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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문학의 적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9. 12. 11.

구모룡 평론가가 부산일보 칼럼에서 얼마 전 만난 아네테 훅 작가의

이야기를 담아주셨어요.

앞으로 나올 아네테 훅 작가의 근간에 대한 이야기도 살짝 담겨 있네요.

[인문산책] 문학의 적들

 

 

‘나는 루쉰을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 작가 위화의 말은 충격을 주고도 남는다. 위화는 모옌과 옌렌커와 더불어 오늘날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매일 똑같은 밥과 반찬을 먹는 기분으로 루쉰을 접한 탓이라고 한다. 그는 문인은 마오쩌둥과 루쉰밖에 없는 줄 알았단다. 후일 루쉰의 작품을 각색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루쉰을 재발견하였다. 더군다나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루쉰의 묘사와 서술을 경탄하는 마음으로 배우게 된다. 작가가 되면서 루쉰을 제대로 읽게 된 셈이다. 위화는 소설을 쓰면서 루쉰을 비롯하여 가와바타 야스나리, 카프카 등을 읽었다고 한다.

문학교육이 문학을 위해 어떤 쓸모가 있는가? 특히 획일적인 교육은 문학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대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다 보면 과연 학생들이 배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와 소설이 어렵기만 하다는 관념이 형성되면서 오히려 문학과 거리를 두는 경험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중·고등학교의 문학교육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입시제도가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리라 믿는다. 정작 문학의 적은 이러한 교육환경보다 미디어 현실에서 더 극심한 모습으로 이미 등장하였다. 

획일적인 교육이 문학 더 멀어지게 해 

TV·뉴미디어, 문학 위상 크게 흔들어 

문학인 스스로 문학의 적 되지 말아야 

텔레비전의 시대가 되면서 인쇄 매체의 종언을 예고한 이는 마셜 매클루언이다. 서구 사회에서 오랫동안 문학이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반면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문학의 위상이 크게 졸아드는 양상이 1960년대에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 곧 ‘문학의 죽음’을 선언하는 데 이른다. 우리 사회의 경우 현대문학의 시대가 개화하는 과정과 텔레비전의 시대는 병행한다. 해방 후에 한글을 쓰는 세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970, 80년대의 일이다. 그렇다 보니 텔레비전의 충격에 대한 이해가 크지 않다. 과연 그럴까? 정부부서에서 수행한 ‘문화향유실태조사’에 의하면 텔레비전 시청이 늘 수위를 고수한다. 텔레비전에 나와야 책도 팔린다는 이야기가 나돈 지도 오래다. 신문과 문학은 같은 종이 매체로서 나란히 발전해 왔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주도하는 문화에서 미디어가 전시, 인정, 평가를 주도하면서 문학의 장에서 이뤄지는 비평시스템도 크게 흔들리고 만다. 활자화된 책의 진리라는 말마저 무색해졌다.

텔레비전 이후의 뉴미디어 시대는 디지털 혁명과 더불어 활짝 열렸다. 미디어 간의 연계와 융합이 거론되면서 문학이 원천 미디어일 수 있다는 애처로운 생존의 논리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스토리텔링이니 콘텐츠 제작이니 하면서 문학을 문화산업에 편입하는 일들이 잦아진다. 이러한 가운데 진지함과 진정성이 옅어지고 열정이 휘발하는 현상도 적지 않게 드러난다. 디지털 시대에 맞춰 장르의 변형도 자주 시도된다. 장르문학의 약진과 웹 문학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아울러 ‘극서정시’와 ‘극소설’이라는 개념도 등장하고 사진과 시를 융합하는 ‘디카시’도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극서정시는 일본의 하이쿠에 육박하는 정도의 짧은 서정시를 말하고 극소설은 기왕의 ‘손바닥 소설’보다 더 축소된 형태를 지향한다. 새로운 문학은 한편으로 독자의 권력에 호소하고 다른 한편으로 뉴 미디어의 위세와 타협한다.

최근 스위스 작가 아네테 훅을 만났다. 스위스 문학상을 받은 장편 〈빌헬름 텔 인 마닐라〉는 이미 번역되어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필리핀에서 유럽의 독립투사인 빌헬름 텔이 따갈로그어로 번역된 연유를 추적한 소설인데 이 작품을 쓰기 위해 필리핀 마닐라대학에서 2년여에 걸쳐 유학하였다. 최근엔 중국 현인을 다룬 소설을 쓰려고 중국에 체재하면서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리사 시의 〈해녀들의 섬〉은 또 어떠한가? 미국에서 21세기의 펄 벅이라고 알려진 대중작가임에도 제주 해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을 썼다. 그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문화인류학자 이상으로 제주를 왕래하면서 자료를 읽었다. 나는 이 작품을 그동안 나온 해녀 관련 소설 가운데 백미라 생각한다. 이처럼 문학은 여전히 그 존재의 위엄을 잃지 않는다. 시인과 작가들이 고투를 거듭한다면 좋은 작품은 항상 출현하기 마련이다. 과연 문학의 적은 누구인가? 잘못된 교육인가? 뉴 미디어인가? 문학인 스스로 문학의 적이 되는 일을 범하진 말아야겠다. 

부산일보 기사 원문 보기

 

 

빌헬름 텔 인 마닐라 - 10점
아네테 훅 지음, 서요성 옮김/산지니

폐허의 푸른빛 - 10점
구모룡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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