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 12인과 문학을 얘기하다

소설을 읽는 사람보다 영화나 드라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고,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를 쓰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예전의 그 위대한 문학은 끝장났고 이제 문학은 기껏 오락거리가 되어버렸다고 푸념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사실이 그렇다. 하지만 몰락과 종언의 온갖 풍문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홀로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문학을 둘러싼 그 추문들의 한가운데서 정결한 마음으로 글 짓는 일에 몰두한다. 마치 그것만이 그 어떤 지독한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위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가능한 대화들』, 6쪽)



염승숙 :
부끄럽게도 소설을 읽고 또 쓰면서, 저는 매일 국어사전을 들고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수업을 들을 때도, 도서관을 갈 때도, 집으로 돌아올 때도, 언제나 국어사전을 손에 쥐고 있었죠.

그것은 필시, 제 부족함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읽는 책 안에는 모르는 단어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요. 외국어를 배우듯이 저는 낯선 우리말 단어의 뜻을 찾았고, 또 그것을 외우기를 즐겼습니다.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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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
오후 두 시. 그것은 내 출근시간이다. 프란츠 카프카. 그는 오후 두 시에 퇴근을 했다지. 그는 오후 두 시에 퇴근해 한숨 낮잠을 자고 일어나 독서를 하고 새벽까지 글을 썼다지.

나는 자유로를 달려 오후 두 시에 닿는다. 오후 두 시는 무가당 크래커를 닮았다. 오후 두 시를 입 속에 넣고 낙타처럼 우물거리다 보면 목이 멘다. 침과 뒤섞여 혀와 입천장에 달라붙는 그것을 뱉을 수도, 그렇다고 꿀꺽 삼킬 수도 없다.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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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 :
다섯 살, 두 살 아이를 키우다 보니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밤 외에는 없다. 아이들을 재우고 부지런히 책상 앞에 앉아도 10시 부근. 몇 문장 쓰지 못했는데도 어느새 자정이다. 여지없이 출출하다.

주저 없이 멸치와 다시마를 꺼내 찬물에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국수 삶을 물을 올려놓고, 양념장을 만든다. 끓는 물에 국수를 넣을 때쯤이면 진한 멸치다시마 육수 냄새가 집 안에 고인다. 야식으로 먹는 국수에 꾸미(고명) 같은 걸 넣지 않으므로 그걸로 준비가 끝이다. 찬물에 국수를 헹군 다음에 그릇에 담고, 뜨거운 국물을 붓는다. 국물을 따르고 붓는 걸 두 번 정도 되풀이 한 다음에, 식탁 앞에 앉는다. 양념장은 한 스푼 정도. 저녁에 먹다 남긴 김치가 있으면 꺼내놓고, 없으면 없는 대로. 국수 한 그릇만 있으면 족하다.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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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
나는 소설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진 않았던가.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어 난감했다. 처음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내 나이 이미 서른이었다. 나는 무엇에 이끌렸던 걸까.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으며 아내이자 한 집안의 외며느리였다.

나는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일, 나만의 직업을 가지고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작가만큼 매력적인 건 없었다. 청소년기에 문예반에 들어가 문학을 접했지만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꿈꿀 수 있는 직업이라 여겼기에 일찌감치 포기한 길이었다. 하지만 ‘이야기’에 매혹된 경험이 있는 숱한 독자들처럼 나 역시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살고 싶었다.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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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 :
출판사에서 전화가 온 것은 오후 무렵이었습니다. 방금 오토바이 퀵 배송으로 책을 보냈으니까 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라는 말이었지요. 저는 집 안을 서성거리다가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동네를 빙 둘러 걷고 또 걸었지요.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는 오후 여섯 시 무렵, 제 앞에 오토바이가 멈췄습니다. 파란색 종이 백에 담겨 있던 스무 권의 『달의 바다』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곳에 새겨진 제 이름과 장편소설, 이라는 활자.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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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의식적으로 했던 훈련은 하루키적 세계관과 스타일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사실 아주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써지는 대로 썼다. 처음엔 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내 글에 달라붙어 있는 하루키적인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동경이 내 글을 망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난 그의 (초기) 소설이 가지고 있는 세련됨, 투명한 문장, 독특한 유머, 허무주의, 미국적 요소,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매끈한 풍경 따위를 정말 사랑했다. 그런 걸 쓰고 싶었다. 그런데 한 편으론 내가 거절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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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 :
저 스스로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고 시를 처음 배우는 친구들에게도 자주 하는 말입니다만, 제발 자유롭게 쓰자는 주문을 많이 합니다. 시만 놓고 보자면, 흔히들 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인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시를 쓰게 되기 때문에 시인이 된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네요. 물론 여기서의 시는 어떤 규정된 개념의 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유롭게 써나가는 글이 어느 순간 시라고 인식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시라고 인정받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한 명의 시인이 탄생하는 겁니다.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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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미 :
시가 아니면 죽을 것 같은 시절을 지나면서 썼던 시들이 첫 번째 시집에 묶인 시들이라면, 시가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을 적어 내려간 것이 두 번째 시집에 묶인 시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그것은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음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새로운 계절이 오듯이 늘 새로운 마음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 두 번째 시집에는 ‘여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죠. 아주 거친 대답이지요?^^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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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
시를 쓸수록 그것이 자꾸 욕망과 허영을 동반하는 것을 봅니다. 시를 잘 쓰고 싶은 욕망과 사람들 앞에서 그 시가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국 동일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문학은 결국 독자를 전제로 하는 것일 테니까요.

한동안 인터넷과 잡지를 모두 끊고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시를 가장 많이 썼고 좋은 시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갈대밭에 꽂혀서 눈도 귀도 없이 흔들리다 보면 거미줄처럼 와서 몸에 척 감기는 바로 그것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시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자세야말로 시를 통해 삶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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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
독자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멋대로 읽으시길 원합니다. 제 맘에 드는 시보다 그렇지 않은 시를 좋아하시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의미와 논리를 말하고 싶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의미와 논리를 지우려고 씁니다. 진실, 그런 게 있다면 그것을 말하기보다 그 진실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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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
뼈저리게 반성하고 또 스스로 경계하는 일이지만 시를 쓰는 사람에게 가장 나쁜 습관 중의 하나는 스스로의 시를 복제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병에 대한 시를 계속 복제해내는 나의 시작(詩作)에 환멸을 느꼈고 자폐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나의 생활이 지겨웠습니다.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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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
나는 내가 시를 쓰면서도 시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시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딴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시인들 사이에 끼여 있으면 내가 이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겨먹은 인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건 나에게 미학적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내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무잡한 기질, 뒷골목 자포자기 스타일, 상스럽고 신파적인 감성, 악착 없음 같은 걸로나 설명 가능한 마이너스 에너지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기 때문일 거다. (252쪽)

불가능한 대화들 - 염승숙 외 지음/산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