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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니 책

전쟁 유령과 생존자, 그 생동하는 관계의 문화인류학::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5. 25.


전후 베트남, 떠도는 영혼에 대한 대중적 상상과 역사적 성찰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인류학계의 최고 상 중 하나인 ‘기어츠 상’의 수상자 권헌익 교수의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이 마침내 국내 출간되었다. 캠브리지대학교의 석좌교수인 권헌익은 냉전 시대 베트남에서 발생한 잔혹한 폭력과 대규모 죽음의 비극적인 역사를 인류학자의 치밀하면서도 따뜻한 인간적 시선으로 조명해왔다.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은 1980년대의 경제개혁 이후 베트남 사회에서 뚜렷한 문화현상으로 부각된 전쟁유령에 관한 의례에 초점을 맞추어 베트남 전쟁의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과 기념행위가 갖는 사회적, 정치경제적, 종교적 함의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세계 석학들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 “어떠한 학자도 시도하지 않은 방식”, “인류학적 통찰의 거의 완벽하고 경이로운 예”라는 극찬을 받은『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은 뛰어난 동남아시아 연구서에 주어지는 ‘조지 카힌 상’의 제1회 수상작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국가적으로 추모되는 전쟁 영웅도, 가정 내에서 기려지는 조상도 아닌 떠도는 유령을 주제로 삼아 냉전사와 친족 연구 등의 지평에서 독보적 시각을 제시한다. 학술서이지만, 권헌익 교수는 베트남인들의 목소리를 생동감 있고 아름다운 문체로 전한다. 뿌리 뽑힌 유령들을 애도하는 베트남인들의 이야기는 냉전의 양극적 질서가 견고한 한국 사회의 독자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감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무지몽매의 표현이나 비유가 아닌 ‘사회적 사실’로서의 유령


유령 이야기만큼 중대하면서도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주제는 드물다. 대부분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유령은 인류의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는 사회적 사실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도 근대화의 과정에서 유령 이야기는 물론 각종 민간 추모 방식을 공식적 활동에서 배제하고 있다. 국가적 기억에서도, 또 조상이라는 친족관계 내의 추모 대상으로서도 배제되는 것이 바로 유령이다.

하지만 권헌익 교수는 베트남의 전쟁유령들이 “구체적인 역사적 정체성을 가진 실체로서, 비록 과거에 속하지만 비유적인 방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방식으로 현재에도 지속된다고 믿어지는 존재”(16쪽)로서 ‘사회적 사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베트남에서는 유령 그리고 유령을 둘러싼 문화적 담론과 실천이 대중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베트남인들의 역사적 성찰과 자아정체성 표현의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인류학적·사회학적·역사학적, 심지어 정치경제학적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베트남의 유령 관련 문화를 비합리성이나 무지몽매의 표현이 아니라 베트남인들의 역사적 경험, 도덕적 가치, 규범, 삶의 물질적 조건 등과 복잡하게 연동되어 사회적 현실의 중요한 축을 구성하는 것으로 접근한다.


친족관계·냉전사 연구의 지적 전통에 도전하는 독보적 시각


권헌익 교수의 베트남 2부작 중 앞서 출간된 『학살, 그 이후』는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마을의 주민들이 타인의 시신과 뒤섞인 가족의 유해를 어떻게 현존하는 국가적 혹은 가내 기념의 체계와 동화시키는지를 논한다. 반면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은 친족도 전쟁영웅도 아닌 전몰자라는 중요한 영역으로 논의를 확장한다. 남부 및 중부 베트남의 공동체들은 전사자의 개별 무덤과 마을 주민들의 집단 묘지뿐만 아니라 많은 무명 외지인의 무덤을 함께 지켜왔다. 베트남인들은 ‘길 위에서’ 비극적으로 죽은 이들이 그 죽음의 비통함과 폭력성 때문에 그들이 죽음을 맞이한 장소에 묶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망자들은 산 자들에 의해 그들의 기억이 인정되고 공유될 때에야 비로소 트라우마적 상황에서 자유로워진다. 뿌리 뽑힌 전쟁유령들은 윤리적 책임감에 따른 산 자들의 행동을 통해 강력한 상징적 변환을 거쳐 고향이 아닌 장소의 중요한 터주신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새로운 가족에게 입양되기도 한다. 전시와 전후 베트남인들의 삶에서, 친족관계는 예정되어 있는 배제적 계보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개방적 관계망이다.

권헌익 교수는 냉전을 ‘상상의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유럽중심적 시각을 비판한다. 냉전이 전 지구적 차원의 갈등이었다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현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 냉전이 ‘장기적인 평화’로 경험되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베트남을 비롯한 비서구 지역에서 냉전은 대규모 학살을 동반했다. 따라서 대규모 죽음의 역사와 망자를 기념하는 행위는 외교사와 경제사만큼이나 중요한 연구주제이다.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은 이러한 집단기억의 차이를 짚어내며 양극정치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깊이를 더한다.


“망자들의 세계에는 우리 편, 저쪽 편이 없다”

냉전이 지속되는 한반도의 현실과도 맞닿은 책


현지 조사 중에 한 지역의 신위를 만나 대화할 기회를 얻게 된 저자는 ‘명사수’라고 불리는 이 유령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권: 당신 세계의 사람들도 여전히 명분 때문에 논쟁하고 싸우나요? 망자들의 세계에도 “우리 편”과 “그들 편”이 있나요?

명사수: 아니오, 친애하는 외국인 친구! 망자들은 싸우지 않는다. 전쟁은 산 자들의 일이다. 내 세계의 사람들은 그들이 당신 세계에 있었을 때 싸웠던 전쟁의 동기와 목적을 기억하지 않는다.

-274쪽, 「유령을 위한 돈」 중에서

명사수의 말에 따르면 망자들의 세계에서는 ‘내 편’, ‘네 편’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늘날 베트남인들은 전쟁 때문에 적이 되었던 가족의 일원들, 가족의 연은 물론 지역적 연고도 없는 민간인, 외국 군인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다. 베트남인들이 전쟁유령을 위해 수행하는 의례행위는 “역사의 상처와 고통을 넘어 인류의 연대라는 윤리적 지평을 지향하는 창조적인 문화적 실천”(28쪽)인 것이다.

한국은 냉전의 오래된 질서가 여전히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의 삶을 양극적 대치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지구상 거의 유일한 사회이다. 이에 옮긴이들은 “베트남 전쟁유령 현상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화해와 연대의 가능성은 아직도 냉전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사회에 중대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윤리적·실천적 교훈을 남기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역설한다. 뿌리 뽑힌 유령의 존재는 대규모 죽음의 경험을 겹겹이 축적해온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을 통해, 끔찍한 폭력을 저지르는 것도 인간이지만 ‘내 편’과 ‘네 편’의 극단을 넘어 생명의 존귀함을 포용하는 것 또한 인간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지은이 : 권헌익


사회인류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석좌교수이다. 런던정경대학에서 재직했고, 서울대학교에 초빙교수로 있다. 시베리아와 베트남에서 현지조사를 했으며 근래에는 한국전쟁의 현재적 역사에도 관심을 두고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학살, 그 이후』 『또 하나의 냉전』 『극장국가 북한』(공저) 등이 있다.


옮긴이 : 박충환 · 이창호 · 홍석준


차례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권헌익 지음 | 박충환·이창호·홍석준 옮김 | 신국판 358쪽 

978-89-6545-354-3 93300 | 25,000원 | 2016년 5월 25일

인류학의 노벨상, ‘기어츠 상’을 수상한 권헌익 교수의 베트남 2부작 완결판. 1980년대 경제개혁 이후 베트남 사회에서 뚜렷한 문화현상으로 부각된 전쟁유령에 관한 기억과 기념행위가 갖는 사회적, 정치경제적, 종교적 함의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 참고: 한글판의 표지이미지는 이재갑 사진가의 작품 <빈딩성 가족무덤>입니다.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 10점
권헌익 지음, 홍석준 외 옮김/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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