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으로 돌아온 시인 전성호
미얀마의 우기를 뚫고 함석지붕 두드리는
‘헨델의 메시아’ 같은 글
책 소개
“내 슬픈 미얀마, 나의 유토피아”
엠마웅과 부엉이 소리 따라 울리는 절절한 산문
길 위를 떠도는 것은 어딘가 도달할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떠돔’ 그 자체임을 겨우 인정하게 된 이국의 밤이다. 그러나 내 노년의 사랑인 쎄인빤 핀 미얀마는 군부 쿠데타가 진행 중이며 젊은 육신들이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대지에 피를 흘리고 있다. 그곳이 내 슬픈 미얀마, 나의 유토피아다.-「은밀한 시선(1)」 중에서
내게 유년 시절의 부엉이는 그런 정서로 달팽이관 저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막연함을 불러일으키는 유랑의 감수성이 날 낯선 이국으로 떠돌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부엉이와 비슷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있던 내게 새가 아니라 도마뱀의 울음소리라니, 충격은 신선하고 놀라웠다. 난 그냥 미얀마의 달빛과 야자수와 작은 금관악기 같은 엠마웅의 울음소리에 빠져들고 말았다. 무려 20년 동안 미얀마는 사실 이런 반전을 계속 체험하게 해주었다.-「엠마웅과 부엉이」 중에서
오랜 방랑과 이주 뒤에 전성호 시인이 돌아왔다. 물론 완전한 귀환은 아니다.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아프리카, 페루, 몽골, 사할린을 거쳐 미얀마에서 20여 년을 정착하였다. 누구보다 더욱 섬세한 눈길로 미얀마의 겉과 속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그는, 뛰어난 작가이자 인류애의 실천가이다. 전성호 시인의 생애 첫 산문집을 통해 미얀마와 수많은 소수 민족의 삶, 장소와 도시, 언어와 사물, 종교와 제도, 민속과 신화, 나아가서 국가 간의 관계와 지정학을 이해하는 일은, 그의 빼어난 시편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을 절절함으로 요동치게 한다.
상인의 눈과 시인의 가슴으로 읽는 ‘존재의 물음’
‘나란 무엇인가, 주체란 무엇인가, 종국에 인간은 과연 선한 존재일까.’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이 물음은 우리들을 항상 괴롭힌다. 시인의 정념과 상인의 정체성을 함께 지닌 저자에게는 더욱 끈질기게 다가오는 물음이었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을 시작으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인드맵처럼 뻗어 간다. 그 시간 속에서 작가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선하며 신뢰가 가고, 겸손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있어왔음에 주목한다. 잠깐의 민정, 70여 년의 군부 통치, 쿠데타, 코로나19로 신음하는 다민족국가 미얀마. 시를 사랑하고, 미얀마를 사랑하고, 양곤을 사랑하는 시인 전성호는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20여 년 미얀마 생활에서 길어 올린 무수한 정념과 사유를 이 책에 담았다.
나는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자 시인이며 상인이다. 나는 내 삶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얻은 모든 질문을 종교적 믿음으로 환원시킬 마음이 없다. 기도와 일상이 그 처절함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과 믿음 사이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저자의 말 중에서
쉐다곤 파고다, 황금빛 판타지가 주는 서러움
이 글은 저자가 20년 넘게 미얀마에 살면서 ‘한 발 더 깊이’ 새로운 고향을 들여다보며 어루만지는 이야기다. 때로 어떤 글들은 미얀마와 우리가 처한 딜레마를 함께 읽어 보는 르포와 칼럼이 되기도 했다. 1부에서는 작가의 ‘은밀한 시선’으로 바라본 미얀마의 생생한 모습, 오랜 세월 머무르고 있는 그곳에서 자신의 근원 부산 오륙도를 생각하는 ‘회귀성의 눈’과 한국의 젊은 청년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세계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깊은 고민 등 저자의 뚝심 있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2부와 3부에서는 미얀마 사람들의 ‘신’, 전통 축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미얀마의 현 상황, 소수 민족들 간의 갈등, 미얀마 양곤의 아름다운 풍경 등 본격적인 미얀마에서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특히 쉐다곤 파고다 사원의 압도적인 스케일을 표현한 구절은 우리를 황금빛 미얀마의 ‘깊고 푸른 밤’ 바로 그 서러움의 자리로 이끄는 듯 생생하다.
미얀마의 관문인 양곤에 도착한 여행자라면 누구나 황금사원 쉐다곤 방문으로 일정을 시작한다. 60톤이 넘는 황금으로 뒤덮인 압도적인 스케일의 사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불교적 판타지를 이룬다. 이곳에서 맨발로 만나는 첫 번째의 놀라움은 화려한 황금빛 속에서 갖가지 포즈로 방문자를 바라보는 부처의 신상들일 것이다. 그다음은 어디다 눈길을 돌려도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초록빛의 열대 나무들이다. ‘대정원’이라고 불리는 양곤의 거대한 열대 수목들은 이 도시를 뒤덮고 있는 지붕과도 같다.-「미얀마는 왜 황금의 나라인가?」 중에서
깨어진 관계, 미얀마는 지금
미얀마에서는 지난 2월 군사 쿠데타가 발발한 뒤로 많은 시민들이 이에 저항하며 힘든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독재로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는 이 사태는 우리나라의 5.18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하면서 많은 한국 시민들도 응원을 보내고 있다. ‘경계인’의 시선으로 미얀마의 현 상황을 바라보는 저자는 여러 종족이 함께 불편한 관계를 겪고 있는 모습을 ‘내부의 깨어진 관계’라 지칭한다. 5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미얀마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종족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미얀마 군부의 시대착오적 행태를 ‘왕조시대의 낡은 사상을 탈피하지 못하고 탑을 쌓아 옛 권력과 종교적 위력으로 민중을 다스리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땅과 하나가 된 미얀마 사람들의 웃음과 평안하고 느린 삶에서 자본주의 문명에선 발견할 수 없는 깊은 치유의 길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나르기스에 대한 기억은 88년 양곤 민주화투쟁 때 발생했던 대학살(3,000~10,000명으로 추정)과 함께 잊혀질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당연히 80년 5월 광주의 상처와 겹쳐진 이 기억들은 내 삶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국가와 통치 혹은 정책 담당자와 정책의 대상자들, 개인의 운명과 집단의 운명, 거대한 환경재앙 등의 문제들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게 미얀마에서의 삶은 붉은 쎄인빤과 참혹한 학살 사이를 오가는 극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피 흘리는 아픔은 여기가 끝이 아니어서 슬프기 그지없다.-「부재하는 광채」 중에서
진실한 언어, 아름다움의 아우라
4부는 전성호 시인이 시를 쓰면서 느낀 고민의 흔적들이다. 그에게 시란 ‘나와 세계를 향한 연애편지’이다. 그는 사랑의 힘으로 시를 쓰고 글을 쓴다. 그리고 희망보다 더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리라고 굳게 믿기에 ‘질문하기’의 촌스러움, 절뚝거리는 철학하기를 멈추지 않고 진실한 시인의 언어로 아름다움의 아우라를 구현해낸다.
시인들은 가난하거나 힘이 없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부당한 현실을 풍자하거나 고발하는 시를 쓰다 감옥에 투옥되거나 고문을 받기도 했다. 때론 시인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하는 존재들이기도 한 것이다. 왜 그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시를 쓰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시인들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시는, 나와 세계를 향한 연애편지다」 중에서
연관 키워드
#미얀마 #코로나19 #쿠데타 #여행 #양곤 #파고다 #시 #떠돌이 #떼진
책 속으로/밑줄긋기
첫 문장
나는 나의 삶이 일생 동안 떠도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P.16 길 위를 떠도는 것은 어딘가 도달할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떠돎’ 그 자체임을 겨우 인정하게 된 이국의 밤이다. 그러나 내 노년의 사랑인 쎄인빤 핀 미얀마는 군부 쿠데타가 진행 중이며 젊은 육신들이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대지에 피를 흘리고 있다. 그곳이 내 슬픈 미얀마, 나의 유토피아다.
P.26 조건 없는 사랑이란 신의 은총과 같은 것이어서 디바는 금방 싱싱한 탄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디바가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의외로 큰 즐거움을 준다는 걸 알았다. 햇빛, 산소, 바람, 온도, 영양분은 디바에겐 자연이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이다. 나는 디바의 이파리를 통해 자연의 깊고도 무심한 사랑에 감사했다.
P.47 어딜 가나 사람들이 모이면 속설 같은 온갖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미얀마 역시 이런 속설들이 미신과 결합돼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나라 중 하나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몬순 때 하늘에서 황소 오줌 같은 비가 흘러내리면 그해의 건기 철엔 연못이 마르고 웅덩이까지 마른다고 한다. 깊은 계곡에서 나오는 돌 이야기인데, 이 돌 속에 무슨 강한 기가 들어 있는지, 이 돌을 몸에 간직하고 있으면 총알도 뚫지 못한다고 한다. 냄새가 지독하고 손바닥만 한 ‘코끼리씬’이라는 것이 습지 또는 늪에 사는데, 덩치가 큰 코끼리가 이 코끼리씬을 밟으면 바로 쓰러지거나 죽는다고 한다. 아예 코끼리들은 냄새로 코끼리씬이 있는 곳을 피해 다닌다고 한다.
P.98 인류애란 단어는 이제 폐기되어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쩜 코비드-19보다 무서운 것은 바이러스를 매개로 부를 축적하는 다국적 기업과 이를 기득권화하는 일부 국가들일지도 모른다. 인류는 이 재앙 앞에서 사라진 꿈과 이상 그리고 엘리어트가 노래했던 황무지만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P.251 옳은 것이 아름답지 않거나 선한 것이 아름답지 않으면 그것은 아우라가 없는 것이다. 아무도 진심으로 감동하거나 설득당하지 않는다. 정치나 혁명이 늘 실패하는 지점이 이곳이다. 당신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지만 당신만의 진실한 언어가 없다. 그것이 없으면 존재는 거짓이기 쉽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바로 이렇게 절뚝거리는 철학하기, 즉 질문하기의 촌스러움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나의 철학하기다. 그러나 존재 물음의 근원 즉 정말로 큰 질문은 언제나 왜? 라는 질문 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자 소개
전성호(田成浩)
1951년 경남 양산 서창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며, 미얀마에서 산다.
2001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창비),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실천문학사), 『먼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실천문학사), 『말을 삼키는 도시』(시인)이 있고 미얀마 양곤에서 21년째 살고 있다.
차례
저자의 말
1부 은밀한 시선
은밀한 시선(1)
은밀한 시선(2)
부재하는 광채
동식물도 꿈을 꾼다
코끼리 감기
노을 속으로 돌아오는 돼지들
늑대처럼 우는 개들
빗방울이 하늘로 올라간 뒤
회귀성의 눈
바람처럼 나를 멈추지 마라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
세계를 향해 한걸음 더
거듭나야 하는 Personality
광의적 약속의 무게
2부 엠마웅과 부엉이
엠마웅과 부엉이
나눈다는 것, 하나가 된다는 것
미얀마는 왜 황금의 나라인가?
인간, 주체를 상실한 포유류
미얀마의 물 축제(띤잔Thingyan)
변하고 있는 미얀마
쉐다곤 파고다–양곤의 빛
아이 울음
핀마나의 꽃, 떼진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
3부 어두운 창의 커튼을 젖히며
미얀마, 깊고 푸른 밤
디아스포라의 초상
나는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는 또 다른 나다
사람에 대한 기다림
뒤를 돌아보라, 거기 오래된 미래가 있다
유익한 공동체 삶의 희망
내가 왜 그런 것을 해야 하지
어두운 창의 커튼을 젖히며
옴니암니, 나의 정치학
사회 구성원의 윤리
의인과 악인의 길
4부 나의 시 그리고 미얀
시는 동시대의 사랑을 쓰는 일
시는, 나와 세계를 향한 연애편지다
꿈과 분노
절뚝거리며 철학하기
주어진 자질에 상상력 대입하기
전성호 지음ㅣ256쪽ㅣ148*210ㅣ978-89-6545-763-3 03810ㅣ17,000원ㅣ2021년 11월 15일
오랜 방랑과 이주 뒤에 전성호 시인이 돌아왔다. 물론 완전한 귀환은 아니다.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아프리카, 페루, 몽골, 사할린을 거쳐 미얀마에서 20여 년을 정착하였다. 누구보다 더욱 섬세한 눈길로 미얀마의 겉과 속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그는, 뛰어난 작가이자 인류애의 실천가이다. 전성호 시인의 생애 첫 산문집을 통해 미얀마와 수많은 소수 민족의 삶, 장소와 도시, 언어와 사물, 종교와 제도, 민속과 신화, 나아가서 국가 간의 관계와 지정학을 이해하는 일은, 그의 빼어난 시편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을 절절함으로 요동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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