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역사학자 정상천 박사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펴내
정상천 작가(왼쪽)와 서영해 선생의 6촌 종손녀 서혜숙·김기영 부부. 서씨 부부는 저자가 서영해 전기를 집필하는데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근 출간 한 달도 되지 않아 2쇄 인쇄에 들어간 화제의 신간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산지니)를 쓴 정상천(57) 작가를 만나 책을 쓰게 된 경위와 우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독립운동가 서영해(徐嶺海, 1902∼?) 선생에 대한 소개를 부탁하였다. 정 작가는 현직 공무원이다. 일반적인 전문 작가도 아니고 재야사학자는 더구나 아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15년, 외교통상부에서 15년간 통상업무를 담당하였으며, 현재는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운영지원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말에만 공부를 한다고 해서 ‘일요일의 역사가’로 불리지만 스스로는 ‘역사 배달부’를 자처한다.
저자 정상천은 공무원으로서보다는 지금까지 총 5권의 역사서 저술을 통해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 배경에는 1994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프랑스 파리1대학(팡테옹-소르본느)에서 역사학 석사·박사를 마친 튼튼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3년에 저술한 ‘나폴레옹도 모르는 한-프랑스 이야기: 프랑스 외교 사료를 통해 본 한·불 관계 비사’(국학자료원)는 그의 세 번째 저술로 한국과 프랑스 사이에 120년 동안 일어난 사건들 중 역사적 의의가 있으면서도 독자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으로 집필되었으며, 관련 분야 독자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는 부산에 있는 출판사 ‘산지니’가 올해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하였다. 정 작가는 파리1대학 박사과정에 있을 때 수집한 서영해 관련 사료를 참조하여 2013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 ‘파리의 잊혀진 독립운동가, 서영해’라는 소제목으로 간략히 소개한 적이 있다.
이번 신간에서는 서영해의 친척들로부터 받은 자료,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영해문고 자료, 부산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영해의 유품과 유고, 앨범 등 폭넓은 자료들이 참고 되었다. 촘촘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1902년 부산 초량동의 한약방 집 아들로 유복하게 태어난 서영해는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소위 ‘임정의 막내’가 된 서영해는 임정 요인들의 권유로 미국보다는 유럽의 중심지인 프랑스로 보내어져서 불어에 매우 능통한 외교관이자 언론인, 문필가로 육성되었다. 서영해는 임정이 ‘기획한’ 유학생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하였으며, 20여 년간 유럽에서 임정을 대표한 유일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7개 언어를 구사했다. 그래서 ‘미국에 이승만이 있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었다’라는 유명한 표현이 나오게 되었다.
정상천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파리의 잊혀진 독립운동가’ 서영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
-서영해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국내에서는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는?
“서영해는 17세 나이에 부산지역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였습니다. 거기서 1년 정도 있다가 임정요인들의 권유로 프랑스로 유학을 갔습니다. 1947년 5월에 귀국하기까지 27년을 해외에서 지냈고, 귀국 후에도 국내 체류기간이 1년 6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국민이 그를 알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1956년까지 상해조선인민인성학교에 교사로 근무한 후 북한으로 갔기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 의도적으로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애써 외면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임정의 열강에 대한 외교라면 우리는 모두 이승만 박사만 알고 있는데, 서영해는 유럽에서 어떤 외교활동을 하였는지?
“네, 사실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1929년 9월 28일 서영해는 파리 5구에 위치한 자신의 숙소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합니다. 물론 임정의 지시로 설립했지만, 재정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한국 소개, 일본 상품 배척, 일본의 외교와 선전을 방해하는 활동을 목표로 파리를 중심으로 강연, 언론 기고, 책자 발간 등의 활동을 통해 외교독립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개최된 많은 국제회의에 임정의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나라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일제의 한반도 침탈의 폐해에 대해서 낱낱이 고발하였습니다. 서영해는 1929년 7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2회 반제국주의자 세계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국제무대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때 도산 안창호 선생을 포함한 12명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전격적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임정은 서영해에게 프랑스 정부에 대한 항의와 더불어 석방교섭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언론에 배포한 호소문 ‘유럽의 자유양심에 고함’을 통하여 한국인들이 일본의 야만적인 억압에 신음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일어난 도산 안창호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체포는 모든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정치적 망명가들에 대한 환대의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비록 상해임시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한 안창호의 석방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체포된 12명중 9명은 석방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33년 1월초에 이승만이 미국에서 제네바에 도착하여 국제연맹을 상대로 독립청원서 제출 등 외교활동을 전개할 때 그와 함께 6개월간 숙식을 함께하며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서영해는 1936년 9월 3일부터 6일까지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1회 만국평화대회와 1937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제2회 대회, 1935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1회 ‘문화 보호를 위한 반파시스트 작가회의’ 등에 참석하여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의 사정과 독립운동을 널리 선전하였습니다.
서영해는 유럽지역에 있어서 우리 임정의 유일한 공식대표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934년 주불외무행서 외무위원, 1936년 9월 주법특파위원(駐法特派委員), 우리나라의 해방이 임박해 오면서 1944년 3월 주불특파원, 1945년 3월 12일에는 명실상부한 주프랑스대사의 직위인 주법대표(駐法代表)로 임명되었습니다.”
-1950년대 이후 서영해가 북한에 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왜 그는 북으로 갔으며, 거기서 어떤 활동을 하였고,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는지?
“그는 1948년 말 유럽에서 다시 남북통일운동을 하겠다고 부인 황순조와 함께 상해를 거쳐 프랑스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상해에 머무는 동안 중국이 공산화되는 기막힌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여기서 중국 여권을 가진 서영해는 부인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최근 그가 상해 조선인민인성학교(임정의 부속학교)에서 1956년까지 근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진을 찾았습니다. 6·25 때 납북되었던 임정요인들이 상해에 있던 서영해와 연락이 닿았을 것이고, 형식적이나마 김일성의 초청을 통해 당시 상해 조선인민인성학교 교장이었던 선우혁과 함께 북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근 북한 탈북자 중 어느 유력한 분의 증언에 의하면 서영해는 6·25 전쟁 때 납북된 임정 요인들이 살고 있던 평양 창광산 자락에 거주하였으며, 임정 요인들이 만든 잡지의 편집장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울러 노동신문에도 기고를 자주 하였고, 민주여성동맹위원장이던 박정애·허헌의 딸 허정숙과 가깝게 지내는 등 당시 북한에서도 대단한 엘리트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공식적인 자료에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고, 그가 언제 어떤 이유로 숙청당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대쪽 같은 성격에 미루어 볼 때 김일성을 비판하다가 1963년~1965년 사이에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이나 삼석 특설묘지 등 다른 애국지사들이 묻힌 곳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 여전히 그의 마지막은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서영해와 관련 어떤 일들을 추진할 계획인지?
“우리 역사교과서에 서영해에 대한 한마디 언급도 없습니다. 임정 외교의 양대 축 중의 하나를 담당했던 서영해가 유럽에서 펼쳤던 활동을 평가해서 역사 기록에 남기는 작업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정부는 1995년에 서영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는데, 그가 1926년부터 유럽에서 임정을 대표하여 단신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노고에 비하면 전체 5등급으로 된 건국훈장 중에서 4등급인 애국장을 받은 것은 격에 맞지 않은 포상입니다.
최소한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 정도는 새로이 추서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최근에 제가 한국외교협회에서 발간하는 ‘외교’지에 ‘파리의 잊혀진 독립운동가 서영해-유럽에서의 외교활동 평가 및 의의’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하였습니다. 오는 4월 발간될 예정인데, 거기에 자세한 외교활동과 평가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등 각종 자료에 그의 사망연도가 1949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사망년도 미상’으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끝으로, 서영해의 유가족과 협의해서 ‘서영해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그분의 업적을 기리고, 관련 자료 발굴과 학술적 연구를 지속해 나갈 예정입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정상천 지음ㅣ316쪽ㅣ16000원ㅣ2019년 2월 28일
총과 폭탄을 든 독립운동가도 있지만 여기 펜을 들고 조선 독립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도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숨겨진 서영해의 삶과 사상을 발굴해 정리했다. 서영해는 당시 유럽사회에 외교 중심지였던 프랑스 언론에 끊임없이 조선을 알렸고 여러 국제회의에 참가해 유창한 불어실력으로 조선이 직면한 어려움을 알리는 활약상을 펼쳤다.
저자는 국내에 부족한 서영해의 자료를 직접 발굴했고 책에는 서영해가 쓴 유고 글과 프랑스 현지 언론에 기고한 글, 인터뷰 등을 모아 번역해 실었다.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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