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사람들의 온전한 따뜻함을 담은 소설,

우리 안에 있는 불안정한 감정을 보듬는 위로

-한경화, 『봄비』

 

 한경화 소설집 『봄비』는 총 여섯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한 편의 소설집으로 묶인 이 소설들 속 인물들은 모두 결핍을 가짐으로써 존재한다.

 

“종점에 살아본 적 있는가, 처자는?”
“종점은 말이지, 목적지의 끝이 아니라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종점에서 살아보면 알거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내리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거든. 나는 종점에 살기 때문에 그런 신경은 쓰지 않고 편하게 차장 밖을 보면서 집으로 온다우.”

13p

 

 「종점」의 주인공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가출하여 고시촌을 전전하다가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와 살림부터 차린 죄책감에 떨며 아이를 지우게 된다. 그녀가 종점미용실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바로 옆 집에 남자와 동거를 하는 스무 살 ‘예슬’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공교롭게도 예슬의 출산을 도운 산부인과 원장은 질환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였으며, 주인공 또한 동거남의 변심과 가출로, 아이를 지운 상처가 있는 여자이다. 소설은 이 세 여자가 빚어내는 갈등과 내면의 은밀한 감정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복덕방 할아버지의 “종점은 목적지의 끝이 아니라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말은 하나의 위로로 다가온다.

 

상우는 화장실로 가서 소변을 보고, 크게 하품을 하며 주방으로 가 커피를 끓였다.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비는 창처럼 곧게 뻗쳐 스치듯 유리를 빗나가고,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창수가 떠올랐다. 집 안에 갇힌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머리 위로 들리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저벅저벅 온몸을 타고 내린다.

43p

 

「봄비」에서는 주인공 상우가 친구 창수의 전화를 받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은 구청 사회복지과에서 근무하는 상우의 시선을 통해 면담 대상자들과의 상담 과정을 보여주며, 비내리는 골목과 담벼락에서, 또 장애인이 된 친구의 삶의 모습을 통해 사회가 잃은 온정을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며 쉽게 잊거나 잃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내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지 맡아 봐.”
여자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코를 킁킁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방 안 가득 비린내가 진동을 하잖아. 비린내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든데, 냄새가 안 나냔 말이야?”

99p

 

「비린내」는 항운노조 사무실에서의 지부장의 공금횡령과 화자의 부정한 금품수령 사건에 대한 비극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화가지망생이었던 주인공은 현실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꿈을 저버리게 된다. 정기적으로 신장투석을 받는 신부전증 환자이기도 한 화자는 허한 마음에 ‘화월장’이라는 창녀촌에 들어가 지갑에 있는 모든 돈을 쓴다. 화자의 몸에 밴 비린내는 “천연향료를 이용해 온몸을 빠득빠득 씻고, 이를 닦을 때 기본적으로 칫솔질을 두 번씩 하고 구강청정제로 헹구어내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그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의 질문에 대한 숱한 의미를 응축하고 있다.

 

“내 남자를 유혹해줘요. 그리고 그 남자를 당신의 남자로 만들어요.”

115p

“보통의 여자들은 떠날 때조차도 남은 남편의 사랑을 갖고 가고 싶어 한다지만 나는 아니에요. 나는 내가 완전히 남편한테서 잊히기를 바라요. 그게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꼭 내 눈으로 그걸 확인하게 해줘요. 내 남편 곁에 내 맘에 드는 여자가 있는 걸 보고 떠나고 싶어요.”

112p

 

 「가려진 시간」과 「달이 머무는 곳」의 중심은  ‘사랑’이다. 「가려진 시간」에서는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여자가 자신의 몸을 파는 여인에게 “내 남편을 유혹해줘요.”라는 부탁을 하는 내용이다. 자신이 남편에게 완전히 잊히는 것이 남편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여인의 적절하지 않은 계획과 그 계획을 행하는 주인공의 행동 이 두 가지 요소는 ‘이상한 사랑’이라는 말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문학평론가 정훈은 “이 소설은 파격적인 소재를 통해 현실에서 금이 간 영역이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달이 머무는 곳」에서는 요리를 가르치는 주인공이 학교 안에서 제자가 남학생과 일탈해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세대 간 관계의 유대에 대해 이야기로, 이 작품에서는 이유불명의 불임으로 인해 남편과 이혼한 주인공이 제자의 ‘겨울달’이 자신의 뱃속으로 차오르는 상상을 통해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주제를 말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누구에게 화를 내고 따져야 할지 몰라 가지 못했고 초라한 내 모습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더더욱 그곳에 가기 싫었다. 휴가 때나 바다가 보고 싶을 때에는 해운대를 가거나 아예 송정을 지나 동쪽으로 더 올라가서 일광이나 진하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160p

 

 「기찻길」은 동해남부선 복선화로 해운대역과 송정역 사이의 기찻길 보존방안이 배경인 소설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달리 변한 송정을 바라보며, 과거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기찻길 주변을 떠올린다. 역무원으로 깃발을 흔드는 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하며, 자신의 속에 밀려온 불덩어리의 존재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떤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저 멀리 파도가 하얗게 밀려오는 것을 보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파도의 하얀 포말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내 속에 밀려온 불덩어리. 그건 다름 아니라 어떤 부끄러움이라는 걸. 기적과 함께 아버지의 그 붉은 깃발이 나에게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준 것이라는 걸. 나는 멀리서 깃발을 흔드는 아버지를 향해 걷는다.

170p

 

 작가는 이 여섯 편의 작품을 통해 무언가에 대한 상실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상실과 결핍에 대해 말하면서도 소설 속 인물들이 모든 걸 잃기만 하게 두지 않는다. 자신의 결핍을 깨닫게 하고, 내밀한 감정을 세심하고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렇게 회복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 「종점」에서는 아이, 「봄비」에서는 온정, 「비린내」에서는 윤리, 「가려진 시간」과 「달이 머무는 곳」에서는 사랑, 「기찻길」에서는 장소 -

 한경화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작가는 이 여섯 편의 이야기를 쓰는 데 칠 년이 걸렸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사 년이 걸렸다고 한다. 나는 오랜 시간 붙들린 글을 빌려 말한다. 서로의 결핍을 껴안고 서로의 온기로 오롯이 따 뜻해지는 이야기에서처럼 우리들의 날들도 그렇게 계속되길 바라며, 또다시 사랑이.

“지금 남자아이와 그런 짓하다 신세 망치면 네 인생이 어떻게 되겠니?”
순간 현이 재빠르게 나를 쏘아보았다.
“사랑하는데 왜 신세 망쳐요?”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구나?”
“왜 반성해요? 난 규를 사랑한단 말이에요. 그게 왜 나빠요?”

178p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linkClass=&barcode=9788965457459 

 

봄비 - 교보문고

한경화 소설 | ▶ 예리한 시선으로 보통의 사람들을 조망하는 한경화의 첫 번째 단편집 2017년 단편소설 「종점」으로 등단한 한경화 소설가의 첫 번째 단편집. 한경화의 시선은 우리 사회에서

www.kyobobook.co.kr

 

 

 

 

Posted by 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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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euk 2022.01.07 14: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두우면서도 파격적인 소설집이네요. 무언가에 대한 사랑의 힘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서평 잘 읽었습니다:)

여러분은 미니북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한 손에 들어오는 아기자기함을 너무 좋아해서

가끔 주변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답니다

 

오늘은 손안에 들어오진 않지만 품 안에는 꼭 들어오는,

따뜻한 잡지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작은 책> 8월 호에

『윤리적 잡년이 소개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포스팅을 통해서 보도록 해요.


우리는 윤리적인 사람들, 윤리적 잡년이다.

『윤

▶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 경시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미국에서 20만 부가 판매된 화제의 스테디셀러로, 사랑과 성에 대한 열린 관계를 탐구하며 전통적인 일부일처제의 한계를 넘어 자유롭고 윤리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가이드를 제시한다. 저자 재닛 하디와 도씨 이스턴은 일부일처제에 대한 신화를 불식시키고 자기 성찰과 솔직한 의사소통에서부터 안전한 섹스를 실천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이고 책임감 있는 다원적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기술을 다룬다.

▶ 파트너에게도 자유를 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개인과 그 파트너들은 경계를 논의하고 존중하며, 갈등을 해결하고 관계를 정의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책은 당신이 누구이든 어떤 관계에 있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해 귀중한 조언을 한다. 

 

 

[『윤리적 잡년』 더 알아보기]

 


 

[<작은책>이란?]

일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는 늘 해왔지만 정작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는 잡지가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일하는 소리만을 전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월간 작은책을 펴내기 시작했습니다.
93년부터 비매품으로 3호까지 부정기로 펴내다가 다달이 펴내자는 의견을 모아 창간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95년 3월에 준비호를 내고 5월에 창간을 했습니다.

― 작은책소개 발췌

 


 

성과 사랑,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내용인데요.

특히 사랑의 고전적 정의를 탈피해가는 지금,

더더욱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윤리적 잡년』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윤리적 잡년 - 10점
재닛 하디.도씨 이스턴 지음, 금경숙.곽규환 옮김/해피북미디어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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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흔치 않은 번역서를 가지고 독자들을 만났습니다.

<진화와 윤리>라는 책은 19세기 영국의 과학사상가 토마스 헉슬리의 저작으로, 경성대 중국대학 이종민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하셨습니다. 

이종민 교수께서는 이 책을 중국 사상가 엄복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윈의 불도그라고까지 불리던 진화론자 토마스 헉슬리가 윤리의 문제를 제기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이 책은 19세기에 영국에 유학하고 있던 중국 사상가 엄복에 의해서  <천연론>이라는 제목으로 중국에 소개됩니다. 그리고 그 책이 당대 중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루쉰도 그 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엄복은 당시 중국사회에 이 책을 소개하면서 헉슬리가 제기했던 윤리의 문제보다는 진화의 입장에서 의역을 했습니다. 당대 중국사회 발전의 필요에 의해서였지요.

우연한 계기로 엄복의 <천연론> 번역팀에 합류하게 된 이종민 교수는 그런 엄복의 입장에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하네요. 토마스 헉슬리가 당시 로마니즈 강연에서 이 내용을 가지고 강연을 할 당시 영국사회는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과 자본의 발전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과도한 노동착취가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배경하에서 헉슬리는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지요.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맥을 같이하는 측면이 있고, 따라서 원서를 제대로 다시 번역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고전입니다. 세계화와 양극화가 일상이 되어버린 작금의 시대에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벗어나 진화와 윤리의 접점을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등단한 시인이시기도 한 이종민 교수가 시 두 편을 낭독해주셨습니다.

이문재 시인의 <식탁은 지구다>라는 시와 본인이 직접 쓰신 <진보는 품이다>라는 시입니다.

 

식탁은 지구다

이문재

중국서 자란 고추

미국 농부가 키운 콩

이란 땅에서 영근 석류

포르투갈에서 선적한 토마토

적도를 넘어온 호주산 쇠고기

식탁은 지구다

 

어머니 아버지

아직 젊으셨을 때

고추며 콩

석류와 토마토

모두 어디에서

나는 줄 알고 있었다

닭과 돼지도 앞마당서 잡았다

삼십여 년 전

우리집 둥근 밥상은

우리 마을이었다

 

이 음식 어디서 오셨는가

식탁 위에 문명의 전부가 올라오는 지금

나는 식구들과 기도 올리지 못한다

이 먹을거리들

누가 어디서 어떻게 키웠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탓이다

 

뭇 생명들 올라와 있는 아침마다

문명 전부가 개입해 있는 식탁이다

 

식탁이 미래다

식탁에서 안심할 수 있다면

식탁에서 감사할 수 있다면

그날이 새날이다

그날부터 새날이다

 

진보는 품이다

이종민

진보는 고난 속에서

바다를 찾아가는 강물이다

강물은 흩어진 듯 이어져

세상 구불구불 돌아다니다

바다로 들어가는 하구에 이르러

흐르지 않는 강물은

생명을 품어 들이지 못하고

바다에 덥석 안기는 강물은

물살을 잉태하지 못한다

진보는

강물의 품이 커져

스스로 바다가 되는 것이다

 

중심도 주변도 자살로 내몰리는

궁핍한 삶의 시대

품이 좁은 진보는

강물 거슬러 부는 바람도

물결 가로막는 여울목도

제 속으로 감싸지 못하고

바다에 이르기도 전에

물살을 빼앗겨

절로 거친 바닥이 드러난다

바다는

큰 품이 없는

이성과 목소리의 강물을

진보라 부르지 않는다

 

진보는 품이다

세상 푹푹 빨아들여

바다의 활력 흐르게 하는 품

목마른 세상 구석구석

넉넉히 적셔주는 품

진보는

그 품들이 모여

바다가 되는 강물의 흐름이다

 

오늘따라 많은 미모의 여인들이 함께 자리해주시니 백년어서원이 환해졌습니다  ㅎㅎ

 

진화와 윤리 - 10점
토마스 헉슬리 지음, 이종민 옮김/산지니
Posted by 아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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