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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70년 전 제주를 기억하며 - <레드 아일랜드> 서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1.

여러분 '제주도'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푸른 바다와 봉긋한 오름들이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섬 제주에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아픈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70년 전 제주에는 피바람이 몰아쳤습니다. 4.3 사건 때문이지요.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시위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통칭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문경원 <레드 아일랜드> 中

 

 

단지 4월 3일 하루에 발생한 사건으로 명명하지 못하는, 무려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제주 도민들에게 불행을 안겨줬던 엄청난 사건이지요. 당시 전체 제주도민의 10분의 1인 3만여 명이 학살되었고,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큰 사건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구체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고, 2000년이 되어서야 제주4·3특별법이 지정되면서 피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레드 아일랜드』는 바로 이 4·3사건을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로,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로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였고 제주 4·3사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담은 추리소설 「암살」을 연재한 김유철 소설가의 작품입니다. 김유철 소설가치열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해방 전후 열강들의 이념 싸움에 억울한 피해 장소가 된 ‘제주’의 아팠던 역사와, 그 시절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녹여냈습니다.

 

 

 

 

4·3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전쟁이 아니라 자국의 경찰과 정부에 의해 3만 명의 국민이 희생되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남과 북의 이념 대립,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의 간섭 때문인데요. 우리나라의 상황상 외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같은 민족을 해치는 비극적인 역사를 낳게 된 것이죠. 그런 역사가 반복되면서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무기력한 분위기가 만연하기도 하였는데, 소설 속 한 대목에서도 그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잔치 분위기가 아니라 토론장으로 변한 공회당에서도 마을 젊은이 몇몇이 모여 앉아 '왜놈 대신에 미군정이 들어앉은 것 말고 달라진 것이 있냐'며 현 시국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여전히 친일 고문경찰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데다 왜정 말기보다 나아질 것 없는 궁핍한 생활을 한탄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대대로 외지인들에 의해 수탈을 당해온 섬사람 특유의 피해 의식이 모든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 『레드 아일랜드』 p.46

 

 

해방 이후 마을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한 말인데요. 드디어 해방을 하고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꾸려나간다는 생각으로 기대에 찼던 사람들은, 또다시 간섭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되어 절망하고 맙니다. 

 

 

 

 

또한 소설 속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외지인으로 제주에 왔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제주에 남은 홍성수, 일제강점기에 밀수로 돈을 번 기회주의자 김종일, 유약한 지식인으로 현실에 순응하고 경찰에 입대한 김헌일, 4·3사건을 이끈 가해자 계급을 대표하는 비서부장 등 당시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이면서 사실적인 인물들로 이루어져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저는 소설에서 김종일과 방만식 두 인물의 대립 구도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전혀 다른 두 인물의 대립을 보여주며 소설의 주제가 더 강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글은 김종일이 민중을 외면하고 지배계급에 하수인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잡혀간 후 혼자 하는 생각인데, 김종일의 말에서 우리는 현실에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을 좇는 데만 익숙해지기 쉬운,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남한에서 단독으로 선거를 치르든 말든, 친일파들이 군정에서 살아남아 권력을 행사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의 가족 건사나 하며 눈치껏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 김종일에겐 국가나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건 그저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허상 같았다. 왜정시대에 그는 일본을 줄곧 동경해 왔고 지금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랬다. 우리 힘으로 얻은 해방도 아니니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쌉쌀한 맛이 입안을 감돈다. 해방된 조국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김종일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나라가 되던 또다시 권력을 잡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그들에 의해 나라는 어떻게든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까.    

 -『레드 아일랜드』 p.144

 

 

김종일은 자신이 가족을 위한 일을 했기 때문에, 남들이 기회주의자라고 불러도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김종일의 말처럼 순응하는 삶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저항하는 삶은 훨씬 더 지치고 힘든 일이지요. 그러나 어딘가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사람이 있습니다. 김종일의 집에서 목동 일을 하던 방만식이 그렇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먹고 살기 위해선 지배층에 붙어살 수 밖에 없었다는 김종일의 말에 방만식은 이렇게 답합니다.

 

 

"하멍 자신과 가족만 중요하단 말임수꽈?"
"가족부터 챙기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변한 거우다."
"그래서? 만식이 넌 특별하다고 생각하나? 소총 몇 자루와 죽창으로 제주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 화북지서에 끌려가 사경을 헤매면서 결심을 했주. 내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멍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본에서도 그렇고 제주에서도 그렇주. 성님과 달리 저 같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으멍. 스스로 만들지 않으멍 말이우다."

-『레드 아일랜드』 p.146

 

 

만식은 민중을 대변하며 힘든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좇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입니다.

 

 

 

 

올해는 4·3사건 70주년을 맞이한 해로, 그날의 뼈아픈 고통을 생생하게 몸으로 기억하는 생존자들도 사실상 마지막 생애주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서평을 쓰는 저도 4·3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관심을 가지려는 노력도 부족했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닥친 일도 처리하기 힘든 세상에, 몇십 년 전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고,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스스로가 김종일이 될 것인지, 방만식이 될 것인지는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해본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레드 아일랜드 - 10점
김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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