의 김미헌 번역자를 만났습니다.
김미헌 역자님은 이번 행사를 위해 서울에서 먼 길을 오셨어요. 또 이날 부산이 무척 추웠는데 참석자분들이 공간을 꽉 채워주셔서 정말 감사했답니다. 역자님께서 강의는 많이 해보셨지만, 북토크는 처음이라 굉장히 떨린다며, 부담을 덜기 위해 티베트 속담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를 떠올리며 강연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이 속담이 티베트에서 온 줄 처음 알았답니다!) 그리고 속담처럼 걱정이 무색하게도 재미있게 티베트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역자님은 티베트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티베트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티베트는 중국 서남부에 있는 티베트 자치구와 티베트 고원을 일컫는 말로 인도, 부탄, 네팔 등과 인접해 있습니다. 인근 나라인 인도와 네팔은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려한 불교 양식을 가진 반면에, 티베트는 험준합니다. 그곳은 '너무 험준해서 말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험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는 기록이 있었고, 여름이 와도 눈이 녹지 않는 곳으로 기후 환경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런 열악했던 기후 조건과 경건한 종교적 신앙은 이 티베트 고원지대에 사는 장족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폐쇄됐지만 안정적인 사회구조에서 자급자족의 날을 보내게 했습니다.
또한 티베트 문화를 이야기하자면 티베트 불교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티베트는 1446년에야 한글을 만든 우리보다도 600년 전인 7세기에 이미 티베트 글자를 만들어 인도로부터 전래된 불경들을 번역한 불교문화의 강국입니다.
38대 국왕인 송첸캄포가 ‘불교의 국교화’ 선포 이후로는 더욱 정진하여 세계적인 불교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 불교의 하나인 밀종과 티베트 토착 종교인 본교가 결합해 형성된 특수한 종교로 보통은 라마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힌두교의 여러 신을 혼합하고, 주문을 외우는 점(옴마니파드메 훔—한국에서는 ‘옴 마니반메훔’으로 잘 알려진—등 짧은 주문을 생활에서 늘 욉니다), 불력으로 재해와 고난을 없애고 악마와 요괴를 물리치는 점, 호마법으로 알려진 비밀스런 주술의례가 있다는 점 등에서 다른 불교와 차이점을 보입니다.
이런 불교는 티베트인들의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밀교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신비로움과 평화와 비폭력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티베트 불교의 가장 신비로운 부분은 전생입니다. 물론 불교가 침투한 사회에는 많든 적든 윤회 사상을 믿는 풍조가 있지만, 전생을 사회제도로까지 승화시킨 곳은 티베트뿐입니다. 삼국시대 이래 불교의 영향 아래 있었던 우리도 ‘다시 태어나면/다음 생에는/전생에...’라는 말을 자주 쓰면서, 무의식의 근저에는 종교를 떠나 윤회에 대해 긍정하는 면을 보이기도 합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윤회사상을 믿고, 티베트 불교에 대한 믿음을 생활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티베트에서 페마체덴이 태어난 곳은 흔히 중심지로 알려진 라싸시가 있는 서장자치구가 아닌, 칭하이성 동북에 위치한 해발 2000미터 고원지대였습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와 포탈라궁과 라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타 티베트 소설과는 달리, 페마체덴 소설의 배경은 칭하이성 내륙 변방의 어느 티베트 마을입니다.
페마체덴은 티베트 변방 마을을 배경으로 티베트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제일 익숙하고 잘 아는 내용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티베트어로, 그 후에는 중국어로, 나중에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었고, 지금은 소설가 보다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합니다. 페마체덴은 티베트를 배경으로 티베트 언어로 티베트 영화를 찍으며, 영화 관련 인터뷰에서 “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티베트 언어”라고 했습니다. 또한 “티베트어는 언어지만 티베트 민족을 구성하는 근간”이라고 말하며 티베트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그런 페마체덴은 티베트어로 적힌 민간 설화집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티베트어로 적은 자신의 소설을 중국어로 다시 적어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페마체덴이 중국어로 쓴 소설집은 3권이 출간되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 <마니석, 고요한 울림>은 중국어로 쓰인,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두 번째 단편집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10편의 단편 중 표제작인 ‘마니석, 고요한 울림’을 읽어보고 종교 문화가 깊이 내재해 있는 티베트인의 일상과 오늘날 티베트인들에게 들이닥친 삶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니석’은 짧은 기도문이 새겨진 돌이나 석판을 말합니다. 이것을 새긴 후 쌓아두곤 합니다.—우리나라로 치면 성황당의 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마니석에는 관세음 보살이나 물고기(불교 8보 중 하나)가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대게는 육자진언이라고 하는 ‘옴마니파드메 훔’이라는 진언이 색색으로 예쁘게 새겨져 있습니다. 티베트어로 마니는 ‘보석,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티베트인들이 자나 깨나 암송하는 ’옴마니 파드메 훔‘이라는 진언은 연꽃(관음보살) 위의 보석(마니주)라는 의미로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하고 싶다는 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티베트에서는 진언을 반복해서 암송하면 깨달음과 공덕, 내세의 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합니다.
티베트인들의 마니석에 대한 경건함은 표제작 ‘마니석, 고요한 울림’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야기는 어느 아주 크고 둥근 달이 뜬, 달빛이 밝은 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마니석 두드려 조각하는 소리에 르싸네가 귀를 기울이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 르싸네는 아내와 술친구 테엔젠, 마을 사람들에게 누군가 마니석을 두드려 조각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지만, 유일하게 마니석을 조각할 줄 아는 조각공 어르신이 며칠 전에 돌아가신 터라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르싸네가 절대 아무 때나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맹세’까지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p. 16
르싸네는 간밤에 함께 집에 갔던 술친구 테엔젠이 인파 속에서 웃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그제야 테엔젠의 얼굴에 있는 시퍼런 멍이 눈에 들어왔다.
(테엔젠은 간밤에 같이 술을 마신 르싸네가 자신을 때렸다고 의심하고 르싸네는 간밤의 일을 다 기억한다며 아니라고 한다. 그러자 테엔젠이 안 때렸다고 맹세를 하라고 한다. )
르싸네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는 눈을 감았다.
“맹세합니다!”
테엔젠은 시퍼렇게 멍든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알았어, 이제 믿을게. 길에서 자빠져서 어디 돌부리에 부딪쳤나 봐.”
르싸네는 테엔젠의 말은 듣지도 않고 옆에서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근데 다들 내 말을 안 믿잖아.”
테엔젠은 얼른 마을 사람들에게 르싸네를 두둔하며 말했다.
“르싸네는 평소 허투루 맹세하지 않아요. 맹세했다는 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 다들 믿으세요.”
한국인들의 시선에서 보면 ‘맹세’까지 하느냐, 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불교에서의 ‘맹세’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티베트인은 그들이 믿는 신이 항상 자신의 곁에 있다고 믿으며, 맹세를 하는 순간 신이 옆에서 그것을 듣고 있다가 모든 걸 기록한다고 합니다. 보통 맹세는 자신의 진심을 밝히고 싶을 때, 자신의 과실을 덮을 때 하게 되는데, 그 ‘맹세’는 그 맹세로 인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맹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업보를 받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며, 그 말에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날 사람들은 쉽게 약속하고, 쉽게 그 약속을 어깁니다. 한입으로 두 말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며, ‘약속’이라는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불교문화가 깊숙이 깔려 있는 티베트인들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응당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집 전체에 걸쳐 이 ‘맹세’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고, 누가 ‘맹세’를 하면 상대방은 그 말을 믿어줍니다.
P. 26
르싸네와 테엔젠은 마니석을 들고 활불이 계신 사원으로 들어갔다.
활불은 작은 체구지만 탄탄한 몸에 인자하고 선한 모습이었다. 저 멀리서 두 사람이 정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두 분 술 끊으려고 오셨습니까?”
두 사람은 활불 앞으로 다가가 고두를 세 번 올리고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활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활불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흔히 활불하면 달라이 라마만 떠올리는데, 티베트에서 활불은 달라이 라마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활불은 티베트 불교의 모든 종파마다 존재하며, 모든 사원마다 존재합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수행승은 모두 활불이라고 하며, 티베트인들에게 활불은 믿음직하고 존경의 대상입니다. 수시로 사원에 찾아오는 신자는 헤아릴 수 없으며 길거리에서 활불을 발견하면 바로 무릎을 꿇고 예를 표시합니다. 활불은 고상한 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티베트 사람들 곁에서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걱정하는 인자한 존재며, 티베트 사람들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르싸네와 친구가 마니석을 보고 신기해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르싸네가 마니석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맹세까지 했지만 믿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P. 43
“술고래야. 아, 아니지. 르싸네야, 넌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구나. 우리도 어제 누군가 마니석을 두드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단다. 불연이 깊은 사람이 제일 먼저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리포첸께서 말씀하셨는데, 네가 공덕을 아주 많이 쌓은 모양이야.”
…
“다들 뭘 가지고 오셨어요?”
“별거 아니고 공양품이네. 먹거리와 마실 거리야. 다들 조각공 어르신께 성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말이야.”
“린포첸께서 망혼이 마니석을 새기는 일은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하시더군. 우리도 이참에 덕 좀 보세나. 공덕 좀 쌓게 해주게.”
르싸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벌써 마니퇴 쪽으로 몰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가져온 음식들을 마니퇴 위에 올려놓고 허공을 보면서 말을 했다. 조각공 어르신 맛있게 드시라, 우리를 잘 보우해 달라는 그런 말들이었다.
사람들은 마니퇴 주변을 에워싸고 앉아서 육자진언을 읊으며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티베트인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로 실천하는 자비와 보시입니다. 채소가 잘 자라지 않는 척박한 고원지대에 사는 티베트인은 육식을 하는 가난한 유목민족입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어렵게 번 돈을 자신보다 못한 이들에게 보시하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을 미루지 않습니다. 늘 1마오짜리 화폐를 지니고 다니면서 사원의 불상 앞에 놓고, 오체투지 하는 순례자에게 건네고, 또 걸인과 나눕니다. 티베트에서는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오체는 이마, 양 팔꿈치, 무릎의 다섯 군데를 말하는 것으로, 오체 투지는 이 다섯 부위를 땅에 내던짐으로써 몸을 땅에 온전히 일치시키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는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지극한 공경을 나타내며, 몸을 엎드리고 낮추어 땅에 맞닿게 함으로써 중생이 빠지기 쉬운 교만심을 꺾고 고행을 통해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행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몇 달 동안 진행되기도 하는 멀고 험한 고행의 과정이기 때문에 간혹 수행 도중 목숨을 잃기도 하며, 가족, 친지, 이웃과 수레에 일용품을 실고 함께 수행하기도 합니다. 티베트인들은 수행길 위에서 맞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예롭게 여기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길 위의 수행자들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 수행자들에게 보시하여 공덕을 쌓기도 합니다. 수행자들의 최종 여정은 티베트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라싸(포탈라궁)입니다. 포탈라궁에는 어떤 기둥에는 천이 둘러져 있는데요, 오체투지를 하며 올라오는 사람 중 도중에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이를 뽑아서 이 기둥에 박아두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체는 오지 못했지만 혼이라도 여기에서 머물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보시는 부처님의 자비를 주고받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티베트사람들의 생활화된 자비와 보시는 그들의 생사관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금생의 선행이 내생의 공덕이 된다’는 불교적 생사관은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으며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의 인과관계는 누구나 아는 진리이지만, 실천에 옮기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을 알기에, 티베트인들을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항상 노력합니다. 그래서 티베트인의 불교는 단순이 국교로 정해진 종교가 아니라 당연히 믿고 몸소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P.50
가끔 달이 아주 크고 아주 둥글고 유달리 밝게 빛나는 어두운 밤에, 르싸네가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올 때면, 이따금 저 멀리서 누군가 마니석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사 없는 민요처럼 고요한 울림이었다.
이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인데요, 티베트인들에게 마니석을 두드려 조각하는 소리는 진짜 가사 없는 민요처럼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니석을 만드는 작업을 공덕을 쌓기 위한, 일종의 기도라고 여기는 티베트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편안하고 익숙한 ‘민요’처럼 고요하고 가슴을 울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마니석, 고요한 울림’의 원래 제목을 직역하면 ‘마니석을 조용하게 두드리다’인데요, 작가는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생활과는 달리, 어떻게 보면 느린 삶의 모습이지만 조용한 가운데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마니석을 조각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티베트 사람들의 실제 생활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질문과 답변 )
1.
청중 1: 책에서 여성 인물들이 독특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용우파엔, 돌마’ 등 여성들이 자기 욕망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았어요. 이것이 원래 티베트 여성들의 특징인지, 의도된 여성상인지 궁금해요.
김미헌 번역가(이하 김): 여성의 욕망이 잘 드러났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봤던 것 같아요. 용우파엔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자 9명을 만나고, 여러 가지 이유로 9명과 헤어집니다. 그러나 결국 상처받은 건 남자가 아니라 용우파엔이었습니다.
사실 장족은 모계 사회입니다. 남성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여자가 여러 남자와 교제를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여자가 결혼 적령기가 되면 하얀 천막에 들어가고, 남자가 아무나 수시로 와서 관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여자는 출산을 할 때까지 나오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남자 중 한 명을 택해서 평생 살게 됩니다. 이후에 남자가 죽거나 하면 그 형제와 같이 살기도 하지요.
그래서 모계 사회이지만 상처받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고스란히 여자의 몫이라고 느껴졌고, 작가가 티베트의 그런 모습을 담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청중 2: ‘낯선 사람’에서 21명의 돌마가 나타나는데, 낯선 사람은 결국 1명의 돌마와 마을을 떠납니다. 돌마가 부처의 배우자라고 하던데, 낯선 사람이 그럼 배우자를 찾으러 온 건가요?
김: 티베트에서는 여자인 경우 다 돌마라고 칭합니다. 낯선 사람에서 돈을 많이 가진 도시인이 마을에 와서 돌마를 한 명 데리고 떠나가는데요, 제 생각에는 티베트 변방의 마을에 찾아온 외지인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조용한 티베트 마을에 나타는 외지인 말이죠.
청중 2: 그런 부분이 독자에게 많은 해석을 남기는 것 같기도 해요.
김: 페마체덴의 영화를 보면 예술성을 강조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와요. 페마체덴의 이러한 성향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중국 정부의 감시를 받으니 그렇게까지 입장을 뚜렷이 표현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청중 2: 상징성이 풍부한 작품인 것 같아요. 찾으면 찾을수록 너무 많은 상징성에 피곤했어요. (웃음)
김: 제가 친절하지 않은 역자일 수도 있는데, 저자 자체가 해설을 많이 하지 않았으니, 역자로서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전달하는 게 역자의 역할이라고 생각되어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3.
청중 3: 책에 실린 10편 중 판타지성이 강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요. 그중에 티베트의 설화나 구전 이야기가 섞인 것이 있나요?
김: 이 책 중에서는 실제로 섞인 부분은 없어요. 하지만 페마체덴은 티베트 설화를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해서, 설화에 관심이 많은 인물인 것은 분명해요. 그리고 한국인인 저희가 이 책을 읽었을 땐 분명 '판타지'스러운 요소가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티베트인들의 생활에서는 판타지가 아닌 정말 실재하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이 소설은 '실재하는 판타지'로 읽힐 수 있겠네요.
<마니석, 고요한 울림>에 싸인 중인 김미헌 번역가님♡
김미헌 번역가는 평소 영화 번역을 주로 하셨는데,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날, 온 하늘의 별이 본인에게 쏟아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기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산지니 출판사에게 고맙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저희가 더 감사합니다. ^^)
아무래도 해외 문학 작품은,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와 사고를 이해하고 읽어야 더 사고의 깊이가 넓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번 강연을 들으면서 <마니석, 고요한 울림>을 훨씬 더 이해하게 된 기분이었답니다. 낯설지만 가까운 티베트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티베트를 이해할 수 있는 소설, <마니석, 고요한 울림>을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마니석, 고요한 울림 - 페마체덴, 김미헌/산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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