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 같은 외로움과 삶의 저기압, 날개 없는 삶의 바쁨과 아픔

 

이러다 비행기가 못 가는 게 아닌가. 직업이 직업인지라 비만 오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합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말고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떠나는 사람들」 중

 

중견 소설가 김헌일의 항공소설집 『고도경보』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들은 날씨에 민감하죠. 비행기의 강인한 날개는 과연 중력을 이겨내지만 눈과 비와 바람과 안개의 눈치를 살펴야만 합니다. 이착륙이 순조롭지 못할 때 생기는 분노와 불안, 원망은 제일 먼저 소설 속 주인공들을 붙잡아 상황을 해결하고 보상하라고 등을 떠밉니다. 그러나 기상은 불가항력, 고군분투한들 그들 역시 비행기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이 이럴진대 “항공사의 직원이 된 후 비와 바람을 그리고 눈을 싫어하게” 된 남자는 “비가 내리는 날 어디 한적한 바닷가라도 가서 와인이라도 한 잔 했으면” 하는 아내에게 화를 내기 마련입니다. 아내의 낭만이 곧 남편의 적인 이 소통 불가의 상황은 먹구름 같은 외로움이 되는데, 이러한 삶의 저기압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인간은 여행을 통하여 태어난다

「붉은 띠」를 제외하면 『고도경보』 속 주인공은 모두 항공사에서 일합니다. 「지상의 낙원, 오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다차인, 「기도」의 승원, 「불꽃」의 진호는 비행기를 운항하는 기장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더 있어요. 다차인의 아내는 집을 나갔고 승원의 아내는 바다로 걸어 들어갔으며 진호는 아내를 두고 비행공포증을 지닌 승객과 잤습니다. 가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이들은 비행기에서 내려 돌아가기 위해 애를 씁니다. 태풍에 비행기가 떠밀리고, 계기가 고장 나고, 연료가 새고 있어도 그들은 무사히 착륙해야 합니다. 물론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장의 사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나비 속에서」의 치호와 「떠나는 사람들」의 현수는 항공사 직원입니다.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제시간에 뜨지 못하는 비행기입니다. 혼자 책임져야 할 것이 무려 하늘이 저지른 잘못이기 때문이지요.

 

만약 비행기가 장시간 지연되거나 결항이라도 되면 큰일이었다. 오늘은 나 혼자뿐이었다. 승객은 이백오십 명이 넘었다. 방콕에 있는 본사와 상의해서 새로운 스케줄을 결정해야 하고, 탑승객들이 쉴 호텔방을 잡아야 하고, 버스를 동원해서 실어 날라야 하고…… 더구나 방금 잡은 현행범을 문초하는 듯 매서운 승객들의 눈초리를 감당해내야 했다. 혼자서, 도대체 혼자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이 저지른 잘못을 나 혼자서 몽땅 책임지는 꼴이었다. 이놈의 회사는 왜 직원을 안 뽑아주는 거야! —「떠나는 사람들」 중

 

하지만 ‘잘못’을 하는 것은 하늘만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문제가 땅에 없을 리 없지요. 치호의 아내는 이혼을 원하고, 현수는 국제 미아가 될 위기에 처한 승객을 무사히 귀국하게 하기 위해 그녀의 가족을 찾아 나섭니다.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 「붉은 띠」는 9월 11일 미국의 한 비행기를 다루었습니다. 건물 어딘가에 충돌할 운명을 지닌 네 번째 비행기 안에는 석우가 타고 있습니다. 술집을 전전하던 여동생이 팔려갔다는 소문을 들어도 아무도 찾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내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와 눌러앉은 그는 연을 끊다시피 한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듣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비행기는 곧 아랍 테러범들에게 점거됩니다. 충격과 공포 속에서 석우가 목격한 것은 전화통이 쉴 새 없는 사랑 고백이에요. 재난 속에서 이 마지막 비행은 과연 어디로 향할까요.


창공에 뜬 고독한 인생들이 전하는 메시지


소설집 제목인 ‘고도경보’는 비행기가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는 고도를 벗어났을 때 울리는 경고음이자 창공에 뜬 고독한 인생들이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여권의 낯선 감촉, 출국심사를 받을 때의 두근거림, 면세점의 화려한 상품, 스튜어디스의 상냥한 웃음, 나를 기다릴 타국 혹은 고국의 누군가를 우리는 공항에서 쉽게 접합니다. 그러나 비행의 세계는 대합실에서 바라본 게이트 너머의 풍경처럼 아득합니다. 30여 년간 항공사에서 일한 작가의 경험이 농축된 『고도경보』는 독자를 대합실에서 출국장으로, 비행기로, 조종실로, 보이지 않게 우리와 날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으로 안내합니다.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고 돌아오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업인 사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날개를 매일 들어 올리는 사람, 돌아오기 위해 떠나며 내려앉기 위해 떠오르는 사람들이 책장을 넘기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 비행이란 무엇인가요.

 

 

 

 


저자 : 김헌일
단편 「어머니의 성」으로 1986년 부산MBC 신인문예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1997년 중편 「회색강」으로 제2회 한국소설 신인상을, 첫 번째 항공소설 단편 「티티야를 위하여」로 2005년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중편소설집 『회색강』이 있다.

 

차례
지상의 낙원, 오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도
불꽃
나비 속에서
떠나는 사람들
붉은 띠

작가의 말

 

 

『고도경보
김헌일 소설집

김헌일 지음 | 문학 | 국판 변형 | 240쪽 | 13,000원
2014년 12월 19일 출간 | ISBN :978-89-6545-275-1 03810

'공중사회'를 해부하는 본격 항공소설집. 30여 년간 항공사에서 근무한 작가경력이 허공에 뜬 고독한 인생들의 메시지를 풍부하게 바꾼다.

  

 

 

 

 

 

고도경보 - 10점
김헌일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