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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일기

[작가 돋보기] 에로와 그로테스크의 경계, 돌직구 시인 김언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 29.

[경남 작가의 재발견]

에로와 그로테스크의 경계, 돌직구 시인 김언희


김언희 시인의 시는 쎄다. 참혹했다. 그것이 제가 받은 그녀 시의 첫인상이었습니다. 김언희 시인은 1953년 7월 2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경상대학교 외국어교육과를 나왔고 1989년 현대시학에서 대뷔했지요. 2005년 경남문학상을 받은 전례도 있구요, 계간 '시와 세계'가 주관하는 제6회 이상 시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최학림 문학기자는 『문학을 탐하다』안에서 '타협 없는 무서운 엽기'라고 그녀의 시를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그녀는 2000년도에 발간한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에서도 자서(自序)에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심장이 약한 사람, 과민 체질,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 시는 구토, 오한, 발열, 흥분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드물게 경련과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는 똥 햝는 개처럼 당신을 // 싹 핥아 치워버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경고하지요. 그쯤 '엽기'코드가 유행했으니 그녀의 시가 당시의 시대 코드를 잘 반영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녀는 쭉 그런 시를 쓰고 있습니다. 여전히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시를요.



그녀의 출판 저서로는 『요즘 우울하십니까』(문학동네, 2011), 『뜻밖의 대답』(민음사, 2005), 『트렁크』(세계사, 2000),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민음사, 2000)가 있습니다.

저는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와 『뜻밖의 대답』안에 있는 시들을 읽었는데요, 속도감 있게 읽히는 반면 불쾌한 감정을 들게하는 시들이었습니다. 시 안에 나오는 표현들 전부가 부정적인 이미지였으니 당연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녀의 시세계를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일단 그녀의 시를 읽어보도록 하죠.

우선은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에서 뽑은 세 편을 소개할까합니다. 제 주관적인 해석이므로 반기를 드셔도 됩니다. 시는 읽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여러 가지 옷을 입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양 한 마리가 무릎을 꿇은 채 여자의 잠속을 절룩절룩 걸어다닌다 도끼에 찍힌 자국들이 헐벗은 사타구니처럼 드러나 있는 앵두나무 저 여자는 언제 죽을까 죽은 앵두나무 아래 죽을 줄 모르는 저 여자 미친 사내가 도끼를 들고 다시 등뒤에 선다 미래의 상처가 여자의 두개골 속에서 시커멓게 벌어진다 앵두나무 죽은 앵두나무 말라죽은 앵두나무 도랑을 가득 채우고 흐르는 것은 검은 머리카락이다.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저는 이를 읽으면서 영화 <이웃사람>이 생각 났습니다. 왜일까요? 앵두는 애정관련 표상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앵두가, 그것이 맺히는 앵두나무가 말라죽었다는 건 이 시에 나오는 여자의 처녀성 상실로 생각되네요. 미친 사내의 도끼질을 보며 강간범을 떠올렸구요. 그것도 강간살인범이요. 시를 곱씹으면 계속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되감기되어 재생되서 끔찍해요. 어쩌면 이 시는 처녀성을 잃고 무참히 살해당하는 여자에게 보내는 추모시가 아닌가. 이런 사회적 성범죄 문제를 각성하라는 시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궁으로 가는 길은 불태워졌다

소작(燒灼)된 길

위에서

타고 남은 내 몸은

내가 낳은 난자를 먹어치운다

피가 벌건

입으로

* 소작Coagulation : 난관(난관)을 태우는 영구 피임.

-『가족극장, 소작*된』

 

소작된 길은 생명 잉태를 막는 차단로가 됩니다. 영구피임은 더 이상 임신하지 않으려고 선택하는 불가피적인 것이지만, 여자의 몸 안에 남아있던 난자들은 생명으로 부화하지 못한 채 무참히 죽음을 당하지요. 현대 의료시술에 의해 살해되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여자의 달거리로, 그들의 시체가 빠져나오게 되지요. 벌건 핏덩어리로 말입니다. 이미지 자체가 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편으로는 소작된 길로 인해 상실되는 여성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구요.

 

자궁의 목구멍에 아버지가 걸려있다

하수구에 걸린 슬리퍼처럼

-『가족극장, 삭망(朔望)』


삭망(朔望)은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을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요, 이것과 같은 말로 삭망전이 있습니다. 삭망전은 상중(喪中)에 있는 집에 매달 초하룻날 보름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제목으로 유추하여 보자면, 상중에 있는 아버지가 지금 성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저 불쾌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날 만큼은 엄숙해야하는 거 아닐까요. 하물며 상(喪)의 중심에서 상주(喪主) 역할을 해야하는 아버지는 특히요. 그래서인지 하수구에 걸린 슬리퍼를 생각하니 짜증이 났습니다. 아니 짜증보다는 분노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이 시 속의 아버지가 미친놈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다음으로는 『뜻밖의 대답』안의 세 편을 추려봤습니다. 아래로는 더 주관적인 해석이 달려있습니다. 이 시인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구나, 생각이 들어서요.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극장이라, 부르거나, 유치원이라, 부르거나 간에, 그것은, 도살장이고, 도살장임에, 틀림없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들의, 공공연한 용도를, 사무치는, 용도를, 모르는 사람, 역시, 없다, 어떤 간판을, 달았든지 간에,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의 집, 안방에서, 또는 욕실에서, 家傳의, 도살 기구들이 흔들거리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섬뜩한 항등식, 무엇을, 대입해도 성립되는, 도살의, 등식을, 모르는 사람, 또한,

-『벙커 A』


우리는 벙커 안에 갇혀있습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항상 어느때나 어디서나 우리는 벙커 안에 갇혀있는 셈입니다. 그 벙커에는 이름이 있지만 벙커는 그냥 벙커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무참하게 도륙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무엇이요. 우리는 그 벙커안에서 무엇을 도륙 당하고 있는 걸까요. 아마 벙커 안에서 도륙되어지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이 아닐까요? 극장에서는 같은 화면을 똑같이 앉아 보고, 유치원에서도 똑같은 내용을 배우죠. 공장에서 찍어내듯 균일화된 사람들이 탄생합니다. 말그대로 이름만 다른 벙커죠. 도살장이지요. 각기 다른 개개인을 죽이는, 벙커는 도살장이군요. 김사과 소설가의 『미나』가 생각나네요.


이자의 개가 되고

호출기의 개가 되고

더 이상 변명일 수 없는 변명의 개가 되고

단말기의 개가 되고

땅거미의 개가 되고

숙취의 개가 되고

시의 개가 되고

구멍의 개가 되고

입에서 나온 입으로 뻐꾹

뻐뻐꾹 성교를 하고 백날이고 천 날이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침내

마침내 그것의 개가 되고

백날이고 천 날이고

누린내가 피어오르고

-『마침내 그것의』


<마침내 그것의>는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을 힐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여기서 '개'는 '노예'로도 바꿔말할 수 있겠네요. 자신의 생활 수준에 안맞는 소비 때문에 이자의 노예가 되는, 휴대폰 단말기처럼 기기의 노예가 되는, 땅거미지도록 술을 퍼마시는 술의 노예가 되는, 상대에게 뻐꾸기 날리며 교접을 원하는 성의 노예가 되는, 개가 되는 그러한 현실. 그리고 결국 누린내가 피어오르죠. 이 누린내는 죽음을 뜻하는 걸로 보이는데요, 얼마나 허무한 인생입니까. 평행 무언가의 노예로, 개로 사는 현실은요.


나에게는

뾰족하게 깍은 연필 한 자루 있네

나에게는 뾰족하게 깍은

자지 하나 있네

뾰족하게 깍은 자지, 아버지의

자지로 오늘도 나는

내 눈을

찌르네

아버지, 아버지가 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녜요

-『나에게는』


비약적일지도 모르지만, 전 연필을 사람이 쓰는 ‘말(言語)’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뾰족하게 날이 선 말이지요. 그것을 다시 아버지의 성기에 빗대어 말한 것은 그 습관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배우지 않습니까. 화자는 뾰족하게 날이 선 자신의 말로 자신도 아버지도 상처입히지요. 아버지가 밴 아이는 내가 준 상처의 말이지만 화자는 그것을 부정하지요. 그 말은 애초에 아버지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아버지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답습했을뿐이죠.



시를 보고, 읽고, 나름대로 해석해보면서 역시 생각한 것은 ‘김언희 시인은 시는 쎄다.’였습니다. 부패된 부정한 사회와 가정에게 돌직구를 날리는 스타일이랄까요. 괜스레 독설가 언니를 만나고 온 듯한 느낌도 들었구요.

 

김언희 시인은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훌륭한 시를,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쓰고 싶었습니다.”라고 그녀의 네 번째 시집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은 김언희 시인의 시를 읽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김언희 시인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아래 책을 참고해보세요.


문학을 탐하다 - 10점
최학림 지음/산지니

『문학을 탐하다』는 2014 '원북원부산운동' 후보 도서입니다.

책 읽는 부산을 만드는 소중한 한 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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