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서평을 들고 온 임병아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특별한 장소를 하나쯤 품고 있기 마련이지요. 그곳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일 수도 있고, 누군가와의 추억이 얽힌 곳일 수도 있습니다.『날짜변경선』의 저자 유연희 소설가에게는 그런 장소가 바로 ‘바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날짜변경선』은 일명 ‘해양소설집’입니다. 수록된 7작품 중 2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작품 속 바다는 단순한 이야기 배경이 아닌, 인물들의 한계를 시험하는 역경이자, 그것을 극복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작중 인물들의 삶 그 자체로 볼 수도 있지요.

 

  표제작인 「날짜변경선」에는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의사가 도망치듯 원양항해선의 선의(배 안에서 승무원과 선객의 건강을 보살피는 일을 하는 의사)로 승선하게 되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원양항해선에는 그리스인 볼칸, 여성 선원 3기사,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다로 온 기관장 등, 저마다의 이유로 배에 오른 이들이 모여 있지요. 주인공 선의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고, 작품의 끝에 이르러서는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하게 됩니다. 조난된 환자를 구하기 위해 두려움을 이겨내고 바다로 내려간 주인공의 모습은 작품집 전체를 통틀어 단연 압권인 장면이었습니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삑삑 거리는 잡음 사이로 선장의 ‘로저’란 종결음만이 왕왕거린다. …(중략)… 샤워를 하던 아내, 얼굴도 모르는 기관장의 아버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갑판장이 다가와 내게 구명조끼를 입혀 준다. 내가 조끼의 후크를 더듬어 채우자 갑판장이 밑으로 늘어진 벨트를 주워 재빨리 허리에 조여 준다. 무전기도 없는 내가, 소리 없이 응답한다. 로저! 알았다고. 지나온 시간이 날짜변경선을 넘는다. -『날짜변경선』229p 中

 

 

  작품집 내에서 바다는 깊고 거대한 미지의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어디선가 새들은>과 <바다보다 깊은>에서는 거센 파도와 태풍이 배를 뒤덮고, <시커호>에서는 높은 수압이 주인공을 압박해오지요. 바다라는 거대한 공간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작고 나약한 존재이기에, 바다 속에서 찾아낸 그들의 의지는 더욱 값진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유령작가>와 <신갈나무 뒤에서>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이 두 작품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작품집 내의 다른 작품들과 같이, 자신을 둘러싼 것들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이들이 등장하여 과거를 되돌아보고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유령작가>에서는 삼류 소설가, <신갈나무 뒤에서>는 절에 들어간 여자를 통해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7편의 작품 중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시커호」입니다. 「시커호」의 주인공 ‘정’은 잠수부로, 과거 침몰된 시커호를 수색하던 중 왼쪽 다리를 다쳐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후 시커호를 찾는 일이 재개되고, 정은 선장을 찾아가 작업에 합류시켜줄 것을 요구하지요. 정은 자석에 이끌리듯 심해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연희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바다에서의 삶은 선택이 아닌 운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우리의 삶도 파도와 폭풍을 만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이 항해는 멈출 수 없는 운명과도 같습니다. 마치 「시커호」의 ‘정’이 다리를 잃고도 시커호를 찾아 잠수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처럼요.

 

나의 주변에는 바다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다에서의 삶은 때로 그들의 의지나 선택 밖의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듯 그들도 바다를 선택해 바다에서 사는 게 아닌 것 같을 때가 많다. 어쩌다 보니 바다를 택해야 하는 환경에 태어난 것 같았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고,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당신이 알든 모르든 간에. -『날짜변경선』작가의 말 中

 

 

  유연희 작가는 부산에서 소설을 쓰는 부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부산에서 나고 자란 덕에 언제나 바다와 함께 해왔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기가 더 어렵다고들 하지요. 너무 가까웠던 탓인지, 바다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날짜변경선』을 읽고서 가까운 송도 바다에 다녀왔는데요, 이전과는 달리 백사장에 밀려오는 파도와 물살, 바람까지도 새롭게 보였습니다. 이 바다가 누군가에게는 과거·현재·미래를 지배하는, 삶의 현장이겠지요.

 

 

 

 

 

 

날짜변경선 - 8점
유연희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