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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만만찮은 인물에 대한 만만찮은 그림책! <루쉰 그림전기>를 읽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0. 31.


왕시룽 글·뤄시셴 그림, 이보경 옮김 | 그린비 | 416쪽 | 2만원



‘전기’를 읽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유소년기에는 할머니께서 위인전집을 선물해(떠안겨) 주신 덕분에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루는 전기라는 장르가 친근했는데, 언젠가부터는 인물보다는 사건이나 시대, 한 사람의 삶을 다룬다면 특정 시기에 집중하는 글을 더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림전기라니. 어릴 적 저에게 ‘어른’의 징표 중 하나는 ‘그림이 없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루쉰 그림전기>는 저에게 ‘그림책’이라 빨리, 쉽게 읽히겠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절 긴장시키기도 했습니다. 막연하게 ‘중국 근대문학의 거장’ 정도로만 알고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루쉰에 대한 책이기도 하고, 글‘만’ 읽는데 익숙해진 제가 어떻게 ‘그림’을 읽을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루쉰 그림전기>는 ‘연환화(連環画)’ 입니다. ‘이어지는 그림’이라 풀이할 수 있는 단어인데, 이 장르에서는 그림이 페이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림 위, 아래 또는 오른편에 간략한 해설문이 들어갑니다. 간혹 그림 안에 말풍선이 들어간 연환화도 있다고 하지만, 이 ‘그림과 해설문’ 형식이 연환화를 만화와 구분하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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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그림전기> 이야기의 시작.


[연환화 - 동서양의 만남이 만들어낸 서민의 책]


연환화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중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송나라 시절의 고전문학서나 청과 명 시대의 연애소설처럼 삽화가 포함되었던 책들, 그리고 새해를 기념하는 연화(年画)등의 전통을 계승하는 장르라고 평가된다 합니다. 중국의 근대기에 등장한 이 새로운 출판물은 분명 기존의 그림(책)들을 재현하는 면모가 있었기에 탄생하고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연환화의 등장의 시대적 배경이나 내용을 보면, 서구의 영향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환화는 1920년대 상해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대에 석판 인쇄술이 상해를 통해 중국 전역에 소개되면서 이야기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잡지들이 발행되기 시작했고, 이들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들이 손바닥 크기의 책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저렴한 가격에 연환화를 대여하는 노점들이 생겨났습니다.




1947년 홍콩의 연환화 대여 노점. 딱 만화방 풍경입니다! 

출처: Hong Wrong. Via: The Comic Journal


초기의 연환화는 중국의 전설이나 고전문학을 담기도 했지만, ‘킹콩’(!) 처럼 당시 개봉한 최신 영화의 각색물들도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문맹률이 높고 여가에 지출하는 금액이 많지 않은 중국의 서민층에게 연환화는 중국의 고전들은 물론이고 최신 (서구)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창이었습니다.


사진만 봐서는 연환화의 인기가 잘 실감나지 않으시지요?

1951년에서 1956년 사이만 해도 10,000종 이상, 총 10억 부가 넘는 연환화가 제작되었습니다. 정부의 검열이 조금 느슨해진 1980년대의 경우 1쇄에 100만부를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연환화가 중국 내 전체 출판량의 ¼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연환화를 만드는 종이가 워낙 질이 나빠 반투명한 정도였다고 합니다.



[싸구려 놀잇감, 그리고 대중교육 매체]


이러한 배경 때문에 연환화의 황금기 중에는 ‘연환화 = 싸구려 그림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루쉰은 이렇게 서민들이 좋아하는 읽을거리를 얕잡아 보는 시각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연환화를 ‘새로운 형태의 예술작품’으로 보고 1930년대에 벨기에 작가 Frans Masereel의 무언소설을 연환화로 출판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때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 공산당에서도 연환화에 관심을 가졌는데, 연환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전하고 문맹자들을 글월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1949년에 중국인민공화국이 설립되고 난 뒤에는 정부 정책이나 규정에 대해 알리는 연환화가 대거 등장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환화는 교육과 놀이, 두 분야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민 항공지식>, 1978년 출판. 

출처: The Comic Journal


‘아… 아빠?’ 스타워즈를 각색한 연환화. 1982년 출판. 

출처: The Comic Journal



[루쉰을 연환화로 만날 때]


이렇게 연환화의 배경을 조금 파악하고 나면, 이 형식이 루쉰의 일생 이야기를 담기에 딱 알맞은 틀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인들, 특히 서민들에게 그들이 체내화하였고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사회적 병폐들에 대해 알려주려고 노력했던 루쉰. 그의 남다른 안목으로 관찰한 연환화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증명하는 예술장르였고, 서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연환화는 루쉰과 같이 파란만장한 중국 근대의 산물입니다. 그 역사를 살펴 보면 지극히 중국적이면서도, 외세의 영향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던 매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루쉰은 중국 사오싱의 명문대가의 장손으로 태어나 평탄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가문의 몰락을 경험하고 농민, 광부들을 만나며 중국 사회에서 '신분'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삶의 반경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체험했습니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며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한 차별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문예활동을 통해 중국인들의 사고를 바꾸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또, 진화론과 같은 과학 분야의 지식과 여러 외국 문학 작품들, 중년에 접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외국에서 들어온 사상들은 그의 사유와 행동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기서 잠시 퀴즈. 

1929년, 쉬광핑과의 아들 하이잉이 태어나자 루쉰은 쉬광핑에게 아스파라거스를 선물합니다 (p.326)이것은 어떤 사상에 기초한 행동이었을까요? 


1. 마르크스주의 2. 남녀평등주의 3. 채식주의 4. 녹색경제론 5. 위 보기 모두


(10/31 오전 9:40 수정: 

이 퀴즈에는 답이 없습니다 ㅠㅠㅠㅠ 

웃길려고 만든건데 선배님들께서 모두 답이 뭐냐 물으시더니....웃길려고 한 것인줄 몰랐다며.... 망했네요 ^_^!)




1928년 징윈리에서의 루쉰.


'중국의 대문호'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루쉰. 그는 '작가'를 생각하면 쉽게 떠올리게 되는, '골방에 틀어박혀 창작활동에 매진하며 세상과 어느 정도 분리된 삶을 사는 이'가 아니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첫번째 방법은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는 것"이며 "사람의 정신을 바꾸는 데 제일 좋은 것은 당연히 문예"라는 신념 하에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행동한 '활동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일생동안 출간했던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 번역문, 혁명지는 그의 근면함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또한 "생활이 지나치게 편안해지면, 일이 방해받게 된다"며 생활공간을 아주 단촐하게만 꾸리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오자 "이 일이 성사되면...볼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글쟁이의 글로 변하겠지요. 아무래도 지금처럼 명예 없이 가난하게 지내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을 읽으며, 저는 우리나라의 청빈한 선비상과 그가 닮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루쉰이 세상을 바꾸어 나갔던 방법 중 하나는 '청년들과의 협력, 그리고 아낌없는 지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교사로 활동하며 교내외의 문예활동을 장려했고, 형편이 어려운 제자를 몇 달간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기도 했으며, 18살 어린 벗 취추바이와 열띤 토론을 하며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미국인 기자 에드거 스노가 그의 작품을 번역해 소개하고 싶다는 제의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작품보다 청년작가의 작품을 많이 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전기의 정치]


이 책을 읽으며 저는 한 사람의 일생을 회고하는 것의 정치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342개의 그림과 해설문, 100여개의 사진자료가 들어있는 책이지만, 저자가 후문에서 썼듯이 책에 포함되지 못한 내용이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언제나 다차원적이며 복잡한 인간의 삶에서 주요 장면들을 간추려 매끄럽고 '읽기 쉬운' 이야기로, 그리고 역사 속의 인물을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작업입니다. <루쉰 그림전기>의 강점은 그렇다면 '연환화'라는 형식 뿐만이 아니라, 루쉰이 일생 동안 마주한 여러 어려움들과 그의 대응방식들, 그리고 역사 속 신념을 정치적, 문화적 맥락에서 분리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책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루쉰과 삶을 함께했던 여성들을 지극히 표면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겠습니다. "선량하고 강인한" 어머니 루루이는 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나오지만 그 영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바람 때문에 결혼한 것이지만 어쨌든 아내였던 주안에 대해서는, 그녀와 "공유하는 언어가 없다" 는 것 외에는 생각한 바가 없었을까요? 또한, 저는 루쉰이 사랑하고 조력자로 삼았던 쉬광핑과의 관계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쉬광핑은 그에게 어떤 깨달음과 도움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루쉰과 그의 남성 친구들이나 제자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인 묘사가 나오기에 더 아쉽다고 느끼는 바입니다.



[오늘날의 루쉰]



자신의 눈으로 세상이라는 살아 있는 책을 읽으십시오.

-1927년 강연 '독서잡담' 중에서

'혼수상태에 있어 죽음의 비애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깨어날 사람들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역동적인 중국의 근대기를 살아 낸 루쉰. 그의 말은 오늘날에도 전혀 바래지 않았습니다.




참고문헌:


하와이 대학교의 연환화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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