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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일기

[서평] 불온한 사람들의 온전한 따뜻함, 『봄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1. 7.

불온한 사람들의 온전한 따뜻함을 담은 소설,

우리 안에 있는 불안정한 감정을 보듬는 위로

-한경화, 『봄비』

 

 한경화 소설집 『봄비』는 총 여섯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한 편의 소설집으로 묶인 이 소설들 속 인물들은 모두 결핍을 가짐으로써 존재한다.

 

“종점에 살아본 적 있는가, 처자는?”
“종점은 말이지, 목적지의 끝이 아니라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종점에서 살아보면 알거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내리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거든. 나는 종점에 살기 때문에 그런 신경은 쓰지 않고 편하게 차장 밖을 보면서 집으로 온다우.”

13p

 

 「종점」의 주인공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가출하여 고시촌을 전전하다가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와 살림부터 차린 죄책감에 떨며 아이를 지우게 된다. 그녀가 종점미용실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바로 옆 집에 남자와 동거를 하는 스무 살 ‘예슬’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공교롭게도 예슬의 출산을 도운 산부인과 원장은 질환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였으며, 주인공 또한 동거남의 변심과 가출로, 아이를 지운 상처가 있는 여자이다. 소설은 이 세 여자가 빚어내는 갈등과 내면의 은밀한 감정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복덕방 할아버지의 “종점은 목적지의 끝이 아니라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말은 하나의 위로로 다가온다.

 

상우는 화장실로 가서 소변을 보고, 크게 하품을 하며 주방으로 가 커피를 끓였다.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비는 창처럼 곧게 뻗쳐 스치듯 유리를 빗나가고,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창수가 떠올랐다. 집 안에 갇힌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머리 위로 들리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저벅저벅 온몸을 타고 내린다.

43p

 

「봄비」에서는 주인공 상우가 친구 창수의 전화를 받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은 구청 사회복지과에서 근무하는 상우의 시선을 통해 면담 대상자들과의 상담 과정을 보여주며, 비내리는 골목과 담벼락에서, 또 장애인이 된 친구의 삶의 모습을 통해 사회가 잃은 온정을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며 쉽게 잊거나 잃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내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지 맡아 봐.”
여자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코를 킁킁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방 안 가득 비린내가 진동을 하잖아. 비린내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든데, 냄새가 안 나냔 말이야?”

99p

 

「비린내」는 항운노조 사무실에서의 지부장의 공금횡령과 화자의 부정한 금품수령 사건에 대한 비극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화가지망생이었던 주인공은 현실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꿈을 저버리게 된다. 정기적으로 신장투석을 받는 신부전증 환자이기도 한 화자는 허한 마음에 ‘화월장’이라는 창녀촌에 들어가 지갑에 있는 모든 돈을 쓴다. 화자의 몸에 밴 비린내는 “천연향료를 이용해 온몸을 빠득빠득 씻고, 이를 닦을 때 기본적으로 칫솔질을 두 번씩 하고 구강청정제로 헹구어내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그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의 질문에 대한 숱한 의미를 응축하고 있다.

 

“내 남자를 유혹해줘요. 그리고 그 남자를 당신의 남자로 만들어요.”

115p

“보통의 여자들은 떠날 때조차도 남은 남편의 사랑을 갖고 가고 싶어 한다지만 나는 아니에요. 나는 내가 완전히 남편한테서 잊히기를 바라요. 그게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꼭 내 눈으로 그걸 확인하게 해줘요. 내 남편 곁에 내 맘에 드는 여자가 있는 걸 보고 떠나고 싶어요.”

112p

 

 「가려진 시간」과 「달이 머무는 곳」의 중심은  ‘사랑’이다. 「가려진 시간」에서는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여자가 자신의 몸을 파는 여인에게 “내 남편을 유혹해줘요.”라는 부탁을 하는 내용이다. 자신이 남편에게 완전히 잊히는 것이 남편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여인의 적절하지 않은 계획과 그 계획을 행하는 주인공의 행동 이 두 가지 요소는 ‘이상한 사랑’이라는 말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문학평론가 정훈은 “이 소설은 파격적인 소재를 통해 현실에서 금이 간 영역이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달이 머무는 곳」에서는 요리를 가르치는 주인공이 학교 안에서 제자가 남학생과 일탈해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세대 간 관계의 유대에 대해 이야기로, 이 작품에서는 이유불명의 불임으로 인해 남편과 이혼한 주인공이 제자의 ‘겨울달’이 자신의 뱃속으로 차오르는 상상을 통해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주제를 말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누구에게 화를 내고 따져야 할지 몰라 가지 못했고 초라한 내 모습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더더욱 그곳에 가기 싫었다. 휴가 때나 바다가 보고 싶을 때에는 해운대를 가거나 아예 송정을 지나 동쪽으로 더 올라가서 일광이나 진하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160p

 

 「기찻길」은 동해남부선 복선화로 해운대역과 송정역 사이의 기찻길 보존방안이 배경인 소설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달리 변한 송정을 바라보며, 과거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기찻길 주변을 떠올린다. 역무원으로 깃발을 흔드는 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하며, 자신의 속에 밀려온 불덩어리의 존재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떤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저 멀리 파도가 하얗게 밀려오는 것을 보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파도의 하얀 포말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내 속에 밀려온 불덩어리. 그건 다름 아니라 어떤 부끄러움이라는 걸. 기적과 함께 아버지의 그 붉은 깃발이 나에게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준 것이라는 걸. 나는 멀리서 깃발을 흔드는 아버지를 향해 걷는다.

170p

 

 작가는 이 여섯 편의 작품을 통해 무언가에 대한 상실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상실과 결핍에 대해 말하면서도 소설 속 인물들이 모든 걸 잃기만 하게 두지 않는다. 자신의 결핍을 깨닫게 하고, 내밀한 감정을 세심하고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렇게 회복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 「종점」에서는 아이, 「봄비」에서는 온정, 「비린내」에서는 윤리, 「가려진 시간」과 「달이 머무는 곳」에서는 사랑, 「기찻길」에서는 장소 -

 한경화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작가는 이 여섯 편의 이야기를 쓰는 데 칠 년이 걸렸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사 년이 걸렸다고 한다. 나는 오랜 시간 붙들린 글을 빌려 말한다. 서로의 결핍을 껴안고 서로의 온기로 오롯이 따 뜻해지는 이야기에서처럼 우리들의 날들도 그렇게 계속되길 바라며, 또다시 사랑이.

“지금 남자아이와 그런 짓하다 신세 망치면 네 인생이 어떻게 되겠니?”
순간 현이 재빠르게 나를 쏘아보았다.
“사랑하는데 왜 신세 망쳐요?”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구나?”
“왜 반성해요? 난 규를 사랑한단 말이에요. 그게 왜 나빠요?”

1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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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교보문고

한경화 소설 | ▶ 예리한 시선으로 보통의 사람들을 조망하는 한경화의 첫 번째 단편집 2017년 단편소설 「종점」으로 등단한 한경화 소설가의 첫 번째 단편집. 한경화의 시선은 우리 사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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