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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차별이 '부정의'를 낳는다. <그림 슬리퍼>와 <언페어>

by 에디터날개 2019. 6. 24.

그림 슬리퍼 
크리스틴 펠리섹 지음
이나경 옮김 
산지니 | 456쪽 | 1만8000원

 

언페어 
애덤 벤포라도 지음
강혜정 옮김 
세종서적 | 480쪽 | 2만원

 


먼저 가정을 해보자. 목격자가 없는 곳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됐을 경우, 가해자는 경찰에 붙잡혀 처벌받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또 다른 가정을 해보자. 내가 누군가에게 범죄를 저질렀다는 누명을 썼을 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내가 무죄임을 확실히 밝혀줄 수 있을까. 

최근 한국에 번역·출간된 <그림 슬리퍼>와 <언페어>는 이 문제를 나란히 이야기한다. <그림 슬리퍼>는 빈민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을 통해 ‘보잘것없는’ 사람이 피해자가 됐을 때 받는 차별을 다뤘다. <언페어>는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제도가 원래 목적대로 정확히 운용된다고 해도 언제나 부당한 유죄 판결, 불평등한 대우가 발생할 수 있음을 실제 사례로 증명한다. 물론 두 책 모두 미국 상황을 다뤘지만 한국 사회라도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그림 슬리퍼>의 저자 크리스틴 펠리섹은 현직 기자이고, <언페어>를 쓴 애덤 벤포라도는 법대 교수이면서 변호사다.

<그림 슬리퍼>의 내용부터 보자. 미국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센트럴에서는 1985~1988년 흑인여성 8명이 살해당했다. 범인은 피해자의 시신을 보란 듯이 도로에 버렸다. 피해자들은 모두 빈민가에 살았다. 경찰도, 정부도, 언론도 이 사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책의 제목인 ‘그림 슬리퍼’는 연쇄 살인범의 별명이다. ‘범죄 전문 기자’로 일하던 펠리섹은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직접 별명을 지었다. 2008년 ‘LA 위클리’ 표지 기사에 처음 쓴 ‘그림 슬리퍼’는 ‘잠들었던 살인마’란 의미다. 살인범이 1988~2002년 긴 휴식기를 거쳐 다시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승사자(Grim Reaper)’와 발음이 비슷하게 만들었다. 펠리섹은 2006년에 처음 이 사건을 접한다. 첫번째 희생자가 발생하고 18년이 지난 뒤였다. 경찰의 수사과정을 계속 지켜본 펠리섹은 이런 물음을 던진다. “어떻게 20년간 반경 6㎞ 이내의 좁은 지역에서 소름 끼치는 연쇄살인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미국 사회의 사법체계는 사진 속 저울처럼 완벽하고 공평한가. <그림 슬리퍼>와 <언페어>의 저자들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한국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 사회의 사법체계는 사진 속 저울처럼 완벽하고 공평한가. <그림 슬리퍼>와 <언페어>의 저자들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한국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는 빈민가에 사는 흑인 여성 피해자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 같은 로스앤젤레스의 부촌 베벌리힐스 인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고, 어머어마한 현상금이 걸린 뒤 순식간에 해결된다. 사우스 센트럴에 사는 피해자들은 ‘가난한 흑인 여성’이라 범죄의 표적이 되었고, 또 가난한 흑인 여성이라 수사 과정에서 뒷전으로 밀렸다. 2008년 펠리섹의 기사가 나간 뒤에야 ‘흑인 여성 연쇄 살인 사건’은 주목을 받는다. 범인 로니 프랭클린 주니어는 2010년 7월 검거됐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언페어> 역시 책의 제목 그대로 ‘불공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주제는 조금 다르다. <그림 슬리퍼>가 가난하고 힘없는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노골적 차별을 다뤘다면 <언페어>는 사회 시스템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부정의’를 말한다. 

저자는 실제로 벌어졌던 예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먼저 편견이다. 추운 겨울 길에서 한 남자가 쓰러진 채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은 옷에 묻은 ‘토사물’을 근거로 그를 술취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병원에서도 그는 ‘술이 깰 때까지’ 방치됐고, 뒤늦게 의료진이 두부 손상을 알아채 수술을 시작했지만 사망했다. 그는 저명한 기자였고, 길에서 강도를 당해 쓰러진 것이었다.

저자 벤포라도는 “관련자들이 정해진 규칙을 등한시하고, 빤히 보이는 우려사항들을 간과하며, 절차를 생략하고, 증거들을 무시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은 뒤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정하고 신중한 수사관’이 아니라 ‘극도로 제한적인 증거’를 근거로 속단을 내리는 데 능하다”고 말한다.

사법체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류와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목격자의 범인 식별 과정에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이나 강압적인 심문에 의한 피의자의 허위 자백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책에는 강간 피해자가 진범을 옆에 두고도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든 사례가 나온다. 

 

재판 과정에서 검사와 배심원, 판사들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 있는 오류와 문제점들도 피의자에게 결정적일 수 있다. 검사가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를 피의자 측 변호인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피의자는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우리가 지금까지 밝힌 모든 문제를 없앤다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끔찍한 학대, 잘못된 유죄 판결, 불평등한 판결이라는 문제들이 남게 될 것”이라며 “사법제도 설계 자체가 인간 행동에 관한 부정확한 가정 아래에서 만들어져서 그 자체로 불공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어 “진정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사형을 받을 만하다고 결론을 낼 때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숨은 힘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경향신문 홍진수 기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212041005&code=960205#csidx0ab09569d8d8303b6757e17108cdb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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