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해방공간 영천, 그 내밀한 풍경
이중기 시인의 신작 시집이 산지니시인선 18번으로 출간된다. 이중기 시인은 서글픈 농촌의 현실과 경북 영천, 대구의 10월 항쟁에 천착하여 한국 사회에 자리한 구조적 모순의 근원에 접근한다. 특히 이번 시집은 1946년 영천 10월 항쟁과 사건에 얽힌 사람들에 매달리며 해방공간 영천의 내밀한 풍경을 드러낸다. 시집의 제목인 “정녀들이 밤에 경찰 수의를 지었다”는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1—1946년 10월 5일 주일」의 구절로, 늦은 밤 정녀, 즉 수녀들이 경찰 수의를 짓는 당시의 상황을 짐작게 한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10월 항쟁은 해방 이후 최초의 민중봉기였다는 사실에 비해 역사적 규명과 연구가 아직 미비하다.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기저에 자리한 영천의 슬픈 역사를 상기하고 10월 항쟁의 진실과 의미를 묻고 있다.
▶ 석양 속으로 저물어가는 농촌 현실
핏빛 석양 속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농업사’와 그 뒤를 참담한 심정으로 따라가는 한 늙은 사내가 눈에 어른거렸다. 그는 여전히 “맨발에 고무신이 편해지는 예순도 훌쩍 넘겼는데/나는 아직 야성 팔팔한 농민 쪽에 서 있다”(「나는 아직 멀었다」)라고는 하지만, 그에게도 조금씩 “영천강 갈대밭도 보이기 시작”하면서 “내가 날 내려다보며 골똘해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_박승민(시인)
1부에는 한국 농업과 농업사에 얽힌 농촌의 현실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에서 있었던 수많은 정권교체와 농업 정책의 변화 속에서도 농촌은 하염없이 저물어간다. 갈 데 없는 절망감과 “나는 아이들에게 농경문화 유장함도 물려주지 못한 죄 많은 족속”(「자술서」)이라는 회한 속에서 시인의 분노와 서글픔은 무럭무럭 자란다. 그러나 “사표 수리가 안 되는 아직 젊은 농사꾼”(「오지, 예순하나」)인 그는 여전히 땅을 돌보고 밭을 일군다.
▶역사의 중심에 놓인 지역 여성들
2부에서는 영천지역과 그곳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여러 인물들을 형상화한다. 특히 영천지역을 기반으로 한 여성들을 서사화하며, 소외되고 번외로 취급되었던 ‘지역의 여성’을 적극적으로 역사의 중심으로 호명한다. 시인은 제월순, 윤영실, 마리안·마가레트 수녀 등 황폐화된 토지를 재생시키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여성들의 행보에 주목한다. “온 산야 초록 캐고 뜯고 꺾어다 식구들 목구멍 추슬렀던 치마폭들”(「슬픈 이름들」)은 모진 제도와 관습의 핍박을 견디고 이 땅에 뿌리내렸다.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난 그들은 스스로 생명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나간다.
▶선교사가 바라본 1946년 영천
대구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읍내 주민들과 관공서 사이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2일에서 3일로 넘어간 새벽 한 시에 민중들 시위가 있었다 군수가 피살되었다 보리공출 과정에서 가혹하게 굴었던 경찰들이 암살당했다 (…) 원인은 미군정이 과도하게 강요한 보리공출과 식량배급 중단, 철도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 그리고 물론 독립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가련한 한국! _「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9」부분
「문을 열다」로 시작하여 「문을 닫다」로 마무리되는 3부는 1946년 영천성당 신부였던 루이 델랑드의 일기를 발췌·첨삭·재구성하였다. 시인은 해방공간 영천의 내밀하고 생생한 현장을 『루이 델랑드의 선교 노트』의 시적 재구성을 통해 들여다본다. 연작시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의 10월」가 배치되어 외국인 선교사가 바라본 10월 항쟁 당시 영천의 풍경이 녹아 있다. 루이 델랑드 신부의 일기는 선명한 밑선을 그으며 그 시절의 영천 풍경과 사건을 스케치한다. 3부의 시는 이중기 시인의 언어와 시선을 한껏 머금고 신부의 일기에 색채를 더한다.
책 속으로
조상이 이승을 간섭하는 이상한 부족국가에서 나는 살았네
땅을, 삶의 방식이 아니라 죽음의 양식으로 받아들여
환갑이 되도록 내 생은 기록할 줄 몰랐네, 뒤늦게
술 석 잔 올릴 제관도 없는 제사
파젯날 초저녁으로 옮겨 저녁 삼아 젯밥이나 먹을 작정이었더니
외등도 안 밝힌 입젯날 늦은 밤 지방에 축문까지 써서 달려온 문장 어른
누르락푸르락 호통에 고개 한번 못 들고 마트로 제삿장 보러 갔네
_「오지, 예순하나」 부분
시집살이 첫 밥 지은 아궁이에 불쏘시개 삼아버린 것,
끝자 조야 눔이 꼭지 섭섭이는 슬픈 옛날 여자들 이름이었지
솟을대문 지나가다 코끝에 묻힌 고기 비린내로 한 끼 잘 먹었던
막사발 같은 그 이름 앞에 당당할 사내 없다
_「슬픈 이름들」 부분
일본인들에게 관대하며 침착하라는 당부가 계속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경찰 권력은 읍내에서 아주 사라졌다 나무총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돌아다니며 치안을 대신한다 타지에서는 흉흉한 소식이 곧잘 들려오지만 영천에는 복수와 징벌이 두려운 경찰 몇몇이 도망갔을 뿐, 조용하다 폭풍전야의 고요인가?
_「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1945년 8월」 부분
저자 소개
이중기
195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1992년 시집 『식민지 농민』을 펴내고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시집으로 『숨어서 피는 꽃』, 『밥상 위의 안부』, 『다시 격문을 쓴다』, 『오래된 책』, 『시월』, 『영천아리랑』,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가 있으며, 연구서 『방랑자 백신애 추적보고서』와 『원본 백신애 전집』(편저)이 있다.
차례
시인의 말 하나
제1부
나는 아직 멀었다 | 우러러 높고 지극할 슬픔 | 가지치기 하다가 | 틀린 말이 아니다 | 오지, 예순하나 | 나와 한국농업정치사 | 자서소전自敍小傳 | 입암立巖에서 머리 숙이다 | 자술서 | 고맙다 | 논이 두 마지기나 남았는데 | 산토끼와 내 열네 살 | 톳재비 우화 | 열네 살 지게대학 보고서 | 도마가 놓인 자리 | 매상 가마니와 시집 | 여기는 별의 수도, 영천 | 서정시에 대한 경고
제2부
골벌국骨伐國 | 기룡산이 숨겨놓은 풍경 | 막걸리면장 | 소똥국수 | 윤영실전 | 양밥 | 호래이 가죽인지 쪽제비 껍디긴지 | 월남치마 그 여자 | 홍옥 가슴 | 얼금뱅이 미륵 | 치사한 논쟁 | 흑발 한 뭉치 | 가리봉동에서 보내온 조난신호 | 난대나무 여자 | 깊은 풍경 | 슬픈 이름들 | 기룡산 북쪽 산돌배나무 | 마리안과 마가레트
제3부
문을 열다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945년 8월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2—945년 9월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3—945년 10월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4—945년 11월 11일 주일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5—945년 11월 19일 월요일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6—945년 겨울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7—946년 봄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8—946년 9월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9—946년 10월 3일 목요일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0—946년 10월 4일 금요일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1—946년 10월 5일 주일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2—946년 10월 7일 월요일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3—946년 10월 8일 화요일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4—946년 10월 14일 수요일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5—946년 10월 15일 이후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6—946년 11월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7—946년 12월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8—947년 2월 | 불란서 문자로 쓴 영천 10월 19—947년 봄, 이후 | 문을 닫다
발문: 기룡산 산돌배나무의 삼백쉰여덟 살 된 생산성이라니!-박승민(시인)
정녀들이 밤에 경찰 수의를 지었다-산지니 시인선 018 지은이 : 이중기 쪽 수 : 136쪽 판 형 : 사륙판 127*188 / 양장 ISBN : 979-11-6861-023-1 03810 가 격 : 12,000원 발행일 : 2022년 3월 31일 분 류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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