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고립·죽음…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상념
정미형 소설집 ‘봄밤을 거슬러’ 부산 배경의 작품 등 7편 담아
- 아버지·남편·세월 등의 상실 속
- 남은 자 고독·허무·그리움 그려
소설가 정미형의 두 번째 소설집이 나왔다. ‘봄밤을 거슬러’라는 제목으로는 촉촉하고 산뜻한 어느 봄밤의 상념에 관한 글들인가 싶은데, 실린 글 일곱 편은 모두 ‘소멸’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는 것(사람), 혹은 상실한 것에 관한 사색이다. 군더더기 없이 섬세한 문체에 고독과 허무가 담겨 조용히 스며든다.
‘벽 속으로 사라진 남자’는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남편이 벽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얘기다. 혹은 그렇다고 믿는 아내의 얘기다. 죽마고우인 케이와 알 수 없이 깊은 유대를 가진 남편은 일을 그만둔 후 케이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진다. 케이는 처음 만날 때부터 자기를 경계하고 노골적으로 혐오하기도 했기에 아내는 그런 케이와 남편이 더 마뜩찮다. 어느 날 남편은 케이로부터 기묘한 색상의 벽지를 얻어와 벽에 붙이고 들여다보더니 그 벽지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지난해 현진건 문학상을 받은 표제작 ‘봄밤을 거슬러’는 평화롭게 나이 드는 듯 했던 노부부의 일상이 실은 작은 변화에도 흔들리고 깨질 만큼 나약했음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생업에서 은퇴해 단독주택에 적막하게 사는 노시인에게 그의 아들은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달라고 하고, 옆집의 젊은 주인은 집을 새단장하며 담장을 허물자고 제안해 온다. 노년의 일상에 생긴 작은 균열은 노시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어느 밤 노시인은 담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에 놀라 뛰쳐나간다. 활기를 잃은 삶에 진하게 드리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덤덤하게, 그러나 긴장감 있는 비유로 묘사된다.
2020년 12월 16일 <국제신문>‘노란 등’은 항구도시인 부산을 뚜렷이 드러나게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나’는 북항 인근에서 커다란 배를 보며 자랐다. 뱃사람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원목을 실은 원양선이 난파되는 바람에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도 다시 바다로 나가야 했다. 배를 타면서 얻은 병으로 오십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아버지는 젊어서는 배에, 죽음의 문턱에서는 병실 침대에 갇혀 지냈다. 어느 날 다시 찾아간 부두에서 나는 과거의 내가 기댔던 ‘노란 불빛’을 만난다.
정미형 소설가는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설을 소개한다. “탈출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동일한 것일 수도 있어요. 경계를 넘어 자발적으로 탈출한 상황이 누군가에겐 사라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이드는 고독과 낯섦, 현실 삶과의 고립, 연락두절된 피붙이 등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는 남은 자의 표정을 그린 것 같아요.”
“아주 익숙한 인간들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색다른 시각으로 써보고 싶다”는 그는 “장편소설도 늘 도전하고 싶은 분야다. 해내는 날이 오면 내 스스로가 가장 놀랄 것 같다”고 말했다.
신귀영 기자, 2020년 12월 16일자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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