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40돌-그날의 기억]
부산, 유신 반대의 시작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민·학생 시위대 행렬.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얼마 전 둘러봤을 때 보이지 않았던 부마민주항쟁 표지석이 있네요. 늦었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진전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지난 11일 부마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정광민(61) 10·16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 부산대 자연과학관(옛 상대) 근처 화단에 세워진 항쟁 표지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연과학관은 40년 전인 1979년 10월16일 부마민주항쟁의 불길이 시작됐던 곳이다.
부마민주항쟁은 당시 민주주의 회복과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퇴진을 바라는, 이른바 ‘운동권’과는 관계가 전혀 없던 평범한 청년 학생의 열망이 일궈낸 학생운동으로 시작했다. 이들이 지핀 불씨는 부산 시민을 자극해 민중항쟁으로 커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한 ‘잊힌’ 항쟁으로 남아 있다.
79년 10월15일 이진걸(공대 3학년)씨 등은 유신독재정권 퇴진을 담은 ‘민주선언문’ 450여장을 대학 곳곳에 뿌렸다. 평소 유신헌법 철폐, 공평한 소득분배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정 이사장(당시 경제학과 2학년)은 이를 보고 친구들과 함께 ‘학내 시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운동권이 아닌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들은 등사기와 씨름하던 끝에 밤을 새워 선언문 300장을 만들었다.
“청년학도여! 시정을 요구하면 무참히 탄압하는 유례없는 독재다. 방관만 하겠는가. 너희들의 열정은 어디 있는가. 혼탁한 시대를 사는 젊은이의 사명감, 책임감으로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중략).”
선언문에는 유신헌법 철폐, 안정성장정책과 공평한 소득분배, 학원 사찰 중지, 학도호국단 폐지, 언론·집회·결사 자유 보장,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전 국민에 대한 정치보복 중단 등이 담겼다. 정 이사장은 “당시 가장 필요했던 것은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오전 10시55분 경찰과 대치했던 시위대 가운데 1000여명이 옛 정문을 통해 시내로 나갔다. 오전 11시37분 500여명이 부산대 사범대 부속고교(현 엔씨백화점) 한쪽 담을 넘어갔고, 11시55분께 700여명이 다시 시내로 진출했다. 백하현(63·당시 국문과 3학년)씨도 시내로 향했다. “도로를 지나가던 버스 기사나 승객들은 시위대에 손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며 격려했죠.” 하지만 동래구 온천장 네거리에서 이들을 저지하는 경찰에 쫓겼다. 사직동 미남 로터리 등 일부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경찰에 저항했지만, 최루탄과 진압봉을 앞세운 경찰에 발걸음을 학교로 되돌렸다. 백씨는 “‘남포동(옛 시청 근처)으로’라는 외침을 듣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기억했다.
16일 오후 중구 남포동·광복동으로 학생들이 모였다. 부산대 시위에 자극받은 동아대와 고신대 학생들도 함께했다. 이곳은 부산 최대 번화가답게 평소에도 인파가 붐볐다. 학생들은 부영극장 앞(현 비프광장)과 미화당백화점 앞(현 창선파출소 맞은편 터), 국제시장 등지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경찰의 진압에 해산과 집결을 반복하며 대항했다. 저녁부터 퇴근한 시민들이 시위대에 동참했다. 시민 참여로 민중항쟁으로 커지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고 진압봉을 휘두르는 등 진압 강도를 높였다. 시민들은 가로수 지지대를 뽑아 만든 몽둥이와 돌 등으로 경찰에 맞섰다. 시위는 격렬해졌다. 파출소 9곳이 파괴됐고, 파출소에서 떼어 온 여러 장의 박정희 대통령 사진도 불탔다. 정부는 군부대 출동 편성에 나섰다가 밤늦게 시위대가 자진해산하자 군 투입 결정을 미뤘다.
부마민주항쟁이 진행됐던 1979년 10월18일 정부의 계엄령 선포 뒤 부산대 새 정문 앞 모습.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항쟁을 주도한 학생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위는 17일에도 계속됐다. 유신 선포 7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백씨는 “이날 부산대는 임시 휴교했다. 근처 기원에서 (시위를) 기다렸다”고 말했다. 부산대 학생 700여명은 학교 안에서 시위를 이어갔지만, 경찰의 진압에 쫓겼다가 오후 2시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동아대 학생들도 행동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로 총학생회 대신 들어선 어용단체인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도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17일 오후 6시께 동아대 학생 1000여명을 비롯해 부산의 대학생들이 부영극장 앞에 다시 모였다. 이들은 어깨동무하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청 쪽으로 향했다. 백씨는 “지금은 상상 못 할 엄중한 시대인데도 모인 학생, 시민들 수가 놀라웠다. 시위대는 경찰을 피해 달아났는데, 상인들은 가게 셔터를 내리거나 양철 문으로 입구를 닫으면서 쫓기는 시위대를 숨겨줬다. 진압하는 경찰한테도 ‘하지 마라’ 하고 말리기도 했다. 시민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부마민주항쟁이 진행됐던 1979년 10월18일 정부의 계엄령 선포 뒤 중구 남포동의 부산시청 앞 모습.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부산 시민은 유신 7주년을 항쟁으로 반겼다. 전날과 같이 퇴근 시간인 저녁부터 시민들은 시위에 대거 참여했다. 당시 직장인이었던 김창우씨는 부마민주항쟁을 기록한 책 <다시 시월 1979>에서 “남포동 근처 부평동에 있던 옛 법원 근처 도로에 사람들이 꽉 찼다. 시민이 대부분”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시장 상인 이아무개(75)씨도 “나라에 도움에 되는 일이었다. 용기 있는 청년들 덕택에 지금 세상이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5만여명이 시위에 나섰을 것으로 추산한다. 깜짝 놀란 정부는 다음날(18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했다.
시위대는 이날 경찰서 2곳과 파출소 10곳을 부쉈다. 경찰차 6대가 불탔고 12대는 부서졌다. 전날(16일) 시위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언론사도 공격했다. 유신체제에 비판적이었던 기독교방송만 무사했다. 정부는 저녁부터 군인 1432명을 투입해 시위대를 진압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찰이 부산 중구 광복로에서 페퍼포그 차로 최루가스를 분사하는 모습.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18일 0시로 정부는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단체활동 금지, 영장 없는 체포 등을 알리는 계엄 포고문이 발표됐다. 해병7연대와 3공수특전여단도 투입됐다. 계엄군은 각 대학과 관공서 등에 탱크와 장갑차를 배치했다. 군인을 태운 군 트럭이 부산대와 동아대를 오가며 순찰에 나섰다.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등 일부 대학에서 학생들이 시위 등을 벌였지만 곧바로 군경에 진압됐다. 시민들도 도심 곳곳에서 작은 규모로 시위에 나섰지만 군경에 강제 해산됐다. 옛 시청 앞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도 진압됐다. 서면에서는 시민 1만5000여명이 서면 로터리에서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며 태화백화점(현 쥬디스태화)으로 행진해 해병대와 대치하다 밤 10시께 해산했다. 19일에도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 시민 400여명이 모여 군경에 야유를 보내다가 3공수특전여단 기동타격대에 진압됐다. 16일부터 19일까지 나흘 동안 부산에서 대대적인 유신독재 철폐 시위가 잇따랐다. 정부는 총을 든 군을 앞세워 강경진압했다. 1979년 당시 부산의 전체 검거 인원은 1058명이다. 시민이 661명, 학생이 397명으로 나타난다. 학생이 불씨를 지폈고, 시민들이 부채질과 기름을 끼얹으며 항쟁으로 확대됐다. 말 그대로 ‘지도부가 없고 계획되지 않았던 자생적 자발적 저항’이었다.
정 이사장은 부마민주항쟁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부마민주항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어요. 국가기념일도 올해 지정됐을 정도예요. 이제 시작인 셈이죠. 정부가 진상규명, 피해자 명예회복 등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백씨도 거들었다. “민주주의라는 집을 짓는데, 부마민주항쟁이 벽돌 구실은 했다고 봅니다. 그동안 배척됐던 피해자의 아픔을 정부가 치유하는 데 애써주길 간곡히 부탁합니다.”
지난 11일 부마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정광민 10·16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 부산대 새 정문 앞에 서 있다.
김영동 기자
한겨레신문 부산/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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