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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국가주의와 문학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 23.

 
 

국가주의와 문학
오길영/충남대 영문학과 교수

2014. 01. 03 자 한겨레 칼럼

 

 

 

 

화제작 <변호인>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송우석 변호사와 고문경찰 차동영이 맞서는 ‘국가론’ 법정 논쟁이다. 송변에게 국가는 주권자인 시민이다. 차동영에게 국가는 정권이다.


이 영화가 주목을 끄는 이유는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묻는 시선의 현재성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종종 시민은 주권을 위임받은 국가권력에 지배당한다. 대의의 한계다. 차 경감이 사로잡힌 뒤틀린 국가주의의 탄생이다. 뛰어난 문학과 영화는 다른 애국주의를 말한다. 국가나 정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헌법에 충성하는 “헌법적 애국주의”(하버마스). 민주공화국의 헌법보다 앞서는 국가나 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파멸적 결과는 매카시즘을 낳았다. 매카시즘은 그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가 생생히 문학적으로 증언하는 전후 현대사의 교훈이다. ‘종북몰이’의 원천인 매카시즘의 문제는 선의 편인 ‘나’와 악의 편인 타자를 선명히 나누는 이분법이다. 권위주의의 특성은,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믿음에서 연유하는 오만과 뻔뻔함에 있다. “나는 옳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뻔뻔함과 나는 옳으니까 내가 틀릴 리가 없다는 오만함은 동어반복에 기초하고 있다.”(김현) 권력이 뻔뻔하고 오만할 때 국가폭력이 발생한다. 문학과 영화는 그 폭력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천운영의 <생강>은 고문기술자 ‘안’과 딸 선이의 내면을 번갈아 파고들지만, 고문의 세세한 실상이나 ‘적’에게는 잔인한 고문을 하면서도 자신의 가족에게는 자상한 ‘안’의 이중성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작품은 ‘안’ 같은 자칭 ‘애국주의자’가 드러내는 빈곤한 자기성찰의 모습을 강조한다. “그것들이 악이고 내가 선이다”라고 믿는 오만함과 “악을 처단”하는 것에 추호의 주저함이 없는 단호함으로 무장하고, “그냥 딱 보면 빨갱이”인 줄 아는 신통력을 지닌 국가폭력의 탄생.


‘국민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조갑상의 <밤의 눈>도 유사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가치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비극적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데만 있지 않다. 작가는 절제된 스타일과 어조로 국가의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이 희생시키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다. “사람 하나가 별거 아니라니? 난세니까 사람 목숨 하나가 더 중한 기다! 그리고 삼라만상에 끝이 없는 시작이 없는 건데 사람이 나중 생각도 해야지!”(<밤의 눈>) 중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다. 시민을 위해 국가가 있지, 그 역이 아니다. 인물의 묘사와 서사의 전개가 아주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에는 그런 상투성을 뛰어넘는 독특한 기운이 있다.


애국주의자에게 국가는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다. <변호인>이나 <밤의 눈>이 보여주듯이 시민은 국가의 이름으로 언제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사회적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 문학과 영화는 다른 길을 걷는다. 애국주의는 진리를 독점하려 한다. 문학과 영화는 확정될 수 없는 진리의 가치를 밝힌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 진리라 생각하는 것을 말하게 하라. 그리고 진리 자체는 신에게 맡겨라.”(한나 아렌트)


어떤 권력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문학은 거창한 정치이념이 포착하지 못하는 개별적 삶의 가치를 새기고, 개인들의 모둠살이로서 사회나 국가의 관계를 되묻는다. <변호인>, <생강>, <밤의 눈>을 보고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8262.html

 

 

『밤의 눈』 2013 만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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