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저자 김비 작가님의 이야기가 9월 20일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남다른 부부’가 사는 법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펴낸 박조건형·김비

▲ 일상을 드로잉하는 박조건형과 소설가 김비 부부가 함께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를 펴냈다. 우울증 환자와 성소수자인 부부는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끌어안는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만나기 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드로잉 작가와 소설가 부부,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 부부, 만성 우울증 환자와 트랜스젠더 부부. 두 사람에겐 다양한 수식이 가능하다. 실제 만난 두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 그저 ‘박조건형’과 ‘김비’ 부부였다. 세상이 어떻든, 누가 뭐라든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사랑해서, 함께 있을 때 더 빛날 수 있는 사람. ‘상대방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란 사랑의 교과서적 정의를 이들에게서 봤다.

 
박조건형(41)과 김비(47) 부부가 그리고 쓴 책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일상, 그리고 쓰다>(김영사)를 펴냈다. 25년간 앓은 우울증, 성소수자의 삶, 열악한 노동의 현장,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와 소소한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엮은 책이다. 슬플 수도, 비장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담백하고 유쾌하게 털어놓는 두 사람이 궁금해졌다. 부부를 지난 17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 예술과 인생의 조력자 


시작은 박조건형의 책이었다. 박조건형이 그린 그림을 책으로 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그의 발목을 잡았던 우울증은 이번에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책을 준비하면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책을 포기하려 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김비였다. 박조건형의 그림에 김비가 글을 보탰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첫 책이 출간됐다.


맞잡은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엔 각자 건(建)과 비(飛)가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결혼반지 대신 새긴 서로의 이름 글자다.


“짝지가 공저로 참여한 책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관심이 생겼어요. 소설가란 걸 알게 됐고,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곤 했죠. 김비 작가의 팬으로 시작된 관계죠. 그러다가 서울에 올라와 처음 만난 뒤 호감을 갖고 사귀게 됐어요.” 김비는 “처음엔 이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호기심에 만나다가 또 헤어지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를 숨기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귀한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서로의 상처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강한 끈이다. 박조건형은 “우울증 때문에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데, 옆에서 지켜봐주는 최고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비는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림과 소설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일으켜 준 것도 서로였다. 박조건형은 대학 만화예술학과에 진학했지만 우울증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다. 어머니가 있는 경상남도 양산으로 내려가 정유공장에 생산직 노동자로 취직하면서 그림을 손에서 놓았다. 하지만 데이트 도중 그려준 그림을 보고 김비가 너무 좋아했다. “만나면 자꾸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니 억지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보니 계속 그려볼까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비는 2007년 <플라스틱 여인>으로 여성동아 장편소설상을 탔지만, 그 이후에 잘 풀리지 않았다. 함부로 보관해 깨져버린 상패를 집 구석에서 찾아 정성껏 붙인 건 박조건형이었다. 박조건형은 ‘영업이사’를 자처하며 출판사에 투고를 했고, 그 결과 <빠스정류장>이 출간됐다. 김비는 “신랑이 없었다면 지금도 소설을 안 쓰고 잊혀졌을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저를 끄집어내줬어요. 서로가 서로를 끄집어내고 일으키는 과정들이 쌓여 신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 우울증을 끌어안고 사는 법


두 사람에겐 우기와 건기가 있다. 박조건형이 우울증에 빠져 무기력한 시기가 우기, 우울에서 빠져나와 활기차게 보내는 때는 건기다. 김비는 “우기일 땐 힘들어 하지만 건기일 땐 누구보다 경쾌한 삶을 산다. 보이지 않는 밧줄에 옥죄어 있다가 풀려난 사람 같다”고 말했다.


사춘기 시절 정서적 돌봄을 받지 못했던 박조건형은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박조건형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빠져나오고를 반복하다보면 절망감도 크고 지친다. 하지만 나처럼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비는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우울증 또한 박조건형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한다. 김비는 “제 정체성과도 똑같다. 나도 그걸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신랑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비가 박조건형에게 말했다. “승리하지 않아도 돼, 극복하지 않아도 돼. 버티고 있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쓰다듬으면서 살아가는 것도 멋진 삶이야.”


■ 성소수자로서 “내 꿈은 자연사”


박조건형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박조건형은 “페미니즘은 약자들의 존재를 긍정하는 철학인 것 같다. 내게도 우울증이 있으니 약자로서의 정체성이 있다. 양성 쓰기를 하면 차별적 행동이나 발언을 조심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비는 성소수자로서 누구보다 삶과 치열하게 싸워온 사람이다. 김비는 “차별이나 편견을 많이 겪었지만 애써 기억하고 살진 않는다. 제 삶에 소중한 사람들만 생각하고 살아도 정말 바쁘다”며 “성소수자로서 일상을 지켜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역할 같다. 농담으로 내 꿈은 자연사라고 말한다”고 말했다.

 

이번 책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앞으로 공동작업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지난해 42일간 다녀온 유럽 여행기도 함께 책으로 엮어낼 계획이다. “우울증을 겪으며 비를 맞았다가 해가 쨍쨍 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성소수자로서 삶의 기록을 함께 남긴다면 귀한 기록이 되지 않을까요.” 김비가 말했다.

 

경향신문 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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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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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여전히 소설을 꿈꾸는 소설가가 있다. 다만 살기 위해 자신을 감추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상처 받는 것에 익숙해져, 그것에 무뎌지는 자신을 마주하기 두려워지던 시기였다. 세상에서 고립된 게 외려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우연히 글을 쓰게 되었다. 겹겹이 쌓여있던 사연들을 내놓으며 억눌렸던 정체성을 길어 올렸다. 그렇게 글쓰기는 삶의 거의 전부가 되었다.

소설가 김비는 트랜스젠더이다. 학교에서 그녀는 세상의 편견을 배웠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정상’이란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에 희생되곤 했다. 생존을 위해선 몸가짐이나 행동, 말투를 조심해야 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이 사회에 내디딜 수 있는 길임을 공부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글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배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이 큰 용기를 주었다.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학창시절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 흔한 백일장에서 상을 타본 경험 한 번 없었다. 글을 배우고 싶어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드라마 작가 교육원이었다. 방송극은 글도 쓰고, 돈도 벌 수 있게 해 줄 거란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초반에는 독특한 소재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선생이나 동기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상급반으로 올라가자 ‘난센스’란 규정이 돌아왔다. 애초부터 대중적인 코드를 바탕으로 한 방송극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기성의 가치관과 적당히 타협하며,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서사의 구조는 소수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 했던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소설, 추락하는 자들의 실패한 이야기

소설을 처음 쓴 것은 성소수자 온라인 동호회 게시판에서였다. 전에 써놓았던 방송극을 소설로 풀어 낸 것이었다. 사실 소설은 다른 어느 장르보다 전문적인 글쓰기이다. 단편의 미학과 장편의 문법도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소설이 각별히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소수를 위한 글쓰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를 단순히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수의 이데올로기를 반성적으로 되물으며, 그것의 한계를 지시한다. 소설은 추락하는 자들의 이야기다. 온갖 성공의 스토리를 들려주는 자기계발식 영웅서사들이 만연한 시대에, 소설은 세상에 감추어진 가장 보통의 실패를 담는다. 소설에 자신의 사연을 위탁한 배경에는 아마 이런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김비의 짝지 박조건형이 김비를 그린 그림. 글의 노동은 멈출 수가 없다. kimbee.net 자료

소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할 때, 게시한 작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응해 주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생각이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는 환희를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동호회에서 알게 된 친구가 홈페이지를 개설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김비의 이야기를 더욱 경청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마침 글쓰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고심 끝에 승낙했고, 그렇게 개설된 홈페이지(www.kimbee.net)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트랜스젠더 김비의 이야기에 세상이 응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홈페이지 개설은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김비의 이야기에 감응했다. 그녀의 사연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듬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설레기도 했다. 반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단순한 의문과 의심에서 찾아온 이도 적지 않았다. 때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설이나, 성적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것은 선의로 응해준 각종 인터뷰들이었다. 그 즈음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도 상승하여, 여러 매체에서 김비를 찾곤 했다. 그녀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고자, 대부분의 제안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진실을 전하기보단 그녀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단일 뿐이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지는 날들이 연속되고 있었다.

문창과로 가는 대신 독서로 창작 연마

소모되는 시간이 쌓여갈 즈음, 다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잃어가던 자신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플라스틱 여인’. 트랜스젠더의 사랑과 비운을 담았다. 불안한 다수가 되기보단 안정적인 경계인이 되고자 한, 어느 여인의 선택에 관한 소설이었다. 이 작품으로 별다른 기대 없이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응했고, 당선되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등단은 김비에겐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 여성동아 공모는 오직 여성들만 응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만해도, 김비는 주민등록상 남자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관계된 기자가 김비의 성정체성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행히 심사에 오를 수 있었고, 심사위원들은 그녀의 가능성에 내기를 걸었다. 김비에게 등단은 단순히 소설가의 지위를 공인 받았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그보단 오히려 세상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받아주었다는 감격이 더 컸다. 등단 이후, 김비는 자신의 소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한 없이 부끄러웠고, 그리하여 소설을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이 더욱 간절해졌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다짐했지만, 별다른 방법을 알진 못했다. 문예창작학과 진학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만류했다. 창작을 아카데믹하게 습득한다는 것이 김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문예창작학과의 존재를 감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그저 독서에 열중했다. 여러 선생님들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작가 교육원에서의 경험이 서사적인 짜임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독서를 통해서는 주로 자신의 문장들을 점검할 수 있었다. 지금도 문장이 메말라 간다고 느낄 때면, 여전히 잘 써진 단편을 찾곤 한다.

김비의 짝지 박조건형이 그린 그림.

외면 당했지만 세상을 버리지 않은 소설가

등단 이후, 김비는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음에 관해 탐닉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하기까지의 곤경과 그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그 과정이란 동일성을 억지로 찾아내는 게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여로에 가깝다. 그렇게 발표한 작품이 ‘빠쓰정류장’(2012)과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2015)이란 장편이다.

‘빠쓰정류장’은 폐암 말기의 순옥과 직장에서 사고로 다리를 잃은 남편, 그리고 트랜스젠더 리브 간의 일시적인 동행을 그린 작품이다. 이들은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사연 많은 버스정류장을 찾아 전국을 떠돈다. 세상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던 이들이 삶의 여러 관문들(터미널)을 통과한다는 상상력이 이채롭다. 반면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비상계단이라는 한정된(혹은 금지된) 공간에서 저마다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과정을 담은 미스터리다.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계단 위에서, 살기 위해 오르거나 내려가야만 하는 군상들의 제자리걸음을 담았다. 대체로 비슷하게 살 것이 강제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서열을 정하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엾은 사람들의 일상을 신비롭게 묘사한다.

이처럼 김비는 절망 앞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곁에 있던 타자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세상은 그녀를 쉽게 외면하곤 했지만, 그녀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김비는 한국문단에서도 약간은 비켜서 있다. 그녀는 마감이 없는 소설가이다. 청탁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항상 쓸 수 있었다. 김비의 작품에 여러 출판사들이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소설이 조금 더 다양해 질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상이 다채로운 만큼, 소설의 여러 매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만을 바랐다. 매출의 규모가 문단 내 위상과 직결되고, 대형출판사의 바깥이 문단에서의 소외로 간주되는 시대이기에, 그녀의 바람은 더욱 소중하다. 배움을 ‘사는 재미’로 알고, 소설이 삶과 다르지 않은 김비의 이야기가 각별한 이유가 여기 있다. 다만 한 뼘 만이라도 더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그녀, 여전히 소설을 꿈꾸는 소설가 김비의 이야기는 언제라도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허민 문화연구자ㆍ인문학협동조합 연구복지위원장

한국일보 | 201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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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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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만도 못해.” (98쪽)

노력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간절한 시대지만, 어느새 희망은 ‘고문’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어두운 현실을 견디는 데 이야기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편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의 방식은 정면 돌파다. 이 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다른 언어로 삶을 비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는 장편소설 『빠스정류장』,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등을 통해 꾸준히 위태로운 삶 속에서 반짝이는 힘에 주목해 왔다. 신작『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가난의 쳇바퀴를 도는 데 지쳐 동반자살을 택하지만, 자살이라는 출구조차 막혔음을 깨닫는 한 가족의 ‘후련한 절망’에서 시작한다.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

우리의 현실을 빼닮은 비상계단과 등장인물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주인공 남수는 달동네에서 자랐고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가장이다. 택배기사로 매일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비관으로 가득 찬 그는 무기력에 빠진 아내 지애, 그리고 뇌 손상을 가지고 태어난 여섯 살 아들 환이와 동반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 만찬을 위해 들른 160층 초호화 백화점 건물의 비상계단에 갇혀버리고 만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위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자살시도마저 실패로 끝나나 싶지만, 남수는 오히려 꼭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느낀다. 생에 대한 그의 의지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 아니라, 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커멓게 끈적거리기만 했던 생각의 늪 속에서, 남수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남루하기만 했던 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떠올랐다. (…) 기필코 여기에서 탈출하는 것. 그리하여 나를 억압했던 생을 농락하며, 망설임 없이 내 손으로 내 삶의 마지막을 선택하는 것. (18쪽)

남수 가족 외에도 계단에 갇힌 이들은 여럿이다. 비정규직으로 취직하면서 기초수급대상에서 탈락한 20대 여성 가장 정화,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명식, ‘일류대학 교수님 사모’이지만 남모를 아픔을 가진 해숙 등,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우리와 비슷하거나 우리가 일상에서 스쳐지나갔을 법한 사람들이다.

남수와 이들 일행은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좌절하지만, 더 위쪽에 있는 공중통로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계단을 오른다. 그러다 아래에서 구조가 진행되고 있으니 내려오라는 구조대의 방송 소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오히려 지진처럼 사방을 뒤흔드는 진동과 불길이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여러 재난들의 메아리이다.



“비상등이었다. 그런데, 붉은 색이었다”

한 편의 영화처럼, 강렬한 이미지와 빠른 전개를 갖춘 소설

비상계단이라는 한정된 장소 내에서 장편을 풀어가는 것은 난관이 될 수 있으나, 작가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남수 가족 이외의 인물들을 적절히 등장시켜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한다. 문이 열릴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남수 일행이 버렸을 때 공중통로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새로운 인물들이 제시하는 비상계단에 대한 정보는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색과 이미지가 중요한 상징으로 쓰이기 때문에 소설은 한편의 영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붉은 빛으로 계단 안 모든 것을 물들이는 비상등이 파란 바다색으로 바뀌면서 이야기의 반전이 시작된다.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각자 어떻게 이 계단에 갇히게 되었는지 털어놓으면서 모두가 붉은 띠로 가로막힌 문을 통해 이곳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정확히 몇 층에서 비상계단으로 들어왔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의 기본 설정에 대한 의문들과 이에 대한 힌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재미를 더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작가가 쓴 소수자 문학

몸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 돋보여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저자 김비 작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에도 참여한 바가 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약자, 여성 등 마이너리티의 삶에 꾸준히 주목하면서 김비 작가는 작품 속에 소수자로 살아오며 쌓은 통찰을 담아왔다. 이 소설에서는 희망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특별히 눈에 띈다.

공중통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주요인물 ‘수현’은 성전환 수술비용을 마련하려는 스무 살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성별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남수는 그를 괴물 취급한다. “인생 망치는 수술이나 하려고” 한다며 남수가 그를 비난하자, 수현은 ‘아저씨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며 이렇게 말한다.

난 아저씨가 부럽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살 수 있는 삶이라도… 태어나보니 그 어떤 혼란도 없이, 그저 돈 벌면 행복하고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그런 삶이라도 (…) 아저씨한테는 그게 전부인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85쪽)

한편, 남수의 아들 ‘환’이는 기형적인 팔다리를 가진 아이다. 남수는 한때 환이의 탄생에서 희망을 보았지만, 환이는 남수가 동반자살을 결심하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지애 또한 환이가 “족쇄” 같은 몸에 갇혀 살고 있다며 마음 아파한다. 하지만 환이는 오히려 “나… 안 이상한데? (…) 나, 지금처럼 예쁜… 내가 좋은데?”라고 말하며 웃는다.

‘비정상’의 몸을 가지고 있는 수현과 환은, ‘비정상’의 몸이란 본질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상’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해 부여한 의미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삶과 죽음을 가로질러

암흑 속으로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딘다

절망의 바닥에 가닿은 상황에서, 남수를 일으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신’이다. 남수는 열리지 않는 문이 끝을 의미한다는 것을 의심하고, 그가 딛고 선 현실을 비관하며 삶을 꿈꾼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의 아내 지애는 “당신이 나를 믿지 않든 (…) 지금 우린 당신이 필요해”라고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서로가 필요하다는 고백, 그곳에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다.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아갈 자격은 없는 걸까.” 김비 작가는 이런 질문에서부터 이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찬란한 희망이 아니라, 어두움과 위험이 깃든 희망을 이야기하는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지금 암흑 속으로 발걸음을 디디려는, 디뎌야만 하는 독자라면, ‘우리는 같은 곳에 있다’ 말하며 내민 이 손을 기꺼이 잡아도 좋을 것이다. 


지은이: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 함께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문학 | 국판 268쪽 | 13,000원 

| 2015년 10월 20일 | 978-89-6545-319-2 03810


동반자살을 결심한 가족, 비상계단에 갇히다. 
희망이 '고문'이 된 시대, 이 장편소설은 우리를 둘러싼 암흑으로 몸을 던져 희망이 아닌 '후련한 절망'에서 첫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트랜스젠더 여성 소설가인 김비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 



차례

더보기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표지 일러스트와 캘리그라피,

그리고 본문 내 각 장의 제목에 쓰인 캘리그라피는 모두 김비 작가의 작품입니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 10점
김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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