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턴 미르입니다.

8월 25일 목요일,

서면 러닝스퀘어에서

제 1회 5.7 문학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이번 토론회에는 발제와 사회를 맡으신

문학평론가 구모룡 선생님,

초청작가 이병순 선생님, 이정임 선생님,

토론에 작가 박향 선생님, 정광모 선생님께서

참가해주셨습니다.

 

 

또 토론회에 관심을 가져주신

아홉 분의 선생님들께서도 함께 해주셨는데요.

제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정영선 선생님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번 토론의 소주제는

1) 소설가로서 소설을 쓰며 사는 일의 의미

2) 소설쓰기에 있어서 경험과 독서의 위상

3) 서술의 여러 층위-스타일(문체), 화자, 공간, 시간 

4) 단편과 장편 쓰기

이었습니다.

 

 

 

먼저 구모룡 선생님께서 1번 주제에 대해 발제를 하셨는데요.

 

소설과 현실에서의 작가를 비교하며

리얼리즘 작가이면서 환상문학가, 보수주의자인 고골

원시주의를 추구하였지만 파시즘 협력자였던 크누트 함순을

예시로 드셨고, 또 마루야마 겐지의 주장을 인용하여

자기를 너무 부정한 나머지 죽은 다자이 오사무와

자기를 지나치게 긍정한 나머지 죽은 미시마 유키오 등을

예시로 드셨습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왜 소설을 쓰는가란 문제보다 왜 소설가가 되었느냐는 문제를

생각하는 때가 훨씬 더 많다." 라고 했었는데요.

이런 점에서 초청작가 두 분과 토론자 두 분께

왜 소설가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정임 선생님께서는 아직 

"내가 소설'가'가 되었다고 생각을 안 해 본 것 같습니다." 라고 하시며

자신이 보고 겪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해서

소설을 쓰게 되셨다고 합니다.

 

이병순 선생님께서는 대학 장학금을 받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가

졸업 후 한동안 손을 놓고 있다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을 했을 때

다시 소설을 써야 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또 등단 이후에도 습작생처럼 치열하게 쓰면서

책을 내기 전까지는 소설가라는 명함을 내밀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박향 선생님께서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많은 책을 사주셨는데

그 책을 읽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지어내서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욕망이 자신을 소설가로 만들었을 거라고 하십니다.

 

정광모 선생님께서는 소설가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또 가상의 세계인 소설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함으로써

창조자로서의 기쁨을 느끼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발제문이 이어졌는데요.

 

구모룡 선생님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언급하시며

소설과 소설쓰기에 관한 세 가지 비유로

'촌충'과 '카토블레파스'와 '거꾸로 된 스트립 쇼'를 얘기하셨습니다.

모두 소설쓰기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관련한 비유였는데요.

이병순 선생님께는 「부벽완월」에서 '짝패'의 욕망 구졸르 다루기 위해

'김부식과 정지상의 이야기'를 끌고 오지만 하도 유명한 이야기여서

이 소설을 통해 얻으려 한 의도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정임 선생님께는 환상 기법을 끌어들인 작품 「손잡고 허밍」에서

소외된 주변부 인물들의 삶과 구체를 다루는 일과

이러한 경향이 유기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이병순 선생님께서는 작품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철저히 하고자 했지만

찾을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부식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병순 선생님은 글을 쓸 때는 자료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정임 선생님께서는 글을 쓸 때 경험과 기억에 많이 의존하신다고 합니다.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자신이 다른 장소나 장면에 있다고 상상하며 버텨오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경험이 환상적 기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정광모 선생님께서는 두 초청작가분들께

주된 목적지로 삼는 소재나 주제가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이병순 선생님께서는 고급 뷔페에서 슬리퍼를 신고 등장한 가족 얘기를 하시며

그 슬리퍼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느꼈고

그러한 순간적으로 스치는 기운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이정임 선생님께서는 이름을 불러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을 최우위로 두고

현재는 공간을 설정하는 데에 많은 관심을 두고 계신다고 합니다.

 

 

 

박향 선생님께서는 이병순 선생님께

너무 자료에 집중해서 잘 녹여내지 못한다면

균형을 잃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으셨고,

이정임 선생님께는 환상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독자와의 소통이 어긋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이정임 선생님께서는 습관적으로 자신이 만든 세계를

독자가 상상하여 따라와주기를 원한다고 인정했지만

아직 그 방식을 고수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병순 선생님께서는 자료조사한 것들을 버리지 못해

가능한 소설에 다 담아내게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싶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세 번째 발제문으로 넘어갔습니다.

 

세 번째 발제문은 서술의 방법에 관한 것이었는데요.

이병순 선생님과 이정임 선생님의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이병순 선생님이 제목에서는 사물을 특정하여

단일한 화제들을 분리하여 파고들고자 하고

텍스트의 완결성을 지향하며 안정적인 서술 방식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이정임 선생님은 표제에서 명사를 벗어나고자 하고

유동적인 서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모룡 선생님은 두 작가분 모두

전지(1인칭이든 3인칭이든) 시점을 선택함으로써 인물들의 역장은 약화되어 있고

특히 이정임 선생님의 소설에서는 화자의 젠더 혼선이 느껴지거나

작가 개입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정임 선생님은 화자의 젠더 혼선은 의도한 거라고 하시며

오히려 중성적 화자를 쓰고 싶지만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박향 선생님은 어떤 효과를 노리고 그런 시도를 하느냐고 물으셨고

이정임 선생님은 인물의 성격이나 분위기를 드러낼 때

대화를 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부분이 약하기 때문에

아예 독자에게 낯선 인물을 등장시키고 싶었다고 하셨습니다.

 

 

 

정광모 선생님은 이병순 선생님의 제목들이 대부분 명사인 것을 짚으며

하나의 사물에서 이야기를 팽창시키는 방식인데 이러한 부분에 목적의식이 있는지

오래된 것들에 대한 애정이나 감수성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이병순 선생님은 긴 시를 쓴다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하시며

압축된 소설, 긴 시같은 소설 지향하신다고 합니다.

 

박향 선생님은 오히려 너무 지나치게 낭만적이지 않으냐고 지적하셨습니다.

또 대체로 주인공들의 삶의 태도가 수동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병순 선생님은 첫 문단을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첫 문단에 신경을 많이 쓰신다고 하십니다.

또 주인공들이 수동적인 점은 의도하신 것으로

주인공이 다음 상황에 어떻게 할까를 독자들이 알기 때문에

한단계 승화된, 그것마저도 눌러 잠재우고 묵묵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영상] 이정임 작품에 대해

 

네 분 모두 토론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시느라

시간이 정말 빨리 갔습니다.

아쉽게도 못다한 토론과

네 번째 발제문은 식당에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토론회에 참가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지역이다 - 10점
5.7문학 편집위원 엮음/산지니

 

 

 

 

 

- 10점
이병순 지음/산지니

 

 

 

 

 

토스쿠 - 10점
정광모 지음/산지니

 

 

 

 

 

 

 

작화증 사내 - 10점
정광모 지음/산지니

 

 

 

 

 

 

 

 

즐거운 게임 - 10점
박향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안녕하세요. 단디sj 편집자입니다.

여러분, 여름은 잘 나고 계신가요?

저는 요즘 날이 너무 더워서 

재밌는 소설책 한 권 가지고 시원한 카페나 도서관을 찾게 되더라고요.

이 무더위 덕분에 문학과 더 친해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도 더위가 좀 물러났음 좋겠는...)

 

서두가 너무 길었지요?

더위에 지친 분들을 위한 반가운 소식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바로 제1회 5·7문학 토론회!!  

 

 

 구모룡 평론가의 발제로 진행될 이번 5.7문학토론회는

이병순 작가, 이정임 작가를 초청해

두 작가의 작품을 자세히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토론은 박향 작가, 정광모 작가가 함께할 예정인데요,

지역과 문학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 ) 

 

- 일시 : 2016년 8월 25일(목)

- 시간 : 저녁 6:30~9:00

- 장소 : 러닝스퀘어 서면점(동보프라자 맞은편 모닝글로리 3층)

- 회비 : 2만원

  *토론회 중에 저녁 식사가 있습니다.

 

 

 

 

 

다시 지역이다 - 10점
5.7문학 편집위원 엮음/산지니

 

즐거운 게임 - 10점
박향 지음/산지니

 

- 10점
이병순 지음/산지니

 

토스쿠 - 10점
정광모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이병순 소설집 『끌』

불안 허공 탈주




 『끌』은 제가 인턴을 시작할 때부터 줄곧 책상 위에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당시 방금 막 나온 신간도 아니었고, 사무실의 누군가가 읽다 잠시 위에 올려두신 것 같았습니다. 누가 제게 읽으라고 한 적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었지만, 왠지 시간이 날 때마다 눈이 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4주째 『끌』은 자리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명사」

 망치로 한쪽 끝을 때려서 나무에 구멍을 뚫거나 겉면을 깎고 다듬는 데 쓰는 연장.


 끌은 끊임없이 가구를 다듬습니다. 까슬한 겉을 깎고 다듬어야 죽은 나무는 비로소 공간에 놓일 수 있습니다. 『끌』은 불안하고, 텅 빈 공간에서 계속해서 끌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질


 볼라와 언감생심, 개죽, 인질 주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비어 있다. 연한 하늘색 바탕에 사람의 두상 그림만 연회색으로 희멀겋게 파여 있다. 파인 부분은 마치 두상을 도려낸 흔적 같다. 인질 주인의 카카오톡은 누구와도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12쪽.)


 '인질'은 택시기사 동수와 인질 주인의 연결고리입니다. 동수는 인질을 통해 인질 주인에게 푼돈을 뜯어내 보려 하지만, 인질 주인은 연락도 인질을 구하려는 의지도 없어 보이죠. 어쩌면 인질 주인의 텅 빈 삶에서 인질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나 봅니다. 인질의 '현대인의 필수품'이라는 별명에도 불과하고 말입니다. 주변 인물과 동수의 통화를 생각해 보면 인질 주인은 그닥 행복한 생활을 한 것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 욕설이 가득한 지칭으로 인질 주인을 부르는 개죽의 말에서 오히려 인질을 찾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텅 빈 삶 속에서 인질 주인은 인질로부터 탈주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인질 주인은 '누구와도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고, 프로필의 두상은 마치 '도려낸 흔적' 같습니다. 



에볼라 출혈열 [ ebola hemorrhagic fever ]

: 에볼라 바이러스에 의해 발열과 전신성 출혈 증상이 발생하며 치사율이 매우 높은 질환

焉敢生心 [ 언감생심 ]

: ‘어찌 감(敢)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으랴’







 놋그릇


  씨는 흙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고 손자 손에 이끌려 쪽마루에 올라선다. 맵싸한 향내가 코를 파고든다. 교자상 너머 병풍은 산처럼 우뚝하다. 영정 속의 얼굴은 모두 다 같아 보인다. 남편은 시아버지 같기도 하고 친정아버지 같기도 하다. 희로애락에 치이고 부대낀 흔적은 어디에도 비치지 않는다. 이승에서 겯고튼 흔적은 죽으면 바람이 다 걷어가 버리는 것일까. (49쪽.)


 손 씨에게 담배와 제사는 옛사람을 마주하는 기회이자 현재를 잊는 시간입니다. 언제나 생각에 붙잡혀 사는 손 씨는 놓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사, 아들, 큰 며느리, 남편. 향불 앞에서 그녀는 꽉 막힌 현재를 벗어납니다. 손 씨는 "그저 향불 앞에 오래오래 엎드려 있고 싶"습니다.



서름-하다

「형용사」

「1」【(…과)】((‘…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여럿임을 뜻하는 말이 주어로 온다)) 남과 가깝지 못하고 사이가 조금 서먹하다.

「2」【…에】사물 따위에 익숙하지 못하고 서툴다.







 


 는 아내를 잡을 언턱거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품었던 고마움과 미안함은 내 분노와는 결코 맞먹지 못했다. 아내의 남자는 수필 쓰는 사람이라 했다. 수필 쓰는 사람, 그 소리가 내 귀에는 숫돌 가는 사람으로 들렸다. (67-68쪽.)


 '나'는 끌질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아내를 떠올립니다. '나'는 아내를 잘 알고 있지만, 아내는 어디선가에서 계속 때를 묻혀 오죠. 익숙한 아내가 낯설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과거와 지금의 아내를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옛 찻집 주인의 내연녀를 통해서도 아내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내연녀 영란에게, 아내에게 그랬던 것처럼, 서랍장을 남기는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아내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수필 (隨筆)

「명사」『문학』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보통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뉘는데,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머, 위트, 기지가 들어 있다. 


숫-돌

「명사」

 칼이나 낫 따위의 연장을 갈아 날을 세우는 데 쓰는 돌. 

숫돌이 저 닳는 줄 모른다

 숫돌에 무엇을 갈 때마다 숫돌 자신이 닳는 것은 알지 못한 채 점차 닳아서 패게 된다는 뜻으로, 조금씩 줄어드는 것은 잘 느끼지 못하나 그것도 쌓이면 무시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부벽완월


 식이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지상을 죽인 것을 두고 그를 향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기심에 사로잡혀 지상을 죽였다는 말은 틀렸다. (중략) 지상을 향했던 순정한 동경과 그를 품었던 절절한 마음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떤 소문에도 의연해야 했다. (85쪽.)


 부식은 지상의 시적 감각과 능력을 몹시 사랑하고, 동경합니다. 윤언이 '글 동냥'을 한다며 조롱을 할 정도로 그는 시에 대한 애착이 깊고, 지상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부식의 눈에 비친 지상은 고고하고, 고매합니다. 또 그에 대한 시기심은 부식을 더욱 안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상은 부식과 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식은 정치적인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자 자신보다 관직에서 높은 성취를 이룬 인물입니다. 부식은 지상과 시에 대에 말을 나누고 싶지만, 지상은 날카로운 정치 이야기만을 늘어놓습니다. 오히려 시에 회의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높은 관직의 부식은 다른 의미로 지상에게 열등감을 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벽완월」은 부식의 눈으로 부식의 소리로 지상의 감정을 보여줍니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언덕에 봄빛은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임 보내는 구슬픈 노래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마르려는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푸른 강에 보태고.

<대동강, 정지상>   







 슬리퍼


  나이 때는 인생의 무게가 제 발밑에 있을 때였다. 또한, 발돋움하지 않으면 세상이 보이지 않을 것같이 초조함이 깃든 나이였다. 찰칵찰칵. 학생들이 카메라에 담기는 소리는 경쾌했다. K에게 부재중 전화가 마흔여섯 통이 와 있었다. (125쪽.)


 '여자'에게 신발은 구속입니다. 그녀가 앓고 있는 무지외반증은 그녀를 신발의 틀에 오래 잡혀있을 수 없게 합니다. 그런 '여자'에게 K는 계속해서 슬리퍼 대신 플랫슈즈를 권합니다. 마치 신발로 '여자'의 삶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발은 언뜻 우리의 발을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신고 있다 보면 발에 땀이 차기도 하고, 속에 날카로운 것이 있으면 오히려 우리 발을 해치기도 합니다. 보온성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아서 때로 한겨울 거리의 한기를 발에 전하기도 합니다. 발을 감싸는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발을 꽉 안아 붙잡고 있죠. '여자'에게 삶은, K는 신발입니다. 신발은 '여자'를 꽉 안아 그녀의 삶을 떠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여자'는 항상 슬리퍼를 착용합니다.



슬리퍼 (slipper)

「명사」

 실내에서 신는 신. 뒤축이 없이 발끝만 꿰게 되어 있다.

「참고 어휘」끌신.


간헐-천 (間歇泉)

「명사」『지리』

 일정한 간격을 두고 뜨거운 물이나 수증기를 뿜었다가 멎었다가 하는 온천. 화산 활동이 있는 곳에서 많이 나타난다.







 창(窓)


 게 창은 알맞은 양분의 햇빛을 관통시키는 프리즘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창은 프리즘도 사탕 빛 정서도 아닌 틀과 유리로 이루어진 건축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깨달았다. (137쪽.) 


 '창'은 흔히 소통의 소재로 등장합니다. 열리는 투명한 벽은 바깥 공기를 들이기도, 풍경을 보여주기도, 날씨를 알려주기도 하는 세상과의 연결고리입니다. 여자는 1층의 방범창이 마치 감옥 같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창을 흠집 내고, 깨고, 부수지만 결국 다시 창을 필요로 합니다. '덜 마른 옷을 입은 것처럼' 기분 나쁜 이곳에서 창은 외부로 통하는 공간이자 바깥세상을 막아주는 벽입니다. 반면 '나'에게 창은 양분을 통과시키는 프리즘이었습니다. 그리고 빛을 들여오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 '나'에게 무겁기만 합니다. "넌 우리의 빛이다."가 "우린 너의 빚이다."가 되는 것처럼. 현실 속 창은 '틀과 유리로 이루어진 건축 구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빚에서, 젖은 습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와 '여자'에게는 창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窓)

「명사」

「1」=창문(窓門).

「2」『컴퓨터』모니터 화면에서 독립적인 환경을 나타내는 사각형 모양의 영역. 흔히, ‘윈도’라 한다.


창문 (窓門)

「명사」

 공기나 햇빛을 받을 수 있고,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벽이나 지붕에 낸 문.











 닭발


 린 시절, 엄마는 언도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닭발을 입에 물렸다. 닭발을 채찍으로 삼아 입안을 후려치려는 의도였다. 티끌만큼의 선처도 없었고 예외도 없었다. 닭발을 물지 않으려고 도리질을 쳤던 어느 날, 발가벗겨진 채 마당에 내쫓긴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중의 하나였다. (166-167쪽.)

 슨 말인가 묻고 싶었지만,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언도는 전화기에 거친 숨만 내보냈을 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아교풀을 잔뜩 삼킨 것 같았다. (174쪽.)


 언도에게 '말'은 거짓말과 눌언이었습니다. '엄마'의 죽음 이후 자진해서 닭발을 씹는 언도는 그 거짓말과 눌언을 스스로 채찍질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언도는 말문이 트이자 오히려 군말이 줄었습니다. 헛말이 없는 입속은 빈 꽈리처럼 홀가분하고 유연합니다. 그런 언도에게 다시금 거짓말을 유도하는 사람은 언도의 눌언을 교정했던 '공'과 '선배'입니다. 그래서 언도는 오늘 다시 닭발을 씹습니다. 오도독하고 닭발을 물면 헛말은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아교- (阿膠-)

「명사」

 짐승의 가죽, 힘줄, 뼈 따위를 진하게 고아서 굳힌 끈끈한 것. 풀로도 쓰고 지혈제로도 쓴다.







 비문(蚊)


飛 [날 비]

蚊 [모기 문]


 엌의 선반과 살강을 달그락거리는 쥐가 아침의 적막을 깨뜨린다. 수리는 사과 소쿠리를 들고 툇마루에 나간다. 사과를 차례차례 헛간 옆으로 던진다. 물컹한 사과들을 만지자 쉬파리들이 후르르 날아오른다. 쉬파리 떼들이 후룩 수리의 얼굴을 덮치다 이내 허공으로 치솟는다. 손에 묻은 사과의 농액은 추깃물 같다. (183쪽.)


 비문증을 앓고 있는 수리에게 안유백은 썩은 사과입니다. 썩은 것만 보면 쉬파리가 들끓는 것처럼 보인다는 수리는 양반인 안유백에게 억압받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리가 그린 안유백의 초상화는 탈주를 위한 열쇠입니다. 파과에 모여있던 쉬파리가 후룩 날아가 버리듯 수리는 도망치고 싶습니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면' 수리는 이제 그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파과 (破果)

「명사」

 흠집이 난 과실


추깃-물

「명사」

송장이 썩어서 흐르는 물. 








 끌은 끊임없이 가구를 다듬습니다. 꺼슬한 겉을 깎고 다듬어야 죽은 나무는 비로소 빈 공간에 놓일 수 있습니다. 『끌』불안하고, 텅 빈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해서 끌질을 하고 있습니다. 








 - 10점
이병순 지음/산지니

(단어뜻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main.jsp)


Posted by 비회원

안녕하세요, 여러분. 잠홍 편집자입니다.


여느때처럼 교정지에 둘러싸여 지내다 달력을 보니 

어느새 12월 31일군요.

그렇다면

2015년의 마지막 블로그글은 바로 제가?!?!?


내가 내가 해~ 잠홍 타령이옵니다


어제는 온수입니까 편집자님께서 

2016년 산지니의 변화를 예고해주셨는데요.


( 읽어보세요~ 산지니 어워드 1부-2016년 달라지는 산지니! )


오늘은 2015년의 마지막 날이니,

오늘만 할 수 있는 블로그 포스팅을 해야겠지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2015년에 굿바이를 고하는 대미의 블로그 포스트. 바로


2015년에 빛난 산지니 책!



올해 상을 받은 산지니 책이 워낙 많다 보니 (에헴)

이번 포스팅에서는 문학 도서를,

다음 포스팅인 '산지니 어워드 3부'에서는 인문 도서를 다룰 예정입니다.


소개하는 순서는 글쓰는 사람 마음...이기도 합니다만, 대체로

가장 최근에 발표된 수상작부터 시작해 연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 날짜변경선, 편지 

세종도서 문학나눔 - 소설




올해의 문학나눔 소설 부문에서는 


유연희 작가님의 소설집 <날짜변경선>, 그리고 


정태규 작가님의 창작집 <편지>이 선정되었는데요.




<날짜변경선>은 바다 저편의 파랑(波浪)을 향해, 

육지의 지나온 기억들을 내려놓고 떠나는 뱃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김만중문학상을 받은 표제작을 비롯한 소설 7편이 실려 있어요.







해양소설을 쓰는 이유에 대해 유연희 작가님은 

"지금도 커다란 위험과 미지가 도사린,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바다로 뚜벅뚜벅 배를 타고 나가는 이들을 보면 

의문과 신비가 생깁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날짜변경선 - 10점
유연희 지음/산지니


정태규 작가님의 창작집 <편지>는 

단편소설 8편과 콩트 6편으로 구성된 독특한 책입니다.



주소 없는 마음에 띄우는 애잔한 편지 한 장이 떠오르는 작가님의 문장들은 

싱싱한 생명력을 통해 루게릭병과의 사투에 굴하지 않는 

작가의 뜨거운 창작혼을 드러냅니다.


 







작품 중 ‘비원’은 말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던 

지난해 여름, 구술을 통해 집필하신 것으로,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경향신문에 "원망과 회한이 죽음의 공포를 버텨낼 만한 

강한 위안과 결심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그렸다."고 

소개되었지요.



편지 - 10점
정태규 지음/산지니


2/ 

2015년 부산작가상 - 소설




이병순 작가님의 첫 소설집인 <끌>은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표제작을 비롯해 총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슬리퍼, 창, 스마트폰 등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을 통해 일상에 나지막하게 깔려 있는 삶의 질문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작품들이 모였는데요. 화려하진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가다듬어 나가는 인물과 소설 곳곳에 자리한 일상의 흔적은 독자들에게 공감과 더불어 문학의 의미, 삶의 가치를 생각하게 합니다.

올해 부산작가상 심사위원분들께서는 <끌>의 
"단정하고 야무진 문체와 안정감 있는 서사"에 주목하셨다고 합니다.

<끌>은 디자인 면에서도 돋보이는 책입니다. 권디자이너님께서 표지 후가공으로 무광청박을 처음 시도하신 책인데, 이병순 작가님도 무척 만족하셨다는 후문이~ :)


 - 10점
이병순 지음/산지니




3/ 레드 아일랜드 
부산국제영화제 북투필름 선정작


김유철 작가님의 <레드 아일랜드>는 해방 전후 시대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의 폭력과 상처를 가감 없이 보여주며 그 속에서 변해가는 사람들의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 놓인 인물들과 현실적인 구성을 통해 1948년 4월 3일 제주를 다시금 바라보는 이 소설은 10년의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쓰여진 탄탄한 장편입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화에 적합한 컨텐츠를 선정해 영화인들에게 소개하는 '북투필름'에 선정한 이 작품. 제주도의 언론사 제민일보에서는 <레드 아일랜드>를 "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소재로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건 속 인물들에게 집중해 시종일관 긴장감을 더한다."고 평했습니다.


레드 아일랜드 - 10점
김유철 지음/산지니


4/  번개와 천둥 

부산문화재단 우수지역출판도서





'소설 대암 이태준'이라는 부제가 있는 이 작품은 1910년대 몽골에서 독립운동과 의사로서 활동했던 대암 이태준을 조명하는 장편소설입니다. 이태준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함안이 고향이신 이규정 작가님께서는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이태준 기념공원을 방문하시고 나서 수년간 조사와 집필을 하셨다고 합니다. 먼 타지에서 자신의 본분을 묵묵히 다해낸 선생을 의사, 독립운동가, 신념을 가지고 시대를 살아낸 한 인간으로 그려내셨습니다.


국제신문에서는 "원숙하고 막힘 없는 문장이 역사소설의 매력을 한결 끌어올린다." 고 소개해 주셨어요.




번개와 천둥 - 10점
이규정 지음/산지니


5/ 아버지의 구두 
원종린 수필문학상


양민주 수필가의 첫 번째 수필집 <아버지의 구두>는 생을 바라보는 조화로운 시선과 같은 통찰로 자신이 경험한 삶의 조각들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저자는 육친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자연의 이법을 따르는 삶, 타인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유연한 태도 등 자신만의 고아한 수필 세계를 이 책에서 마음껏 펼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구두>에는 범지 박정식 서예가의 아름다운 그림도 실려 있답니다. 풍부한 시적 감수성과 먹의 농담이 조화로워요.




아버지의 구두 - 10점
양민주 지음, 박정식 그림/산지니



6/ 만남의 방식 
제8회 백신애문학상


정인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만남의 방식』에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 그리고 그것이 형성한 고통과 치유의 서사는 단단한 결정을 이루어 뼈처럼 보석처럼 읽는 이의 마음을 붙듭니다. 고백과 폭로라는 구조를 통해 새로운 시작에 대한 전망을 조심스레 타진해온 정인 소설의 정통성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오롯합니다. 8편의 소설마다 빠짐없이 존재하는 ‘나’들은 다양하게 변주된 학교폭력, 성폭력, 가족갈등 속에서 고백 혹은 폭로를 선택하며 숨겨진 의외성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집을 통해 정인 작가님은 결국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점을 말하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저자 인터뷰에서 발췌합니다:
"「만남의 방식」을 보면 ‘나’가 결국 자기 사촌을 수용하잖아요. 너는 나를 외면해도, 나는 내 마음 속에 너는 사촌이라는 의식이라는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만남의 방식 - 10점
정인 지음/산지니




7/ 금정산을 보냈다 
2015년 원북원부산 도서



목록의 마지막은 처음부터 마음 속에 고이 점찍어두었던 주인공이라고 하죠.

<금정산을 보냈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산지니 시인선 001호이자 최영철 시인의 열 번째 시집.

출간되자마자 문학기자들이 '찜'한 책. 

부산 출판사에서 나온 책, 그리고 시집으로서는 첫 번째 원북원부산 도서! 


<금정산을 보냈다>는 강인한 생명력과 자연의 진정성을 발굴한 전작과 달리, 생성과 파멸, 환희와 비명이 교차하는 시편들로 어둠을 직면하는 시집입니다. 최영철 시인은 물질과 속도에 중독된 우리에게 마주해야 할 세계의 진면목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집니다.




최영철 시인에 대해, <금정산을 보냈다>를 담당한 온수입니까 편집자는 

"출판사에 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는 시인, 그리고 언제나 헤어질 때는 막걸리 하자며 술 약속을 어김없이 하는 시인. 시인인가 출판인인가 가끔 헷갈리지만 그래도 그의 시를 읽으면 역시 시인이야! 하며 무릎을 치게 만드는 시인."이라 말했고


엘뤼에르 편집자는 "한동안 잊었던 시 읽는 맛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라며 

이 책을 '올해의 산지니 책'으로 추천하시더군요.


시집이 쓸모없다고 하지만, 시만이 할 수 있는 일. 

시가 아니면 금정산을 통째로 아들에게 보낼 수 없었겠지요.


새해를 시와 함꼐 시작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금정산을 보냈다 (양장) - 10점
최영철 지음/산지니



독자 여러분, 미리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산지니 어워드 3부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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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병순, 시 이영옥 씨 부산작가상 수상

 

Posted by 비회원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가 창작집
'창' '닭발' 등 단편 8개 묶어 출간
'끌과 나무'처럼 끌어안는 세상 기대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서 당선해 등단한 이병순 소설가가 첫 창작집 <끌>을 세상에 내놓았다. 등단작품 '끌' 외에 '인질', '놋그릇', '부벽완월', '슬리퍼', '창', '닭발', '비문' 총 8편의 단편을 묶었다.
 
생애 첫 작품집을 묶는 소회가 어떠할지, 어떤 이야기들로 독자들에게 말을 걸어올지 궁금해 하며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나러 문을 열고 들어간다.
 
소설은 일상 속에서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그러나 늘 달라붙어 있는 관계에 대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 문제의 중심에 '소통의 부재'가 똬리를 틀고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정작 서로의 삶 속에 깊이 있게 관여하지는 못한 채 곁을 떠돌 뿐이다. 다들 저 혼자서 생활의 올가미에 발목 잡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간절히 소통을 갈구하는 말들을 떠올리지만 그 말들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허공에 부유한다. 
 
'창(窓)'은 창호를 만드는 대기업의 하청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복학 준비생의 이야기다.
 
주인공 '나'는 창이 없는 단칸방에서 철물점을 하는 부모와 고등학교 때까지 방 가운데에 커튼을 치고 한방에서 살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독서실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았고, 제대를 하고는 앞이 막힌 쪽창이 전부인 고시원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과장을 따라 다니며 보조 일을 하던 '나'는 전망 좋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창을 수리하러 다니면서 환한 창을 갖고 살면서도 창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창은 소통을 의미하지만 '마음의 창'을 닫고 사는 사람들에겐 벽과 다름없으며 깨뜨리고 싶거나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을 부추길 뿐이다.
 
"넌 우리의 빛이다." 제대를 하던 날 아버지가 한 말이지만 '나'에게 그 말은 "우린 너의 빚이다"라는 말로 울려 퍼진다. 전망 없는 현실에 놓여 있는 '나'가 어떤 방법으로 세상에 창을 내야 할지, 또 삶의 버거움을 어떻게 견뎌나가야 할 지, 작가는 우리에게 담담하게 그리고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닭발'은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자 갑자기 말더듬이가 된 수학교사 언도의 이야기다.
 
엄마는 도계장 도계라인에서 잘려 나온 닭발을 소쿠리에 담는 일을 하면서 사생아로 낳은 언도를 키웠다. 어릴 적 언도는 사생아라는 사실과 말더듬이 엄마가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 늘 가족에 대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으로 말더듬이가 된 언도는 '말더듬이 교정' 학원에서 상담사 '공'을 만난다. 상담을 받으며 어릴 적 상처를 치유한 언도는 말더듬이도 고치고 공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 어느 날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공이 전화 한 통으로 여느 때보다 더 깍듯한 존댓말로 이별을 통보한다. 이날 언도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비린내 나는 닭발을 입에 물려 주던 엄마를 떠올리며 포장마차에서 혼자 닭발을 씹는다. 
 
엄마는 "정으로 돌을 쪼개듯 말을 힘들게 빚어내"는 심한 말더듬이였지만 "거짓말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해선 헛말을 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이런 엄마와 언도가 소통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말을 술술 잘하지만 해야 할 말을 숨기기도 하고, 헛말이나 거짓말로 자신을 위장하기도 하며, 심지어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소통을 위해 말을 배웠지만 정작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사는지 깊이 있게 생각해볼 일이다.  
 
작가는 "나무는 끌 맛을 안다"고 말한다. 끌만 나무의 맛을 보는 게 아니라 나무도 끌 맛을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끌과 나무처럼 우리도 서로를 심심(深深)하게 들여다보고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끌이 결을 살린 매끈하고 탄탄한 가구를 만들 수 있듯이 우리 삶도 각각의 무늬를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따뜻한 소통의 무늬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힘겨운 세상살이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바로 사람 맛을 느낄 수 있는 말을 주고받으며 사는 일이다. 

이은주 | 김해뉴스 | 201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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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점
이병순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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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이병순 첫 소설집 '끌', '창'·등단작 '끌' 등 수록

신예 소설가 이병순이 생애 첫 소설집 '끌'(산지니 펴냄)을 내놓았다.

이병순 소설가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작가 수업과 작품 활동을 줄곧 했고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끌'이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끌>의 작가 이병순 소설가



대개의 독자는 작가가 비로소 소설책을 한 권 엮어서 펴냈을 때, 온전하게 그 작가를 만날 수 있다. 소설가가 꾸준히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더라도 그 문예지를 찾아 읽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으므로 책이 아니라면 독자는 소설가의 존재감을 좀체 느끼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집 '끌'은 탄탄하고 진지한 신예 소설가가 부산 문단에서 새로이 출발함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의미를 갖는다. 모처럼 만나는, 옹골차고 든든한 느낌의 '첫 소설집'이다. 이병순 소설가는 독자와 속 깊이 교감하는 방법의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부지런히 모색하고 고민하면서 다채로운 색감과 결을 책에 담았다.

수록 작품은 한결같이 우리 삶의 진실, 생(生)의 절실한 얼굴과 현장을 바탕에 탄탄하게 깔고 있다. 허황하게 공중으로 휘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읽는 이에게 다가가 턱 하고 박히는 현실감과 공감력을 내장했다. 군더더기 없이 단호한 대목도 많다.

'창(窓)'
은 복학을 앞두고 아파트 창호를 관리하는 아르바이트에 나선 평범한 대학생에게 창문이 갖는 벽 같고, 거울 같은 상징을 차분하고, 냉정하고, 실감 나게 그린다. 주인공은 말한다. "시급을 많이 주는 곳은 여전히 치킨 배달원이었다. 복학을 한다는 것은 치킨 배달원이 된다는 뜻이었다."

'끌'은 등단작으로 작가의 예술적, 문학적 관심과 방향을 여러 겹으로 품었다. 목공예인인 나는 해맑고 마음에 구김살 없던 아내와 산다. 손과 몸으로 살고 느끼는 나는 아내가 수필을 배우러 다니면서 변하자 생각한다. "나는 수필은 잘 몰라도 아내를 수필보다는 많이 알았다. 아내는 어디선가 자꾸 때를 묻혀 오고 있었다."

'닭발' 또한 잘 빚어낸, 뜨겁고 탄탄한 단편이다. 교사인 나는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말더듬이 증세에 시달린다. 이 덕분에 여성과 사귀게 되지만 소통은 또 미끄러진다. 이 과정을 닭발 하나로 매끈하게 꿰어냈다. 단편 '부벽완월'과 '비문'은 역사소설 형식을 취했다.

조봉권 | 국제신문 | 20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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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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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소설집 '끌'을 낸 이병순 소설가. 부산일보 DB


'처음'이란 단어엔 기대와 두려움이 같은 무게로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첫 소설집을 낸 이병순(51) 소설가는 "세상 한복판에 그냥 내던져진 느낌"이라고 했다.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남들은 '늦깎이' 등단이라 했지만, 작가에겐 '이른' 등단이었다. 기회는 뜻하지 않게 왔다. 큰 기대 없이 보낸 단편이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본심까지 오르자 용기백배한 작가는 소설 공부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20년 논술 강사 일도 접고 '배수진을 치고' 소설에 매달렸다. '굶어 죽을지도 모를' 기나긴 사투를 각오했지만 1년 만에 '덜컥' 당선. 그는 이 '이른 행운'에 취하지 않기 위해 단편소설 하나하나를 '신춘문예 응모작'이라고 여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병순 작가의 첫 소설집 '끌' 
2012 본보 신춘문예 등단작 등 
3년간 열정 쏟은 단편 7편 수록 

스마트폰 '인질' 삼은 택시기사 
포장마차의 단골 술안주 닭발… 
외로움·소통 부재의 일상 담아


소설집 '끌'(사진·산지니)은 지난 3년간 그가 이렇게 결사적으로 쓴 7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스마트폰, 끌, 닭발, 슬리퍼….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사물들을 통해 인간을 들여다본다.

표제작 '끌'은 2012년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하다. 끌로 가구를 다듬는 목수는 상처 입은 그의 마음도 함께 끌질하고 일상은 손에 잡힐 듯한 날 선 감각으로 다듬어져 간다. 

승객이 두고 내린 스마트폰을 '인질' 삼아 사례비를 받으려던 택시 기사의 남루한 일상('인질')도 있다. 하필 가까운 사람의 번호가 하나도 저장돼 있지 않은 서글픈 인질. 작가는 "'인질'에 집착하는 택시 기사를 통해 현대인의 외로움과 삶의 부박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포장마차의 술안주 '닭발'로 들여다본 '소통의 부재'('닭발')도 쓸쓸하다. '닭발'은 퇴고까지 거의 2년이 걸린 작품이다. '말(言)은 무엇인가.' 닭발을 매개로 이 거대한 화두를 풀어내기 위해 작가는 양계장에서 종종걸음을 치기도 하고, 끙끙대며 작품 노트만 2권을 썼다. 중편으로 시작했던 소설은 '도저히 안 돼' 구석으로 밀려났다가 2년 만에 단편으로 완성됐다. 소설가의 "자식이 못나도 내 자식인 것처럼 한 번 쓴 작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성하고야 만다"는 모토 덕분이었다.

피아니스트 남편의 의처증에 시달리는 여자는 외반무지증 때문에 꽉 조이는 신발을 신지 못 한다('슬리퍼'). 작가는 평범한 소재 슬리퍼를 통해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18세기 조선의 화공 최수리가 타락한 양반 안유백에 '저항'하는 단편 '비문'과 고려 중기 묘청의 난을 평정한 김부식이 정지상을 회상하는 '부벽완월'도 있다. 단편 7편은 모두 결연한 신춘문예 응모작 같다. 

첫 소설집을 낸 작가는 그동안 쓴 단편을 다 털어 냈으니 또다시 초심으로 돌아갔다. 첫 장편을 준비 중인 그는 한 달에 몇 번씩 서울을 오가고 있다. "'멸치'에 대해 쓰면 바다를 통째로 다 알아야 할 것 같은 넘치는 의욕을 다스리지 못해" 장편의 소재가 될 분야 공부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승아 | 부산일보 | 201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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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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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 소설집

 

 

일상의 균열을 통해 피어나는 삶의 질문들

 

  소설 「끌」은 평생 가구를 만들며 성실하게 살아온 목수의 이야기다. 가구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그것을 보람으로 삼는 주인공(남편)에게 두 가지 시련이 닥친다. 하나는 가구 업계의 불황이고, 두 번째는 아내의 외도다. 호구지책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주인공은 친구의 주선으로 다시 나무와 연장을 만지며 자신을 가다듬는다. 끌로 생채기 난 가구를 다듬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쌓인 분노와 원망도 함께 끌질해 나간다. 소설 「끌」에서는 주인공과 아내의 관계를 끌과 나무의 관계로 보여주며 아내의 외도로 상처받은 주인공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한다.

 

  서랍장 생채기를 화심으로 삼아 꽃을 갉작갉작 그린다. 가는 꽃문양이 새겨지는 자리마다 물비린내와 습한 흙냄새가 섞인 듯한 생나무 냄새가 난다. 나무 가루가 날린다. 끌 자루를 잡은 손에 느슨하게 힘을 풀어 포개진 꽃잎 안쪽 선을 다독이듯 민다. 자잘한 금을 꽃술로 삼아 가는 평끌 끝을 쓱싹쓱싹 그린다. 안쪽으로 오므린 꽃잎 부분을 지날 때 끌 자루에 힘을 살짝 뗀다. 내가 끌 자루에 매달린 것 같다. 몇 걸음 물러서서 서랍장을 본다. 생채기는 꽃으로 피어났다. _「끌」에서.

 

  「슬리퍼」는 남편의 의처증에 시달리는 여자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여자는 출장 피아노 레슨 강사이고 그녀의 남편 K는 피아니스트이자 음대 교수다. 여자는 자신의 외도를 의심하며 옥죄고 다그치는 남편 K를 떠나 바닷가로 향한다. 평소 외반무지증이 심해 꽉 조이는 신발을 신지 못하는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백사장을 거닐며 늦여름의 바닷가의 풍경을 음미한다. 소설 말미, 집에서 입던 옷에 슬리퍼를 신고 남편의 피아노 협연을 보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나’와 ‘자유’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슬리퍼’라는 일상의 소재를 통해 자신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음을 던진다.

 

  K는 무대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객석은 조용해졌다. K가 건반에 손을 올리자 여기저기서 들리는 헛기침 소리도 멎었다. 앙코르곡은 브람스의 소품 ‘왈츠’였다. ‘왈츠’라는 곡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애잔한 선율이었다. 여자를 안고 업었으며 여자의 목을 조르던 저 손으로 K는 지금 왈츠를 치고 있다. 여자는 앞좌석 의자 밑 저 깊숙이 밀려나 있는 슬리퍼를 발로 당겨 신었다. _「슬리퍼」에서.

 

 

소통의 부재를 그려낸 현대인의 자화상

 

  소설집 『끌』에서는 빚에 허덕이는 생활고, 반지하와 같은 허름한 주거환경,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믿음 등이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장악한다. 소설은 주인공들의 이러한 남루한 삶을 통해서 소통의 부재와 비윤리성을 드러낸다.

 

  소설「인질」은 택시기사 동수가 손님이 두고 내린 스마트폰을 돌려주기 위한 과정 속에 생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수는 습득한 스마트폰을 인질로 삼아 사례비를 뜯어내려고 하지만 습득한 폰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번호가 하나도 저장되어 있지 않다. 즐겨찾기에 저장된 사람들도 폰 주인에게 욕설을 내뱉을 뿐, 정작 폰 주인에게는 무관심하다. 핸드폰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전자기기임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의 주인공과 즐겨찾기에 저장된 사람들은 부재중이다. 독자는 현대 사회의 대표적 사물인 스마트폰(핸드폰)을 통해 현대인들의 소통이 부재한 각박한 삶을 읽어 내려갈 수 있다. 더불어 끝까지 핸드폰(인질)의 주인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 결말을 통해 허상에 사로잡혀 필요 없이 부박하게 사는 우리네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여기 택시로 오기엔 아주 멀어.”
  “허명이라는 사람의 집은 어딥니까?”
  “집? 그 아이의 집을 알았다면 내가 이러고 있지도 않지.”
  “아이, 어서 안 들어오고 뭘 해?”
  언감생심 목소리 사이로 여자의 고태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 내가 아주 급한 볼일을 보는 중이거든, 그럼 이만.”
  동수는 남아 있는 팥빵을 마저 욱여넣고 우적우적 씹는다. 지방까지 갖다 줬다고 사례비와 차비에 웃돈까지 바랐던 것이야 말로 언감생심이었다. _「인질」에서.

 

  「창」의 주인공 나는 창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복학준비생이다. 창틀을 수리하는 A/S 과장을 따라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창을 통해 세상을 엿본다. ‘창’은 소통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창 안에 갇혀 있거나, 창밖으로 내몰려 있다. 소설은 소통의 대표적 이미지로 ‘창’을 보여주면서 그 속의 혹은 그 밖의 고독한 현대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창을 통해 보고 싶어 하는 것,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소설 속에 녹아 있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현대 사회의 소통에 대해 꼬집는다.

 

  “앞이 트였다고 모두 전망인 것은 아니라고. 김 군도 아파트를 많이 다녀봐서 알겠지만 창 앞에 볼 게 뭐 있었어? 전망, 전망들 하지만 정작 전망 좋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전망이라 하지 않지. 요새 사람들, 세계로 어디로 다니면서 좋은 것은 다 보고 사는데 뭘 더 보고 싶겠어. 사람들이 넓은 창을 원하는 것은 뭘 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누가 저들을 봐 주기를 바라는 거지.” _「창」에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숙고

 

  「부벽완월」과 「비문」은 일종의 예술가소설이다. (…) 예술의 목적, 예술과 정치(도덕)의 관계,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등 전통적인 미학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들 두 단편은 예술가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_황국명(문학평론가)

 

  「부벽완월」은 고려 말 묘청의 난을 평정한 김부식이 부벽루에 올라 달을 보며 정지상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김부식이 정지상에게 질투를 품어 묘청의 난 때 그를 죽였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소설은 김부식 입장에서 그 사실에 대한 변명의 기회를 준다. 「부벽완월」은 서경천도, 묘청의 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부식이 지상에게 품은 것은 질투가 아니라 동경과 흠모였다는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쓰였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는 김부식이 시 구절 하나를 취하기 위해 괴로워하는 장면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문학에 대한 열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저 홀로 발아되어 꽃을 피운 가요처럼 지상의 시들도 모두 제 흥에 겨운 시들이었다. 지상의 시 어디에도 세상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서려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은 세상의 한복판에 쓰러지고 말았다. _「부벽완월」에서.

 

  「비문(飛蚊)」은 18세기 무렵 조선의 화공 최수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리는 타락한 양반 안유백의 하인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엄숙한 태도를 드러내거나 예술적 행위에 대해 특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수리의 예술적 경험과 그 기록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수리의 그림을 된장독 덮개로 쓰거나 불쏘시개로 사용하는 안유백의 억압이 그러하다. 잔인한 주인 안유백은 수리의 동료이자 도망 노비인 상두를 놓아주는 조건으로 초상화를 그리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붙들린 상두는 모진 매질 끝에 끝내 자결하고, 수리는 화폭 가득 검은 먹물만 칠해진 것을 초상화라고 제시하여 안유백의 격분을 산다. 조선시대 후기의 변화하는 시대상에 역행하는 안유백에게 저항하는 화공 최수리를 통해 예술가의 역할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나리 눈엔 이것이 검은 바탕으로만 보이십니까? 소인의 눈엔 쉬파리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꼬여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리께서는 혹시 비문증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눈 한쪽 망막에 검은 점이 있어 언제나 파리 한두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병이지요. 나리는 모르셨겠지만 저는 오랫동안 비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앓는 비문증은 이상하게도 푹푹 썩은 것만 보면 온통 파리가 바글바글 들끓는 것처럼 보입니다.” _「비문(飛蚊)」에서.

 

 

 

| 이병순 소설집

이병순 지음 | 문학 | 국판 | 238쪽 | 13,000원

2015년 9월 11일 출간 | ISBN : 978-89-6545-315-4 03810

 

이병순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표제작 「끌」을 비롯해 총 7편의 단편으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슬리퍼, 창, 스마트폰 등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을 통해 일상에 나지막하게 깔려 있는 삶의 질문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화려하진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가다듬어 나가는 인물과 소설 곳곳에 자리한 일상의 흔적은 독자들에게 공감과 더불어 문학의 의미, 삶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역사적 인물인 김부식, 정지상을 주인공으로 한 「부벽완월」, 18세기 말 조선의 어느 화공 이야기를 다룬 「비문」에서는 문학과 예술에 관한 작가의 숙고와 성찰을 전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글쓴이 : 이병순

 

 

부산 출생.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끌」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차례

 

 

 

 

- 10점
이병순 지음/산지니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