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산지니는 출판도시 인문학당 2019년 하반기 첫 번째 행사로, 820일 저녁 7시 산지니X공간에서 해양사의 명장면의 저자이신 부경대 사학과 조세현 교수님을 모시고 강연을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먼저 책을 출간하기까지 많이 힘써주신 산지니 출판사의 대표님, 편집자님들, <국제신문>의 조봉권 기자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함께 이 작품을 집필하신 다른 교수님들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해양사의 명장면』 집필에는 근세 동아시아사, 해양사를 전공하신 김문기 교수님, 서양 근현대사를 전공하신 박원용 교수님, 일본사를 전공하신 박화진 교수님, 조선시대사를 전공하신 신명호 교수님,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신 이근우 교수님, 중국 근현대사와 해양사를 전공하신 조세현 교수님께서 참여하셨습니다여섯 분 교수님들께서는 전공에 관련된 내용 뿐만 아니라 더 넓은 부분을 다루시려 많은 연구를 진행하셨다고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으면서도 전문적인 내용들이 담겨있는 것 같아요.

 

 

 

  조세현 교수님께서는 가장 재미있는 내용으로 장더이의 세계 일주를 뽑아 설명해 주셨습니다.

  장더이는 초기 세 번의 해외 사절단에 모두 참가하여 중국인 최초로 세계 일주한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여덟 번의 해외여행을 통해 여덟 권의 여행기를 남겼는데 증기기관, 수에즈 운하, 선상 문화 등 새로운 문물을 마주하게 된 장더이의 충격과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중국 중심적 세계관에 익숙했던 이들에게 오랑캐의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데는 심리적 갈등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야말로 견강부회의 모습을 보였지만 장더이의 여행기는 근대의 출발을 알리는 문명사적 발견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조세현 교수님께서는 장더이가 수행한 벌링게임 사절단과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을 비교 연구하는 과제를 진행 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질문 시간을 가졌습니다.

 

Q. 장더이가 수에즈운하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중국도 대규모 공사를 하는 일이 없지 않았는데 장더이는 무엇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것이 바다와 바다를 연결하는 공사가 아니었고 기술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A. 그건 꼭 장더이만의 충격도 아니었습니다. 장더이 이후의 여행기에도 전조등을 사용해 수십 리까지 보였다는 등 비슷한 모습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운하가 작동하는 일련의 과정과 건축공법에 대한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양 문명에 관한 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주 다녀오다 보면 또 이러한 모습은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Q. 교수님께서 중국과 일본을 비교해서 연구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분이 저도 참 궁금합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에 가서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중국도 그런 식으로 분명히 서양을 접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것은 청일 전쟁의 패배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비교해서 본다면 정말 재미있는 연구가 되지 않을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A. 일본이 근대화에 훨씬 앞서고 중국이 뒤처졌다는 편견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파고들다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해국 건설의 측면을 보면 중국이 돈이 많기 때문에 비싼 군함을 사는 등 일본에 앞서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바다에 관련해서는 예를 들자면 이와쿠라 사절단보다 1년 앞서 움직인 벌링게임 사절단의 기록에는 바다에서 항해하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의 기록에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어요. 왜 그럴까요? 이미 다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섬나라 일본은 막부시절에 이미 많은 사절단과 유학생들을 보내며 바다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군사력에서 밀리지 않았음에도 일본이 승리한 결정적인 이유는 해양에 대한 지식이 앞서있었기 때문입니다.

 

 

 

 

  모험, 사건, 그리고 우리 삶의 모습들로 가득 차 있는 『해양사의 명장면』조세현 교수님 모시고 즐겁고 유익한 말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관계상 생략된 이야기가 있어 아쉬웠지만, 누구나 흥미롭게 읽고 입문할 수 있는 교양 인문학 도서라는 믿음으로 부경대학교 해역 인문학 시민 강좌의 다음 책을 계획 중이라 하시니 너무나 기대되는 소식입니다. 하루빨리 산지니에서 다음 책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해양사의 명장면 - 10점
김문기 외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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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할인, 3권 이상 주문시 택배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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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사의 명장면은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6명 전원의 다른 전공만큼 다양한 시선으로 세계 해양사 속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강의를 듣는 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으로, 간혹 아는 내용을 만났을 땐 일일이 반가워 해가며 세계의 바다를 물들인 여섯 빛깔 해양사속으로 들어갔다.

 

  내륙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바다란,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상자처럼 낯선 장소였다.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게 된 후에도,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그저 방에 액자처럼 걸려있어 바라만 보던 존재였다. 그럼에도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려간 것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모든 이야기들이 그만큼 흥미 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해양사의 명장면』은 예로부터 바다에서 길을 찾고 또 그 속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해양공간은 에스파냐의 모험가들에게 타자와의 접촉을 가능케 한 통로였다. -24p

 

<만국공법>에는 해양 관련 조항이 풍부하다. 이 번역서는 동아시아인들에게 해양 분쟁에 활용되면서 바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을 가지게 만들었다. -81p 

 

  역사적으로도 바다는 미지의 세계, 두려움의 세계였다. 아직까지도 어촌에 민간신앙의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근대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처럼, 기존 육로중심의 관계가 아닌 바다를 통한 새로운 만남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를 통해 바다는 동양과 서양으로 세계를 양분하는 경계선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되었다.

 

해적은 어떻게 기사 작위를 받게 되었나?

근대 중국인의 눈으로 본 영국의 문화는?

곰솔이 어떻게 조선의 해양문화를 떠받치게 된 것일까?

청어가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켰을까?

 

  『해양사의 명장면은 이 네트워크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 전쟁, 무역, 문화교류 등을 자세히 살펴보며 재미있고도 깊이 있게 다양한 에피소드를 전한다.

 

조선은 지도를 깊이 감추어 두려고만 하였다. 바다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리 정보를 비밀에 붙이려고 한 조선은 근대라는 흐름에 올라탈 수 없었고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진정으로 바깥 세상에 관심이 있는가? -111p

 

  역사를 배우고 알아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을 위한 질서유지의 의지 속에서 지식은 실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통제의 수단으로 전락하였고, 개척의 의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근대라는 흐름에 올라탈 수 없었. 그래서 이근우 교수는 지금의 우리가 진정으로 바깥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며 역사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되짚어주고 있다.

 

사람의 역사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면 집만 볼 것이 아니라 길도 함께 보아야 한다. -208p

 

바렌츠를 막았던 얼음이 녹듯이, 이 땅 한반도에도 해빙이 올까? 청어가 넘쳐나던 동해로, ‘환동해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283p

 

  그러므로 해양사의 명장면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닷길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역사적 항구도시 부산의 역할은 자연스럽게도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속을 뜨끈하게 채워주었던 미역국에서부터 조선의 물고기라 불리던 청어, 우리나라 해양 교류의 중심지인 부산에 이르기까지 바다에서 시작된 다양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삶 가운데 깊이 녹아들어 현재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해양사의 명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와 친절한 설명으로 인문학 도서, 그리고 해양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를 쌓으며 항해한 우리는 '오늘'에 도착했다. 멈추지 않고 다시 모험을 준비해야 할 지금, 해양사의 명장면을 통해 새로운 바다를 만나보기를 바란다.

 

 

해양사의 명장면 - 10점
김문기 외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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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출판도시 인문학당

『해양사의 명장면』조세현 저자 강연

 

 

 

 

 

"본디 바다는 인류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항해시대에 이르러 인류는 고요한 바다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고,

교류와 기회로서 바다가 탄생했다.

그 바다에서 문명은 서로 부딪히고 겨루며

역사의 명장면들을 만들어냈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들이 '해양'을 주제로 연구해 펴낸 『해양사의 명장면.  이 책은 근대 초기 중요 공간이었던 바다를 배경으로 일어난 해양사의 명장면들을 다양한 해석과 함께 담았습니다.

여섯 명의 교수는 전공이 각기 다른 만큼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도 다양한데요, 이번 강연에서는 조세현 교수님을 모시고 해양사의 명장면 중에서도 '해양 중국'에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일시: 8월 20일(화) 저녁 7시 

장소: 산지니 X 공간

신청 URL: http://naver.me/5HNY5KYW

* 현장에서 도서 구입 가능합니다

 

 

 

해양사의 명장면


김문기, 박원용, 박화진, 신명호, 이근우, 조세현 지음 | 신국판 변형 | 20,000

9788965456100 94900


바다를 기반으로 출발한 부경대학교와 해양도시 부산의 산지니출판사가 함께 내는 해역인문학 시민강좌 총서, 그 첫 번째 책. 부경대학교 사학과 여섯 명의 교수는 ‘해양’이라는 주제 아래 관련 분야 최전선에서 꾸준한 연구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책에는 서양 근현대사에서 ‘해적’의 역할부터 조선 시대 ‘조선통신사’를 통한 문화교류 양상까지, 저자 각각의 시선으로 바라본 해양에 대한 다양한 역사와 해석이 담겨 있다.


 

 

 

 

 

 


해양사의 명장면 - 10점
김문기 외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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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부터 동북아까지,

해양 교류와 분쟁의 역사를 들여다보다

 

바다를 기반으로 출발한 부경대학교와 해양도시 부산의 산지니출판사가 함께 내는 해역인문학 시민강좌 총서, 그 첫 번째 책. 부경대학교 사학과 여섯 명의 교수는 ‘해양’이라는 주제 아래 관련 분야 최전선에서 꾸준한 연구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책에는 서양 근현대사에서 ‘해적’의 역할부터 조선 시대 ‘조선통신사’를 통한 문화교류 양상까지, 저자 각각의 시선으로 바라본 해양에 대한 다양한 역사와 해석이 담겨 있다.

 

 

 

 

 

▶ 두려움과 공포의 바다부터 교류와 기회의 바다까지

여섯 명의 저자가 바다를 통해 다시 본 역사

 

본디 바다는 인류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대항해시대에 이르러 인류는 고요한 바다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고, 교류와 기회로서의 바다가 탄생했다. 그 바다에서 문명은 서로 부딪히고 겨루며 역사의 명장면들을 만들었다. 이 책은 근대 초기 중요 공간이었던 바다를 배경으로 일어난 ‘해양사의 명장면’들을 담았다.

저자 여섯 명의 각기 다른 전공만큼 담고 있는 장면도 다양하다. 서양 근현대사를 전공한 박원용 교수는 서양 근대사에서의 해적의 역할과 해양공간의 교류가 만든 일상의 변화를 전한다.

중국 사상문화사와 동아시아 아나키즘을 깊이 섭렵한 조세현 교수는 해양 시각으로 본 근대 중국 형성을 연구했다. 그는 청나라 최강 북양함대가 일거에 몰락하는 과정, 중국 ‘해양영웅’ 정성공 이야기를 전한다.

한국고대사를 전공하고 대마도 연구, 해도와 지도 연구를 활발히 하는 이근우 교수는 해도로 보는 조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선통신사 연구의 권위자 박화진 교수는 조선통신사, 왜관 등 바다를 매개로 한 한일 관계사를 깊이 연구했다. 박 교수는 해양교류 측면에서, 조선통신사의 왕래길과 초량왜관 스캔들 등에 관해 전한다.

조선 왕실 문화·역사를 연구한 신명호 교수는 관음 신앙을 해양문화 관점에서 조명하고, 주역, 영남 해로, 해상 진상품 등을 통해 유교 나라인 조선의 해양 인식을 들여다본다.

환경사, 해양사, 기후 관련 역사를 연구한 김문기 교수는 ‘청어’를 중심으로 해양사를 소개한다. 청어는 유럽 한자동맹, 네덜란드의 성장 등 세계사에 영향이 컸고, 조선이 19세기에 바다를 중국에 여는 상황 등에서 흥미롭고 중요한 구실을 한 물고기이다.

 

 

 

 

 

 

▶ 근대의 바다를 보며 미래의 바다를 조망하다

 

흔히 ‘근대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바다에 대한 지식과 활용이 근대의 지평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근대 이전 ‘육지’ 중심의 제국에서 ‘바다’ 중심의 근대 제국으로의 전환기에서 어떤 나라는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환기에 조선은 어떠했을까? ‘바다’를 다루는 역량이 부족해 근대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침체기를 겪고 말았다.

해양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에 대한 중요성은 21세기인 지금도 다르지 않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바다를 둔 한국에서 해양의 활용은 정치, 경제, 외교 등의 분야에서 모두 빠질 수 없는 카테고리 중 하나이다.

해양사의 명장면을 통해 ‘해양’이라는 공간을 이해하고, 그 지식을 넓혀보는 건 어떨까. 독자들이 근대의 바다를 보며 미래의 바다를 조망하기를 기대한다. 해양을 얼마만큼 알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 고지도, 문서, 사진 등 120여 종의 풍부한 사료를 담다

 

해양사의 명장면』 속 여섯 명 저자의 시각자료 활용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서는 고지도, 문서, 사진 등 한국사, 서양 근현대사, 일본사, 환경사, 해양사를 전공한 교수들이 모은 각 분야의 자료를 수록했고, 이를 보는 해석을 덧붙였다. 예를 들면 일본 에도시대 화가 가노 미쓰노부의 그림 「조선통신사환대도병풍」에서는 국서전명식 구경꾼들이 해학적으로 묘사된 장면이 있다. 저자는 이를 보며 그 당시 조선통신사에 대한 에도 사람들의 열렬한 호감을 유추한다. 또한 남미,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장면과 해설을 통해 해양 세력의 교류와 충돌을 볼 수 있다. 독자는 이를 통해 더욱 생동감 있는 역사의 한 장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 밑줄긋기

 

P.24 구하나하니섬의 원주민을 대면한 콜럼버스는 그들을 종교도 없는 존재이자 악, 살인, 범죄, 체포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콜럼버스는 인종적 타자를 보는 유럽의 시선을 가지고 문명사회의 성원이 지녀야 하는 가치를 결여한 존재로 원주민들을 바라보았다.

 

P.70 장더이는 서양식 교육을 받은 신형 지식인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를 비롯해 청말 대양을 건넌 중국인들은 동양(東洋)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떠났다. 그러나 구미사회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서양(西洋)을 발견했다. 과거 불교로 상징되는 인도문명에 충격을 받아 큰 변화를 겪은 이래, 과학기술로 상징되는 유럽문명의 출현은 세계관의 전환을 가져왔다. 물론 중국 중심적 세계관에 익숙했던 그들에게 오랑캐의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데는 심리적 갈등과 더불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P.79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설명할 때, 전통시대에서 근대 시기로 넘어오는 것을 흔히 ‘책봉조공 체제에서 만국공법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만국공법(萬國公法)은 좁은 의미에서 책제목이고, 넓은 의미에서 국제법의 또 다른 명칭이다.

 

P.100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이란 용어는 원래 아시아의 바다를 양분하는 개념이었다. 중국인이 해양활동을 확대하면서 아시아의 바다를 동서로 구분한 것에서 시작했는데, 점차 중국 남해(현재의 남중국해)를 기준으로 동쪽을 동양으로, 서쪽을 서양으로 각각 지칭했다.

 

P.106 조선은 1402년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보기 드문 세계 지도를 제작하였다. 동으로는 일본열도로부터 서로는 아프리카까지 나타내고 있는 세계지도이자,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지도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다.

 

 

 

 

 

저자 소개

김문기

부경대 사학과 교수

근세 동아시아 환경사, 해양사 전공

 

박원용

부경대 사학과 교수

서양 근현대사 전공

 

박화진

부경대 사학과 교수

일본사 전공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사 전공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한국고대사 전공

 

조세현

부경대 사학과 교수

중국 근현대사, 해양사 전공

 

           

 

 

 

해양사의 명장면


김문기, 박원용, 박화진, 신명호, 이근우, 조세현 지음 | 신국판 변형 | 20,000

9788965456100 94900


바다를 기반으로 출발한 부경대학교와 해양도시 부산의 산지니출판사가 함께 내는 해역인문학 시민강좌 총서, 그 첫 번째 책. 부경대학교 사학과 여섯 명의 교수는 ‘해양’이라는 주제 아래 관련 분야 최전선에서 꾸준한 연구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책에는 서양 근현대사에서 ‘해적’의 역할부터 조선 시대 ‘조선통신사’를 통한 문화교류 양상까지, 저자 각각의 시선으로 바라본 해양에 대한 다양한 역사와 해석이 담겨 있다.


 

 

 

 

 

 

 

해양사의 명장면 - 10점
김문기 외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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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북투어 여행기]

 

 

2018년 2월 8일(목)~ 2월 11일(일) 진행된

『저항의 도시, 타이베이를 걷다』 북투어

비 오는 타이베이를 걸으며

산지니 어둠 여행단을 보고 느끼고 나눴던

그 시간들을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7화 

 대만은 지방인가 국가인가?

by. 조세현(부경대 사학과 교수)

 

 


대만은 중국의 지방일까? 독립적인 국가일까?

 

 

▲ 중국과 대만의 지도

 

 

 오늘날 대만臺灣이라는 지역은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여기서 중화민국은 청조淸朝의 멸망과 함께 1912년에 건국되어 37년간 중국을 지배하다가 1949년 중국공산당 세력에 패퇴하여 대만으로 옮겨왔다. 오랜 기간 동안 중국대륙의 통치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대만을 통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과 중화민국은 실질적으로는 중국대륙과 대만 섬을 각각 지배하고 있지만, 명분상으로는 양자가 모두 대륙과 대만을 자국의 영토라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지역명칭에 불과했던 대만이란 이름을 국가명과 구분하지 않고 부르고 있다. 어쩌면 국제사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의 국호를 인정하지 않기에 더욱 ‘중국과 대만’이란 구도로 이해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중화민국과 대만사이에는 역사정체성과 관련한 뿌리 깊은 문제가 숨겨져 있다.

 

  대만이라는 나라는 중국일까 아닐까? 우리가 보통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믿는 상식과 달리 요즘 다수의 대만인들은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대만인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전환은 이미 소수의 견해가 아니라 국가권력 차원에서 이루어지기에 더욱 놀랍다. 대만사회에서 자신이 대만인이라고 여기는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중국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감소하지만, 여전히 중국으로부터 독립보다는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비록 대만사회 내부에서조차 중국과 대만이라는 명칭 갈등상황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대만을 바라볼 때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중국(대륙)이냐 대만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서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접근하는 태도이다.

 

 

 대만은 중국과의 역사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을까?

 대만사관련 다양한 해석 가운데 대만사연구자인 이수붕李筱峰의 견해를 빌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중국당국이 항상 대외적으로 “대만은 예로부터 중국의 신성한 영토의 일부분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사실이 이와 같은지 문제를 제기한다. 대만은 1684년 청 제국의 영토에 편입되면서 비로소 중화제국 통치아래 일부분이 되었다. 그 전에 대만은 중국의 어떤 왕조정권에게도 통치를 받지 않았다. 만약 대만이 예로부터 중국영토의 일부분이었다면 대만역사상 출현한 첫 번째 통치정부는 중국이어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며 실제로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인이 대만통치를 시작할 무렵 당시 명 제국은 이를 동의하였다. 대만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경영하고 있을 때에는 중국영역이 아니었으며, 정성공이 대만에 정권을 수립하면서 비로소 명의 영역에 들어왔고, 다시 청이 대만의 통치권을 빼앗으면서 청의 영토 안으로 들어왔다고 본다.

 

  대만이 중국에 예속된 시기는 청이 통치하던 211년간이다. 그러나 청 제국이 대만을 병탄했지만 한참동안 이 섬을 정식영토로 보지 않아 봉산금해封山禁海의 정책을 폈다. 1684년부터 100여년 이상 엄격한 해금정책을 폈으며 1875년 이후에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이민을 개방하였다. 그래서인지 대만이 중국에 예속된 것은 청대부터 처음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에 대만사가 중국사에 포함된다고 믿는 것은 상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청조가 대만을 진정한 자신의 영토로 인식한 것은 18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1895년의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대만은 다시 일본에게 영구 할양되었다.

 

 

▲ 삼국간섭 삽화, 출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2%BC%EA%B5%AD%EA%B0%84%EC%84%AD)

 

 


  중화민국은 1912년 건국되었는데, 당시의 대만은 일본통치아래 식민지였다. 따라서 대만은 중화민국의 건국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원래 중화민국의 영토에 속하지도 않았다. 1912년부터 1945년까지 중화민국의 범위에는 대만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만은 비록 중화민국의 관리아래 놓였으나 실제로는 중화민국정부가 연합국을 대신하여 잠시 관리한 ‘주권이 정해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대만과 팽호(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의 작은 섬)의 영토귀속은 반드시 연합국과 일본이 정식 평화조약을 체결해야만 영토의 귀속이 확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1949년 중화민국정부는 중국공산당에 패배해 대만으로 철수하였으며, 결국 중화민국의 범주는 대만과 팽호로 축소되었다. 이런 해석에 따라 다수의 대만학자들은 대만은 고대시기에 중국에 속하지 않았고, 청대에도 통치범위가 대만 섬 전체에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역사 거주민 문화 정체성 및 국제법상으로 독립된 국가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대만학계가 위와 같은 하나의 역사해석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대만 내 통일파와 독립파, 혹은 국민당과 민진당 간에 대만사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복잡하게 엉켜있다. 단순화시키자면 어떤 사람들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분으로 중국인이 개발했지만, 단지 대만개발이 비교적 늦었고 장기간에 걸친 이민으로 형성된 사회로 대륙과 상이한 경험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대만역사는 중국역사의 일부분이며, 대만사는 중국의 지방사라는 관점을 가진다. 이에 반해 다른 사람들은 대만은 예부터 중국의 영토가 아니며 항상 외래정권의 통치를 받았다고 믿는다. 즉 대만은 이전에 한 번도 대만인 스스로가 주인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역사정체성을 둘러싼 다양한 역사해석이 대만의 역사교과서 편찬을 둘러싸고 역사논쟁으로 확대되면서 역사교육에 관심이 있는 교육계와 정치계도 논쟁에 참여했고 언론매체를 통해 일반대중도 광범하게 논쟁에 동참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만정치가들이 대만사 연구 성과를 자의적으로 대만독립(혹은 그 반대)에 이용하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곤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잦아졌다.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한편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대륙과 대만의 역사관계를 본격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대만과 팽호를 병칭하여 대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한인 위주의 역사서술을 하면서 대만의 고산족의 기원도 중국 화남지역에서 이주한 고인류로 보고 있다. 정성공에 대해서는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를 몰아내 대만을 수복한 민족영웅으로 높이 평가하고, 청대의 대만통치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통해 대만의 중국 귀속여부를 당연한 일로 여긴다. 일본식민통치시대 역시 항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연구하며 대륙과 대만동포 간 상호협력을 강조한다. 대륙학계는 “대만은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분”이라는 관점을 줄곧 유지해 왔으며, 기본적으로 대만사는 중국의 지방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에 충실하여 논쟁적이기보다는 통일적인 입장을 취하는 특징을 보인다.

 

  대만사가 오랫동안 중국연구의 영향을 받아서 중국사 가운데 지방사의 하나였지 독립국가의 역사로 인식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중원중심의 국가관을 해양국가관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나, 한족중심의 편견을 버리고 다족군多族群사회라고 보는 것이나, 정권교체가 빈번한 이민사회라고 보는 현상은 결국 새로운 대만사를 건립하려는 목적과 맞물려 있다. 이로 말미암아 전개된 대만의 역사논쟁은 독립파와 통일파 사이의 논쟁은 물론 대만독립파 내부에서도 전선이 형성되었고, 대륙학계 역시 이 논쟁에 가세하여 중국의 대만사학자와 대만의 독립파학자 간에서도 논쟁이 이루어졌다. 대만사회에서 대만사라는 하나의 역사에 복수의 역사학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상황은 중화민국사와 대만사 사이에서 방황하는 대만지식인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 8화에서 계속 

 

 

 

 

저항의 도시, 타이베이를 걷다 - 10점
왕즈홍 외 지음, 곽규환 외 옮김/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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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화교의 역사』의 저자이신 조세현 교수님~

이번에 『해양대만과 대륙중국 - 대만을 둘러싼 역사논쟁』이라는 신간을 발간하셨네요^^

반가운 마음에 기사 담아왔습니다ㅎㅎ

『부산화교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조세현 부경대학교 교수(사학과,사진)는 17일 동아시아 해양사에 대한 안목을 넓혀줄 저서 『해양대만과 대륙중국 - 대만을 둘러싼 역사논쟁』(부경대학교 출판부 발간, 367쪽)을 출간했다.

한국연구재단의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 지원으로 부경대학교 출판부의 해양인문학총서 1권으로 나온 이 책은 해양대만과 대륙중국이라는 구도로 대만 역사를 둘러싼 대만학계와 중국학계의 논쟁과 대만학계 내부의 통독논쟁을 서술한 한 저서다.

 

(중략)

 

조 교수는 서강대학교 사학과 학·석사과정을 마치고 북경사범대학 역사과에서 중국근현대 정치사상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淸末民初無政府派的文化思想』(中國, 社會科學文獻出版社),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교류와 연대』(창비), 『부산화교의 역사』(산지니), 『천하의 바다에서 국가의 바다로』(일조각) 등이 있다. 

김태현 기자

 

 

 

기사 전문 읽기 (한국경제)

 

 

부산화교의 역사 - 10점
조세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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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왼쪽)와 순종황태자가 근대 군대식 복장을 하고 나란히 섰다. 사진출처: 부산일보


1895년 8월 20일 경복궁에 잠입한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시해하고 암매장한다. 을미사변이다. 황후의 국장은 2년이 훌쩍 지난 1897년 11월 21일에야 치러진다. 아관파천과 환궁, 대한제국 선포 과정에서 고종은 황후의 복수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칙령에서 을미사변을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해 법령을 혼란시킨 만고에 없던 일'로 규정하고 을미의병들이 국모 복수를 위해 충절로 궐기했다고 평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편전에 해당하는 경소전을 황후의 혼백과 유해를 안치한 빈전으로 삼음으로써, 통치의 우선 과제에 황후의 복수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황제 즉위 절차적 정당성 획득 노려 
근대화 압력 맞선 군주제 변신 추적



고종은 왜 국장을 미루고 황후의 복수를 이토록 강조했을까?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는 고종이 공자의 '춘추 의리론'을 내세워 유교적 존왕론을 강화하고, 황제 즉위 과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하려 한 것으로 분석한다.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론이 19세기 서구와 일본으로부터의 개방 압력에 대응하는 고종의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은 광무개혁을 추진하며 1902년 5월부터 양경체제(서울·평양)를 공식화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평양 천도 가능성을 열어놓으려는 조치였다. 책은 황제의 어진을 평양 풍경궁에 모시는 의식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치렀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부 어진은 근대적인 사진이나 유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이후 쿠데타 세력이 양경체제를 추진하며 천황을 도쿄로 이주시킨 것과 비교되는데, 이때는 서구식 군복을 입은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활용되었다. 

지은이 신명호 교수는 대를 이어 조선을 다스려온 국왕 고종과, 수백 년 막부시대를 거치며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일본 천황의 상반된 권력 기반에서 원인을 찾는다. 전통을 잇는 국왕이 근대적 황제로 바뀐 사실만 알리기만 하면 되었던 고종과, 천황의 존재 자체를 민중들에게 근대적인 이미지로 알리는 일이 시급했던 메이지 천황의 입장차 말이다.

이렇게 책은 서구의 근대화 압력에 맞서 한국과 청, 일본, 러시아, 티베트가 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는지, 그 군주제의 어떤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는지를 살펴본다. 

국왕과 황제, 천황, 차르, 그리고 달라이 라마에 의한 정교 합일 지배 등 각국의 군주제 양상은 서구 열강의 압력과 각국의 경제 정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흘러갔다. 

'서구화=근대화'에 길들어버린 동아시아인조차 과거의 군주제를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현실이다.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군주제의 의미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부경대 사학과에 재직 중인 박원용·신명호·이근우·조세현 교수와 동북아역사재단의 박장배 연구위원이 저자로 참여했다. 

부산일보│이호진 기자│2014-11-01
원문읽기: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41101000051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 - 10점
박원용 외 지음 /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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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에 동아시아 각국의 군주와 지배 엘리트들이 군주제 유지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각국의 특수성은 어떠했는지를 비교해 살핀다.

조선은 황제를 중심으로 전제군주제를 도모했으며, 청나라에선 만주족과 한족, 군주입헌제와 민족주의가 대결했다. 

또 일본에선 막부와 장군을 중심으로 한 에도시대 군주제가 조정과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군주제로 변모했으며, 러시아의 군주정은 우익 정치세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허약한 모습을 보였다. 

티베트에선 독특한 정교합일의 전통이 달라이 라마에 투영됐다. 이들의 비교 연구는 어떤 함의를 줄 수 있을까. 저자들은 전통을 지키려는 다양한 군주론 또한 당시 근대화론이나 혁명론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부각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경북매일신문ㅣ2014년 10월 31일 

원문읽기: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33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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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극심해지는 외세의 침투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막부는 조정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이전까지 막부가 유일한 국가의사 결정기구로 작동했던 것과는 달라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외 위기와 내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통합된 의사결정기구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조정이 쇼군을 정점으로 한 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군주제를 창출하는 과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막부 중심의 체제가 수백년간 지속되면서도 천황의 종교적, 학술적 권위를 존속시킨 것은 새로운 정치체제 형성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고종(왼쪽)과 일본 메이지 천황 모습. 출처: 세계일보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유신의 관료들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전국을 순행(巡幸)하게 하고 천황의 사진, 초상과 같은 시각적인 장치들을 활용했다. 또 하나 주목한 것이 천황릉이었다. 천황 지배의 정당성을 ‘만세일계’(萬世一系·천황가의 혈통이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고 주장)라는 관념을 통해 확보하기 위해 능을 조작했던 것. 신무천황릉은 없던 것을 새로 만든 것이다.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박원용 등 지음, 산지니)는 19세기 이전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동아시아 각국의 군주제가 서양 세력과 대면하면서 겪은 변화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비교적 빠른 시기에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력한 입헌군주제를 성립시킨 일본을 비롯해 조선, 중국, 러시아, 티베트의 사례를 분석한다. 

조선의 경우 고종은 명성황후의 국장을 지연시키며 ‘국모 복수론’을 확산시켰다. ‘존왕론’을 강화시키고자 한 의도였는데 고종 자신을 중심으로 외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논리였다. 책은 “고종은 황제에 즉위한 후 정치체제를 황제 중심의 전제정치체제로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전제군주론이 바로 19세기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이 구상했던 ‘구본신참’ 또는 ‘법고창신’의 정치적 표현이었다”고 설명했다.


세계일보│강구열 기자│2014-11-06

원문 읽기: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4/11/06/20141106003749.html?OutUrl=naver


왕좌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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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

동아시아 5개국의 대응사례를 중심으로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동쪽의 왕좌를 흔들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인 19세기 이전의 동아시아 각국은 폐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적 세계질서를 축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는 동아시아라는 큰 틀에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강력한 입헌군주제인 ‘근대일본과 천황제’ 모델을 비교적 빠른 시기에 성립하자 유학파, 친일파, 외교관 등 다양한 통로로 조선과 청에 일본의 모델이 소개되고 논의되었습니다. 조선의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성립 그리고 청 왕조의 무술정변과 20세기 초의 개혁노력은 일본의 모델을 수용하고자 하는 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외에 러시아의 차르 체제도 조선과 청의 군주제에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의 신해혁명은 티베트의 독립은 물론 베트남 군주제를 약화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군주‘론’과 군주‘이미지’로 살펴보는 5개국의 근대 군주제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에서는 ‘군주론’과 ‘군주이미지’ 라는 두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5개국의 역사를 비교합니다.
1부에서는 위기를 맞이한 각각의 군주제를 지탱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는지 비교하였고, 2부에서는 사건이나 구체적인 조치들을 통해 각국의 군주제가 어떠한 이미지를 구축하려 하였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전제군주제를 도모한 조선
 조선의 고종은 명성왕후의 국장을 늦추며 ‘국모 복수론’을 확산시키고 존왕론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후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전제군주론을 본격화했습니다.
또한 광무시기에 고종황제는 평양에 궁을 짓고 그곳을 서경으로 승격하는 양경체제를 구축하려 했는데,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명분으로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이용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했던 서경의 영숭전을 계승하겠다는 의도였지요. 일본에서도 명치시기에 교토와 도쿄를 수도로 삼고자 했는데, 광무시기와 명치시기의 양경(兩京)체제 추진은 근본적으로 서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이므로 비슷하게 보이지만 사실 다른 점이 많습니다. 따라서 양국의 양경체제 추진은 서구 앞에 선 한일 양국의 역사적 경험을 비교하기 좋은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만주족과 한족, 군주입헌제와 민족주의가 대결한
 청나라의 사례로는 청말신정(淸末新政) 시기, 단방(端方)이라는 만주족 고위관료를 중심으로 한 다섯 대신의 구미 여행과정과 그들이 귀국하여 전개한 입헌군주론이 예비입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고 관제개혁은 어떻게 실패하였는지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팔기제도를 개혁하고 만한차별을 폐지하며 황권을 강화하려 함으로써 청말신정 시기 고조된 민족주의에 따른 만주족과 한족의 갈등이 가져온 군주입헌제의 굴절과 정치적 혼란도 조명하였습니다. 이민족 정권인 청조의 특성상 군주입헌제 변혁을 주도하기는 힘들었고,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가 승리하였습니다.


명치유신으로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빠르게 다진 일본
 일본의 경우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 과정에서 국가의사결정기구가 막부와 조정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나 위기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안정적이고 강력한 국가의사결정기구, 즉 정부(政府)가 필요해지면서 막부와 장군을 중심으로 하였던 에도시대의 군주제를 폐지하고 조정과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군주제를 창출하게 되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명치유신 관료들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천황이라는 존재를 적극 활용하였고, 천황 지배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천황릉을 이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없던 천황릉을 새롭게 만들기도 하고, 원분이나 방분을 전방후원분으로 둔갑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전제정 지지파의 유대인 탄압과 사회주의 세력의 러시아
 전제정의 위기가 가속화하던 러시아에서 군주제를 수호하고자 한 대표적 우익 조직인 러시아 민족동맹은 유대인 박해가 전제정의 수호와 민족의 이익과 가치 보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러시아 군주정이 우익정치세력들의 지원에 의지하여 전제정을 수호하려는 시도이자, 전제정의 취약한 지지기반과 반대세력을 확실히 제압할 수 없었던 허약한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러시아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베일리스 사건은 많은 시사점을 남깁니다.


독특한 정교합일의 정점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티베트의 군주론에서는 군주권 계승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이론이자 방법인 ‘활불 전세’ 제도, 달라이 라마를 정점으로 하는 중층적인 ‘정교합일 체제’라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1912년 이후 달라이 라마는 청 황제의 권위를 완전히 대신하여 티베트 사회의 구심점으로 존재했습니다. 또한 티베트에서 군주의 모습은 여전히 불교교단 수장의 이미지와 겹칩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이미지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뿐 아니라 통합된 티베트를 만들어내는 티베트 민족주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근대화냐 전통이냐? 이분법을 넘어서는 동아시아 연구

 근대화 성공 여부로 동아시아의 근대사를 해석하려는 서구적 관점의 기존 연구는 전통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군주제를 지지하는 전통적 지식인이었던 각국의 주류 세력은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여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혹은 군주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군주론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새로운 군주론과 그에 입각해 전개한 정치개혁운동, 사회개혁운동, 사상개혁운동 등은 당시의 근대화론이나 혁명론 못지않게 중요했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티베트는 모두 군주제를 경험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한 이들 4개국에서 현재 군주제의 양상이나 영향력을 찾아보기는 어려우며, 군주제에 내리는 평가 역시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일국적, 서구적 관점을 넘어선 새로운 시도인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는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티베트가 서구 열강에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어떤 대책을 세우고 개혁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같으면서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연구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저자

박원용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박물관장을 겸하고 있다. 저서로 『19세기 동북아 4개국의 도서분쟁과 해양경계』(공저), 『대중독재와 여성: 동원과 해방의 기로에서』(공저) 등이 있고 『E. H. 카 평전』, 『10월혁명: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 등의 번역서가 있다.

박장배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근현대 중국의 티베트 통합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연구 사업을 하고 있다. 저서에는 『역대 ‘중국’의 판도(版圖) 형성과 ‘변강’지배』(공저), 『중국 동북 연구-방법과 동향』(공저) 등이 있다.

신명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왕실문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조선공주실록』,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이근우 서울대 동양사학과, 한국학대학원 석ㆍ박사과정을 거쳐 일본 경도대학 일본사교실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에 재직 중이며 대마도연구센터 소장을 겸하고 있다. 저서로는 『고대왕국의 풍경』, 『부산 속의 일본』, 『대한민국은 유교공화국이다』 등이 있다.

조세현 서강대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북경사범대학에서 중국 근현대 사상사와 문화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淸末民初無政府派的文化思想』,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교류와 연대』, 『부산화교의 역사』 등이 있다.

 

 

차례

책을 펴내며
 서장

제1부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기 위한
 동아시아 5개국의 군주론 비교연구

1장 을미사변 후 고종의 국모 복수와 군주전제론
2장 청말신정 시기 오대신출양과 군주입헌론의 전개-단방을 중심으로
3장 막말기의 새로운 권력구조 구상
4장 러시아 군주정의 구원투수-러시아 민족동맹의 형성과 전략을 중심으로
5장 19세기 말, 20세기 초 티베트의 군주론의 변용

제2부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기 위한
 동아시아 5개국의 군주이미지 비교연구

6장 광무 명치시기 양경체제 추진과 군주이미지 활용 비교연구
7장 청말신정 시기 만한갈등과 군주입헌론의 굴절-관제개혁과 만한평등책을 중심으로
8장 명치정부의 무대장치 천황릉
9장 러시아 전제정의 반격-베일리스 사건의 상징성을 중심으로
10장 20세기 전반기 달라이 라마의 이미지 변화-자연재해와 관련하여


참고문헌
색인


 

 

 

 

 

『근대 서구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군주제』

동아시아 5개국의 대응사례를 중심으로

박원용 박장배 신명호 이근우 조세현 지음 |
역사 | 신국판 양장 | 384쪽 | 28,000원
2014년 10월 27일 출간 | ISBN :
978-89-6545-267-6 93910

근대의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티베트가 서구 열강에 받은 영향과 대응방식을 다룬 책. 근대화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를 기준으로 역사를 해석하려는 관점을 지양하고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를 동아시아라는 큰 틀에서 파악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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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저자 조세현 교수, 김필남 평론가.

산지니 6월 저자와의 만남
『부산화교의 역사』, 조세현

 

6월 11일 수요일 서면 러닝스퀘어에서 산지니와 『오늘의문예비평』이 함께하는 저자와의 만남이 열렸습니다. 이번으로 벌써 60회를 맞는 6월 저자와의 만남 주인공은 『부산화교의 역사』를 쓴 조세현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입니다.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인 김필남 평론가가 즐거운 대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로컬문화총서 04
『부산화교의 역사』
조세현 지음
역사 | 국판 양장 | 208쪽 | 16,000원
2013년 12월 30일 출간 | ISBN : 978-89-6545-236-2 94300

인천화교가 중심이었던 기존 한국화교 연구의 폭을 확장한 저서로서, 부산화교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시대에 따라 청국조계지, 시나마치(支那町), 청관(淸館)거리, 상해(上海)거리로 불리던 부산화교의 역사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까지 되짚을 수 있다.

 

 

가장 먼저, 한국에서는 인천화교가 가장 유명한데 부산화교를 대상으로 책을 쓴 계기를 묻자 “사투리는 쓰지 않지만 초중고 모두 부산에서 나온 부산 사람”이라며 시민 인증(?)부터 한 저자는 전공인 중국 근현대사상과, 성장했고 또 몸담고 있는 도시인 부산을 연결할 수 있는 주제를 찾다 부산화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저자는 “앞으로의 연구에 돌 하나 얹는 마음”으로 쓴 책이라며 대담 내내 겸허한 모습이었지만 부산화교에 대해서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분명한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크고 중요한 것들만 연구할 가치가 있는 건 아니겠죠?

이야기는 한국, 그중에서도 부산 화교의 특징으로 이어졌습니다. 전 세계 화교는 대다수가 중국 복건성이나 광동성 출신의 남방화교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화교들은 특이하게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동 화교가 많습니다. 인천에 들어온 화교들이 주로 노동자임에 반해 부산의 화교는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 차이나타운의 지원을 받은 복건성 출신의 화교 상인들이 들어옵니다.

 

경청하는 독자 여러분.



초창기 부산화교는 청나라 조정의 지원을 받은 지배자로서 등장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상해네트워크’(19세기 후반 상해를 중심으로 영국제 면직물을 수입하여, 다시 상해에서 화북지역, 조선, 일본 등으로 재수출하는 유통구조-『부산화교의 역사』에서 인용)를 언급하셨는데요.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는 것이 초기 한국화교, 인천화교와는 다른 점이라고 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부산에도 산동화교들이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초반에는 화교가 청조의 지원을 받은 지배자로 등장하지만 청일전쟁을 겪으며 바뀝니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 때문에 통일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화교를 백안시하고, 한국 화교들의 국적도 대만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1992년 한중수교가 성사되자 한국과 대만의 관계는 끊어지고 화교의 정체정에도 혼란이 옵니다. 이외에도 박정희 정권의 화교억압정책 등 한국의 화교들은 역사적 사건에 따라 다사다난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부산을 배경으로 한 주제이니만큼 참가하신 분들도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는데요. 현재 부산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와, 부산화교의 상징적 건물 봉래각, 차이나타운 축제와 발전, 화교억압정책, 짜장면(!) 등 다양한 제제의 문답이 오갔습니다.

 

 

원래 이번 행사는 초량 차이나타운 축제 때 한중우호관에서 개최하려고 했는데, 세월호 참사로 축제가 무기한 연기되자 불가피하게 장소를 서면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유익한 시간이라 모두가 즐거웠지만 단 한 명, 대관을 담당한 편집자 Y의 마음은 빠듯한 시간 때문에 원래 콩만 했던 것이 아예 좁쌀이 되었다나 어쨌다나.

재미난 이야기 들려주신 선생님과 대담자 김필남 선생님, 와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다음 저자와의 만남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청국조계지에서 상해거리까지─『부산화교의 역사』(책소개)

 

 

부산화교의 역사 - 10점
조세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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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家好!
여러분
안녕하세요, 산지니입니다.

계간 『오늘의 문예비평』과 함께하는 제 60회 산지니 저자와의 만남 주인공은 『부산화교의 역사』 저자 조세현 교수님입니다.

혹시 부산 초량 차이나타운과 금강산의 공통점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다른 이름을 넷이나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이 달라지지만, 차이나타운은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지요. 청국조계지, 시나마치(支那町), 청관(淸館)거리, 상해(上海)거리로 말입니다. 각각의 이름에 따른 차이나타운의 역사, 그리고 부산의 역사를 함께 짚어보게 될 이번 저자와의 만남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행사는 1시간가량 진행하며 참가비는 없습니다. 행사 중 토스트와 음료를 무료로 드실 수 있고 추첨을 통해 산지니 책을 선물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일시: 2014년 6월 11일 수요일 저녁 7시
장소: 러닝스퀘어 서면점 (동보플라자 맞은편 모닝글로리 3층)
대담: 김필남(『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주최: 산지니, 오늘의문예비평

 

청국조계지에서 상해거리까지─『부산화교의 역사』(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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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전복라면 편집자입니다.

점심을 먹고, 오늘 저녁 이주홍 문학상 시상식에 갈 편집자 Y를 따라 이규정 소설가께 선물할 꽃을 사러 갔습니다. 오는 길에 꽃을 들고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Y가 졸업사진 같다고 놀렸어요. 이상도 하지, 꽃과 제가 한데 있으면 구분이 잘 안 될 텐데 어떻게 찾아냈을까요...Y는 역시 눈 밝은 편집자. 하하하^^;

 

북디자이너를 기다립니다>> http://sanzinibook.tistory.com/notice/1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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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이 닿는 곳에 화교(華僑)가 있다.’

화교들의 적응력을 빗댄 말이다. 국내에선 중국과 가깝고 개항 역사가 긴 인천 화교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인천과 더불어 대표적인 개항지였던 부산은 어떨까?

조세현 부경대 교수(사학)가 최근 펴낸 ‘부산화교의 역사’(산지니)는 인천 화교에 가려진 부산 화교와 화교촌의 어제와 오늘을 연구한 책이다. 특히 그간 잘 조명되지 못했던 한중 수교(1992년) 이전 부산 화교의 역사가 담겼다.

부산 화교촌은 부산 동구 초량동 일대로 오늘날 ‘상해거리’로 불리는 지역이다. 지금도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과 한의원이 들어서 있고, 중국풍의 주민센터가 있는 부산의 차이나타운이다.

부산 화교의 기원은 임오군란(1882년) 후 조선과 청나라가 무역협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4년 지금의 초량동에 청국 영사관인 ‘청관(淸館)’이 들어서고 청국인 거주를 위한 조계지(租界地)가 인천의 3배 규모로 들어서면서 화교가 본격 유입됐다. 조 교수는 “개항 초기 부산 화교는 인천 화교의 주류인 산둥계가 아닌 남방의 광둥계였다”며 “나가사키, 고베 등 일본 개항지에 진출했던 광둥계 중국 상인이 부산으로 건너온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1893년 조사 당시 인천 화교의 인구가 711명일 때 부산 화교 인구는 142명이었다.

부산 화교는 당시 조선의 화교가 그랬듯 주로 포목점이나 중식당을 운영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1913년 청국 조계지를 없앤 뒤로는 면제품 수입을 겸하던 포목점에서 중식당으로 업종을 바꾸는 이들이 늘었다. 이 시기는 값싼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 ‘화공(華工)’과 ‘화농(華農)’이 유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부산 화교촌의 명칭도 시대별로 부침을 겪었다. 개항 초기 ‘청국 조계지’였던 것이 일제강점기에는 ‘시나마치(支那町)’로, 광복 이후에는 ‘청관거리’로 불렸다. 6·25전쟁 이후 주한 미군을 상대하는 유흥가가 들어서면서 ‘텍사스촌’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곳은 한중 수교 이후 부산시가 중국 상하이 시와 자매결연을 하면서 오늘날의 ‘상해거리’가 됐다.

부산 화교 사회의 확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6·25전쟁 때였다. 전쟁으로 화교 피란민이 몰려들면서 1942년 230명이던 부산 화교는 전쟁 기간 5000명을 웃돌았다. 전국 화교 5명 중 1명꼴로 부산에 살던 시절이다. 청관거리 인근에 ‘충효촌’이라는 화교 피란촌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1960, 70년대 한국 정부의 화교 차별로 화교 상당수가 대만으로 떠나가면서 활기를 잃었던 부산 화교촌은 한중 수교 이후 중국 국적의 ‘신화교’가 대거 유입되고 있다. 조 교수는 “양안 관계 때문에 대만 국적의 구화교와 신화교의 관계가 정치적으로는 껄끄러운 측면이 있지만, 신화교가 음식점을 열며 대거 진출한 초량동 일대에서는 구화교와 신화교가 잘 어울려 지내는 편”이라고 말했다. 2002년 현재 한국의 화교 인구는 2만1782명으로 서울 34%, 인천 15%, 부산 14% 순으로 조사됐다.

 

 

 

2014. 02. 13 동아일보 우정렬 기자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140213/60806520/1

책소개: 청국조계지에서 상해거리까지─『부산화교의 역사』(책소개)

 

부산화교의 역사 - 10점
조세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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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조계지에서
상해거리까지,

부산화교의 역사

 

 

“바닷물이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 이 말 들어보셨죠? 세계 각국에 널리 정착한 화교의 특성을 비유하는 말이지만, 한국의 대표적 차이나타운인 인천이 항구도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재미있기만 한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제일의 항구도시 부산은 어떨까요? 여러분들은 한국의 화교 하면 어디가 제일 먼저 떠오르시는지요? 한국의 화교 연구는 대체로 인천화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타 지역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수준입니다. 일반인들의 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시 동구 초량에 위치한 부산 차이나타운 특구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관심의 대상은 매년 열리는 축제며 중식당 등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산지니 로컬문화총서의 네 번째 책인 『부산화교의 역사』는 한국화교 연구의 폭을 확장한 저서로서, 부산화교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차이나타운에 거주한 화교들의 출신이 시대에 따라 바뀌면서 그곳의 이름 또한 조금씩 달라졌는데, 이 책은 그 네 가지 이름인 청국조계지, 시나마치(支那町), 청관(淸館)거리, 상해(上海)거리로 구분·전개되며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화교의 역사에서 부산의 역사를 읽는다

부산에 화교가 이주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후반으로, 임오군란 후 조선과 청국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부터입니다. 1880년대 초반부터 일본의 개항도시에서 거주하고 있던 일부 화교가 일본인들을 따라 부산에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에서 무역을 하던 광동 출신 화상이 종업원을 보내 부산에서 덕흥호(德興號)라는 지점을 개업하려 했지만 이미 부산에 들어와 있던 일본 상인들과 마찰이 생기며 청일 간의 외교 분쟁으로까지 번진 ‘덕흥호사건’부산화교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부산에 청국영사관 설치도 잠정 결정되고 청국조계 후보지도 확정되었습니다. 덕흥호사건은 인천 등 개항지 청상(淸商)들이 중국에 본점을, 조선에 지점을 두는 방식과는 다른 사례로서, 부산화교의 기원이 일본에 거주하던 화교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비롯해 조선을 사이에 둔 청과 일본의 힘겨루기가 팽팽했던 근현대사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한편,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일본인들은 차이나타운을 중국인(지나인, 支那人)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시나마치(支那町)로 불렀습니다. 이 시기 화교들은 적성국 국민이 되어 정치적 탄압을 받았으며, 특히 지리적으로 일본과 긴밀했던 부산에서 화교의 활동은 더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 등으로 화교 다수가 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해방 후 한국화교는 남북분단과 국공내전을 시작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는데, 내전을 피해온 중국인들로 인해 부산의 화교인구도 다른 도시처럼 제법 증가하였습니다. 화교에게 또 다른 변화를 안겨준 계기는 한국전쟁입니다. 한국전쟁에 따른 냉전은 화교들에게 대륙과 대만 중 하나를 조국으로 선택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국가 개념을 생성하게 하였으며, 몰려드는 피란민으로 인해 부산의 영주동, 황령산 일대, 서면 주변 등 세 곳에 전시 화교촌이 건설되었습니다. 전쟁 직후 몇 년은 부산화교의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 부산에 머무른 화교도 적지 않았습니다. 국공내전과 특히 한국전쟁을 계기로 부산에 정착한 화교들이 일제강점기부터 거주하던 소수의 원주민을 대체하였습니다. 특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던 반공포로가 부산화교의 일부를 구성한 사실은 이채롭습니다.

 

소수자의 역사, 더 나은 지역공동체를 위한 거울

이런 초량 차이나타운은 지리적 위치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지만, 청관거리의 주인인 화교들의 출신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게다가 해방 후 미군의 텍사스거리, 러시아인의 외국인 쇼핑거리, 최근의 상해거리까지 변신을 거듭하며 다문화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사례이다.
그러나 초량 차이나타운의 역동적인 변화는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그리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중국인으로, 대만에서는 한국인으로, 심지어 대륙에서는 외국(대만)인으로 대접받으며, 한마디로 찬밥 신세였던 화교들의 신세는 기구하였다. 우리가 소수자인 화교들의 슬픈 역사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은 어쩌면 좀 더 나은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자기반성의 한 과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휴전 후 폐쇄적인 공간이던 청관거리는 화재 전 부산역에 있던 텍사스촌이 옮겨오면서 또 한 차례 변모하였고 호황도 누렸지만, 1960년대부터 한국정부가 화교의 경제활동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실시하면서 화교의 수가 감소하였습니다. 이후 1992년에 한중수교가 수립되자 부산시는 중국 상해와 자매결연을 맺고 1999년 8월에 청관거리를 ‘상해거리’로 명명하였습니다. 현재 부산의 차이나타운은 본래 화교들의 거주지에서 출발했으나 일본인, 미국인, 러시아인, 동남아인까지 거류하면서 다국적 공간의 관광명소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부산화교의 역사는 부산과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공유하며, 나아가 그 이면과 그늘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소수자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더 나은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길일 것입니다.

 

 

 

조세현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북경사범대학에서 중국 근현대 사상사와 문화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책세상, 2001), 『淸末民初無政府派的文化思想』(중국 사회과학문헌출판사, 2003),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교류와 연대』(창비, 2010) 등이 있다.

 

 

 

 

로컬문화총서 04
『부산화교의 역사』
조세현 지음
역사 | 국판 양장 | 208쪽 | 16,000원
2013년 12월 30일 출간 | ISBN : 978-89-6545-236-2 94300

인천화교가 중심이었던 기존 한국화교 연구의 폭을 확장한 저서로서, 부산화교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시대에 따라 청국조계지, 시나마치(支那町), 청관(淸館)거리, 상해(上海)거리로 불리던 부산화교의 역사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까지 되짚을 수 있다.

 

 

 

 

부산화교의 역사 - 10점
조세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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