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씨앗>은 창비에서 운영하는 국내 유일의 독서 문화 플랫폼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2019 <책씨앗> 청소년 추천도서목록'은 현직 선생님이 검토해 믿을 수 있는 청소년 추천도서를 소개합니다. 여기에 산지니 도서가 (무려 10권이!) 소개 되었습니다!


 

 

 

어떤 분야에 어떤 도서가 소개되었을까요?

 

함께 보시죠!

 

 

 

 

 

 

영화의상은 배우의 특별한 역할을 위해 존재하므로 영화의 장면이 바뀔 때 관객들은 배우의 의상만으로도 스토리의 전개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10개 주제로 나누어 37편의 영화 속 의상들이 어떻게 영화의 스토리와 인물의 감정 변화를 나타내는지 알려준다.

 

 

 

 

저자가 우리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담은 인터뷰 모음집이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42인을 만난 내용이 담겨 있다. 자신의 일에 전념해 한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장인들,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기업인, 이웃과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 등 살아가는 방식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두가 자신의 삶을 성실히 가꾼 사람들이다. 독자들은 그들의 열정과 노력이 담긴 이야기를 통해 삶의 태도와 지혜를 배우게 될 것이다.

 

 

 

 

 

 

세상의 온갖 권력과 권세를 흡수하던 그곳, 상암리 고향 집. 가문의 모순을 깨달은 후손이 선택한 길에서 이 집의 운명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남겨질 유산은 무엇일까? 작가 박정선은 소설 속에서 상징적 소재들을 활용해 친일 청산 문제의 본질이 이제는 우리 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사회적 메세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왜성은 임진왜란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블랙박스다. 왜성은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던 부산을 중심으로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분포해 있으며 일본에게도 보기 힘든 일본 성곽의 고유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성은 일본의 침략을 대변하는 유적으로 인식돼 홀대를 받아왔다. 이 책에서는 31개의 왜성을 취재하고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420여 년 전의 임진왜란, 왜성을 통해 그 역사를 알아본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임시정부와 유일하게 연락하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27년간 고군분투했던 큰 거목이었지만, 최근에까지 우리에게는 잊혔던 이름, 서영해!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주불 특파위원으로 고려통신사를 설립하여 일본의 한반도 침략상을 전 유럽에 알리고 한국에 대한 참모습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묻혀 있던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삶을 국내 최초로 담아냈다.

 

 

 

 

 

 

2년간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하나원 내 청소년 학교에서 파견교사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탈북 청소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남한사회에서 북한출신자들이 겪는 또 다른 문제들에 주목하게 됐다. 단순 정착을 넘어 사회, 경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나갈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해 고민했다. 이 소설은 작가의 그러한 관찰과 고민의 결실이다.

 

 

 

 

 

 

2017년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 50주년을 맞이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이하 국시모) 윤주옥 실행위원장이 자신의 경험을 오랜 시간에 걸쳐 정리한 국립공원에 대한 보고서이자 연서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지리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틋함과 개발에 신음하는 국립공원을 향한 분투를 담백한 문체로 드러낸다.

 

 

 

 

계절이 사라지고 있다 봄과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여름은 아주 길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워지고 있다. 놀라운 건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혁명 이전보다 겨우 1℃정도 더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2015년에서야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 대부분의 국가가 지구의 평균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이내로 제한하기로 합의 했다. 이 책은 인류가 함께 지속가능한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렵더라도 2℃ 목표 달성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인구가 줄어든다며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입양은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실제로 벨기에 입양인 친구들을 만나면서 이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표제작「우리들 킴」을 비롯해「엄마들」, 「해변의 여인」등의 작품을 통하여 입양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끊어진 관계를 둘러싼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만날 수 있다.

 

 

 

 

 

세계 전역에서 일어난 다양한 시위 현장을 일곱 가지 주제로 묶어 소개한다. 특히 각 시위 현장을 담은 79개의 사진은 짤막한 글만으로는 그려보기 힘든 '변화를 위한 창의적인 행동'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독자들은 시위 정황과 함께 언론인이었던 저자의 경험과 의견을 읽으며 생각을 키울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변화를 촉구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의 감정과 표현, 그 요구와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보고 듣게 될 것이다.

 

 

 

패션, 영화를 스타일링하다 - 10점
진경옥 지음/산지니

 

사람이 희망이다 - 10점
손정호 지음/산지니

 

유산 - 10점
박정선 지음/산지니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 10점
정상천 지음/산지니

 

생각하는 사람들 - 10점
정영선 지음/산지니

 

지리산 아! 사람아 - 10점
윤주옥 지음/산지니

 

2℃ - 10점
김옥현 지음/산지니

 

우리들, 킴 - 10점
황은덕 지음/산지니

 

거리 민주주의 - 10점
스티브 크로셔 지음, 문혜림 옮김/산지니

 

 

책 주문하기 >> https://goo.gl/cUJW3o

*산지니 출판사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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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지난 9월 22일 금요일 저녁 7시, 부산콘텐츠코리아랩 금정센터에서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의 저자인 신동명 작가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어보지 못한 저로선(ㅠㅠ) 왜성이라기에 건축적인 이야기가 나오는걸까?

성벽과 터만 겨우 남았을 성이 왜 블랙박스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강연을 들었습니다.




강연을 듣고 있으니 교과서에서 얼마나 얕게 역사를 배웠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7년중 반절 이상을 협상으로 인한 대치만 했고

왜군뿐만아니라 명나라, 그리고 자국인 조선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이 

어마어마 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왜성같은 전쟁과 수탈의 흔적을 왜 돈을 써서 보존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긴 전리품이라는 말과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왜성은 일본에 있는 성의 원형이며 국제적 관광물이 될 수 있다는

얘기에 역시 감정에 사로잡혀 편협하게 보면 안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진자료를 보고 어디인지 척척 대답해주셔서 작가님과 산지니 식구들을

놀라게 했던 독자님들, 그리고 좋은 강연 해주신 신동명 작가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산지니의 남은 2017년 인문학당 강연인

 11월 3일(금) 7시, 윤주옥 작가님의 <뭇 생명의 삶터 국립공원> 강연도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Posted by 좀B

[취재후기] <왜성 재발견>후일담


EP.2 간절곶엔 포켓몬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요즘 포켓몬 모바일 게임 때문에 더 유명해진 울산 울주군 서생면 간절곶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하해수욕장이 있다. 부산 해운대나 광안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해수욕장이지만 회야강 하구와 연결된 주변 경관이 참 ‘이쁜’ 곳이다. 이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마을 서쪽 야산으로 조금만 오르면 서생포 왜성을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에 쳐들어왔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성이다.

 

▲ 서생포 왜성,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의 표지 사진이기도 하지요.

 

 

  1990년대 초에 기사 취재 때문에 처음 이 서생포 왜성을 찾아보고 받았던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성벽의 보존 상태나 규모도 그랬지만 세 곳으로 구획된 각 성곽의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ㄱ 또는 ㄴ 자 형태로 꺾이도록 쌓은 출입구 구조와 사선 또는 포물선 형태를 한 성벽 모서리의 선형을 보고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 왜성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을 찾아가면 서생포 수군만호진성 터가 나온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 수군이 주둔했던 성인데 왜란 때 파괴돼 지금은 일부 구간에 성벽 밑부분인 기단석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왜란 때 이 성을 점령한 가토의 왜군이 이 성의 성벽을 헐어낸 뒤 그 돌을 옮겨다 서생포 왜성을 쌓았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의 이 전통 수군 진성은 복구되지 않았다. 대신 조선 수군은 왜군이 이 성을 허물고 쌓았던 서생포 왜성을 진성으로 사용했다.  진하해수욕장 이름도 ‘진성 아래에 있다’(鎭下)는 뜻에서 불려진 것이다.


 

  서생포 왜성과 관련한 이러한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면서 더욱 이 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울산에 이 곳 말고 가토의 부장이 쌓은 왜성(울산왜성)이 하나 더 있고 부산과 경남 일대에도 왜성이 여러 곳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울산 왜성

 

  ‘왜성 재발견’ 취재는 바로 이렇게 부산 울산 경남지역에 남아 있는 왜성들을 찾아 이들과 관련한 임진왜란사를 재조명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부산 울산 경남에서 취재활동을 하고 있는 한겨레 후배기자들과 뜻이 맞은 데다 마침 부산박물관에 왜성 전문가(나동욱 박사)까지 선뜻 나서줘 취재는 전반적으로 큰 무리 없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하지만 30여개에 이르는 전체 왜성을 10차례로 나눠 함께 답사하다 보니 하루에 3~4개 성을 훑어가는 식으로 취재할 밖에 없었던 한계도 있었다. 필자가 직접 집필을 맡았던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 기장 죽성리와 임랑포 왜성은 모두 하루만에 답사를 끝낸 곳이다. 결국 기사를 제대로 쓰기 위해선 전문가와 기자들이 함께 한 기본답사 외에 필자 개인의 별도답사와 보충취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막상 신문에 기사가 나온 뒤에도 그랬지만 이를 보완해 책으로 낸 뒤에도 여전히 내용이 미진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다.


  특히 각 왜성의 특성과 이에 얽힌 임진왜란 역사 및 사연을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 왜성을 어떻게 찾아가서 무엇을 봐야 할지에 대한 정보 제공에 너무 소홀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부산과 근교에 있는 왜성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충분히 주변의 관광지나 유적지 명승 등과 함께 둘러볼 만한 곳이 많다.

 

  기장 죽성리 왜성은 시내버스를 이용해 기장 청강리 사거리에 내린 뒤 기장문화원과 남산봉수대를 거쳐 가벼운 산행을 하며 찾아갈 수 있다. 기장문화원과 죽성리 왜성 근처 소름요 도자기 공방에선 임진왜란이 왜 일본에서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유물과 흔적을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 기장 죽성리 왜성

 

  양산 증산리 왜성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증산역에 내린 뒤 걸어서 1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증산공원에 있다. 증산공원 산책길을 한바퀴 돌며 왜성 터도 살펴보고 정수장 쪽으로 하산하면 물금역으로 갈 수 있다. 물금역에선 기차가 아니더라도 부산 덕천동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가 있고 근처 용화사와 임경대와 같은 관광지도 둘러 볼 수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왜성과 주변 볼거리를 찾아 보고 즐길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는 글을 써보고 싶다.

 

글 | 신동명 기자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저자 3인방

   (왼쪽부터) 김영동 기자, 신동명기자, 최상원 기자


  *본 후기는 저자가 직접 실제 '왜성' 취재 이야기를

   작성해주셨습니다.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 언론스크랩 

<한겨레21> 『왜성 재발견』 신간 소개 -  http://goo.gl/WMHtPY

<한겨레> 왜성은 치욕의 물증 아닌 전리품이다 - http://goo.gl/6RitYW

<연합뉴스> [신간들춰보기] 『왜성 재발견』 - http://goo.gl/etKqfK

<전남일보>왜성,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 - http://goo.gl/LtTSOH

<경상일보> 왜성 31곳 발로 뛰며 확인한 임진왜란의 전리품 - http://goo.gl/eBXtWw

 


Posted by 비회원

[취재후기] <왜성 재발견>후일담


EP.1 왜성이 뭐예요? 뭐 뭐예요?



“왜성이요?”


“예. 왜성이요.”


“근데, 왜성이 뭔데요?”


왜성을 취재하며 취재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성이 뭔데요?”라는 질문이다.

왜성을 취재하며 왜성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만 하는 답답함이란….

심지어 왜성 관리를 책임지는 지방자치단체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왜성이 뭔데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는 황당함을 넘어 버럭 화가 치밀기도 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용마산에 있는 마산왜성을 취재할 때다. 현재 마산왜성은 산호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기본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마산합포구청 누리집(masanhp.changwon.go.kr)에 들어갔더니 ‘산호공원은 일명 용마산성이라 불리며 선조 25년(1572년)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착공하여 선조 30년에 완공했다’라고 되어 있었다.


'엉? 이게 무슨 소리야?'


조선의 선조 임금은 1567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1572년이 선조 25년이라고? 선조 25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이니, 1592년을 1572년으로 잘못 적었나보다. 그런데 선조 임금이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고? 선조 25년부터 30년까지는 임진왜란이 한창 벌어질 때인데, 그 시기에 어떻게 왜군 점령지역에 성을 쌓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군이 이곳에 쌓은 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지?


▲ 마산왜성


마산합포구청 누리집은 ‘마산왜성’에 대해선 아무런 소개를 하지 않고, 대신 전혀 앞뒤 맞지 않는 ‘용마산성’을 언급하고 있었다. 누리집에 안내된 번호로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호공원에 대한 누리집 설명이 조금 잘못된 것 같아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인데, 그걸 왜구를 막으려고 조선이 쌓은 성으로 소개하고 있고, 쌓은 시기도 잘못된 것 같네요.”


“뭐라구요? 왜성이요?”


“예. 왜성이요.”


“근데, 왜성이 뭔데요?”


담당 공무원은 기자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왜성’이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는 오래전에 배운 것이라 외우지 못한다고 했다. 누리집에 소개된 내용은 예전부터 그렇게 되어 있던 것이라 출처를 모른다고 했다.


“내용을 확인해보시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보름가량 지나 마산왜성을 소개하는 ‘마산·고성·남해 왜성’ 기사 작성을 끝낸 뒤, 마산합포구청 누리집에 다시 들어가봤다.


‘산호공원에는 일명 용마산성이라 불리는 과거 성터인 마산왜성이 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마산의 용마산을 군사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축성을 시작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완공한 것이라고 전한다.’


고쳐져 있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최소한 잘못된 것은 바로잡혀 있었다.

왜성 제일 높은 곳에는 천수대가 있었고, 천수각 위에는 왜장이 머물며 전투를 지휘했던 목조건물 천수각이 있었다. 현재 마산왜성 천수대에는 6·25전쟁 전몰군경 2039명의 위패를 모신 위령각이 서있다. 해마다 현충일이면 지역 기관장들이 이곳을 찾아 머리를 숙인다.


이곳이 왜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이런 일이 되풀이해서 일어날까?

왜성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그럼에도 왜성을 허물거나 복원해야 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글 | 최상원 기자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저자 3인방

   (왼쪽부터) 김영동 기자, 신동명기자, 최상원 기자


  *본 후기는 저자가 직접 실제 '왜성' 취재 이야기를

   작성해주셨습니다.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 언론스크랩 

<한겨레21> 『왜성 재발견』 신간 소개 -  http://goo.gl/WMHtPY

<한겨레> 왜성은 치욕의 물증 아닌 전리품이다 - http://goo.gl/6RitYW

<연합뉴스> [신간들춰보기] 『왜성 재발견』 - http://goo.gl/etKqfK

<전남일보>왜성,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 - http://goo.gl/LtTSOH

<경상일보> 왜성 31곳 발로 뛰며 확인한 임진왜란의 전리품 - http://goo.gl/eBXtWw


 



Posted by 비회원

 

편견의 역사를 바로잡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현장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역사상에는 기쁨의 역사와 슬픔의 역사가 공존한다. 희비(喜悲)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재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도려낸 단정의 역사, 망각의 역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희망의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

  왜성은 임진왜란이라는 420여 년 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블랙박스다.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전남 여수까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분포해 있으며 이제는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일본 고유 양식 성곽의 원형이 남아 있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성은 임진왜란의 침략을 대변하는 유적으로 인식돼 홀대를 받아왔다. 이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은 31개의 왜성 전체를 취재하여, 임진왜란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책에서만 볼 수 있는 420여 년 전의 임진왜란, 왜성을 통해 역사가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을 깨워본다.

 

 

 왜성에 대한 오해와 진실

왜성, 어디까지 알고 있니?

 

  조선에 침략한 직후부터 부산에 전진기지 구실을 할 성을 쌓기 시작했던 왜군은 1593년 남쪽으로 후퇴한 이후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진행하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았다. 1597년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은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확보하기 위해 울산, 경남, 전남 등에 추가로 성을 쌓았다.

 

_ '들어가며' 중에서 (p.13)

 

  임진왜란 7년 동안 왜군은 울산에서 전남 순천까지 동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았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왜성은 부산 11개, 울산 2개, 경남 17개, 전남 1개 등 모두 31개이다. 왜군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설치한 군사시설은 훨씬 많지만, 관련 학계가 성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 31개의 성이 전부이다.

  ‘왜성’이라는 명칭은 왜군이 쌓은 성이라 하여 명명된 것으로, 대부분 강이나 바다 근처의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독립된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왜성은 조선의 읍성과는 달리 겹겹이 둘러친 성곽을 바깥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뚫어야 하는 구조로, 방어하기에 좋은 성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동안 조·명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왜성을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왜성은 존재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정적 인식을 주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만든 성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 치욕의 상징물이 인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군이 왜 왜성을 쌓았는지 그 역사적 사실에 다가가면 그 인식은 바뀌게 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이듬해부터 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은 것은 성에 의지해 조·명 연합군의 공격 등에 최대한 버티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안전하게 철수하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성은 치욕의 상징물이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난을 극복한 우리 조상이 자손들에게 당당히 물려준 전리품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p.14)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자 국난을 극복한 조상들의 당당한 전리품, 왜성. 이제 왜성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거두고, 새로운 역사 인식의 주춧돌을 놓을 필요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왜성을 사라지게 만들어…

 

  왜성은 16세기 말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이라는 한·중·일 동북아 3국간의 7년 국제전이 남긴 특수한 산물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성 전투에서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왜성을 통해 현장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를 겪은 국민들 사이엔 왜성을 ‘조선이 침략해 쌓은 부끄러운 역사의 상징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만연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삶의 터전 가까이에 있는 왜성을 방치하게 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왜성이라는 존재조차 잊게 했다. 즉,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사람들에게 왜성의 존재를 지우게 한 것이다.

 

  박문구왜성은 용두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용미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부산항 매립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현재 용미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다. (…) 추목도왜성과 박문구왜성의 위치는 여전히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개발 등에 휘말려 왜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들어선 건물 때문에 왜성 터로 추정되는 땅을 파헤쳐 조사할 수도 없다. 그렇게 왜성은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_ P.29

 

부산 박문구왜성 외 몇몇 왜성들은 관공서 건물과 지하철 기지창 건설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문화재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개발과 맞물려 왜성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왜성은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어 우리 역사에 있어 미아가 될 뻔한 적이 있으며, ‘허물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주장이 일 때도 있었다. 다행히 현재는 지방기념물로서 타 문화재와 동등하게 보호받고 있으나 아직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일반인들의 부정적 인식은 여전하다.

 

 

왜성을 통해 우리 역사의 아픈 과거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다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동래읍성 주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방어시설 ‘해자(垓字)’가 발견된 것이다. (…) 이렇듯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스러져간 조선 백성들의 주검이 동래읍성 해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우리 역사에서 잊혀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조선 백성들이 420여 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_ p.33~34

 

  부산도시철도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나온 81명의 유골, 성벽돌 없이 윤곽만 남아 있는 옛 동래읍성과 동래왜성, 그리고 전쟁 이후 쌓은 새 동래읍성 등은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증거물이자, 동시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고 이어져 오는 한국사의 증거물인 것이다. 더불어 일반인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왜성은 우리네 삶 속에서 자연스레 익힐 수 있는 역사 교육의 훌륭한 교재가 되기도 하고, 나아가 국제적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크다.

 

  왜성은 16세기 한・일 관계사의 규명되지 않은 역사적 비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게다가 왜성은 일반인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 이에 우리 가까이에 있는 왜성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_ ‘책을 펴내며’ 중에서 (P.5)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왜성에 대한 취재를 시작한 것에 대해 저자는 “우리의 입장에서 왜성을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었다”고 전한다. 더불어 “ 편견의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역사 인식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한반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왜성은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다. 우리 역사의 증거물인 왜성을 통해 선조들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하고 반성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지은이 :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 차례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지음  | 신국판 | 15,000원 | 978-89-6545-360-4 03910 | 2016년 7월 15

 

왜성은 임진왜란이라는 420여 년 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블랙박스다.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전남 여수까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분포해 있으며 이제는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일본 고유 양식 성곽의 원형이 남아 있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성은 임진왜란의 침략을 대변하는 유적으로 인식돼 홀대를 받아왔다. 이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은 31개의 왜성 전체를 취재하여, 임진왜란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책에서만 볼 수 있는 420여 년 전의 임진왜란, 왜성을 통해 역사가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을 깨워본다.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 신문스크랩 >> 420년전 역사 고스란히 간직한 '왜성의 재발견'(울산신문) 

 

+ [출간 전 미리보기] 사전답사 - 왜성 재발견 >> http://goo.gl/0HAr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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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5화 :: 왜군, 진해에 수군기지를 건설하다

-진해 웅천, 안골, 명동, 자마 왜성


 

 

  진해는 한·일 교류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전쟁 기간 내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격전지였다. 서해로 진출하려는 왜군이나, 왜군 본거지인 부산을 되찾으려는 조선 수군이나 진해 앞바다를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592년 5월7일 거제 옥포에서 벌인 첫 전투(옥포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달아나는 왜군을 진해 앞바다까지 쫓아가 왜선 5척을 격침(합포해전)시키고 회군했다. 같은 해 7월9일 한산도해전에서 또다시 대승리를 거뒀을 때도 조선 수군은 진해 안골포까지 왜군을 쫓아가 왜선 30척을 불사르고 철수(안골포해전)했다. 조선 수군은 다음해 3월3일부터 4월3일까지 한달 동안 진해에 주둔해 있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7차례나 출격(웅포해전)했다.

 

  고니시를 중심으로 그의 사위이자 쓰시마 도주였던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 여러 장수들은 진해에 웅천왜성, 안골왜성, 명동왜성, 자마왜성 등을 쌓아 조선 수군을 견제했다.

 

■ 왜군 제2거점, 웅천왜성

 

  웅천왜성은 해발 184m 진해 남산 꼭대기에 있다. 성벽 둘레 1250m에 면적 1만7930㎡로, 전체 왜성 가운데 울산 서생포왜성 다음으로 크다. 웅천왜성은 안골포, 마산, 가덕도, 거제도 등과 육로와 해로 모두 연락하기 좋은 위치에 있으며, 일본으로 철수하기에도 좋은 위치이다. 왜군은 이곳을 부산 다음의 제2거점으로 삼았다.

 

 웅천읍성은 세종 16년(1434년)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와 제포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됐다. 하지만 삼포왜란 때는 왜인들에게 함락돼 동문이 불탔고, 임란 때는 왜군에게 함락돼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사용됐다. 성벽 둘레에는 폭 4m가량의 해자가 있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4차례 조사가 이뤄졌는데, 적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박아놓은 나무말뚝(목익)과 들었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나무다리(도개교)가 해자에서 확인됐다. 웅천읍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현재 동문인 견룡문과 주변 성벽이 복원된 상태이다. 경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돼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는 웅천왜성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페인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웅천왜성에 초청하기도 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27일 부산에 상륙해 다음날 웅천왜성에 와서 1595년 6월 초순까지 1년6개월가량 머물며 웅천왜성과 주변 왜성에 있던 왜군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 집전과 교리 강론을 하고 이교도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사목활동을 폈다.

 

 세스페데스 신부도 웅천왜성에 도착한 직후 일본의 포르투갈인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에게 보낸 편지에서 “웅천성은 난공불락으로 조만간 거대한 성벽과 망루와 치성을 가진 대단한 공사가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 근처에는 아우구스티뉴(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 휘하의 모든 중신과 병사, 동맹자, 종속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매우 잘 지은 넓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저택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라고 웅천왜성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소개했다.

 

 하지만 성의 웅장함과 달리 웅천왜성에 주둔해 있던 왜군의 처지는 매우 곤궁했다. 조선 수군이 남해안 제해권을 철저히 틀어쥐고 있어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사실상 조선 수군과의 맞대결을 포기하고, 성에 틀어박혀 농성전으로 버텼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세스페데스 신부는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에게 두번째 보낸 편지에서 “굶주림, 추위, 질병 등 일본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 가톨릭교도들의 고난은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관백 전하(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식량을 보내준다 해도 이곳에 도착하는 양은 실로 보잘 것 없어서, 전군을 먹여 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일본에서 지원은 이미 중단된 지 오래이며, 최근 2개월 동안은 도착한 배도 없습니다”라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 왜군 해군기지, 안골왜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웅천왜성을 쌓을 때,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등은 해발 100m의 동망산 꼭대기에 안골왜성을 쌓았다.이들은 왜군 수군을 대표하는 장수들로, 해전에서 거듭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조선 수군을 막기 위한 수군 기지로 삼기 위해 안골왜성을 쌓은 것이다.

 

  왜군은 안골왜성을 쌓을 때 인근에 있던 조선 수군기지인 안골포진성의 성벽 돌을 가져다 썼다. 안골포진성 서쪽 성벽 일부는 아예 안골왜성의 성벽으로 이용됐다. 안골포진성은 성종 21년(1490년) 건설됐다. 앞서 이곳엔 세조 8년(1462년) 김해 가망산에 있던 만호진이 옮겨와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임란 때 제포진성처럼 왜군에 함락됐다.

 

  안골왜성은 웅동만을 사이에 두고 웅천왜성과 마주보며, 부산의 길목인 가덕수로를 지키는 구실을 했다. 현재 가덕수로는 부산신항 건설로 매립돼 대부분 메워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안골왜성을 고적 ‘웅천안골리성’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현재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돼 있다.

 

 

  명동왜성은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1593년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가 진해 명동마을 주변 구릉에 쌓고, 소 요시토시가 주둔했다. 마쓰우라는 일본 규슈지역에 있던 히라도번의 번주로, 고니시가 사령관으로 있던 왜군 제1군에 소속돼 있었다.

 명동왜성은 진해만 동쪽과 거제만 북쪽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크게 4개의 성곽으로 이뤄져 있다. 명동마을 앞 바다에 접한 나지막한 구릉에 성곽이 하나 있고, 명동마을 뒷산인 성실봉 꼭대기에 또 성곽이 하나 있다. 성실봉 꼭대기 부근에 외성으로 추정되는 성곽이 2개 더 있다. 명동마을 앞 구릉에 있는 성곽과 성실봉 꼭대기에 있는 성곽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축성됐는지 명확하지 않으며, 어느 성곽이 주 성곽인지도 불명확하다.

 

 

  웅천왜성의 또다른 지성인 자마왜성은 와성만 북쪽 해발 240.7m인 자마산 꼭대기에 세워졌다. 애초 이곳엔 삼국시대 때부터 산성이 있었는데, 소 요시토시가 기존 산성을 일부 고쳐 왜성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거진 숲에 파묻혀 성곽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태이지만, 산 위에서는 지금도 조선식 돌담이 발견된다. 자마왜성 터에서는 바다는 물론 웅천읍성 지역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6월 출간 예정 << 

 

곧 출간되는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을 통해

더 자세한 왜성 이야기와 사전답사로 둘러보지 못한 왜성들을 만나보세요!

 

 

*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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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4화 :: 왜장 가토, 우물 없는 ‘철옹성’에 갇히다

-울산왜성

 


 

 

 

■ ‘독 안의 쥐’를 놓치다

 

  “여러 적 중에 청정(淸正·가토 기요마사)이 가장 강하니 청정을 격파한다면 나머지 적은 셀 것도 못 되오이다.”

 

  임진왜란 6년째 정유재란이 터지던 해인 1597년 음력 섣달 그믐날, 조선 국왕 선조는 조선에 파견된 명군 최고지휘관인 군문 형개(邢玠)를 만나 조·명 연합군의 울산전투 승전 상황을 축하하면서 “곧 가토를 사로잡게 됐다”는 형개의 말에 고무돼 이렇게 답했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설 쇠고 9일째 되는 날 선조는 이미 닷새 전 조·명 연합군이 왜군에 대한 포위를 풀고 경주로 후퇴했다는 ‘허무한’ 보고를 받아야 했다.

 

  이 울산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왜란 끝무렵인 1598년 9월 육군 3로군에 수군까지 합해 ‘사로병진’ 작전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울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순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사천 등 3곳의 왜군 본거지에 총공세를 펴기 9달 전 먼저 울산을 전략적인 공격목표로 삼아 집중공격함으로써 벌어졌다.

 

  1597년 12월23일 새벽부터 이듬해 1월4일까지 12일 동안 명군 4만여명과 조선군 1만여명 등 5만여명의 연합군과 울산왜성 일대 왜군 1만여명 사이에 치열하게 펼쳐졌다. 뒤에 출동한 6만여 왜군 구원병력까지 치면 조·명·일 3국의 12만 대군이 12일에 걸쳐 벌인 왜란 기간 최대 규모 전투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는 도원수 권율이, 명군 및 연합군 총지휘는 명군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가 맡았다. 왜군은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했다.1597년 9월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 정유재란 이후 왜군의 승기를 꺾은 명과 조선은 다시 동남해안으로 쫓겨 수세에 몰린 왜군에 대한 막바지 총공세를 준비하면서 울산을 전략적인 우선 공격목표로 잡은 것이다. 왜군의 핵심 배후거점인 경상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조·명 연합군은 먼저 12월22일 언양과 태화강 하류 등 울산 외곽의 수륙 양쪽 길목부터 봉쇄한 뒤 23일 새벽부터 울산왜성을 포위하고 가토를 비롯한 성 안의 왜군 1만여명을 고립시킨 상태에서 이듬해 1월4일까지 대대적인 총공세를 퍼부었다. 가토는 애초 울산왜성에서 남쪽으로 35㎞ 가량 떨어진 자신의 본거지 서생포 왜성에 있다가 조·명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했다는 보고를 받고 23일 밤 뱃길로 태화강 하류에서 조·명군을 피해 울산왜성으로 들어갔다. 수적 열세에 물과 식량까지 바닥난 왜군은 갈증과 허기에다 한겨울 추위마저 겹쳐 극한 상황 속에 궤멸 직전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끝내 울산왜성 내성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산, 김해, 양산 등에서 왜군 구원병력들이 속속 울산으로 출동해 그 수가 6만여명에 이르자 역포위를 우려한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의 포위를 풀고 경주로 물러나고 말았다.

 

  명군이 후퇴하면서 부린 행패 때문에 인근 백성들 피해 또한 컸다. <선조실록>은 당시 명군 장수를 수행했던 접반사의 보고를 통해 “회군하는 군사는 다시 대오를 편성하지 못하고 그 행동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촌락에 들어가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고 부녀자들을 강범하며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 적이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어떤 마을의 노파는 울부짖으며 “굶주림을 참고 쌀을 찧어서 군량을 댄 것은 왜적을 평정하는 날을 기대해서인데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살아갈 길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1598년 9월 사천·순천 왜성과 함께 울산왜성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9월21일 명군 제독 마귀는 2만4000여 군사를 이끌고, 별장 김응서의 5500여 조선군과 함께 먼저 동래를 공격해 부산 쪽 왜군과의 연결을 차단한 뒤, 가토의 1만5000여 왜군이 지키는 울산왜성 공성에 나섰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마귀는 25일 경주로 말머리를 돌렸다가 10월6일 사천에서 명군이 왜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천으로 다시 후퇴했다. 11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따른 본국의 귀환명령을 받고 가토와 휘하의 왜군들이 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난 뒤에야 마귀는 이 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 천수각과 우물이 없던 왜성

 

  울산왜성은 지금의 울산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에 있다. 울산 도심을 가로질러 울산만과 연결되는 태화강과 동천 하류를 끼고 있는 곳이다. 이 성은 왜란 초부터 울산 울주군 서생포에 왜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아온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군의 남하공세에 대응해 동쪽 최전선에 전초 방어요새로 쌓은 것이다.

 

  가토가 설계하고 부장 오다 가쓰요시(太田一吉)가 감독을 맡았으며 1만6000여명을 동원해 1597년 12월 울산왜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40여일 만에 공사를 끝낸 것으로 기록됐다. 축성에 필요한 돌은 가까이 있던 경상좌도병영성과 울산읍성 성벽을 헐어 그 돌을 가져다 썼다.

 

  울산 중구 동·서·남외동 일대에 걸쳐 있는 경상좌도병영성(사적 제320호)은 1417년(태종 17년)부터 1894년(고종 31년)까지 존속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 영성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울산왜성 축성 때문에 파괴됐다가 왜란 뒤 몇차례 보수 및 복원공사가 이뤄졌으며, 현재 북문 터를 중심으로 동·서문 터까지 양쪽으로 성벽이 복원돼 남아 있다. 울산 중구 북정·교동 일대에 있던 울산읍성은 조선 성종 8년(1477년)에 쌓은 울산군수(종4품) 치소가 있던 읍성으로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된 뒤로 현재 성곽이 남아있지 않다.

  울산왜성은 공사를 급히 한데다 축성이 끝나자마자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본곽 안에 여느 왜성에 다 있는 지휘소 건물인 천수각이 없었다. 건물이라면 각 성벽 모서리마다 세운 12개의 전투용 누각과 거주용 막사 정도였다.

  정유재란 때 왜군 장수를 따라 조선에 파견된 뒤 이 왜성의 축성을 지켜봤던 왜군 종군승려 게이넨(慶念)은 일기에 당시 급박했던 축성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른쪽도 왼쪽도 성을 쌓느라 쇠망치소리 도끼질 소리로 잠을 이룰수 없다. 총을 쥔 사람, 깃발 든 사람, 뱃사람 할 것 없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오고 어슬렁거리는 자는 매를 맞고 때로는 적에게 목이 잘리우고…”

 

 

  울산왜성은 독립된 구릉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으로 성을 포위해 고립시키기는 쉬운 반면, 어느 방향에서도 공격로를 찾기 힘든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명군은 전투 초반, 쉽사리 성을 에워싸고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끝내 성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명군 경리 양호를 수행했던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은 보고를 통해 “석축이 깎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위로 쳐다보며 공격해야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 성은 이처럼 외부 공격으로부터는 철옹성 같은 요새였지만 성 안에 우물이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과의 전투 때 성 안에 고립됐던 왜군들이 갈증을 못 견디고 어둠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 물을 찾다가 매복해 있던 별장 김응서의 조선군에게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때문에 가토는 본국에 돌아가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을 때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도록 성 안에 우물 120여개를 파고 실내 다다미를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드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 성은 왜란 이후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됐고 1624년부터 30년간 전함을 건조하는 전선창을 두기도 했다. ‘울산학성’이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때엔 조선 고적 제22호(1935년 5월)로, 해방 뒤엔 국가 사적 제9호(1963년 1월)로 지정됐다가, 1997년 10월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에 따라 ‘울산왜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울산시문화재자료 제7호로 격하됐다.

 

  한삼건 울산대 교수(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는 “원래 학성은 나말·여초 때 우리 옛성인 계변성 또는 신학성을 일컫는 것으로, 울산왜성 북쪽 맞은편 학성산에 있었다. 이곳엔 고려 말·조선 초의 옛 읍성도 있었고, 울산왜성 전투 때 조·명 연합군 지휘부가 주둔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조·명군 지휘부가 있던 학성산엔 2000년 7월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울산지역 의병 239명과 그밖의 다수 무명의 위패를 봉안한 충의사가 세워졌다. 울산왜성은 왜란 당시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성’(甑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공간 구실을 하고 있으나 주변의 급속한 도시개발로 인해 본곽 동쪽 주출입구 주변의 성벽 등을 빼곤 아래쪽 제2곽과 제3곽 석축은 대부분 훼손돼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한삼건 교수는 “제3곽부터 성 아랫부분 석축은 일찌감치 조선시대부터 이미 뽑혀나갔을 것이다. 왜란이 끝난 뒤 경상좌병영성을 보수 또는 복원할 때 왜성 돌을 가져다 썼을 것으로 보인다. 병영성 돌이 왜성으로 갔다가 다시 병영성으로 돌아가기도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 5화에서 계속

 

*본 게시물의 순서와 책의 목차는 상이합니다.

*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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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3화 :: 왜구를 막았던 '신라의성'에 왜성이 들어서다

 -부산 구포·양산·호포 왜성

 


 

 

  시인 김용호(1912~1973)는 그의 대표 장시 <낙동강>에서 “칠백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고 했다. 유구한 세월을 도도히 흘러 남하하면서 반변천·내성천·영강·위천·감천·금호강·황강·남강·밀양강·양산천 등 여러 지천을 품어안고 멀리는 가야와 신라 천년의 영욕에서부터 가까이는 6·25전쟁의 참상과 4대강 사업에 따른 몸살까지 겪으면서 영남인들에게 삶의 젖줄이 돼왔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도 낙동강 수로는 왜군에게 진격, 후퇴, 방어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특히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을 통한 서쪽 진격로가 봉쇄되자 왜군은 낙동강 하류 수로를 통해 서·북쪽 내륙으로 연결되는 길목인 김해, 구포, 양산 등지에 왜성을 쌓고 교두보를 마련하려 했다.

  대표적인 예로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 때 왜군은 부산 동래에 집결한 대규모 병력을 이 수로를 이용해 진주로 실어날랐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도 1592년 7월 한산도·안골포 해전에서 왜 수군을 대파한 뒤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쫓아 이 수로를 따라 김해, 양산, 구포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 신라 장군 의기 서린 ‘의성’(義城)에 들어선 왜성

 

  부산 북구 덕천2동 산93 일대에 있는 구포왜성은 왜군 제6군 수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휘하 장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이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뒤인 1593년 7월 낙동강 수로 확보와 인근 김해·양산지역 왜성과의 연락 및 지원을 위해 쌓은 왜성이다. 금정산 상계봉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지맥이 끝나는 곳의 해발 75.7m와 36.5m 높이 두 구릉에 각각 본성과 외성을 쌓아 연결했으나 1970년대 낙동강교 건설로 단절됐다. 외성은 2005년 북구 문화빙상센터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본성부 2만9548㎡만 보존돼 부산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다.

 

  구포왜성은 상계봉 쪽 능선을 끊어 북동쪽으로 방어망을 치고 서쪽과 북쪽으론 낙동강 수로를 통해 김해와 양산 방향으로 나가고, 동쪽으론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 방향과 연결되는 전략상 요충지에 자리잡았다. 본성은 낙동강과 주변을 잘 관망할 수 있는 정상부에 본곽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한두 단계 아랫쪽 주위까지 모두 5개의 성곽을 두르고, 그 아랫쪽에 다시 4개의 성곽을 배치한 형태다.

 

  본곽 주위 성곽은 60~70도로 비스듬히 쌓은 석축이 8~10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본곽 안에 성의 심장부요 지휘소 격인 천수각 터도 있다. 현재 본곽은 빈 터로 남아 있지만 주위 다른 성곽 터는 대부분 경작지 또는 사찰 터로 편입돼 관리 부실의 우려를 안고 있다.

 

 

 

■ 수륙교통 요지에 남긴 왜성

 

  양산은 조선 전기 경상좌도 남부의 중요 교통 요지로서 11개 속역을 거느린 황산역과 7개 원을 두고 있었다. 황산역은 조선시대 동래에서 한양까지 연결된 간선도로 구실을 했던 영남대로의 중요 거점으로서, 동래를 거쳐 올라온 관리들이 밀양이나 김해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이 됐다.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1 일대의 양산왜성은 바로 이 황산역의 교통로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왜군이 쌓은 성이다. 양산시 동면 가산리 산 56-1 일대에 있던 호포왜성은 양산의 7개 원 가운데 호포원이 섰던 교통의 요지를 이용해 왜군이 거점을 마련했던 곳이다.

 

  양산왜성은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깨지면서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해 일으킨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 왜장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남진하는 조·명연합군으로부터 부산의 본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양산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삼각주의 해발 133m 야산 두 봉우리 가운데 동북쪽의 높은 곳에 본곽을 쌓고 동북쪽으로 길게 부곽을 2개 붙였으며, 서남쪽으로도 능선을 따라 부곽을 5개 정도 길게 연결한 뒤 봉우리 쪽에 별도 중심곽을 배치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본곽 성벽은 4~6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부곽 쪽은 허물어진 곳이 많다. 성벽 둘레는 1.5㎞ 가량 된다.

 

  본곽 동남쪽 아래 산기슭에도 별도 성곽이 남아 있는데 터가 모두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밭 곳곳에서 삼국시대 토기와 조선시대 옹기 파편 등이 발견됐다. 양산왜성은 ‘물금 증산리왜성’이라는 이름으로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로 지정돼 있다.

 

  이 왜성은 뒤에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고쳐 쌓고, 구로다 죠수이(黑田如水)·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자가 주둔했다. 양산왜성이 있는 산은 부산의 증산왜성처럼 꼭대기를 깎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산으로 불린다.

 

  지역 행토사학계에선 이 왜성도 구포왜성처럼 <삼국사기>에 ‘사도성’(沙道城)으로 기록된 삼국시대 성터에 축성한 왜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산왜성과 양산천 및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호포왜성은 현재 철저하게 훼손돼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다. 서쪽 전반부는 35번 국도와 촌락 및 농경지 개설로, 동쪽 후반부는 부산교통공단의 지하철 기지창 건설로 인해 파괴됐다. 호포는 금정산 서쪽 끝자락에 양산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 있던 교통 요지의 나루로서, 조선 전기까지 호포원이 있다 폐원됐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 자리에 왜성을 쌓아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포왜성은 축성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호포원은 당시 양산군에 있던 7개 원의 하나였는데, 이미 북정원과 함께 폐원된 상태였다. 원으로서의 가치가 약화됐거나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 때문에 폐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성은 물론 이에 앞서 호포원과 관련한 유구도 충분히 나올 만한 가능성이 큰 곳인데도 사전에 문화재 발굴조사도 없이 국도나 지하철 기지창 건설 공사가 강행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호포원과 호포왜성은 그 이름과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개발 만능주의와 무지로 인해 소중한 역사문화자산을 잃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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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2화 ::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었다?! -부산 기장 죽성리·임랑포 왜성

 


 

 

“멀리 기차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다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갯마을.”

 

  난계 오영수(1909~1979)의 단편소설 <갯마을> 첫머리에서 이렇게 묘사한, 소설의 실제 배경이 된 마을은 부산 기장군 일광면 학리 또는 이을포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마을들과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이웃한 곳에 각각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와 장안읍 임랑포 마을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도시문명과는 거리를 둔 한적하고 외진, 그래서 더욱 평화로운 해안 포구죠.

 

  420여년 이런 마을에도 임진왜란의 광풍은 그냥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1592년 음력 4월 보름 부산 동래읍성을 함락한 왜군은 세 길로 나눠 북상하면서 이튿날 동쪽으로 기장을 거쳐 울산, 경주 등을 가차 없이 짓밟고 올라갔죠. 이후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반격에다 조선 수군의 해상로 봉쇄 및 의병 봉기 등에 따른 배후 보급로 차단으로 수세에 몰리자 이듬해 4월부터 한강 이남으로 물러나 동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습니다. 이즈음 이곳 죽성리와 임랑포 마을에도 왜성을 남기게 됩니다.

 

■ 무명 조선 도공의 넋을 기리다

 

무명도공추모비(송중환 소름요 대표 제공) 

 

  죽성리 왜성 인근 서답골 또는 세답골이라 불리는 골짜기 한켠에 ‘소름요’라는 도자기 공방이 있다. 공방에서 해안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가마터 쪽으로 가면 ‘무명도공추모비’라고 새긴 비석이 서있다. 송중환 소름요 대표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 도공과 사기장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04년 5월 사비를 들여 세운 것이다. 송 대표는 이후 지역의 관심 있는 이들을 모아 조선사기장연구회를 만들고, 회원들과 함께 해마다 이 비석 앞에 차와 꽃을 올리는 추모제를 열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부터 일본에선 차 마시는 풍습과 다도가 유행했다. 당시 100여년 동안 지속됐던 일본 전국시대의 내전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휘하에 복속시킨 영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 영토 확장의 야욕을 실현하려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일으킨 와중에도 나고야 진중에서 자주 다회를 열어 즐겼다고 한다. 이에 조선에 파병된 영주와 장수들은 조선 각지에서 수많은 도공과 사기장들을 경쟁적으로 붙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도자기 파편

 

 

  황구 기장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기장지역은 오래 전부터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장인과 흙, 물, 가마 등 조건을 모두 갖춘 대표적인 생산지라고 한다. 황 소장은 “2000년대 초 기장군 장안읍 임랑포 바닷가에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깨진 조각을 200여점 가량 수습한 적이 있다. 아마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도공들을 납치해가면서 도자기들도 함께 약탈해가다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사기장과 도공 등 포로들을 일본에 끌고간 왜군 영주와 장수들은 이들을 주로 자신의 고향에 강제이주시켜 평생 도자기를 구우며 살도록 했는데, 관련 기록이 주요 영주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문서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죽성리 왜성과 임랑포 왜성을 쌓고 주둔했던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는 모두 왜란 중 사기장과 도공들을 숱하게 붙잡아 끌고간 것으로 악명이 높다.

 

  7년 왜란 기간 동안 도공과 사기장 같은 장인 외에도 수많은 조선 민간인이 일본에 끌려갔다.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나 일본 쪽 연구자들은 5만~6만명, 한국 쪽에선 10만~2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를 통해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에게 팔려간 민간인까지 치면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 읍성·진성의 돌을 뽑아 왜성을 쌓다

 

두모포 진성

 

  “진중의 왜인들이 바야흐로 축성 공사를 일으켜 나무를 끌어오고 돌을 실어나르는 왜인이 도로를 메웠으며 옛 (기장)현의 성에서 돌을 반수 이상이나 뽑아내고 또 근처의 암석을 채취해 끊임없이 실어날랐다.”

 

  <선조실록>은 1595년 12월 죽성리 왜성 상황과 관련해 이런 기록도 남겼다. 왜군들이 죽성리 왜성을 증축하면서 조선 읍성과 수군 진성의 돌을 마구 뽑아다 썼던 것이다.

 

  성벽은 주로 화강암을 써서 70도 정도 경사지게 비스듬히 쌓았는데, 외성 일부 구간에서 수직으로 축조된 성벽이 드러나 이곳이 애초 조선 수군의 두모포 진성 남쪽 구간인 것으로 확인됐다. 왜군들이 조선의 진성 일부 구간을 편입시켜 왜성을 축조한 사례다. 왜성과 우리 고유 성곽의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전체적으로 죽성리 왜성은 청강천(신천천)의 자연지형과 해자를 통해 북서쪽의 외곽 방어망을 철저히 하면서 동쪽으로 죽성만 포구를 감싸안은 형태의 해안 요새로 보인다. 또 기존 조선 수군의 거점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그 거점을 파괴하는 이중효과까지 노렸다.

 

  부산 복천박물관은 2002년 도로개설 구간에 포함된 죽성리 왜성 본성 북쪽의 외성 일부분을 발굴조사했다. 여기서 띠 모양의 성곽터(4개)에 ‘스리바치’라는 일본 전국시대 조리기구와 상감청자·백자·도자 파편 등이 출토됐다.

 

■고리원전 이주단지에서 확인된 왜성 유적

 

 ▲ 임랑포 왜성

 

  2001년 중앙문화재연구원은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일대 고리원전 주민 이주단지 예정터에서 발굴조사를 벌여 왜성 성곽터(3개)와 건물을 세우고 구덩이를 파냈던 흔적 등을 기와·도자기 파편 등의 유물과 함께 확인했다. 이 곳은 인근에 있는 고리원전의 추가 건설에 따라 장안읍 효암리 주민 50여가구가 집단 이주한 곳인데, 이주단지 터 조성 전 사전 지표조사에서 왜성 터 유구가 확인돼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임랑포 왜성 외곽부의 성터가 드러난 것이다.

 

  이주단지에 있던 외곽부 성은 고도가 높지 않고 임랑포 앞바다와 접해 있으나 해안 쪽으로 전망이 좋고 비교적 급경사를 이뤄 방어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철도와 도로 건설, 이주단지 조성 등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왜성은 규모는 비교적 작지만 성곽과 해자, 왜성의 본 모습을 알 수 있는 여러 시설물의 기초가 아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하지만 본성 일대조차 문화재나 공원구역 지정 등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방치돼, 대부분이 잡목과 수풀 더미에 묻히고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로 훼손되고 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더 이상 훼손을 막아 왜성 축성사를 이해하는 학술자료로서는 물론 아픈 민족사의 현장이라는 가치로 볼 때도 보존의 필요성은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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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1화 :: 동래읍성의 아픔을 420년만에 발굴하다-부산 동래왜성

 


 

 

위의 사진은 무엇일까요?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입니다. 처참했던 1592년 음력 4월15일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한 유적이죠.

 

  이후 경남문화재연구원은 곧바로 발굴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성곽을 따라 땅을 길게 판 해자에선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과 투구, 환도, 창, 화살촉 등 전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죠.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전쟁의 처참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뼈였습니다. 해자 밑바닥에선 남자 59명, 여자 21명, 어린이 1명 등 모두 81명의 뼈가 발굴됐는데요, 이 가운데 8명의 두개골에선 칼에 베이거나, 활이나 총, 둔기 등에 맞은 흔적이 드러났습니다. 이렇듯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스러져간 조선 백성들의 주검이 동래읍성 해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졌습니다.

 

  그렇게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조선 백성들이 420여년만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 치열했던 동래읍성 전투 그 이후... 병참선 확보, 통치 목적의 동래왜성

 

 

  왜군은 동래읍성을 함락한 뒤 동래읍성 동헌에서 동쪽으로 700여m 떨어진 구릉 꼭대기에 동래왜성을 쌓았다. 임진강·행주대첩·2차 진주성·울산성 전투 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굵직굵직한 싸움에 참전했던 킷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가 이 왜성을 만들어 머물렀다.

  그는 왜군 장수 중에 가장 많은 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와서 부산 증산왜성 등을 쌓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사촌이다. 킷가와는 모리 가문의 선봉대를 맡았는데,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 조선인의 코를 베어가는 왜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킷가와 가문 문서>에는 그가 1597년 9월1일부터 같은달 26일까지 전라도 일대에서 조선군의 코 1만4800여개를 베어갔다고 기록돼 있다. 학계는 조선군의 코가 아니라 아녀자와 노약자 등 조선 백성들의 코를 베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있는 동래읍성의 동장대. 임진왜란 때 왜군은 이곳에 동래왜성의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

 

  강이나 바다 근처 낮은 구릉에 있는 대부분의 왜성과 달리 동래왜성은 내륙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학계는 왜군이 부산의 국방·행정 중심지였던 동래에 병참선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내륙에 동래왜성을 쌓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1446년(세종 28년) 세워진 옛 동래읍성을 파괴해 석재를 조달했다. 조선은 1731년(영조 7년) 옛 동래읍성의 6배 규모로 새 동래읍성을 건설하며 동래왜성 성벽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옛 동래읍성의 돌을 재활용했고, 조선은 새 동래읍성을 쌓으며 동래왜성의 돌을 또다시 재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동래왜성에 석축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동래왜성 2곽 추정 지역을 지나 구릉 꼭대기로 올라가면, 1곽이 나온다.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 조선후기 동래읍성의 동장대가 세워졌다. 해운대, 기장, 구포 등 부산 외곽으로 가는 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동장대 동쪽 비탈엔 30~40m 길이의 해자가 보인다.

  1979년 동장대 복원공사 당시 이곳에서 조선 기와가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일본에 돌아가 세운 구마모토(熊本) 무기시마(麥島)성 천수각에서 같은 제작틀로 만든 기와가 출토됐다. 동래읍성에서 가져간 것을 본보기로 만든 기와를 일본성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충렬사 경내로 들어가 동래구 칠산동 쪽으로 내려가면, 동래사적공원의 구릉을 타고 길게 늘어서 있는 조선후기 동래읍성 복원 성벽이 보인다. 조선후기 동래읍성의 문 가운데 하나인 ‘인생문’도 저 멀리 보일듯 말듯하다.

  인생문이라는 이름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 고개를 통해 도망간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죽은 주검들을 성 밖 묘지로 옮기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인생문은 1731년(영조 7년) 새로 만든 조선후기 동래읍성에 딸린 문으로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다. 임진왜란 때 억울하고 처절했던 조선 백성 사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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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0화-  왜성, 어디까지 알고 있니?

 


 

S#1. 2015년 12월의 산지니 출판사

 

 

대표님 : (신문 한 꾸러미를 주시며) 이 기사 한번 읽어보고 담당 기자님들께 연락해보는 건 어떤가? 왜성 관련 서적도 별로 없는것 같은데... 

 

기획 가뭄에 허덕이고 있던 단디SJ 편집자,

대표님께서 건내주신 한겨레 기사에 눈이 번쩍 뜨이다.

 

 

단디SJ : (혼잣말로)  그동안 왜성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은 성'으로만 알고 있는데...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증명하는 사실상 유일한 역사적 증거물이자, 16세기 말 우리 조상이 절체절명의 국난을 마침내 극복하고 얻은 전리품이구나!

 

인터넷을 통해 그동안 연재된 '왜성' 기획기사를 찾아본다.

 

단디SJ :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왜성을 사라지게 만들었구나.

 

단디SJ는 부산 박문구왜성과 경남 양산시 호포왜성 편을 읽고 있다.

이 왜성은 관공서 건물과 지하철 기지창 건설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문화재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완전히 사라졌다. 나머지 왜성들도 대부분 묘지, 농경지 등으로 활용되면서 빠르게 훼손되고 있다. 멸실 직전의 왜성도 나타났다.

 

S#2. 2015년 크리스마스 이틀 전  

 

 

한 자 한 자 진심을 다해 출간 제의 메일을 쓰는 단디SJ 편집자.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누가 보면 애인한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는 줄 알겠다.

 

S#3. 2015년 12월 30일 (메일 발송 일주일 후)

 

단디SJ 편집자, 보낸메일함을 확인한다.

기자님은 메일을 읽었다. 하지만 답이 없다.

시무룩.

 

 

 

S#4.  2016년 1월 6일 (메일 발송 2주일 후)

 

대표님 : 거, 왜성 관련 해서 연락이 없는가?

단디SJ  : 네... 그러네요.

 

메일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산지니 출판사는 바쁘게 돌아갔다.

중국근현대사상총서를 비롯한 몇 권의 책이 나왔고,

출판사 식구들끼리 신년회를 가졌으며,

연말정산서류를 뗀다고 부산을 떨었다.

 

S#4.  2016년 1월 16일 (메일 발송 20 후)

 

여느때와 다름없이 메일함을 여는 단디SJ 편집자.

어딘가 반가운 메일주소에 오른손의 마우스질이 바빠진다. 클릭클릭!!

 

 

단디SJ : 아~ 메일이 왔어! 왔다고!!

 


 

 

2016년 4월 15일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는

독자 여러분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왜성'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한겨레> 기자 3인방이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31개 왜성을 심층 취재한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출간 전 여러분과 우리 지역의 왜성으로 사전답사를 떠나려고 합니다.

 

매주 금요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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