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를 만나세요, 당신이 세상의 乙(을)이라면


- 기존에 출간된 책보다 매끄럽고 쉬운 번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 한비자는 처세술이 아닌 경영학+정치학의 통치술
- 특히 사회에 나가기 전인 청년에 일독을 권합니다

고전학자 정천구(49) 박사를 부산 금정구 남산동 연구실 겸 자택에서 지난 19일 만나자마자 평소의 의문부터 털어놓았다.

   


'한비자' 번역본을 펴낸 고전학자 정천구 박사가 한비자의 사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본지에 연재한 기획시리즈에 바탕을 둔 단행본 '한비자, 제국을 말하다'도 함께 냈다. 서정빈 기자 photobin@kookje.co.kr

"재작년 이른바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들썩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저는 사건의 장본인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이 일찌감치 '한비자'를 공부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생각하곤 했는데요."

커피콩을 가는 수동 커피그라인더를 돌리던 정 박사가 대답 대신 요즘 우스개를 하나 들려준다. "어떤 청년에게 꿈이 뭐고, 그 꿈을 이루는 데 어려운 점이 뭐냐고 물었더니 '재벌 2세가 되는 게 꿈인데 아빠가 노력을 안 해요'라고 답하더랍니다." 참 절묘한 농담이다.

곱게 간 커피가루에 물을 부어주면서 정 박사가 덧붙인다. "한비는 전혀 다르게 말하죠.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는 있어도 능력은 물려받을 수 없다. 필요한 덕목을 터득해서 네가 1세가 되라, 네 삶의 군주가 되라 하는 메시지와 내용이 '한비자'에는 있지요."

요약하면, '한비자'를 쓴 중국 전국시대(거의 2500년 전이다) 법가 사상가 한비가 땅콩회항의 현장을 봤다면, "그렇게 공부하라고 했건만…"하고 혀를 찼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물론, '한비자'에서 배울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비자'는 훨씬 풍부하고 깊고,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현실감이 높다. '한비자'는 2500년 세월을 거치며 강철처럼 단련되고 엄정하게 검증받은 책이다.

■거칠지 않게 어렵지 않게 번역

정천구 박사는 최근 산지니출판사에서 '한비자' 완역본을 펴냈다. 한비자를 전면에 내세워 현대 한국사회의 현실과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한 '한비자, 제국을 말하다'도 같은 출판사에서 함께 냈다. '한비자,제국을 말하다'는 지난해 3월~8월 국제신문에 연재한 글을 다듬어 엮은 책이다.

그는 비중이 크고 중요한 책을 꾸준히 번역하거나 저술했다. 저서로 '삼국유사, 바다를 만나다' '맹자독설', 번역서로 '차의 책' '동양의 이상' '원형석서' '일본영이기' '밝은 마음을 비추는 보배로운 거울-명심보감' '삼교지귀' '모래와 돌' '베트남 선사들의 이야기' 등이 있다.

그의 저서 가운데 '논어, 그 일상의 정치' '맹자, 시대를 찌르다' '중용, 어울림의 길'은 고전 주해서로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동양 고전을 깊이 읽고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한비자'가 그 흐름을 이었다.

"다른 연구자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데, 정천구 번역본 한비자를 다시 내신 뜻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는 답했다. "한비자 전체를 번역한 책은 현재 시중에 4종 정도 있는 것으로 알아요. 그런데 대체로 번역이 거칠고 상그러워요. 대학생 이상이면 읽는 데 어려움이 없는 번역서가 필요하다고 봤지요." 정 박사는 "그리고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게 아니라 옮기는 이의 해석과 시각과 역량이 담기게 마련"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내내 한비자 주석서가 안 나온다. 비교적 근래까지 한비자에 관한 관심이 없었다. 일본만 해도 에도시대에 한비자 주석서가 쏟아져 나왔고 권위 있는 책도 많다. 이런 사정으로 우리나라에서 유명세에 비해 한비자 번역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다.

■제자백가 책은 고루 읽어야

   

그가 한비자를 새로이 공들여 번역한 뜻은 또 있다.

"기존 한비자 번역서에는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사상이 유가사상과 단순하게 대립하고 배척만 한 것으로 이해하는 면이 있죠. 유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고, 그러다 보니 유가와 법가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정 박사가 볼 때 둘 사이의 관계는 훨씬 긴밀하다.

법가의 거물로, 진시황이 완성한 천하통일의 바탕을 마련한 상앙은 당시 유가를 비판하면서 법가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상군서'라는 책으로 남겼다. 유가의 거목 맹자는 이런 '상군서'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비판하면서 자기 사상을 펼친다. "불교사상이 없었다면, 성리학이 성립할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하게 법가와 유가의 관계는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데가 있었죠."

이는 정천구 박사가 강조하는 고전 공부법의 요체로 이어진다. "함께 읽어야 해요." 한비자를 비롯한 제자백가는 '나는 논어가 좋아' '그럼 나는 맹자'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제대로 배울 수 없고 고전공부에서 아주 중요한 균형감각까지 못 갖추기 십상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세상 살기 어렵다고 노자와 장자에만 빠져들면 도피로 흐르고, 법가만 파고들면 각박해질 수 있겠다. 실제로 에도시대부터 한비자에 열광한 일본은 국가 발전을 앞당기는 데 성공하지만, 그 뒤 침략적 제국주의로 흘렀다. 조선은 법가와 유가가 균형을 이룬 전기에는 융성했으나, 성리학과 관념론에 빠져버린 조선 후기에는 참혹했다. 정 박사는 '한비자' 또한 '논어' '맹자'를 비롯한 여러 제자백가의 책과 함께 볼 것을 권했다.


■당신이 을이라면 한비자를 읽자

'한비자'의 문장은 간결한 아름다움이 있다. 상당 부분이 치밀하고 논리적이다. 권력과 정치의 속성과 본질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2000년이 지난 지금과 하나 다를 게 없어 간담이 서늘하고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다. 각 장의 제목만 봐도,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한국 정치 현장 이야기처럼 생생하고 현실감이 강하다.

망징(나라가 망할 징조) 팔간(신하의 여덟 가지 간사한 짓) 십과(군주의 열가지 허물) 세난(유세의 어려움) 간겁시신(간사하고 겁주고 시해하는 신하)…. '한비자' 자체가 강한 책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한비자'는 인간사회의 관계를 힘(권력)의 관계로 보고 이를 활용하고, 여기서 살아남고, 번성하고, 안정되는 법을 논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경영학과 정치학을 아우른 통치술이지요. 조직 위계에서 아래 쪽에 있는 분들, 갑을관계에서 을인 분들은 반드시 읽어야죠. 그래야 안 당하죠. 20대 청년들도 사회에 나가기 전에 꼭 읽기를 권합니다. '한비자' 속에는 일화가 많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논어 맹자 등 다른 책과 함께 읽을 때,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책이다. 


# 고전학자 정천구와 그가 말하는 인문학

정천구 박사는 부산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부산 동구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에서 도덕경을,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사상구 사상평생학습관에서 맹자를 강의한다. 이 두 군데에서 강의하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책 쓰고, 노니는 삶을 산다.

그는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하거나 가르치려면 "장기 강의는 필수"라고 잘라 말한다. 그 자신이 강사로서 한비자 84주, 맹자 60주, 중용 36주, 순자 32주를 강의했다. 현재 하고 있는 맹자는 96주 진행했다. 드문 장기 강의이다.

좋은 인문학 강의는 진지하게 이뤄지며, 수강생에게 배우는 재미와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해준다. 정 박사는 이렇게 의견을 밝혔다."적어도 인문학 공부라면 1회성 강의나 특강은 보람과 효과를 느낄 수 없다. 80주에 걸쳐 해야 할 공부를 단 두 시간에 듣는 것은 '나도 안다'는 착각만 조장한다. 공부의 효과는 단숨에 얻을 수 없다. 꾸준히 해야 한다. 그것 말고는 길이 없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인문학의 참맛을 느낀다."


조봉권 | 국제신문 | 2016-04-21

원문 읽기


 

한비자 - 10점
한비 지음, 정천구 옮김/산지니


 

한비자, 제국을 말하다 - 10점
정천구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먹구름 같은 외로움과 삶의 저기압, 날개 없는 삶의 바쁨과 아픔

 

이러다 비행기가 못 가는 게 아닌가. 직업이 직업인지라 비만 오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합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말고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떠나는 사람들」 중

 

중견 소설가 김헌일의 항공소설집 『고도경보』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들은 날씨에 민감하죠. 비행기의 강인한 날개는 과연 중력을 이겨내지만 눈과 비와 바람과 안개의 눈치를 살펴야만 합니다. 이착륙이 순조롭지 못할 때 생기는 분노와 불안, 원망은 제일 먼저 소설 속 주인공들을 붙잡아 상황을 해결하고 보상하라고 등을 떠밉니다. 그러나 기상은 불가항력, 고군분투한들 그들 역시 비행기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이 이럴진대 “항공사의 직원이 된 후 비와 바람을 그리고 눈을 싫어하게” 된 남자는 “비가 내리는 날 어디 한적한 바닷가라도 가서 와인이라도 한 잔 했으면” 하는 아내에게 화를 내기 마련입니다. 아내의 낭만이 곧 남편의 적인 이 소통 불가의 상황은 먹구름 같은 외로움이 되는데, 이러한 삶의 저기압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인간은 여행을 통하여 태어난다

「붉은 띠」를 제외하면 『고도경보』 속 주인공은 모두 항공사에서 일합니다. 「지상의 낙원, 오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다차인, 「기도」의 승원, 「불꽃」의 진호는 비행기를 운항하는 기장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더 있어요. 다차인의 아내는 집을 나갔고 승원의 아내는 바다로 걸어 들어갔으며 진호는 아내를 두고 비행공포증을 지닌 승객과 잤습니다. 가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이들은 비행기에서 내려 돌아가기 위해 애를 씁니다. 태풍에 비행기가 떠밀리고, 계기가 고장 나고, 연료가 새고 있어도 그들은 무사히 착륙해야 합니다. 물론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장의 사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나비 속에서」의 치호와 「떠나는 사람들」의 현수는 항공사 직원입니다.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제시간에 뜨지 못하는 비행기입니다. 혼자 책임져야 할 것이 무려 하늘이 저지른 잘못이기 때문이지요.

 

만약 비행기가 장시간 지연되거나 결항이라도 되면 큰일이었다. 오늘은 나 혼자뿐이었다. 승객은 이백오십 명이 넘었다. 방콕에 있는 본사와 상의해서 새로운 스케줄을 결정해야 하고, 탑승객들이 쉴 호텔방을 잡아야 하고, 버스를 동원해서 실어 날라야 하고…… 더구나 방금 잡은 현행범을 문초하는 듯 매서운 승객들의 눈초리를 감당해내야 했다. 혼자서, 도대체 혼자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이 저지른 잘못을 나 혼자서 몽땅 책임지는 꼴이었다. 이놈의 회사는 왜 직원을 안 뽑아주는 거야! —「떠나는 사람들」 중

 

하지만 ‘잘못’을 하는 것은 하늘만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문제가 땅에 없을 리 없지요. 치호의 아내는 이혼을 원하고, 현수는 국제 미아가 될 위기에 처한 승객을 무사히 귀국하게 하기 위해 그녀의 가족을 찾아 나섭니다.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 「붉은 띠」는 9월 11일 미국의 한 비행기를 다루었습니다. 건물 어딘가에 충돌할 운명을 지닌 네 번째 비행기 안에는 석우가 타고 있습니다. 술집을 전전하던 여동생이 팔려갔다는 소문을 들어도 아무도 찾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내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와 눌러앉은 그는 연을 끊다시피 한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듣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비행기는 곧 아랍 테러범들에게 점거됩니다. 충격과 공포 속에서 석우가 목격한 것은 전화통이 쉴 새 없는 사랑 고백이에요. 재난 속에서 이 마지막 비행은 과연 어디로 향할까요.


창공에 뜬 고독한 인생들이 전하는 메시지


소설집 제목인 ‘고도경보’는 비행기가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는 고도를 벗어났을 때 울리는 경고음이자 창공에 뜬 고독한 인생들이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여권의 낯선 감촉, 출국심사를 받을 때의 두근거림, 면세점의 화려한 상품, 스튜어디스의 상냥한 웃음, 나를 기다릴 타국 혹은 고국의 누군가를 우리는 공항에서 쉽게 접합니다. 그러나 비행의 세계는 대합실에서 바라본 게이트 너머의 풍경처럼 아득합니다. 30여 년간 항공사에서 일한 작가의 경험이 농축된 『고도경보』는 독자를 대합실에서 출국장으로, 비행기로, 조종실로, 보이지 않게 우리와 날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으로 안내합니다.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고 돌아오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업인 사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날개를 매일 들어 올리는 사람, 돌아오기 위해 떠나며 내려앉기 위해 떠오르는 사람들이 책장을 넘기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 비행이란 무엇인가요.

 

 

 

 


저자 : 김헌일
단편 「어머니의 성」으로 1986년 부산MBC 신인문예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1997년 중편 「회색강」으로 제2회 한국소설 신인상을, 첫 번째 항공소설 단편 「티티야를 위하여」로 2005년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중편소설집 『회색강』이 있다.

 

차례
지상의 낙원, 오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도
불꽃
나비 속에서
떠나는 사람들
붉은 띠

작가의 말

 

 

『고도경보
김헌일 소설집

김헌일 지음 | 문학 | 국판 변형 | 240쪽 | 13,000원
2014년 12월 19일 출간 | ISBN :978-89-6545-275-1 03810

'공중사회'를 해부하는 본격 항공소설집. 30여 년간 항공사에서 근무한 작가경력이 허공에 뜬 고독한 인생들의 메시지를 풍부하게 바꾼다.

  

 

 

 

 

 

고도경보 - 10점
김헌일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